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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79회 정기일요법회의 원할한 진행을 위해 이른 아침 시간부터 현관에서 법우들을 맞이하며 주보를 나눠주시고, 스님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무국앞 복도에서 업무를 보시고 , 엘리베이트에서 안내봉사하시는 보현보살님들 모두들 봉사 한다는 상을 내지 않고 각자 맡은 역활을 기쁘게 수행합니다.
보광당에서 안내하시는 법당안내팀과 새법우팀 보살님들의 밝고 청정한 모습들
떡과 생수를 나누어주시는 강남구와 강동1.2.3구 보살님들 모두모두 거룩하신 불광형제들입니다.
현수거사님의 집전으로 천수경 독송과 타종을 하시고 합창단장님과 다도팀의 보살님들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께 헌향과 헌다를 올리며, 사회자 추담거사님의 진행으로 일요법회를 열어갑니다.
보현행자의 서원 : 참회분 봉독
금주의 법문: 효림 스님(경원사 주지)
금주의 법어: 빛깔과 형상으로는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매월 금강경강의 해주시는 효림스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잘 배우고 잘 실천하겠습니다,()()()
신야하처재라 인심중유재라 심불인부재라 차심재무애
신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 가운데 인정을 하면 존재가 있고
마음에 인정하지를 아니하면 그 존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제 이 마음에 있고 없음이 있는 것이다. 뭐 이런 뜻입니다.
서론으로 말씀드리는 건데 도킨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요즘 미국에 있는 어떤
사람하고 더불어 우리가 어릴 때 70년대에는 세계의 지성을 대표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 보니까, 도킨스 설리라는 사람인데 아주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이다. 뭐 이런 찬사를 받아요. 그 대한민국에 있는 어느 스님이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이다. 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사람이 아주 세계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다. 이런 대접을 받아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공이 뭐냐 하면 동물을 연구했는데 그 중에서도 동물을 연구하다보니까, 동물의 진화를 연구를 했던 거에요.
그러면서 어떤 결론에 이르렀느냐. 신이라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이 동물학자로서 명성을 얻기보다는 동물학을 연구 하다보니까,
신이 없다고 하는 것에 결론이 도달하면서 무신론자로 더 명성을 얻었어요.
그 사람이 쓴 책이 여러가지 많이 있는데, 이 사람이 쓴 책 중에 유일하게 읽은 것이
“만들어진 신”하는 그런 제목의 책을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뭐냐! 신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신이라고 하는 것을 설정해서 그런 망상을 가지면 그것은 하나의 망상으로 끝나지만 다수의 많은 사람이 신을 만들어서 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신이 있는 것으로 설정이 된다. 이런 결론이에요. 그래서 신은 없는 것이다.
스님이 그런 소리를 하면 불교하니까 저런 말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사람은 권위가 있는 학자로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상당히 많은 파장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거는 이 사람이 영국 옥스퍼드를 나오고 아주 스팩도 아주 화려한 그런 사람인데 런던에 다니는 버스에다가 신은 없라고 하는 광고 문구를 붙여가지고 그렇게 해서 기독교 신자들이 아주 반발을 하고 그래 가지고 그럼 나하고 같이 토론해 보자 진짜 신이 있는가?
나는 신이 없음을 너에게 증명해 보이겠다. 그럼 너는 나에게 신이 있음을 증명해 봐라. 그걸 아무도 증명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어떤 토론을 유도해 낼려고 그렇게 광고 문구를 붙이고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결론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신이 있다면 어느 곳에 있느냐? 결국은 우리 마음에 있다고 가정하면 있는 것이 되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뭐 이런 뜻이에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물었어요.스님! 사성제 팔정도 불교의 기초교리 이것을 몰라도 스님이 맨날 말씀하시는 금강경 무주상 이러시는데 상에 주하지 않는 마음이면 도인이 됩니까. 그렇다 교리는 일체의 현상이다 부처님의 모든 교리가 현상을 분석해서 아주 치밀한 논리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반야심경도 보면 첫 구절에 어떻게 나오느냐면 오온이 공함을 비춰봐 일체 고액을 건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도 일체고액 일체고액을 건너갑니다. 이게 반야사상 이라고 하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인데 이런 반야사상이 나중에 선불교에 들어와서 선의 사상을 형성했어요. 그런데 이 선의 사상에서도 우리가 매우 주목해야 할 것은 돈오사상입니다.
돈오는 수행을 열심히 해 가지고 도를 깨닫는다. 도를 이룬다. 성취한다.
이런 논리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논리를 갖고 있느냐 반야심경에는 오온이 공함을 비춰보면 일체고액을 건너간다. 도를 닦아서 가는 게 아니고 다른 말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내가 내 마음 가운데 탐욕 하나만 극복해도 도에 이르러요. 그래서 내가 도를 닦아가지고 탐욕을 끊겠다. 그 사람은 평생 참선해도 도를 못 깨닫습니다. 수행을 안 해도 내 마음 가운데 있는 탐욕을 극복하면 도인이 되요.
내가 정말 정색을 하고 하는 얘긴데 종단을 어지럽히고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몇몇 사람들이 효림스님을 찾아와서 도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그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진심으로 물어보질 않아서 참 딱하게 생각해! 니가 죽을 때까지 승복을 입고 도를 닦는다고 했지만, 너는 아직 탐욕을 끊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니가 도인이 못 된 거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요.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일세.
마음에 이 명치 끝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분노 이거 하나만 극복해도 도인이 되는거에요. 그러면 그 후부터는 어떻게 되냐 수행은 저절로 된다. 탐진치(貪瞋痴) 이 세 가지를 한번에 다 끊어라. 그러면 옛날 스님들은 그렇게 얘기해도 한 번에 세 가지를 다 끊어야 겠구나 되는데 요즘은 그러면 복잡하고 힘들어서 못해! 그래서 하나만 끊어라 너의 어리석은 마음 하나만 끊어도 너의 어리석음이 뭐냐? 니가 수행을 하는데 거꾸로 하고 있다.
수행을 해서 탐진치(貪瞋痴)를 끊고자 하는 마음이 어리석음이다. 너의 마음속에 있는 어리석음을 끊으면 수행은 저절로 이룬다. 그게 돈오사상이다.
화내는 마음 진심(嗔心) 성내는 마음 하나만 극복해도 늘 니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뺏아가고 너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구박하는 사람에게조차도 네가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를 보낼 수 있으면 넌 도인이니라. 이 세가지 가운데 가장 끊기 쉬운 것이 뭐냐 탐욕입니다.
부처님의 삼보 정제를 정말 귀중한 줄 알고 그것에 대해서 조그마한 사심도 품지 않는 니 마음을 가질 때 니가 도인이 되는 거다. 그걸 배워야 되는데 그걸 알지 못하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수가 없습니다.
오늘 금강경 제 20분 이색이상분 이걸 얘기함에 있어 내가 지난번에 얘기한
소멸하지 아니하는 권력이 어디 있으며 녹슬지 않는 쇠붙이가 어디 있으랴?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 인생도 권력도 흘러서 죽음으로 간다.[자은성보살님 녹취]
[노래:부처님 마음일세]
금강경에 대해서 제가 계속 한 대목씩 해석하다 보니 어느덧 20분째 왔는데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것이 우리는 금강경을 읽고 독송하는 금강행자가 되려면 금강경에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대로 거기에 준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을 가진다는 건 금강경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하고, 금강경의 마음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고득락,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을 하고 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욕망의 불꽃이 꺼졌다는 뜻도 있지만 행복하다, 즐겁다는 뜻도 있습니다. 요즈음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보면 평화롭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행복을 추구하느냐 하면 헌법에도 행복추구권이 있듯이 내가 이렇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법에서 보장하고 있어요.
불교가 제시하는 방법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합당한지 아니면 기독교나 유교에서 제시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우리가 객관적으로 면밀히 검토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유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책을 많이 봐서 좀 압니다. 유학이나 기독교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봤는데 불교가 제시하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르고 타당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짧은 시간에 장황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극락을 가거나 천당을 간다고 하는데 왜 가고 싶어할까요? 거기 가면 행복하다 하고 그기가면 좋아서 죽는것도 고통도 없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간다고 해서 간결하고 쉬운 것 같습니다.
이창동 영화감독이 만들어서 국제사회에서도 높이 평가받은 영화 제목이 ‘밀양’인데 밀양은 경상남도에 있는 곳으로 영남루라는 유명한 누각도 있고 유서가 깊은 곳으로 사명스님도 거기서 태어나셨고 유명한 유학자도 많이 태어난 곳입니다. 영화 제목을 왜 밀양으로 했느냐 하면 비밀스런 밀(密), 볕 양(陽)에서 빛이 상징하는 것의 의미를 영화에서 그런 것을 은밀하게 표현하려고 애를 쓴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 보면 한 여인이 자기의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범인을 감옥으로 찾아가서 여인은 아들이 죽은 뒤 교회에 다니니까 교회에서는 원수를 용서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아들을 죽인 철천지 원수이고 내 가슴에 못을 박은 저 인간을 용서하려고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나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하여서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를 용서 안 했는데 누가 용서했느냐고 하니 하느님한테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주인공이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하느님이 용서하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한국 기독교의 가슴에 정곡으로 일침을 가한 겁니다.
우리가 불교에는 참회를 하고, 기독교에서는 회개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다 비슷한 말이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한 번 뒤돌아보게 하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그 영화를 보고 스님으로서 가슴을 쓸었습니다. 내가 많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고 내 스스로 부처님께 절 몇 번하고 참회했다, 나는 죄를 소멸받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우리가 기독교 불교인을 떠나서 그런 것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도록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금강경에도 정토사상이 있어서 정토에 어떤 사람이 가느냐고 하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간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믿기만 하고 마음이 안 깨끗한 사람이 극락에 가면 거기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까 도둑질하고 사기 치기 쉬운 곳이 극락이거나 천당이라면 그곳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부처님 믿는 사람만 극락을 간다고 하면 나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를 두고 혼자만 극락 간다고 즐겁고 행복할까요? 우리가 아름다운 극락세계를 만드는 것은 나의 청정한 마음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과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를 이룰 때 극락이 되는 거지 한 침대에 같이 살아도 하느님 믿어서 천당 가고 안 믿어서 지옥 간다면 그곳이 어찌 천당이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깨끗한 마음과 마음이 모여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극락이고 천당이 될 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색이상 20분 원문 읽기)
이 대목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데 예를 들어서 잘 생기고 눈빛이 멋진 영화배우 원빈이 배우로서 필수조건인 얼굴이 잘 생긴 건 누구나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얼굴이 잘 생겨서 영화배우가 되었다면 그보다 더 잘 생긴 사람은 왜 배우를 못할까요? 그보다 잘 생긴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32상 80종호를 갖춘 부처님의 원만구족한 얼굴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과 같은 구족한 상을 가진 전륜성왕도 부처님이겠느냐 하는 질문이 경전에 나옵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암자에 살 때 어떤 보살님이 개를 한 마리 데려와서 키워달라고 하는데 본인은 아파트에 살아서 키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개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스님 말고는 맡길 데가 없다면서 자기가 산책하는 공원에 버려진 유기견이라 데려왔다고 해서 두고 가라 했습니다. 그 개는 눈이 정말로 선하게 생겨서 누가 봐도,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봐도 그 개를 보면 무서운 생각이 안 들게 생겼습니다. 눈이 참 선해서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는가 보다 하면서 개를 묶지도 않고 마당에 놓고 키웠습니다.
사람도 잘 생긴 얼굴은 아닌데 착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착하게 생겼다고 반드시 착한 사람은 아닙니다. 얼굴이 고약하게 생긴 사람도 비단결같이 고운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즉 생긴 것으로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다운 데가 있어서 부처님이지, 구족하게 잘 생긴 몸을 갖고 있다 해서 부처님이 되신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리광보살님 녹취]
사람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은 죽으면 장례를 치르는데 각 문화권마다 다르고 각 종교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인도의 전통장례 풍속에 따라서 화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도에 모든 사람이 다 화장을 하지는않았습니다. 경전에 보면 공동묘지에 시체를 그냥 갖다 놓으면 들짐승이 와서 뜯어먹고 부처님 옷도 원래 우리가 가사를 시체 같은 것 싸둔 옷 시체는 썩어서 없어졌는데 헝겊쪼가리가 남아 있는 것을 깨끗이 빨아서 붙여서 쓰지요. 가사는 그걸 상징하는 겁니다. 지금은 아주 고급스럽게 번쩍번쩍하게 금란가사를 해서 입고 물론 큰 행사를 하고 큰 법회를 하는데 상징적으로 그런 옷을 부득이하게 입어야 할 그런 상황도 있지마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금강경에서 가장 금하는 상을 내기 위해서 그런 옷을 입는다면 그건 참 슬픈 일입니다.. 어쨌든 화장을 해요. 그런데 기독교는 내가 특별히 기독교를 미워해서 그런게 아니라 한국에서 대세니까 그걸 비유해서 얘기하는데 기독교는 화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화장을 안하는가?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염이라는 것을 합니다.. 새 옷을 입혀서 옷을 꽁꽁 묶는데, 염이라는 것이 묶는다는 뜻입니다. 죽어서 뼈가 흩어지지 말라고 묶는 겁니다. 그리고 관을 딱 덮어서 다른 사람들이 열지 못하도록 못을 박는데, 그런데 서양도 관을 만드는데 그 사람들은 관에 뚜껑이 원래 없어요. 뒤에 관뚜껑도 만들어졌지만 못을 안 박습니다.
그리고 염을 안합니다. 그 사람들은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보다도 더 깨끗하게 화장을 하고 분장을 합니다.
불교는 왜 염을 묶어서 하고, 기독교는 그렇게 하느냐?
그기에 기독교의 세계관이 들어있고, 불교의 세계관이 들어있어요.
불교는 화장을 할려고 하면 타더라도 뼈가 흩어지지 않게 관을 하고 옷을 할 때에도 나이롱 옷은 타면 그 유골에 나이롱 기름이 묻어가지고 보기도 안 좋고 좀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같이 면섬유 옷을 입으면 깨끗이 타서 없어져버리지요.
그런데 기독교는 어떻게 하냐? 기독교하는 사람은 그걸 의심을 하면 안 되고 절대적으로 믿어야하는 가운데 있어요. 예수님이 독생자라서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부활해서 하늘로 갔는데 다시 온다는 재림 그러면 재림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은 사람이 다 살아난다는 거야. 아마 진짜 재림을 하면 우리도 살아날 거야 화장하고나면 살아 날려면 몸이 없잖아 그래서 화장을 안하는 거야 그래서 살아난다고 시체를 우리보다 더 깨끗하게 귀중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서양에서는 사고가 나서 망가져서 죽으면 수의사가 다 복원해야 돼요. 살아있는 때처럼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나서 재림해서 살아났는데 내 팔이 없다 하면 안 돼잖아 가령 교통사고가 나서 신체가 다 망가지면 얼굴만 복원하는게 아니라 몸 전체를 다 복원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고 난 뒤에 2~3년이면 예수님이 다시 올 줄 알았어 안 왔어, 20~30년 기다리면 올 줄 알았어 안 왔어. 200~300년이면 올 줄 알았어 또 안 왔어 지금 이천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안 온거야. 내가 남의 종교를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거는 정확한 얘기니까. 섹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쥴리엣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그기에 보면 관속에 있는데 가서 보니까 쥴리엣이 죽어 있거든 그래서 로미오도 죽은 거야 쥴리엣이 살아나서 보니까 로미오가 죽어 있으니 다시 죽은 거야. 어찌되었든 지하에 가서 시신을 확인했다 이겁니다. 서양 영화에는 그런 말이 많이 나와요. 흡혈귀 드라큐라 그런 영화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몸뚱이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맨 처음 예수님이 죽었을 때 매장을 했으면 문제가 다른데 매장을 안했다는 겁니다. 그 나라 문화 자체가 매장이 없습니다. 동굴 속에 갖혀 있는데 가보니까. 성경서에 복음서마다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가서 보니까 가고 없더라. 그런데 그 뒤에 나온 복음서에는 또 가서 보니까 예수님 있는 걸 봤다. 또 뒤에 계속 나오는 복음서에는 들어가서 손에 못을 친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렇게 매장을 안하는 겁니다. 부활을 기대해가지고 핵심은 그런데 재림을 안하잖아요. 자꾸 죽은 사람은 많이 생기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지금은 공동묘지를 만들어 매장을 하는 거예요.
얼마 전에 불이 나가지고 그 귀중한 문화재가 불에 탔다고 하는데 프랑스에 있느 노틀담이라고 하는 성당에 가보았습니다. 제가 외국여행을 별로 안 가보았지만 어떻게 유럽에 가 봤습니다.
그리고 영국에 있는 무슨 이름을 못 외웠는데 유명한 성당에 가봤는데 바닥이 다 무덤이야 그래서 죽어서도 그런 사람은 밟고 다니면 안되니까 바닥에서 툭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 귀족들이고, 일반 평민은 성당안에 다 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이거는 죽어서도 차별을 하네. 돈 많은 사람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고 없는 사람은 적게 만들고 이럴 수는 있지만,
돈 많다고 성당 안에 무덤을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재림하면 벌떡벌떡 일어날 사람들입니까?
아니 지금 여기 예수님이 왔는데 시신이 저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으면 여기까지 올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된거예요.
그래서 불교는 사람의 몸뚱이가 인연이 화합해서 만들어졌다. 오온인 색,수,상,행,식 이 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색은 지수화풍이고 그 다음에 수상행식은 우리의 의식작용이다.
그 의식작용을 더 높이 생각한 것입니다. 몸뚱이 이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있는데 기독교는 내가 웃으면서 설명하는 건데
원죄라는 거를 얘기하잖아요 우리는 죄인이다. 하나님한테 가면 우리는 다 죄인이야 죄인이라서 유태인들은 모자를 절대 안 벗습니다. 회교들도 특히 여자들도 히잡을 쓰고 교황들도 도토리 같은 것을 쓰는데 왜 그러는지 다 이유가 있어요. 저 높은데서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지금 우리가 전쟁하는데도 아! 저기는 우리 편이 있구나. 그러면 폭격을 안해야 하잖아요.
십자가를 걸고 표시를 하는 거예요. 그 표시하기 위해서 쓰는 거예요.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은 좀 저속한 것이다. 남의 종교에서 너무 소상하게 얘기해서 좀 미안한 생각은 드는데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모양으로써 부처님을 보려고 하면은 사도를 행함이라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거다. 하는 것이 금강경의 세계관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구별할 때 오늘 어떤 사람이 차를 좋은 차를 타고 왔어. 야! 차가 좋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미안하니까 나한테 설명을 하는데 아 사업하는 사람은 이런 걸 타고 다녀야합니다.
이런걸 타고 어디가야 아 저놈은 좀 센놈이구나 인정을 해주지 스님처럼 조그만 경차를 몰고 다니면 무시합니다. 사업하니까 세상의 분포가 그러니까 그럴수는 있지요. 그러나 우리 불자들이 몀품백 들고 다니는 사람, 양복 여기에 무슨상표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 고급차 뭐 이런 걸로 사람을 보지말자. 모자나 그 사람이 앉아있는 의자,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
부처님도 부처님의 생긴 모양 보고 부처님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우리가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가지고 사람을 보아서야 되겠어요.
오늘은 금강경의 대의는 “모양으로써 사람을 보지 말자” 입니다.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발원문을 낭독하시는 송파23구 명등 법문행보살님
매주 현안보고 하시는 법회장님의 노고에 언제나 수희찬탄드립니다.
이번주에도 새법우님이 오셨습니다.
귀중한 인연 잘 이어가시길 기원드립니다.()()()
법회가 끝난 후 나눠드린 떡과 각자 구법회에서 준비해온 다과를 드시면서 서로 따뜻하고 정다운 대화들을 나눕니다.
법회가 끝난후 오늘도 30여명의 불광형제님들께서는 대웅전에서 금강경독송기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불광형제님들의 기도 정진력에 수희찬탄드립니다.()()()
토요법회 오신 지명스님 현수막이 하루만에 쓰레기통 신세를 지게 되었네요.
몇달전에 외부에서 현관로비로 이전해온 반야원!!! 물품을 갑자기 종무소로 옮기고 그 자리에서 기도 접수를 받는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번주에도 불광정상화의 간절한 염원으로 불광사, 화광사, 동명사에서 시위 정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국토 성취하자!
첫댓글 비로자나불님 법회일지 작성하시느라 늦은 밤까지 애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_()()()_
처음 법문 녹취하신 자은성보살님께도 감사합니다 조금씩 분담하니 더욱 좋습니다_()()()_
많이 부족하지만 배워가면서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걸 몸소 체험하면서 실감합니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항시 건강하시길 불보살님께 기원드립니다.()()()
일요법회 법문을 다시 볼수있도록
힘들게 녹취하시고
편집하신 보살님들의 노고와
수고에 찬탄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_()_
이 글 작성하는 일에 많은 분들의 마음 합침이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일임을 다시 한 번 느껴 보니다.
자성인 보살님, 자은성 보살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