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시각장애인 위한 색상 구별 라벨 제작한 노뮤직노라이프 박진 대표
“누구나 컬러를 고를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꽃바람이 불어오면서 야외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 되었다. 비대면 시대이나, 사람 간 관계는 단절되지 않고 소그룹 모임이 싹을 틔우는 요즘. 옷장을 열고 나란히 걸려 있는 셔츠 중 어떤 색을 코디할까 고민하는 시간마저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게 ‘옷 고르기’는 쉬운 한편 어려운 일이다. 가지각색 노하우로 색을 구분해 의상을 고르지만, ‘색상’에 대한 진입 장벽이 있는 것도 사실. 이런 패션 고민을 덜고자 노뮤직노라이프 박진 대표가 ‘색상 구별 라벨’이 부착된 일상복을 출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촉각화된 오선지 악보의 음계로 옷의 색깔을 나타내는 ‘색상 구별 라벨’을 개발한 디자이너를 만났다.
Q. 기업명에서 음악의 향이 느껴지네요.
A. ‘노뮤직노라이프’는 상호임과 동시에 패션과 도서출판을 통해 음악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런칭한 두 번째 브랜드입니다. 첫 번째 브랜드인 ‘드링크 비어 세이브 워터’가 채울 수 없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어요. 드링크 비어 세이브 워터의 경우 디자이너의 역량을 살리고, 예술적인 시도를 담은 상품을 시즌별로 한해에 2회 선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부족함을 느끼게 됐어요. 화려하고 독창적이지만, 멋을 부리는 측면이 강한 데다 가격대도 있어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면은 좀 부족하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입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은연중 가지고 있는 ‘어떤 틀’ 같은 것을 깨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2019년에 일상에 녹아들 수 있는 스타일을 기조로 하는 ‘노뮤직노라이프’ 브랜드를 런칭하게 된 거예요. 음악적인 감성을 담은 이름이 된 건 음악을 떼놓고는 디자인 작업을 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착용감에 신경을 쓴 양말은 리듬감이 부드러운 재즈를 모티브 삼아 제작됐고, 타이트하면서도 블링블링한 셔츠는 록을 모티브로 태어났거든요.
Q. 음악을 무척 사랑하시나 봐요.
A. 디자인 구상할 때를 포함해 잠들 때도 음악을 틀어놓습니다. 그래야 집중이 잘 되고 안정감을 느껴요. 패션 디자이너가 된 것도 중학생부터 꾸준히 했던 밴드 음악 덕분입니다. 홍보 포스터 제작 및 단체 셔츠를 구상하며 자연스레 패션 감각이 길러졌거든요. 음악 축제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에 참여했다가 제가 구상한 포스터와 셔츠 등을 본 아트마케팅 회사 쌈지의 관계자분이 감각이 있다며 패션 디자이너 활동을 제안하셨죠. 전공생은 아니지만 패션 디자인에 흥미가 있었고, 센스가 있다는 말에 입사를 결정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걸어오고 있는 디자이너의 길의 시작이었죠.
Q. 색상 구별 라벨의 개발을 마음먹은 순간은 언제였나요?
A.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으셨던 시각장애인분이 던진 질문이 단초가 되었죠. 그분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제 직업을 듣고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옷 색깔을 구분하고, 그날의 옷을 고르는지 궁금하지 않나요?”라는 질문과 함께 자신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를 풀어놓으셨어요. 눈이 불편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는데, 직접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그때 나눴던 대화도 큰 충격을 주었죠. 여태껏 많은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을 지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틀 안에 시각장애인의 입장은 담아내지 못했던 거니까요. 하지만 그저 막연한 생각뿐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엄두는 내지 못했어요. 시각장애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선뜻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죠. 그러다 샤워를 하던 중 정전이 된 일이 있었습니다. 서둘러 두꺼비집을 올렸는데, 불을 켠 후에야 옷을 거꾸로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어둠 속에서 눈이 보이지 않아 실수했다는 머쓱함 이전에 시각장애인분들은 옷의 색상뿐 아니라 앞뒤 구별도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잠시나마 직접 겪어보니 그들의 불편함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어요. 뭔가 대안이라도 만들자는 결심이 선 순간이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아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개발을 위한 인터뷰에 응해줄 시각장애인분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Q. 연구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A.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한 적도 많은데 저마다의 요령으로 옷의 색깔을 구별하고 있었어요. 딱 한 가지 종류의 셔츠나 바지만 사거나, 옷 안쪽의 케어라벨을 빨강 계열은 세모, 파랑 계열은 직사각형과 같이 특정 모양으로 오리거나, 옷장에 두는 위치로 구별하는 등 다양했죠. 눈이 불편하다 보니 정리가 어렵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하나같이 옷장이나 서랍이 일반인인 저보다도 깔끔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은연중 장애인에 대한 색안경을 썼었나 하며 돌아보게 된 시간이기도 했어요. 시력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자신을 꾸미고 드러내며, 흔쾌히 의상 코디 경험을 이야기하는 그분들을 보면서, 색상을 인지하기 어렵다는 것 외에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죠. 많은 노하우 가운데 색상마다 라벨의 형태를 달리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아서 거의 샘플 제작 단계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촉감에 민감해서 옷을 사면 라벨을 전부 떼어버린다는 한 시각장애인분의 말을 듣고 낙담하며 작업을 초기화시킨 일도 있었죠. 색상뿐 아니라 사이즈나 세탁 등 주의사항도 표시할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시각장애인분들에게 문의한 결과, 정보가 많으면 알아보는 데도 시간이 걸리거니와 색깔 구별이 가장 중요하다는 답변을 듣고 하나에 올인하기로 했습니다.
Q. ‘시각장애인’ 하면 점자를 먼저 떠올리는데요.
A. 개발 초반에는 점자를 이용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후천적 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어려워하는 비율이 적지 않다는 말을 듣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습니다. 또 나라마다 언어와 문자가 다른 것처럼 점자도 여섯 개의 점을 사용한다는 것만 동일할 뿐 한글과 영어 등 기호는 다르다는 게 인지의 장벽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죠. 글로벌 시대니 만큼 훗날을 생각할 때 세계적으로 공통된 체계가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무수한 고민과 수많은 논의 끝에 만국공통인 오선지 음계 체계를 떠올렸어요. 오선지의 가장 아래에 표시하면 하양, 그다음 자리는 옅은 회색, 그 위는 빨강…. 이런 식으로 위치에 따라 색상을 표시하면 어떨까 싶었죠.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음악이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한 셈입니다.
Q. 시각장애인분들의 호응은 어떤가요?
A. 색상 구별 라벨이 들어간 브랜드의 정식 명칭은 ‘터치더컬러(touch the color)’입니다. 맨투맨과 반팔 셔츠를 판매 중이고, 색상은 7가지 무지개색과 하양과 검정, 옅은 회색과 짙은 회색 11가지입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긍정적인 반응이 많아요. 셔츠 하단에 색상 구별 라벨이 부착되어 있으니, 옷걸이에 걸린 상태에서도 밑단을 만져 확인이 가능해서 좋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색상이 구별되어 코디가 자유로워졌다 등등.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개발자로서 보람을 느끼고, 터치더컬러 사업의 원동력이 됩니다. 실은 색상 구별 라벨 제작에 뛰어들자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이 시장성 문제로 우려를 표했었어요. 하지만 이런 시도가 시각장애인들의 의상 선택을 넓히고 주도적으로 색상을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11가지 색깔로 한정된 것이 아쉬움이지만, 색상 구별 지표가 없는 것과 조금이나마 기틀을 마련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봐요. 저와 같은 연구나 시도를 하는 분들이 늘었으면 하는 소망과 패션 소외 계층을 위한 연구나 지원이 정부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Q. 이루고 싶은 비전이나 목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우선 터치더컬러 브랜드를 지속 가능한 상품으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시각장애계에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는 추세지만, 모르는 분도 계시는 만큼 홍보 기획을 세우고 있어요. 시각장애인 직원을 채용해 색상 구별 라벨 셔츠의 시착 영상을 제작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시각장애인 진행자가 직접 의상을 착용해 셔츠의 질감, 어울리는 코디 추천 등을 소개하며 상품을 알리는 내용이죠. 인공적인 기계음보다 사람의 목소리가 공감과 친근함을 더 잘 이끌어낼 수 있고, 시각장애인 진행자의 설명이기에 상품 구매를 생각하는 시각장애인 고객들도 좀 더 신뢰를 갖지 않을까 생각해요. 언젠가 색상 구별 라벨 체계가 완전히 정착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의류로까지 확장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꿉니다. 그럼 패션 소외계층이 점차 줄고, 패션의 사각지대도 차츰 축소되겠죠. 모두가 색상을 누리며 즐길 수 있는, 찬란한 내일이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여러분도 함께해주세요.
신혜령 기자
* 본 원고는 월간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 4월호에 쓰일 목적으로 작성된 글의 원본입니다. 가필첨삭을 거치지 않은 글이라 실제 간행물에 실린 내용과는 다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댓글 앗! 내 티가 왜 거기서 나와.
박진 대표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