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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금타
*최면을 통한 전생 연구가였던 돌로레스 캐년(1931~2014) 할매의 자료입니다. 할매가 기독교도이다 보니, 기독교적 내용이 많지만 참고로 할 내용이 많습니다. 앞서 올렸던 "저승문답"과는 또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S"는 피시술인(subject)을 지칭하는 것이며, 靈界에서 대답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죽음의 경험
나는 종교 써클 안에서, 죽은 사람의 靈에게 말을 걸어서 그들과 대화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나는 그 일에 대해 그런 식으로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은 사실이라고 추측한다. 내가 말을 거는 그 죽은 사람이 더 이상 죽어 있지 않고 오늘날에 다시 살아가고 있으며 매일의 생활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현재 죽어 있는 靈, 즉 흔히 말하는 鬼神이 아닌,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여 현생에 살고 있는 靈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死者에게 말을 걸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 왜냐하면 알다시피, 나는 前生逆行士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前生逆行과 歷史硏究를 전문으로 다루는 최면가에겐 인기 있는 용어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들이 역사를 꿰뚫고 내려가서 다른 생애를 다시 살 때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착상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나는 곧 이것에 익숙해 졌고, 그것이 매혹적임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런 믿기 어려운 분야에서의 나의 모험의 얼마간을 묘사하는 책들을 썼다.
대부분의 최면술사에게 있어, 前生관련 작업은 엄격하게 출입이 금지된 분야이다. 난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들이 자신들이 발견할지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확실한,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한 상황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한 그런 치료사가 내게, 마치 자신이 정말로 획기적인 발전을 했다는 듯이, 이렇게 비밀을 털어 놓았다.
“내가 몇 번의 逆行을 시도 했고, 한 번은 어떤 사람을 어린애였을 때로 데려갔어요.”
그는 대단히 심각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웃음을 참기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거기서부터 이 일을 시작했는데요.”
심지어 치료방법으로서 前生의 기억을 정기적으로 다루는 다른 역행가들 중에도, 최면에 걸린 실험 대상자를 죽음의 경험으로 데려가거나 “죽은” 것으로 추측되는 기간인 中間界에 있는 동안으로 과감하게 들어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어떤 신체적인 일이 최면상태에 있는 被최면자의 살아 있는 몸에 일어나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이러한 기억들을 다시 삶으로써 손상을 입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특히 그 피최면자가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경우엔. 하지만 수백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설사 끔찍한 방법으로 죽었다 해도 그 개인에겐 아무런 신체적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신체적 효과가 없도록 보장하기 위해 항상 특별한 예방책을 강구한다. 피최면자의 안녕이야말로 나의 가장 직접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내게 있어, 中間界, 소위 “죽은” 상태는 내가 만난 가장 흥분되는 존재상태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 인류에게 커다란 이익을 줄 수 있는 많은 정보가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죽음이 전혀 두려울 것이 없음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죽음을 직면할 때, 죽음이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대단히 익숙한 것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그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들은 끔찍한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수도 없이 방문했던 친숙한 곳, 많은 사람들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탄생과 죽음이, 각자가 여러 번 겪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영혼의 성장의 자연스런 일부인, 進化的 循環임을 보게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死後에도, 비록 수준(plane)은 다르지만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주위에서 보던 물리적 세계처럼 실제적인 곳에서의 生命과 生存이 있는 것이다.
인생의 많은 것들처럼, 죽음은 어떤 것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미스테리 속에 감추어져 있고, 민간전승에서나 다루고 邪敎信仰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죽음은 어쨌거나 우리 모두가 누구나 결국엔 경험해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마음 뒤로 쑤셔 넣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건, 우리는 몸이란 無常한 것이며 어느 날엔가는 숨을 거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그 個性(인물)도 육체라는 껍데기와 함께 소멸할까? 이 삶이 존재하는 모든 것일까? 아니면 어떤 더 이상의 것, 우리가 삶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敎會가, 善하고 信仰心 싶은 이에겐 天國이, 邪惡하고 저주받은 자에겐 지옥이 기다린다고 說敎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의 만족을 모르는 호기심 때문에, 나는 항상 답을 찾았고, 이러한 알고 싶은 갈망을 공유하고픈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우리가 삶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두려워하지 않은 채로 행복과 사랑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삶을 보다 쉽게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역행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내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어떤 대답을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역사에 대한 熱情家였던 나는, 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나는 그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던 때로 돌아가서 사람들이 전생에서의 자신들의 삶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눈을 통해 역사를 보면서, 역사를 다시 사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이 역사적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한 그들의 버전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각자는 깊은 최면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게 되었으니, 삶과 삶 사이의 기간, 이른 바 “죽은” 상태를 발견한 것이다. 그곳은 이곳 地球에서의 물리적인 삶을 떠난 뒤에 사람들이 가는 장소이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한 것을 편집한 것이다.
내가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관해 발견한 가장 일반적인 묘사는, 차가운 느낌이 있고, 그러고 나서 갑자기 영이 침대 옆에서 자신들의 시신을 치켜보며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통은 왜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슬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死者의 靈은 대단히 굉장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감각은 두렵다기 보다 들뜬 기분이다.
다음은 한 여성이 80대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한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이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고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돌 : 당신은 참 오래 사셨군요.
S : 오! 그렇게 늙었었나? 그게 저기 있군요! 오! 난 내가 그토록 볼품없는 줄은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난 너무나 주름살이 많고 오그라들었군요. 완전히 낡았어요. 내가 여기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돌 : 쪼그라든 것도 놀랍지 않지요. 그 몸이 오래 살았잖아요. 아마도 그래서 죽었겠군요. 당신은 “여기”라고 했는데, 어디에 있죠?
S : 나는 빛 속에 있어요. 느낌이 너무 좋아요. 지적인 것 같아요. 평화롭고.. 고요하고.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돌 : 이제 뭘 할거죠?
S : 그들이 가서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군요. 오, 내게 할 일이 많을 땐 쉬고 싶지 않아요.
돌 : 쉬고 싶지 않는데도 쉬어야 하나요?
S : 아뇨, 하지만 내가 다시 속박되길 원하는 것 같진 않네요. 나는 성장하고 배우고 싶어요.
이 이후로 나는 그녀에게서, 그녀가 공중에 떠 있다는 대답 외에는 더 이상의 대담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휴식하는 장소’에 있었던 그녀의 표현과 그녀의 호흡에 의해 말하겠다. 피시술자가 그곳에 갔을 때, 거기는 마치 그들이 깊은 잠에 빠진 듯했고 그들은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질문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답이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특별한 장소는 이 책에서 나중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다른 경우에, 한 여성이 집에서 애기를 낳는 중이었다. 그녀의 호흡과 신체의 움직임이 그녀가 출산의 징후를 경험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일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이 기억할 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피실험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출산이 끝났을 시간으로 시간대를 옮겼다.
돌 : 애기를 낳았나요?
S : 아뇨. 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애기가 나오지 않으려고 해요. 나는 탈진했고, 그래서 나는 몸을 떠났어요.
돌 : 애기의 성별을 알고 있나요?
S : 아뇨.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돌 : 당신 몸이 보이나요?
S : 예,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어요.
돌 : 이제 무얼 할 거죠?
S : 쉬러갈 것 같아요. 나는 결국 돌아가야 해요. 하지만 잠시동안 이곳에 머물거예요. 나는 빛속에 있고, 그 빛은 평온해요.
돌 : 이 빛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S : 모든 知識과 모든 것이 알려지는 곳. 모든 것이 순수하고, 단순한 곳. 여기엔 더 많은 순수한 진실이 있어요. 당신은 당신을 혼란스럽게 할, 세상의 일들을 갖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지구에서의 진실을 갖고 있지만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해요.
돌 :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어느 때엔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죠? 그걸 어떻게 알고 있죠?
S : 나는 약해요. 나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어야 했어요. 나는 그것을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해요. 내가 그렇게 약하지 않았더라면 더 세상에 머물 수 있었을 겁니다. 난 그 고통을 기억할 수 없어서 기뻐요. 나는 내가 돌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고, 내가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어요.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한 가지예요.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극복해야 해요.
돌 : 하지만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대단히 인간적이고, 그것은 당신이 몸 속에 있을 때는 항상 행하기 힘들죠.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는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이 보다 쉽죠. 당신은 그것이 당신이 배우기를 원했던 교훈이라고 생각하나요?
S : 그래요. 그것은 때로 내게 약간의 시간이 걸려요. 하지만 나는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어요. 난 내가 보다 더 강해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 더 잘 했어야했어요. 하지만 내가 아이였을 때 내가 앓았던 그 병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아요. 난 이것이 나쁜 것이 될 거라고 염려했죠. 그래서 나는 포기했죠. 고통은, 당신이 보다 높은 의식 수준을 다루게 될 때,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서 물러가서 순수한 빛이 되고 순수한 사고가 되었을 때, 고통은 그치게 되요. 고통은 오직 하나의 교훈이죠. 우리가 인간 수준에서 고통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굉장한 것을 얻게 되고, 그 순간만이라도 바깥으로 관심을 보이게 되요. 우리 는 그 고통에서 물러나서, 집중하고, 깊은 것에 도달하고, 인내함으로써, 우리는 그 고통 위로 상승할 수 있어요.
돌 : 우리가 겪는 고통에 어떤 목적이 있나요?
S : 고통은 하나의 가르치는 도구죠. 때로 그것은 특정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때로 오만한 영은 고통을 통해 꺾일 수 있고 보다 더 자비심이 많으라는 가르침이 되죠. 고통은 그들에게 그들이 결국 그 고통 위로 상승하는 것을 배워야 함을 가르칠 수도 있어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되죠. 때로 고통을 이해하고, 왜 그것을 갖고 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고통이 경감됩니다.
돌 : 하지만 당신이 말했듯이, 사람들은 미친 듯이 날뛰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하죠.
S : 그들은 너무 자기중심적이 되요. 그들은 그들 자신의 관심과 그들이 그 순간에 느끼는 것에서 보다 더 영적인 수준 위로 올라갈 필요가 있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다룰 수 있어요. 이제, 어떤 사람들은, 고통이 하나의 피난처이기 때문에 고통을 일으키죠. 그들은 어떤 변명으로서 또는 어떤 “구실”로서 고통을 가질지도 모르고, 그것이 그 목족이죠. 그것은 개인에 따라 다르죠. 무엇이 고통일까요? 만약 당신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을 만질 수 없어요. 만약 당신이 당신이 다칠 것이란 점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그 고통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죠. 고통에 힘을 주지 마세요. 고통을 느끼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그곳은 완전히 사람과 관련이 있어요. 당신의 보다 높은 마음인, 靈에까지 도달하세요. 그러면 고통이 당신에게 붙지 못할 것입니다.
돌 : 사람들은 자신을 고통과 분리시킬 수 있나요?
S : 물론이죠.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요. 하지만 그들은 항상 원하진 않죠. 그들은 동정을 원하고, 자기응징,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일들을 원하죠. 사람들은 재미있어요. 모든 사람들은 시간만 있다면 이 일들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죠. 그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죠.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저기에 더 쉬운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은 그 자신이 그것을 생각해내야 하죠. 그것은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다 주는 교훈들의 일부입니다.
돌 : 사람들은 죽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해요. 죽음이 일어날 때 그것이 어떤지를 말해줄 수 있나요?
S : 글쎄요. 내가 몸을 갖고 있을 때는 무겁게 느껴져요. 그것이 나를 입죠. 그것은 단지 불편해요. 하지만 당신이 죽을 때, 죽음은 무게를 경감시킵니다. 그것은 이완됩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는 주변의 모든 문제들을 나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 주위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무거운데, 이 모든 다른 것들을 적재하고 있으니까요. 죽을 때는, 그 모든 것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과 같아서 기분이 좋죠. 그것은 하나의 轉移입니다.
돌 :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무슨 일이 이러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S :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죠. 그들은 믿음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단지 신뢰하면 됩니다.
돌 : 누군가가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S : 당신은 몸에서 일어나서 몸을 떠납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올라오죠. 빛속으로.
돌 : 그곳에 있으면서 무엇을 하나요?
S : 모든 일이 완벽해요.
돌 : 그 빛을 떠나면 어디로 가나요?
S : 지구로 돌아가죠.
돌 : 우리가 지금처럼 시간을 통해 당신에게 말을 하는 것이 유별난 일인가요?
S : 하지만 시간은 의미가 없어요. 이 구조(frame 틀)에서는, 시간이 없죠. 모든 시간이 하나예요.
돌 :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때때로 말을 걸어도 당신을 성가시게 하진 않겠군요.
S : 왜 그래야 하죠?
돌 : 음.. 우리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나로서는 당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S : 내개 보기엔 그것이 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것 같군요.
또 다른 사례는, 9살의 나이에 죽은 어린 소녀에 관한 것이다. 내가 처음 그녀에게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1800년대 말에 학교의 소풍을 가려고 건초를 깐 마차를 타고 소풍을 가고 있었다. 그 소풍 장소가 열릴 근처에 시내가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가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영을 하지 잘하지 못했고 물을 겁냈지만, 다른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고 놀릴까봐 겁이 나서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는 척하기로 했다. 얼마간의 아이들이 낚시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린 소녀는 정말로 그것이 걱정되었고, 그 소풍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나이를 더 먹은 시점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내가 숫자 세기를 끝마쳤을 때, 그녀는 행복하게 말했다. “난 더 이상 그곳에 없어요. 나는 빛속에 있어요.”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S : 난 수영을 할 수 없었어요. 어둠이 내게로 몰려왔고, 난 가슴에 통증을 느꼈어요. 그러고 나서 난 바로 빛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돌 : 그 시내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깊었던 것 같나요?
S : 그렇게 깊은 것 같진 않아요. 난 정말 겁이 났어요. 난 나의 무릎이 접혔고, 나는 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난 단지 너무 겁이 났거든요.
돌 : 어디 있는지 알겠어요?
S : 나는 영원속에 있어요.
돌 : 누가 당신과 함께 있나요?
S : 그들은 일을 하고 있어요. 그들은 모두 바빠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느라.. 나는 모든 것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려고 노력중이예요.
돌 :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것 같나요?
S : 그래요. 이곳은 매우 평화로운 곳이군요. 하지만 난 돌라갈 겁니다. 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해요. 두려움은 당신이 가져온 것이고 그것은 마비시키고 있어요. 난 정말로 물이 깊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의 두려움이 그것을 배가시켰다고 생각해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목소리가 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 속의 괴물과 같아요. 두려움은 단지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죠. 영향을 받는 것은 세속적인 마음이죠. 그 靈은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있어요.
돌 : 사람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할 때, 그 두려움이 그 일을 그들에게로 끌어당긴다고 생각하나요?
S : 오, 그렇죠! 당신은 일들을 당신 자신에게로 가져오죠. 思考는 에너지죠. 그것은 창조능력이 있고, 그것은 일이 일어나게 만들죠. 다른 사람의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지 보는 것은 쉽고, 그래서 당신은 “그들은 왜 그허게 그걸 겁내지?”하고 말하죠. 하지만 그것이 당신 자신의 두려움 일 때는, 그 두려움이 너무 깊고, 너무 개인적이고, 너무 애처로워서 그것은 당신을 삼켜버리고 말죠. 그래서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보고서 그들이 자신들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을 도우려고 시도할 수 있다면, 그와 비슷한 어느 곳인가에서 그것은 내가 가진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돌 : 잘 이해되요. 당신은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임을 알고 있죠.
S : 죽음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그것은 내가 해온 가장 쉬운 것이죠. 죽음은 모든 혼동의 끝과 같아요. 당신이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하기 까진.(* 새로운 생을 받기 전까지) 그러고 나서 그것은 더 많은 혼란이 시작되죠.
돌 :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계속해서 돌아오죠?
S : 당신은 그 순환을 완성해야 합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배우고 세상의 모든 일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완벽 속으로, 영원한 생명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돌 :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명령이군요. 모든 것을 배우란 것은.
S : 그렇죠. 때로 그것은 대단히 피곤하죠.
돌 :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S : 음.. 내가 여기 있는 곳에서 본다면, 그것은 너무나 간단해 보여요. 나는 제어하에 있어요. 예를 들어, 나는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길도 나는 느껴요. 나는 그것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인간에 관한 어떤 것이 있어요. 당신이 거기에 있을 때 그것은 당신을 삼켜버리죠. 내 말은, 두려움이 당신의 일부가 되고, 두려움이 당신에게 닿고, 그것에 떨어져 있고, 객관적이 되기 쉽지 않다는 의미죠.
돌 : 그것은 당신이 감정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죠.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서 “얼마나 쉽냐”고 말하기란 항상 쉬운 일이죠.
S :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두려움을 보는 것과 같죠. 난 인내하고 삶과 함께 머물고, 내가 그 삶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을 때까지 죽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해요. 난 만약 내가 많은 경험을 겪기 위해 함께 머물 수 있는 어떤 삶을 갖는다면, 그것은 많은 짧은 기간의 삶을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거라 생각해요. 나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많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려고 조심스럽게 선택할 겁니다. 따라서 나의 여행을 제한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보다 더 힘든 삶이 될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동안에 사람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특정한 일들이 있어요. 당신이 행하는 것이 당신 주변으로 오죠.
우리 미국 문화에서는 오래된 어떤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사망할 때, 당신의 삶이 “여러분 눈 앞에서 번쩍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연구한 몇 몇 경우에 일어났다. 이것은 그 사망자가 자신들의 삶을 뒤돌아보고,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를 보고 분석할 때 더 자주 일어났다. 이 일은 한 편으로는 종종 master들의 도움으로 행해지며, 그분들은 감정을 배제한 채로 그 삶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나의 고객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전생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재음미할 수 있었다. 이 퇴행최면연구 분야에서 일하고 있을 때 무엇이 전통적인 것이고 무엇이 설정된 패턴을 따르는 것인지 말하기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노인으로서 평화롭게 사망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옮겨져서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언덕으로 가서 가족묘지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른 편(* 저승)으로 가는 대신에,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어떤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을 끝내기로 했다. 거기서 그녀는 자신이 귀신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자신은 어떤 사람의 형상을 한 안개나 농무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구들과 사물들이 그녀를 통과해서 비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런 이상한 상태에 자신이 처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집을 돌아다녔다. 한 지점에서 식모가 그 늙은 여성이 집에 나타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어쩌다 듣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녀가 주위를 돌아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뒤에, 그녀는 귀신으로 있는 것이 싫증났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보거나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곧 그녀는,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서 이루고자 했던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안 순간, 그녀는 집 밖에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에 계곡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그녀의 사망한 남편이 그녀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 차원에서는, 그들은 다시 젊었다. 그들이 결혼할 당시의 나이 그대로였다. 그들은 서로 팔을 끼고 계곡 위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의 계곡”이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이것을 마치 밝게 채색된 pallet 즉 누비침대커버가 그 계곡 위해 던져졌던 것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막 떠났던 그 생애로부터 온 장면들과 장소들의 콜라주처럼 보였다. 선형방식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의 형식으로 그녀의 눈 앞에 그녀의 삶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삶이 그들 앞에 놓여졌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그 공동묘지를 볼 수 있고, 그 도시를 볼 수 있고, 그 집을, 그 산들을 볼 수 있어요. 그것은 마치 우리가 알았던 모든 것을 합쳐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마치 이것이 우리의 삶이었고, 이것이 우리가 함께 가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공유했던 것,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것을 볼 수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했던 그 삶을 겪은 것이 기뻐요."
다른 경우에, 나는 산사태로 방금 사망한 어떤 남성과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S : 깊은 연못 속으로 다이빙한 적이 있죠? 바닥이 어둡고 음산한 곳으로 말이죠. 당신이 물 표면으로 다시 올라옴에 따라 점차로 밝아지죠. 그러고 나서 물표면 위로 뛰어오르고, 그곳은 주위가 온통 햇빛이 가득하죠. 죽음은 그와 같아요.
돌 : 죽음이 그와 같은 것이, 당신이 사망한 방식, 즉 바위가 당신 위로 떨어졌기 때문일까요?
S : 아니죠. 그것은 내가 그 物理的 수준에서 靈的 수준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예요. 내가 몸을 떠나는 것은, 물웅덩이를 통과하여 위로 솟아오르는 것과 같았던 거죠. 그러고 나서 나는 영적인 수준에 도달했고, 그것은 물표면 위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아요. 당신이 사고로 죽는다면 물리적으로 당신이 물리적 수준에 대한 의식을 잃기 바로 직전까진 고통스럽죠. 왜냐하면 당신의 몸이 손상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의식을 잃고 난 뒤에는, 죽음은 매우 쉽고 자연스러워요. 죽음은 우리 삶의 다른 것들, 즉 사랑하는 것이라든지, 걷는 것, 달리는 것, 수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죠. 죽음 이후는 삶의 또 다른 부분일 뿐이죠. 사실 죽는 일은 없어요. 당신은 단지 다인 삶의 다른 단계로 넘어가서 계속하는 것뿐이죠. 죽음은 유쾌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걱정한다면, 그들에게 깊은 물웅덩이가 있는 강으로 가서 웅덩이 바닥으로 다이빙해보라고 하세요. 그 바닥에서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표면으로 뛰어들라고 하세요. 그들에게 죽음이 그와 같다고 말하세요.
돌 :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고통스러울 거라고 걱정하는 것 같아요.
S : 당신이 고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아요. 대부분의 경우, 고통을 원하지 않는 한, 고통은 없어요. 만약 당신이 고통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거나 당신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고통을 필요로 한다면, 극도의 고통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그 경우에도 당신은 언제든지 고통에서 떨어질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든지 이용가능하죠. 고통의 기간 동안의 몸과 영혼의 분리는 누구나 이용가능해요.
돌 : 하지만 실제적인 죽음 자체, 즉 몸을 떠나는 것은 고통스럽죠?
S : 아뇨. 轉移는 구속보다 쉬운 것 중 하나죠. 고통은 몸에서 유래해요. 靈은 후회를 제외하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해요. 그것이야말로 靈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이죠. 좀 더 많은 어떤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그 느낌. 이 느낌은 고통스럽죠.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은 더 이상 의미가 없죠. 왜냐하면 그것은 몸과 함께 남겨지니까요.
돌 : 실질적인 사망이 일어나기 전에 몸을 떠나서 몸이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S : 그렇죠. 그 사람은 그런 선택권이 있어요. 거기에 머물거나 아니거나, 그리고 그것을 겪거나, 아니면 떠나서 그냥 지켜보거나에 대해서 말이죠. 이것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하나의 옵션이죠.
돌 : 난 개인적으로 그것이 보다 편안한, 특히 트라우마가 있는 죽음이 될 경우에, 보다 편안할 거라고 생각해요.
S : 그것은 순전히 그 개인에 달린 것이죠.
죽음에 대한 또 다른 묘사
S : 당신이 벌거벗은 채로, 추위에 떨며, 피를 흘리면서 온갖 가시나무와 야생동물과 이상한 소리들로 가득한 어두운 숲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모든 숲의 뒤에는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은 찢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동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당신은 푸른 풀들이 자라고 있고 새들이 노래하고, 하늘에는 구름이, 그리고 그 목적지로 가는 길에 즐겁게 웃고 있는 시내가 흐르는, 그런 개간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삶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는 나의 비유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돌 : 하지만 지구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죠.
S : 숲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하죠,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단 그들이 숲에서 나오면 두려움이 더 이상 없죠. 두려움은 숲에 있어요.
돌 : 그렇다면 죽는 도중에 두려워할 것이란 없군요!
S : 다른 것보다 더 많이 바람직한 어떤 과도기/變移가 있죠. 이 점에 대해서 점잔빼며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은 단지 문이죠. 아무리 여러 번 문을 열더라도, 그것은 문이란 사실에서 변하지 않아요.
돌 : 자연연소(* 인체 내부에서 불이 생겨서 몸이 타버리는 현상. 인간발화현상이라고 불리는 미스테리한 현상)로 인해 죽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어떤가요?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 미스테리인데요.
S : 그것은 그 시스템 내부에 있는 당신들이 “화학약품”이라고 부르는 것의 불균형에서 기인하죠. 그것은 인간의 신체가 잘못된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죠. 비록 매우 제어되고 느린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그런 죽음은, 몸의 액체가 연소되는 것에 기인하죠. 이 일은 때때로, 신체의 화학적 구성에 있어서의 불균형을 유발하는, 유전적 요소에 기인해요. 예를 들면, 인체 시스템에 인(燐)이 너무 많은 때죠.
돌 : 이 일은 식이요법에 기인한 것이군요!
S : 그렇게 많이 식이요법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화학약품의 수준을 생산하기 위해 인체에 주어지는 신호에서 기인하죠.
돌 :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나나요, 아니면 고의로 일어나요?
S : 그건 묘사하기 힘든데, 왜냐하면 모든 경험들은 유일무이하니까요. 그것은 그 둘 중 어느 하나거나 두 가지 모두에 기인할 수 있죠.
돌 : 집단으로 죽은 사람들은 어떤가요? 열차사고, 대량학살, 지진으로 죽은 많은 사람들은 동시에 죽는데, 그들 모두가 동시에 죽기로 선택했나요, 그 점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나요?
S : 당신은 개인적 기반에 관한 까르마의 개념을 알고 있어요. 정말로 “집단” 까르마라고 불리는 것도 있죠. 수 많은 겁의 세월을 거치면서, 영혼들이 단체로 어떤 일을 수행하거나, 변화를 확립하거나, 단체로 삶을 경험한 경우가 있었죠. 당신이 개인적 기초에서 경험한 것만큼요. 이 “집단 사망”은, 자신들의 변이(變移)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지점에서 함께 오기로 한, 개인 영혼 그 이상이 아니죠. 즉 그것은 죽음의 경험을 배우는 중에 있는거죠. 그렇게 할 때, 그들이 동시에 사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어떤 중대한 때에 있음을 발견하죠.
돌 : 그들은, 삶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일에 동의했나요?
S : 그렇죠.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후원을 발견하는 이 단체 변이(變移) 내에 있기 때문이죠. 이 변이 중에 그들은 혼자 있지 않기에 경험의 공유가 있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여러 번의 탄생과 삶의 共有가 있었죠, 그래서 다중의 또는 共有된 죽음을 발견하는 것이 보기 드문 일이 아니죠.
돌 : 예전에 챌린저 호 사건에서 사망한 우주비행사들이 그 경우인가요?
S : 참으로 이것은, 죽음의 경험을 공유하게 될 것을 同意한 한 가지 사례죠.
2章. 영접하는 자
사망 후에, 어떤 영들의 경우 혼란의 기간이 있는 것 같다. 모든 이가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부분은 죽는 방식, 즉 자연사(自然死)인지, 갑작스럽고 뜻밖의 사망인지에 의존한다. 내가 발견한 주요한 것은, 누구든 죽음을 겪은 뒤에 결코 혼자가 아니란 것을 보증한다는 점이다.
S : 때로 당신이 정말로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즉 당신이 물리적 수준에 있는지, 영적인 수준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기간이 있어요. 왜냐하면 감각의 얼마간이 비슷하지만 다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죠. 적응 또는 재교육의 기간이 있어요. 그것은 자신들이 이곳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아내려는 어떤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죠.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도움이 즉시 보내지니까요. 보통은 소수의의 영혼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이전 생(生)들에서 당신과 가까운 까르마적 연결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육화(肉化)의 중간 지대 자체에 한 두 사람이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그곳에서 당신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망자(亡者)는, 직전의 생에서 그들과 가졌던 관계 때문에 그들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영적인 수준으로 넘어갈 때 혼란을 일으키는 또 다른 것은, 당신의 기억이 열려서 당신의 과거의 肉化와 당신의 까르마적 그림 전체를 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영혼들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그 관계의 처음에, 당신은 그들을 당신이 방금 떠났던 그 생에서 알았죠. 그러고 나서 당신은 당신이 그들을 알았던 다른 관계들을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 수준에 있는 동안에 당신의 까르마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과정의 일부죠.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막 완성했던 것과, 당신이 지구로 다시 돌아갈 때 여전히 해결할 필요가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죠.
돌 : 그렇다면 사람들이 죽을 때 어떤 사람이 항상 마중 나온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S : 그렇죠. 가능하다면, 그것은 보통은 망자의 생애 동안에 망자에게 특별했던 사람이죠, 만약 그들이 환생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망자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사람, 그리고 이끄는 힘은 그곳에 망자를 돕기 위해 그 변이의 기간 내내 있어요.
돌 :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맹렬하게, 즉 갑자기 사망합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죽은 줄 모른다면, 그들은 더 많이 혼란스럽지 않을까요?
S : 그래요, 사실이죠. 그래서 그곳에 있는 조력자가 망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그들이 그것을 통과하도록 도와야 하죠.
돌 : 영이 사후에 다른 영혼들을 만날 때, 보통 그 영은 어디로 가나요?
S : 영은 학습이 일어나는 수준으로 갑니다. 그것을 위한 중심이 되는 위치란 것은 없어요. 즉 그것은 단지 존재의 한 상태인거죠. 그래서 보통은 그 영은 이 일을 하는 동안에 많은 다른 영혼들과 상호작용하죠. 다음 생애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운 뒤에, 영은 영적인 master들과 상담하여, 다음 환생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죠. 영은, 어떤 상황이 그 영이 다시 돌아가기에 최선이 될 것인지를 보기 위해 master와 상담하는 것입니다. 어느 영혼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영이 상호작용하기에 최선인지에 관한 상담도 있죠.
돌 : “휴식하는 장소”에 대해 들어보았나요?
S : 그래요. 만약 당신이 내가 설명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면, 그것은 손상된 영혼들이 다른 영혼들의 집단에 들어가거나 다시 환생의 수준으로 들어가기 전에, 쉬는 것을 목적으로 가서 자신을 회복시키는 특별한 장소죠.
돌 : 어떤 사람들은, 당신의 영(靈)이 몸을 떠나는 그 시점에 예수의 영(靈)의 형태가 당신을 접촉해서 당신을 안내할 것이라고 믿어요.
S :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죠. 만약 저승으로 건너가고 있는 어떤 개인이 이 예수 에너지를 요구하거나 바란다면 이 일이 때때로 이루어지는데, 따라서 실제로 그것은 예수 에너지가 자신을 나타내는 거죠. 왜냐하면 그는 그의 도움이 이러한 과정의 일부가 될 거라고 말했고, 그래서 누구든 자신을 이러한 에너지에 대해 열어놓기로 선택한 사람을 위해 그곳에 존재하죠. 그들이 육화하건 안 하건. 이것은 또 다른 신앙이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실이죠. 만약 그들이 특별한 실재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갖고 살았다면, 그 영의 에너지가 亡者들이 쉽게 건너는 것을 돕기 위해 그곳에 있을 겁니다, 만약 이것이 망자들이 원하는 것이라면요.
돌 : 영의 세계에 어떤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영들이 잠을 잔다는 믿음이 있어요. 왜냐하면 영들이 예수가 두 번째로 와서 자신들을 소생시킬 때까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죽기 때문이라는 거죠.
S : 당신이 발견하려고 기대하는 그것, 당신이 창조하는 그 현실을, 당신은 정말로 발견합니다. 만약 망자들이 아마도 어떤 축제 속에 있는 것으로 깨어나기를 기대한다면, 그땐 그것이 그들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 무엇이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죠. 당신이 “육체적 몸”이라고 부르는 것의 사망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너무나 많은 다양한 일들이 있죠. 몸이 죽을 때, - 영혼은 결코 죽지 않죠. - 만약 그것이 온화한 죽음이라면, 그땐 안도감이나, 경이감이나, 해방감이 있어요.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그곳에 있을 겁니다. 만약 亡者들이 안내자나 친구들을 만나서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이 빛으로 향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이것이 그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천벌과 지옥불에 대한 믿음에 함빡 젖어 있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믿는다면, 이것이 그들이 또한 지각(知覺)하게 될 것이죠. 이것의 대부분은, 그 개인 영혼이 사망하기 전의 ‘마음 태세’에 기초한 것이죠. 하지만 대개는, 망자가 다른 쪽으로 건너기 전에 그들에게 가까웠던 사람들이 거기 있죠. 일반적으로, 다른 영혼이 와서 망자를 치유의 장소로 안내할 것이고, 그래서 망자들은 자신들의 혼란을 없애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죠. 아마도 그 영은 혼란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이쪽 편(*영계)에 오랜만에 왔기 때문이죠. 영접자들은 망자들이 혼란스럽게 되지 않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 지, 그들이 어디로 갈 필요가 있는지를 발견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만약 영접자가 망자들이 알고 있었던 누군가라면 망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유발하는 것이니까요. 트라우마적인 죽음을 맞이한 어떤 사람들은 깊은, 아주 깊은 휴식의 기간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자신들의 몸이 존재하기를 그만 두었다는 사실(* 곧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있죠. 그러한 깨어남은 대단히 느리게 진행 될 겁니다. 우리는 멍하니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들은 스스로에게 손상을 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죠.
돌 : 그들이 때로 그 일을 하나요?
S : 그래요,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죠. 공황상태에 있는 그들은, “난 돌아가야 해, 난 돌아가야 해.”라고 느끼면서 자신들을 해칠 수 있죠.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죽은 곳에 자신을 묶어 둡니다.
돌 : 그들이 가서 휴식하는 것이 더 좋은 거죠?
S : 그렇죠. 왜냐하면 일어난 일이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천천히 깨달을 수 있게 되니까요. 그렇게 해서 충격과 트라우마가 사라지는 거죠.
돌 : 그들이 사랑한 이들이, 트라우마적인 죽음이 있을 때 (영접하러) 오나요?
S : 그렇죠. 하지만 당신이 정신적 충격을 주는 죽음이라고 생각할 어떤 것이, 이쪽 편에서도 트라우마적이라고 항상 여겨지진 않아요. 당신은 아마도 많은 군인들이 트라우마적인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들은 일어난 것의 대부분을 받아들이는데, 출산당시에 사망한 누군가보다는 더 잘 받아들이죠.
돌 : 그것은 주위의 환경과 개별적 영혼에 달린 문제 같군요.
S : 그래요, 상당부분.
저승에 있다가 다시 지구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확립된 순환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만약 누군가가 자신들이 죽을 수 없는 어떤 장소에 있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영원히 있고 싶어할 것 같았다. 나는 지구의 사람이 항상 불멸(不滅)을 추구하고 있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S : 아니죠. 당신은 그곳이 대단히 빨리 싫증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의 3학년의 수업이 끝났다면, 왜 당신은 당신의 남은 생애동안 3학년에 머물고 싶어하겠어요? 그것은 안락할 수는 있지만, 그곳엔 더 이상의 배움은 없을 겁니다.
돌 : 더 이상의 도전이 없겠군요.
S : 사실입니다. 죽음은 진보를 위해 필수적이죠. 만약 한쪽에서 영의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더 이상의 죽음이 없다면, 정체가 일어날 것입니다. 죽음은, 많은 정보를 배우기 위해 最適인, 하나의 진행 중인 과정이죠. 모든 것은, 그것이 이런 관점에 있는 것처럼 존재하죠. 만약 당신이 배우고 있던 그 수업이 끝나면, 그땐 그 수업을 가르쳤던 그 경험들과 더 많은 진보된 수업들을 배울 새로운 경험을 떠맡는 것을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죠. 경험의 각 수준은 그 아래에 있는 경험으로부터 각성상태가 성장하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경험들을 위한 촉매제가 될 주변환경들이, 새로운 경험이 필요할 땐 버려질 것입니다. 당신은 3학년 교실에 앉아서 4학년이나 6학년의 수업을 받을 겁니까?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가서 마음의 새로운 구조와 함께 새로 시작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만약 당신이 동일한 교실에 남는다면, 당신은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겁니다. 마음의 얼개도 또한 대단히 중요하죠.
돌 : 내가 보기엔 지구의 많은 주민들에 있어서 그것이 사실인 것 같아요. 때로 만약 그들이 동일한 환경에 머문다면, 그들은 성장하지 못한다. 이것이 당신 말의 의미인가요?
S : 정확히 옳아요.
돌 : 그들에게 어떤 새로운 도전, 새로운 장소,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군요.
S : 새로운 환경은 진보에 대단히 중요하죠.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이는 미래로 보는 것을 방해하죠. 어떤 사람들은 사후의 삶이 없다고 생각하죠.(그녀는 잠시 웃었다.) 하지만 일단 어떤 것이 존재하면, 존재하는 그 에너지는 파괴될 수 없죠. 육신의 사망 후에도 생존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죠? 당신은 전기(電氣) 같은 어떤 것을 파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에너지는 비록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항상 거기에 있죠. 왜 그들은, 에너지는 파괴될 수 없지만 인간의 영(靈)과 영혼은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것이, 인간 영혼의 실상이죠, 영혼은 그저 에너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단지 육신 내에 거주하는 어떤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에너지로서의 영혼은 마치 에너지가 늘 그렇게 하듯 전파되죠. 당신의 개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에너지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조(創造)의 진리의 정수(精髓)니까요. 모든 것이 에너지죠. 어떤 형태들은, 당신 주위의 물리적 세계처럼 보다 낮은 수준에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에너지고 따라서 불처럼 단순한 전환과정으로 그렇게 설명될 수 있죠. 모든 물질은 실제로는 에너지죠. 그것은 단지 에너지가, 보다 낮은, 보다 기초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죠. 그러니 당신은 자신을 순수한 에너지의 존재로 볼 수 있어요.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죠. 물질과 같은 것은 없어요. 이것은, “물리적” 세계 주변에 뚜렷이 보이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주어진, 단지 하나의 함축된 의미에 불과하죠.
죽음은 많은 두려움을 품고 있어요. 하지만, 죽음은 커다란 否認者고, 커다란 非眞實性이죠. 죽음은, 사람들이 가장 언급 하지 않은 것이지만, 대부분이 한번쯤은 생각해 보는 주제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에서 풀려나면, 이 행성에 존재하는 것을 멀리 능가하는 삶이 다시 존재하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이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부적절한 사용, 즉 自殺이나 또는 그런 종류에 속하는 것을 통해 이 삶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그럴 경우 다른 편에까지 미치는 그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다른 편에서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어요. 자신의 때가 되기 전에 살아 있는 몸을 버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결코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살은 용납될 수 없는 낭비죠.
돌 : 나는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이 모든 것을 명백히 했으면 해요.
S : 그래요. 당신이 가질 주요한 문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 방면의 철학적 敎義죠.
돌 : 당신 말은,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의미하는군요!
S : 철학적인 교의는, 존재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그 방식이죠. 예를 들어, 다른 믿음의 교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내가 설명한 일들의 어떤 것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돌 : 당신 말은, 天國과 地獄과 같은 것들을 믿으며 자란 사람들을 말하나요?
S : 그래요. 또한 각 영혼은 오직 한 번의 肉化만 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란 사람들도.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믿는 것이죠.
돌 :그래요. 그들은 삶이 한 번뿐이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죠. 우리가 한 번 이상 살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 있죠.
S : 당신이 두 번이나 그 이상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당신이 단 한 번만 태어날 수 있음을 믿기가 더 어렵나요?
돌 :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개념을 어려워하죠.
S : 당신 쪽에 있는 사람들만 그렇죠. 그것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그런류로 문제를 갖는 한 가지 이유죠.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기회를 바짝죄고 있다고 느끼니까요. 만약 그들이 많은 기회가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들은 매 번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실수를 나쁘다고 느끼지 않겠죠. 그들은 다음번에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어요.(* 로마 카톨릭에서는 S의 주장과 달리, 사람들이 여러 번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지금의 삶을 흥청망청낭비해 버릴 수 있다고 하여,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윤회의 교리를 이단으로 지정해 버렸다.)
돌 : 그들은 이번 기회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네요. 이해가 되요. 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S :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삶 이후에 또 다른 생존이 있다는 생각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죠. 왜냐하면 아마도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또 다른 삶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연속되는 고문이라고 생각하죠. 많은 교회들은, 사람들이 이전의 생존 또는 연속적인 생존을 믿기를 원하지 않죠. 왜냐하면 그런 믿음은 교회들이 쥐고 있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느슨하게 할 것이고, 따라서 교회들이 더 이상의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죠. 모든 위대한 思想學派의 지도자들은 前生과 後生에 대해 알고 있었죠. 하지만 그 지식은 제어를 위해, 일반 대중에게는 폐쇄되었죠. 심지의 힌두 학파조차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통제를 사용하죠.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이 사람은 자신의 이전의 생존에서 지금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어떤 일을 했다. 따라서 왜 내가 그를 도와야 하나? 그는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짓을 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그 개념을 기독교나 다른 어떤 종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책략, 즉 통제에 사용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윤회를 까스뜨 신분제도를 정당화하는데 사용한다.) 당신은, 종교 쪽에 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 점을 알지 못하고서, 보다 어두운 쪽에 의해 뒤틀리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聖經에서 많은 것을 제거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가했죠. 그들은 상관하지 않아요,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이것이 내가 聖經이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聖經이 말하는 것이다.”
돌 : 사람들은 이런 일을 발설할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들에게 聖經은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변경되었다고 말하려는 것 말이죠.
S : 이런 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생각하기를 두려워하죠. 당신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평생동안 (아무 의심 없이) 믿었던 것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고서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거나, 아마도 그들의 부모가 알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믿는 것의 기초를 날려버리고 있는 거죠. 그런데 사람이란 무언가를 믿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가 없어요. 비록 그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믿음일지라도 말이죠. 그는 무언가를 믿지 않을 수 없죠.
돌 : 바꿔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는) 다른 (믿음을 가진) 思想學派에 의해 깜짝놀라죠.
S :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이 예언들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을 때의 예수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을 말하죠. 그들은 예수가 틀렸다, 예수는 미쳤다, 예수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죠. 누군가가 약간 다른 어떤 것, 약간 유별난 어떤 것을 가지고 올 때마다, 그것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따라서 그들은 그것에 대해 나쁜 말을 하게 되죠. 이 (윤회의) 知識은 배울 필요가 있는 어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어야 함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죠. 이런 일을 알아야할 사람들이 있죠. 그러면 그것이 그들 안에 어떤 불꽃을 일으키고 그들은 그것을 진실로 인식알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자신들이 원했던 것,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 되는 길을 발견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충분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에 서게 할 것이니까요. 기억하세요. (2000년전 예수가 세상에 와서 가르침을 폈을 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의 메시지를 믿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세상을 보세요. 세상의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기독교도라고 고백합니다. 진실은 수 세기 동안 억압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진실이 드러날 때입니다.
다음은 존재의 다양한 수준에 관한 또 다른 존재의 설명이다.
S : 다른 수준들이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죠. 예를 들면, 당신은 바로 지금 물리적 수준에 존재하고 있지만, 당신 자신의 靈的인 양상들은 靈的인 수준들에 그림자와 같은 반영을 갖고 있죠. 왜냐하면 그 영적인 수준들은 이곳에도 있지만, 단지 관련된 진동들이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영적인 눈으로 보면, 많은 경우 그것은 거의 물리적 장소와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것은 이곳에 지구의 동일한 위치에 있죠. 그것은 단지 주파수만 다를뿐이죠. 그것은 라디오와 같아요. 그것은, 동일한 라디오인데, 그것을 통해 나오는 진동들이 동시에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죠. 하지만 그것은 다른 주파수상에 있죠. 그래서 여러분은 주파수 수신기를 조정해서 어느 때건 진동의 특정한 세트를 받는 거죠. 그렇게 그것은 이러한 다른 수준들에 존재해요. 그것들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다른 주파수들을 갖고 있고, 그래서 그것들은 충돌하지 않아요. 내 뜻을 정확히 전달했는지 모르겠군요.
돌 : 이해한 것 같아요. 그것은 내가 전에 들었던 것이죠. 우리는 한 가지 수준에 있을 수 있고, 다른 수준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S : 그래요. 아니면 만약 당신이 이 수준에서 명상이나 그런 등의 종류를 통해 알아차리게 된다 해도, 당신은 단지 흐릿하게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다른 주파수에 속하니까요. 당신은 당신의 주파수의 일부를, 다른 수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그러한 다른 주파수와 상호작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변경시킬 수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 어떤 장애가 있을 겁니다. 따라서 그 묘사는 어두운 유리나 베일을 통해 본 것과 같죠. 다양한 수준들이 있죠. 하지만 거기엔 또한 당신이 필요하다면 다른 수준들에서 온 다른 존재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중간의 수준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당신이 당신의 까르마를 해결하는 이 과정에서 물리적 수준 상에서 함께 상호작용해왔던 그 존재들의 얼마 정도는, 아마도 다른 수준에 있을 겁니다. 그들은 아마도 아직 물리적 수준에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당신은 다음번의 환생을 위해 그들이 결정하고 있었던 것을 보기 위해 그들과 상의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당신은 아마도 그 두 사람 모두의 까르마를 위해 최선의 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그리고 언제 어디서 환생할지에 대해 토론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까르마와 환생의 뒷면에 있는 목적들 가운데 하나죠. 당신은 이 목적을 위해 당신이 잠을 자는 동안에 이러한 중간적인 수준들에 갈 수 있어요. 당신이 환생의 중간 지대에 있을 때, 당신은 또한 보다 높은 수준들에 접근할 수도 있어요.
돌 :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진보된 영혼이 아닐지라도 이들 다른 수준들에 갈 수 있나요? 아니면 당신이 특정 수준들에만 가는 것만을 허용하는 장애물 같은 어떤 것이 있나요?
S : 당신은 당신의 이해가 허락하는 만큼까지 갑니다. 당신의 마음이 유일한 장애물이죠.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마음을 열고 이해할 수 있는지 그 정도에 따릅니다. 그리고 그곳엔 당신이 원하거나 필요로 한다면 당신의 마음을 훨씬 더 열어 주기 위해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돌 : 난 이러한 수준들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그것들을 분명한 물리적 경계로서 그리려고 노력중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마도 불가능할거라고 느껴지네요.
S : 그것은 분명한 물리적 경계들과 같지 않아요. 비유를 사용하자면, 땅위에 서 있는 당신의 수준은, 한 수준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행성 표면에서 곧게 위로 갈수록, 당신은 과학자들이 대기의 공기가 옅은 정도에 따라 성층권이니 뭐니하면서 다른 층들로 이름을 붙인 大氣들을 통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수준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죠. 그것은 단지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의 점진적인 變移죠. 당신이 땅에서 곧게 위로 올라갈수록, 당신은 대기의 다른 수준들은 보지 못하죠. 당신은 단지 더 멀리 올라갈수록 사물들이 점차로 변해서 다른 것이 되는 것을 알아채죠. 영적인 수준들도 이와 같아요.
돌 : 그곳에 얼마나 많은 수준들이 있는지 알고 있나요?
S : 아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것 같아요. 어떤 수준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다른 수준들은 단지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하죠.
돌 : 무엇이, 진보하고 있는 누군가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인가요?
S : 음,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당신이 얼마나 진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계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난 어떤 한계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의 지각은 오로지 계속해서 위로 확장되거든요. 하지만 나보다 더 진보한 사람들은, 더 멀리까지 지각할 수 있죠. 왜냐하면 그들은 보다 많이 진보했으니까요. 나의 현재의 수준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진보할수록
당신의 까르마는 긍정적이 됩니다.
돌 : 당신은 동일한 수준에 머물러서 판에 박힌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겠군요. 당신이 그 수준의 환생을 떠날 때, 당신은 당신이 떠났던 그 동일한 영적 수준으로 돌아오나요?
S : 아뇨. 많은 경우 그것은 당신이 환생했던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과, 당신이 그 일들을 다루었던 방식에 좌우됩니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환생했을 때, 당신이 명상이나 그런 류의 수행을 정기적으로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심지어 물리적 수준에 있는 동안에 조차 당신의 진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돌아오면, 당신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죠. 만약 일시적으로 어떤 특정한 수준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대개 그곳에 당신이 배울 필요가 있지만 그 교훈을 흡수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던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죠.
나는 이 존재에게서 물리적 인간 밑에 있던 지구의 수준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했다. 나는 내가 들은 가장 낮은 수준은 바위나 식물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들의 에너지였다고 말했다.
S : 당신은 요소들(element)을 말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 문제의 경우 이 宇宙와, 다른 우주의 몇 몇의 모든 수준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금은 이곳 우주에 대해서만 말할텐데, 우주 전체, 그것 전체는 다양한 강도와 당양한 수준의 에너지죠. 당신은 물리적 수준을, 딱딱하고 물리적이라고 지각합니다. 단지 당신 몸의 에너지가 그것과 그런 식으로 조화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도, 당신의 원자 과학자들이 알고 있듯이, 모두 에너지죠. 에너지들은 다양한 창조의 수준들로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즉 바위나, 나무와 같죠. 하지만 그런 것이 반드시 에너지의 보다 높거나 보다 낮은 수준(level or plane)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에너지나 영들의 다른 진동인거죠, 당신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요. 그것들은 그 내면에 power와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힘들이죠. 그것들은 단지 다른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있는 그 수준에서는, 그 에너지 법칙들이 당신들의 수준과는 어떤 식으로 다르게 적용되고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을 언급했었지요. 그것은 이런 다른 에너지 수준들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이 당신의 지구상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유죠. 왜냐하면 그 일들이 종종 이러한 다른 에너지 수준들에 있는 존재들에 의해 유발되기 때문이죠. 그들은 당신의 에너지 수준과 상호작용할 수 있죠. 이해가 되나요?
돌 : 난 그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려 애쓰는 중이에요.
S : 음.. 당신은 小人들에 관한 민간전승을 알고 있죠. 그 같은 것이 이러한 다른 에너지 수준을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있겠군요. 小人의 개념은 정말로 존재해요. 그것은 다른 에너지 수준의 존재들이죠. 그것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유형의 환생이죠. 예를 들어, 이런 다른 에너지가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당신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정신능력으로 상호작용하는 거죠. 그리고 또 다른 방식은, 당신이 날씨나 뭐 그런 것의 변화에 민감하도록 도움으로써 가능하죠. 또는 아마도 만약 당신이 “우연의 일치”라고 부를 일련의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런 다른 에너지 수준들에서 온 영향 때문일 겁니다. 이것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강력하게 바라면, 그 바람의 힘과 그에 관한 생각이 특정한 에너지 형태를 만들죠. 이 다른 에너지 상의 존재들은 이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묘한 방식으로 사물에 영향을 끼쳐서 이것이 이루어지도록 돕죠.
돌 : 카톨릭 교회에는 煉獄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그런 수준의 어떤 장소가 있나요?
S : 아뇨. 내가 볼 수 있는, 연옥이란 것과 같을 가능성이 있는 가장 가까운 것은 손상된 영혼들을 위한 휴식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이 처벌을 위한 장소는 아니니까, 카톨릭의 연옥과는 의미가 같진 않죠. 정말로 연옥이나 지옥과 같은 특정한 장소는 없어요. 그와 같은 경험은 지난 환생에서 일어났던 일의 결과로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거죠.
돌 : 안 그래도 지옥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근사체험을 했을 때 자신들에게 “나빠”보이는 장소들을 묘사했죠.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요?
S : 그들은 이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지옥에 가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그런 삶을 살았다고 믿은 결과입니다. 그들이 산 삶의 유형에 따라, 그들은 부정적인 에너지들을 끌여 들였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이 靈的인 쪽으로 넘어갈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들이 여전히 그들 주위에 뭉쳐져 있죠. 하지만 이제 그 근사체험자들은 이러한 영향들을 인식하고, 그들은 그것들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수준에 있으니까요. 이러한 것들이 그들을 완전히 둘러싸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실제로는 그것이 그들의 지난 환생에서 자신들에게 끌여들여졌던 부정적인 에너지들에 기인한 마음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대단히 불쾌한 어떤 장소에 있다고 생각하게 하죠.
돌 :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머물러야 하는 곳은 아니겠죠.
S : 그렇죠. 지옥의 상태는 모두 당신의 마음이 변이의 기간 동안에 어떤 상태인가의 문제죠. 천국과 지옥이란 개념은, 당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 하나의 우화나 전설이 되었죠. 이것을 믿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망할 당시에, 만들어 내는데 一助를 한 그 기본적인 현실(elemental reality)을 발견한 정도만큼 자신의 현실로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그것이 그들에겐 정말로 현실인거죠. 당신들의 聖經에 나오는 天國과 地獄에 대한 묘사는 근사체험을 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그들은 현실로 돌아와서 자신들이 본 것을 묘사하죠. 그래서 그들이 본 것은, 변이의 기간 동안에 그들 주변에 있던 영적 에너지들을 지각하는 방식이었던 거죠. 하지만 그들은 실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까지 저곳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거죠. 만약 그들이 좋고 대단히 유쾌한 어떤 것을 보고했다면, 그것은 천국으로 보고되었죠. 대단히 끔찍한 어떤 것을 보고한 사람들은 그것은 지옥으로 보고했죠.
돌 : 그들은 항상 불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죠.
S : 부정적인 에너지들은 당신이 불에 타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 그런 방식으로 그 마음을 고문할 수 있어요. 이것은 물리적 태움이 아니죠. 왜냐하면 죽어야 하는 몸은 뒤에 남겨지고 없으니까요.
돌 : 그렇다면 내가 이 일에 대한 글을 쓸 때 사람들이 이 일들을 이해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들은 오랫동안 그런 식이라고 교회로부터 배웠거든요.
S : 좋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발견한 이 일들을 쓰고, 그 정보를 서로 관련시키세요. 사람들이 근사체험을 다룬 책을 읽도록 북돋우고, 그래서 그들이 가진, 죽음은 두려운 것이라는 이러한 정신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세요. 죽음은 숨쉬는 것 이상으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돌 :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죽고, 그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근심했고, 그러면 지옥을 그들이 보게 된다. 그들은 나쁜 삶을 살았다고 판단하고, 그래서 이것이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그들이 어떤 나쁜 경험을 하게 한다는거죠?
S : 그렇죠. 왜냐하면 그런 태도들의 하나가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이도록 도우니까요.
돌 : 사람들이 실지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사람들에게 더 좋을 것 같군요. 비록 교회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겠지만요.
S : 그렇죠. 그것은 그들에게 권력의 문제죠. 宗敎는 정치적 또는 실력행사로 타락했죠. 그래서 영적인 것이 대중의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 대중을 순화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죠. 그들의 윤색에는, 매우 기본적인 의미에서 진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어떤 양상이 있긴 하죠.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은 물리적 수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총체적으로 오해되죠.
돌 :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만약 교회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지옥으로 갈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죠. 내가 보기엔 교회가 두려움에 대한 전체 태도를 만드는 것 같군요. 사람들이 일이 어떤지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들은 (죽음에 대한) 더 잘 준비가 될 것입니다.
S :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일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이해시키기란 어렵군요. 하지만 아마도 이 설명이 실제의 개념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실마리를 사람들에게 줄 것입니다.
돌 : 음.. 지구에 사는 우리는 聖經을 갖고 있고, 성경에는 많은 일들이 죄라고 적혀 있어요.
S : 당신이 들은 일 중 많은 것들은 - 예를 들어 당신이 카톨릭계가 발명해낸 “일곱 가지 重罪” 같은 것 -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 나중에 추가한 것이죠. 그것은 하나의 (대중)통제였죠.
돌 : 그렇다면 저쪽 편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 일곱 가지 죄)을 나쁘다고 여기지 않겠군요.
S : 그것들 중 몇몇은 나쁘죠. 하지만 각자가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영원히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처벌은 없어요. 자기 자신이 자기를 그런 식으로 처벌하지 않는 한은 그런 일은 없어요.
돌 : 사람들은, 모든 것이 黑과 白이며, 聖經대로 한다고 말합니다.
S : 하지만 聖經 자체가 수 세기를 거치면서,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변경되어 왔죠. 수 세기 동안, 그들이 사람들, 대중을 대상으로 통제했던거죠.
돌 : 하지만 그들은 聖經이 神의 말씀이라고 하죠.
S : 일은 그런 식으로 출발했죠. 그래서 상당량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경을 자신의 관점으로 왜곡할 수 있죠. 성경은 대단히 고귀한 책입니다. 그 의도는 결점이 없어요. 하지만 필사과정에서 얼마간의 오류가 있었죠. 부정확한 점들이 있죠. 하지만 그 의도는, 크리스트의 기간 동안에 그러했듯 오늘날도 진실합니다.
돌 : 이런 부정확성은 번역과정에서 왔군요!
S : 그렇게 많이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단지 인간의 시도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실수였어요. 하지만 성경과 마찬가지로 유효하고 깨달음을 가르치는, 또 다른 위대한 책이 있어요. 바가바드 기타, 꼬란 같은 것이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이 그것이죠.
3章. 자살
D : 자살은 어떤가요?
S : 그래요, 그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경우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가장 슬픈 사실들 중 하나니까요. 그 상황을 온전하게 묘사할 단어가 없을 정도에요. 자살은, 자신이 한 일의 引力을 실현하게 되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계약을 단순히 깨트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의 靈魂의 에너지가 완전한 不調和로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自殺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느냐에 따라, 때로는 병원에 가거나, 때로는 思索地域으로 갑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한 두 명의 個體들이 이 사람에게 배정되어서, 왜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지극히 잘못된 것인지를 설명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이쪽 편(靈界)에서 죄가 된다고 참으로 고려 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그 정도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명이 정말로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무엇을 성취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뒤범벅이 되어 버리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手中에 갖고 있는, 그 까르마[業]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生과 生의 중간지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관을 넓히는 것과 일들의 보다 큰 양상들을 보는 법을 배우죠. 그래서 그들은 그 일들을 포기하는 일이 없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요. 자살한 이들은 보통은 그 몸으로 재빨리 돌아가지 않아요. 대개 자살은 너무 많은 精神的 外傷(트라우마)을 가져오죠. 그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그토록 이른 시기에 그 (새로운) 몸 안으로 되돌아가기에 충분할 만큼 재빨리 자살을 저지르도록 한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어요. 그들은 그 존재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자신들을 그 시점으로 데려갔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자살자들이 그것을 직면할 준비가 되기까지는 보통 긴 시간이 걸립니다. 만약 그것이 극히 나쁘다면, 그들은 ‘휴식하는 장소’로 데려가져서, 왜 자신들이 삶의 이러한 단계, 즉 자살을 생각하는 지점에 도달했는지에 관한 트라우마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自殺은 그 영혼에 많은 나쁜 까르마[業]를 가져오는데, 그 惡業은 그 이후의 잇따른 생애에서 많은 善에 의해 제거되어야 합니다.
D : 만약 自殺이 누군가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라면, 그들이 돌아올 때 자신을 벌합니까?
S : 때때로 그들이 곧바로 들어가는 그 생애에서는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앞 生에서 가졌던 그 문제들에 관해 계속 일하게 될 어떤 생애로 항상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의 결과가 바로 다음생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란 뜻) 때때로 자신들이 그 문제들을 직면할 수 있다고 느끼는 지점까지 가는 데는 몇 生이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들은 결국엔 다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길은, 마지막 삶이 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의 정당한 몫을 가질 어떤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自殺은, 이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곤란을 견디고, 성장할 수 있고, 늙을 때까지 원숙하게 살고, 잘 균형 잡혀서 완벽한 삶을 삶으로써 빚을 갚아야 해요. 자살의 빚을 갚고, 까르마의 균형을 잡는 것을 돕는 데는 몇 번의 생이 걸리죠. 자신이 이 앞 生에서 포기했던 그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올바른 궤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살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 방법을 자살자가 배울 때까지, 동일한 상황, 그 문제들을 다시 직면해야 합니다.(* 전생에서 자살할 때와 유사한 환경을 겪으면서 또다시 자살 충동을 느낌. 이때 자살충동을 극복하면 전생에서 자살한 악업이 일정부분 해소되나 만약 같은 상황에서 또다시 자살을 하면 앞서의 악업이 소멸되지 않고, 그에 더하여 새로운 악업이 추가됨.) 그들은 결코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습니다. 자살을 하는 이는, 단지 進步를 뒤로 미루고 분열을 만들 뿐입니다.
돌 : 당신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란 점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자살의 문제에서 풀려나기 위해 얼마만한 시간이 걸리죠?
S : 그것은 개인의 상황 상황에 따라 다르죠. 각 영혼은 다른 영혼과 배우는 비율이 다르니까요. 그것은 어떤 다른 것보다, 영혼의 혼란과, 하잘 것 없다는 느낌과, 상실감에 달렸죠. 자살은 가볍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해결 될 수 있어요. 그것은 누군가가 당신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 것처럼, 해결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죠. 해결하기 불가능한 것은 없어요. 단지 어떤 한 문제가 다른 한 문제보다 해결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것뿐이죠. 그래요, 자기를 죽이는 것은 궁극적인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까르마를 균형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니까요. 자살하는 것,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까르마는 없습니다. 그것은 더 많은 까르마를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를 배신한 것으로 유명한 유다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하는데, 유다의 배신보다 더 나쁜 일은 유다가 자살한 사실이라고 한다.)
돌 : 어떤 이들은 어떤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저지르죠.
S : 어떤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범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다시 겪어야 할 그 문제를 더욱 증폭시킵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로부터도 탈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그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그들은 정말로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살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돌 : 자살이, 다른 사람의 삶과 관계가 있나요?
S : 그렇죠. 자살이 일어날 때, 많은 경우 그것은 그 가족의 다른 영혼이 그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는 하나의 기회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한 소년이 자살을 했다고 합시다. 그 경험으로부터, 그 어머니는 자신이 그 소년을 너무 억압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남을 보다 더 많이 이해하는 것을 배우죠. 그녀는 그것으로부터 배우죠, 비록 힘든 수업이긴 했겠지만.
돌 :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남겨진 그 가족이나 친구들에 관한 까르마는 아니겠군요!
S : (단호하게) 자살은 결코 까르마가 아니죠! 자살은 自由意志의 한 양상입니다.
돌 : 알겠어요. 그렇다면 자살은 결코 그 어느 것에도 좋은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군요.
S : 그렇죠. 승리자가 없죠.
돌 : 하지만 자살이 다른 누군가의 까르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일어나나요?
S : 아뇨. 왜냐하면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까르마를 짧게 자를 것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온당하지 않을테니까요.
돌 : 나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 다소간의 계약을 한다고 들었거든요. 따라서 자살은 그 계약을 어기고 있는 것, 자신들의 서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거죠.
S :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master들을 만나고 그래서 그들은 만약 자신들이 결정을 잘 할 경우 대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까르마를 이 생애에 해결할지를 어림합니다. 그것은 마치 교실 숙제와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죠. “음, 이것이 이번 생애에 성취하기 위해 내가 노력할 것이군.” 이제, 만약 그들이 그것을 모두 성취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그것들에 관해 서투르게 숙고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것에 종사하고 있었고 노력했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중도에서, 거의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들이 자살함으로써 생애를 짧게 잘라버린다면.. 음... 그것은 자신들이 해보겠다고 말했던 어떤 일, 자신들이 성취해 보겠다고 진지하게 약속했던 어떤 일을 성취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들여 해결해야 할 더 많은 까르마를 만든 것이 됩니다. 따라서 自殺은 어느 모로 보나 부정적인 경험입니다.
D :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점들과 까르마들을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군요. 그들이 이 문제를 성취하기 전에 그만두는 것은, 그 목적을 좌절시키겠군요.
S : 정확합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생애에 “X”만큼의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리고 이 “X” 만큼의 일이, 온전히 삶을 다 살기 전에 행해지거나 성취된다면, 그 뒤에 그들이 죽기를 바란다면,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물리적인 삶을 계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땐 적절한 채널을 통해 이탈이 마련될 수 있죠. 그것은 때 아닌 때에 그 몸을 버리는 것이죠. 또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면 자살은 결코 묵인 될 수 없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