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용암공소(폐쇄공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산면 사암리 983-1
용암공소 혹은 용바위공소는 1899년 설립되며,
미리내성당에서 1927년 양지성당으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1930년 관할구역의 변경으로 미리내성당으로 환원된다.
1899년 설립 당시와는 다르게 미리내본당은 성지로 선포되었고,
그 외에도 가까운 지역에 성당들이 몰려있을 정도로 발전되어,
용암공소(용바위공소)는 1987년 폐쇄하게 된다.
현재 가장 가까운 성당은 2.3킬로 거리에 있는 원삼성당이다.
예전부터 공소 자리였으며, 신자들이 도망쳐서 생계를 해결하려다 보니
가진 것은 없고 그저 땅 파서 흙을 개고 옹기로 구워 팔았던 곳이었음을
나타내는 듯, 공소 건물 주변에는 항아리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원래 공소가 교구에 기증된 땅이 아닌 개인 재산으로 무상 임대되었는데
공소 폐쇄 이후에 2013년 우씨 가문에서 타인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어
리모델링을 거쳐 개인 주택이 되었다.
▼ 현재의 모습(2022년)
▼ 과거의 모습(2010년)
42. 올해( 2021년)로 설립 13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도전리(원심이)공소
관할 본당: 북여주 성당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원심동1길 109 (도전리 421-4번지)
공소의 뿌리는 18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이는 정 안토니오로,
아내 임 카타리나가 병인박해로 순교하자,
원심이(도전리의 옛 이름)로 피신한다.
정 안토니오와 송선일이 원심이에 정착하고 불과 4-5년 후
충주 배일곡에 살던 남원 양씨 곡산공파 양재형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오며 교우촌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우도(Oudot, Paul, 오보록, 1865-1913)신부가
1890년 원심이에서 신자들과 생활하면서 경당을 짓고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힌 후
1891년 10월, 전라도로 이임했다는 기록이
뮈텔 주교(Mutel, 1854-1933)의 일기에 남아있다.
현 공소는 1957년 12월 9일 30여평 규모의
목조 기와 지붕 형식으로 건립되어 낙성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지붕 보수 공사 등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도전리 공소는 2021년에 설립 13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외침 2021년 2월호 71페이지)
1801년 신유박해 때, 한양 서소문 밖 이조 관리였던 정 도마는
동생과 아내, 두 아들 등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가
지금의 원주시 지정면 판대리인 구제에 정착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아들 형제가 헤어지고, 아내가 죽는 등 계속된 탄압에 작은 아들 안토니오만 데리고
원심이로 향한 정 도마는 한 바위 위에서 묵주신공을 바쳤고,
훗날 사람들은 그 바위를 묵주 줄을 굴렸던 ‘줄 바위’라 이름 붙였다.
세월이 흘러 안토니오는 다시 아들 셋을 뒀는데,
이들 삼형제 중 인품과 덕망을 갖췄다는 둘째 아들 재영(아우구스티노)이
‘도전 공소’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당시 안토니오와 아들 삼형제는 붙잡힐 것을 염려해
성을 정 도마의 외가 전주 이씨 성을 딴 이씨로 바꾸었다.
이 아우구스티노 회장은 두터운 신망으로 주위 사람들의 모범이 됐고.
마을 개간과 농사짓는 법을 보급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강천면은 ‘원심이’ 개발 공로를 인정,
산을 내주고 9일장을 치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울러 그는 임종시 허리에 33마디로 매듭지어진 새끼줄을 두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예수님의 생애를 상징한다고 일컬어진다.
그는 이 새끼줄이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굴렸던 것으로 보인다.
43. 가야리(오감)공소
관할본당: 북여주 성당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오감길 56 (가야리 167-1 번지)
여주 관내에 공소 신자 수가 100명 이상인 공소는
원심이공소(현 도전리공소)와 오감공소(현 가야리공소)였다.
1945년 해방 무렵 오감공소 신자 수는 30여 세대 120여명이였다.
현 공소는 1986년 신축되었다.
44. 장평공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장재로 14 (장평리 280-3번지)
45. 나래리공소
관할 본당: 장호원 성당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나래천로509번길 152-4 (나래리650번지)
공소를 마련하기 전에는 10여km 떨어진
감곡성당까지 걸어가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1950년대에 교우촌 형성
1960년도에 이르러, 새로운 공소 건물을 짓기로 결심해서 1975년 완공
현재 공소 건물은 1998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
1963년 교구 설정보다 앞서, 1960년 장호원본당 역시 설립되기 전인 1950년대,
청주교구 감곡본당의 관할 지역이었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나래리.
당시 나래리 지역 신자들이 주일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소속 본당인 감곡본당을 찾아가려면 1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가야만 했다.
길도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던 시절, 연로한 신자들이
1시간30여 분 거리를 걸어 다니기란 쉽지만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신자들은
당시 구역장의 집에 모여 공소 모임을 시작했다.
공소의 첫 발걸음을 뗀 것.
이때 감곡본당에 부임해 있던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들은
한 달에 한 번 꾸준히 이곳을 찾아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1960년도에 이르러, 새로운 공소 건물을 짓기로 결심한 신자들은
건축을 위한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신자들은 매년 쌀 한 말씩을 모았고,
가난한 살림에도 너나할 것 없이 동참했다.
더불어 지역 주민이 내어준 땅에 직접 블록을 찍고 쌓아가며,
1975년 완공에 이르기까지 힘을 모았다.
신자들의 땀방울이 모여 이룬 공소는
지역 신자들의 신앙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지역 토박이인 전임 공소회장은 “당시 어르신들의 손에 이끌려
신앙생활을 더욱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며 “아울러 신앙을 꽃피웠던 그 시절,
이곳 공소가 지역 신자들을 모이게 하는 신앙의 중심지가 돼줬다”고 전했다.
현재 공소 건물은 1998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
현재 공소는 공소 예절도 없어지고,
지역 반모임과 레지오 회합, 판공성사 등의 장소적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나,
지역 신자들은 공소를 중심으로 신앙이 다시 새롭게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신문]
46. 금호리공소
관할 본당: 장호원 성당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장여로189번길 28-12 (노탑리 345번지)
1977년 강당 완공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루었고
옹기를 구워서 생활하고,
옹기가마안에서 신앙생활을 몰래하기 하기도 했으며,
공소가 생기기 전까지는 약 3~4km 떨어진 감곡 성당으로 걸어서 미사참례를 했다 합니다.
감곡성당 가기전에 있는 청미천에 섭다리를 만들어서는
그리로 건너서 성당에 갔다고 합니다.(금호리교우의 말씀)
1977년 노탑2리에 '금호리 사랑의 집'을 공소 강당으로 건립.
현 공소는 1993년에 봉헌식을 하였다.(외침 2021. 4월호)
47. 방추리공소
관할 본당: 장호원 성당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설장로586번길 15 (방추리 32-1번지)
과거에 방앗간이였던 곳에 1978년에 공소 강당을 지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2009년에 재건축을 한 것이 지금의 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