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고향 -선비 칼을 차다. 남명 조식♣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싶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게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명종실록>1555년(명종10) 11월19일
남명조식(南冥曺植)(1501~1572)
지극한 충언이었다.
감히 임금을 고아로, 대비를 과부로 칭하는 간언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었다
50여년 간 무려 4차례 사화가 일었다
대비(문정왕후,1501~1565)가 수렴청정을 하던 그 시기
조선은 비명횡사하는 선비의 절규로 가득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이며 명종의 어머니
본관은 파평, 윤지임(尹之任)의 딸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윤씨가 호(岵,뒤에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자, 1517년(중중12) 왕비에 책봉되었다
인종(1544~1545)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1545~1547)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소윤)에게 권력을 주어,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대윤)일파를 제거한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10년전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그 입 다물라..." 대사하던 전인화씨가 문정왕후의
역할을 맡았다. "난정아~" 부르던 이덕화씨가 윤원형 역할을 맡았다
시대적 배경을 참고하시라고 알기 쉽게 드라마 이야기를 삽입한다 |
다행히 그때 그가 있었다
주저없이 말하고 행동으로 증명하는 옳곧은 선비가 있었다
나라를 위해 칼을 품고 세상을 위해 은둔한 사람
그는 바로 남명 조식(南冥曺植)이다
지리산(知異山) 천왕봉(天王峰)
높이1915 m, 백두대간의 끝자락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지리산
신년의 정월 사람들은 각자의 소원을 들고 지리산에 오른다
간절한 무엇을 구하는 마음으로...
이 곳에서 500년전에 그도 답을 얻고자 했다
조식은 평생을 지리산에 기대 살았다
조식이 종종 찾아 올라왔다는 백운계곡, 그 때와 다름없을 풍경으로 흐르고 있다
남명은 벼슬을 멀리하고 성리학을 곁에 두었다
지리산 자락에서 그는 늘 만족해 했다
어린시절 과거 공부를 한적도 있으나 곧 그만두었다
중요한 것은 관직이 아니었다
최석기 교수(경상대학교 한문학과)-
세상에 나가서 뜻을 펴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옛날 은나라 때 큰 정치가인 이윤(伊尹)처럼 자기시대를 태평성대로 만들어 보는데
그런 시대가 아니라면은 공자의 제자중에 가장 뛰어난 안회라는 사람처럼
차라리 초야에 물러나서 도덕과 학문을 드높게 부지하고 그걸 존속시키는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마침 26세때에 그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모시고 내려와, 장사를 치르고,
3년상을 치르고,30쯤 가까웠는데
그때부터는 서울에 가지않고 처가가 있는 김해에 은거를 합니다
※ 이윤(伊尹)-은(殷)나라 탕왕(湯王)에게 불려가서 재상이 되어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토벌함으로써 은(殷)이 천하를 평정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 안회(顔回,BC514~BC483)- 공자의 제자 가운데 안회는 덕의 실천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연구와 수덕에만 전념하여,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으며, 공자의 제자 가운데 겸허한 구도자의 상징이
되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사자성어를 만들 정도로 가난을 선비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신산서원(新山書院)-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737
남명의 후학들이 세운것으로 김해부 유일의 사액서원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뒤 30살 청년 남명은 이곳에 공부할 집을 지었다
십 수년간 수학하며 학문을 닦고 그러다 명성이 높아져 후진을 양성하게 된 장소다
산해정(山海亭)-그의 공부방 산해정, 높은산에 올라가 바다를 본다는 뜻이다
산해정이란 이름은 조식이 직접 부친 것이다
서원 곳곳에 남명의 숨결이 있다
조종명(70)-여기는 말하자면 교무실, 서원의 원장이나 관리하는 분들이 자는 방이고,
동재 서재는 학생들이 자고...
산해정에 은둔했지만, 그의 명성은 조선에 높아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30대의 남명에게 관직을 제수하기도 했다
학문을 위해 과거도 포기한 남명이 수락할 리가 없었다
최석기 교수-35세부터 45세까지 15년동안 초야에서 아주 푹 침잠해서
세상에 잘 나타나지도 않고, 그래서 결국은 남명학문의 기반은 거기에서
있었다고 생각하고..
※조식은 1537년(중종32) 세상의 도리가 어긋나고 시속이 흐려져 과거로 출세한다는
것은 곧 이에 가담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어머니께 예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 공부를 영영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고, 이 해 학문을 가르쳐주기를
청하는 정지린(鄭之麟)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훗날 북인(北人)이란 당파를
형성하는 첫 제자였다.
남명의 학문의 합천에 이르러 더 깊어진다
김해에 이어 다음 거처는 합천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마을은 40대 남명이 다시 정착한 그의 고향이다
※조식은 45세에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 하고, 48세 되던해 뇌룡정을 지어
학문에 몰두한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의 공부하는 연모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남명의 사상들이 확인되는 곳곳의 글귀들...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
시거이룡현(尸居而龍現)-가만이 있다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난다 뜻으로
장자에 나오는 글이다
뇌룡정(雷龍亭)-연못처럼 잠잠하다 뇌성벽력같이 하고
가만히 있다 용처럼 승천한다는 시거이용현과 상통하는 말이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린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있기도 하다
남명 조식
평생을 은둔했던 선비라면 그의 이름이 이 시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40~50대를 뇌룡정에서 보내는 남명에게
조정은 포기하지 않고 관직을 제수했다
퇴계도 남명이 벼슬에 나올 것을 권유했다
남명은 고사를 계속하다 그의 나이 55세 산청의 현감직을 받아들인다
단성현(丹城縣)의 현감(縣監)에 제수된 뒤 남명이 한일은 명종에게 사직소를 쓰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사직소, 즉 단성소(丹城疏)다
남명은 명종을 고아로 문정왕후를 과부로 칭했다. 상당히 과격한 발언이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더 강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병주교수(건국대사학과)-
대표적으로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도 조광조의 죽음 소식을 듣고 상당히
충격을 받는 그런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여러가지 정치현실을 직접 접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이런점들을
항상 의식하고, 지방에 낙향을 했을 때도 그런 중앙의 정치현실을 바로잡아야 된다
그리고 오히려 '處士(처사,은둔한 선비)의 위치에 있으면 보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위치에서 중앙정치의 문제점을 지적을 할 수 있는 점이죠
단성소는 과연 어떤 내용일까? 경상대학교의 남명학 연구소를 찾았다
최석기교수-"선생 55세때 단성 현감에 제수되셨는데 나가지 않으시고 상소를 올려서
사직을 하셨다. 상소의 대략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문정왕후 께서는 생각이 깊은 분이시기는 하지만,
깊은 궁궐에 사시는 한 과부에 불과하시고
전하께서는 아직연세가 젊으시니
선왕이 남기신 한 명의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입니다.
백성들의 민심은 억 만 갈래로 갈라져 있으니
어떻게 이런 시국을 감당하시겠으며...
최석기교수- 이분이 현실 정치권에 나가서 뜻을 펴기 보다는 크게 은거를 해서
자기 학문고 자기 도덕을 완성시켜보고자 했기 때문에, 지리산 밑에 들어가서
은거하기를 젊어서부터 희망하셨던 것 같은데...
남명은 지리산을 찾는다
명종은 분노했으나 재야언론의 영수인 남명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남명의 언행으로 보자면 그의 상소는 과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浴川(욕천) 냇물에 목욕하고서-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사십년 동안 더렵혀진 온몸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되는 맑은 연못에 다 씻어버렸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만약 티끌이 내 오장육부 속에서 생겨난다면
※(亻尙)빼어날당, 배회할 상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지금 당장 내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내겠다
※(考刂))가를고
-'浴川(욕천)詩碑(시비)'중에서
그래서 깨어있어야 했다
남명은 옷고름에 방울을 매달아 그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깨우쳤다
성성자(猩猩子)
방울의 이름은 성성자, 깨닳을 성자가 2개다. 스스로 경계하여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또한 칼도 지니고 다녔다. 경의검(敬義劍)이었다
내명자경(內明者敬) - 안으로 마음을 밝게하고
외단자의(外斷者義) - 밖으로 의로써 실천한다
신병주 교수-남명사상의 특징은 경(敬)과 함께 의(義)를 항상 추구하는 거죠
'경(敬)','의(義)'가 따로 때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남명의 사상을 '경의(敬義)' 라고 하고, 그 상징물로 남명이 '경(敬)'사상,
항상 마음을,자세를 바르게 해야 되겠다는 의미에서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셨고
또, 이 '경의검'이란 칼은 초점이 '의(義)'에 맞춰 있는 거죠
'경(敬)'의 수양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문제라든가 대외적인 위기 이런 것들이 온다면
과감하게 실천하는 그런 요소로...
칼과 방울을 지닌 선비 남명 그의 행보는 산청으로 이어진다
산천재(山川齋)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466
60의 나이의 남명은 지리산에 자신을 의탁한다
※조식은 61살 되던 1561년(명종16)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이주했다
산천이란<주역(周易)>대축괘(大畜掛)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밖으로 빛을 드러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남명에겐 평생 스승이 없었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스승이 있다면 바로 지리산이었다
조종명(남명조식14대손)-방에 앉아 계실 때에도 방의 쪽문을 열고 천왕봉을 바라보고
마루에 앉아 계실 때에도 천왕봉을 바라보고, 늘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수양하고, 스스로 천왕봉의 기강에 닮아가려 하는 그런 노력을 하셨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리산은 남명에게 무엇이엇을까?
남명은 지리산에 대한 수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시를 살펴보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이면 족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德山卜居(덕산복거) - 덕산에 살곳을 정하고
春山低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만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하늘나라 가까운 천왕봉만 사랑하노라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돌아와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 십리나 되어 마셔도 남도다
-'德山卜居(덕산복거)'중에서
그런 그가 지리산이 바로 보이는 집을 얻었으니 세상을 얻은 것과 진배 없었을 것이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 타던 말 한필을 팔아 장례를 치른 남명이었다
그의 학문은 이론에 깊어지는 것 뿐 아닌 스스로의 삶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남명의 강직한 면모는 지금도 늘 회자되곤 한다
남명은 책만 파는 선비도 아니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선비들도 병법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실천했다
후학들에게 전술을 전수함은 물론이었다
조종명(70)-"여기가 바로 남쪽 바닷가이기 때문에 왜구들이 노략질하는 실상을
바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남명이 머물던 산해정을 넘어 바닷가가 빤히 내려다 보인다
왜구에 습격이 잦았던 경상도 해안 남명은 왜적을 경계 할 것을 선비들에게 주문했다
그의 실천학문은 조선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진가가 드러났다
경상도에 50명 의병장이 남명의 제자였던 것이다
불꽃같이 일어났던 의병장들 그중엔 남명의 외손녀 사위 곽재우도 있었다
사욕을 품은 붕당이 대배하지 못한 전쟁을 불러왔을 때,
나라를 구해야 할 수령들이 다만 도망가기 급급했을 때,
300만명이 목숨을 잃게 될 임진왜란에서 칼과 화살을 들고 전장에 나선 사람은
남명의 제자들이었다
곽재우를 따른 의병만 2000명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발발하고 체 10일 되기전에 주저하지 않고 봉기해 나아갔다
남명의 선비들은 준비된 병력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신병주교수-남명의 후학들은 남명이 강조했던 의(義)사상을 이어받았다 라고
판단이 되는 것이, 임진왜란 시기에 물론 왜적이 주요 침입로가 경상도였지만,
그렇다고 꼭 의병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남명사상의 영향이 상당히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 경상도에서 거의 모든 남명 문하의 인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건 상당히 놀랄만한 지표입니다
남명문하의 의병장<역사스페셜 자료>
의령 곽재우 (郭再祐)-남면의 제자이자 외손서인 홍의장군 곽재우
성주 이준민(李俊民) 조식은 그의 외숙이다
고령 김면(金沔) 임진왜란 3대의병장
현풍 박성(朴晟) 진도전통인물 칠전리태생
초계 전치원(全致遠),곽준(郭遵)-김면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움
합천 정인홍(鄭仁弘),박이장, 하혼(河渾)
삼가 노흠(盧欽) 이흘(李屹)-경주이씨
거창 문위
안음 조종도(趙宗道)
함양 박여량(朴汝樑)
산음 오장
단성 이유성,김경근
진주 이정(李瀞),이로(李魯)
그의 제자들로 형성된 북인은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처사 조식은 1602년(선조36)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광해군과 전란 극복에 힘쓰던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주요인사들이 사형되면서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충익사(忠翊祠) 홍의문-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왜군과의 접전이 벌어졌던 의령, 그 곳에 후손들은 충익사를 세워
곽재우와 휘하장군18명을 기리고 있다
남명의 실천주의는 조선을 지켰다
역사의 한 축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최석기교수-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서 계속 전승되어 내려온것이 어느시대나
지식이 이론화 되고 공서화 되고 공론화되고 이럴 때, 진짜 학자 진짜 몸으로
보여주면서 옳바른 행동을 하는 양심 있는 실천하는 학자, 그런 사람들을 늘
필요로 하죠 어느시대든 그런 사람들에게 남명은 계속 살아 있습니다.
남명묘소-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임진왜란은 남명 사후 20년 뒤에야 일어난 전쟁이다
스승이 세상을 뜬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제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일순간 봉기했다
1572년(선조)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뒤 그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지었고
남명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칼찬 선비 남명의 문과 무는 선비가 갖추어야 할 균형이었다
옳곧은 것은 살아남아 역사에 깊이 박힌다. 칼 찬 선비 남명의 실천 학문이 그러하다
김해의 신산서원에 남명선생의 후학들이 모인다
선대이기도 하지만 스승으로서 잊지말아야 할 정신을 이어가고 싶어서다
칼찬 선비 조식에 대한 존경심은 여느학자에 대한 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 바쁜 요즘시대에도 한달에 두번씩 꼬박꼬박 모이고 있다
남명의 역할은 또 있었다
그의 후학들은 남명학파가 되어 선조말부터 조정에 대세를 정했다
광해군에 이르러서는 조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남명학파의 탄생이었다
산청 경상도의 소박한 도시, 남명이 말년에 의거했던 곳
평범해 보이는 오늘에 오래 된 결의가 있다
시간은 지나고 세월이 바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놓치고 말지만
우리 곳곳 그들의 숨결이 있다
광해군 때 사액해 덕천서원(德川書院)이라 불리는 이 곳
남명이 세상을 떠나고 4년 뒤 제자와 후학들이 덕천서원을 세웠다
스승이 없는데도 한 곳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며 공부했다
덕천서원(德川書院)-남명 조식의 학덕들 추모하시 위해 사림들이 건립한 서원
경의당(敬義堂)
남명의 제를 올림은 물론이었다
덕천서원은 옥산서원, 도산서원과 더불어 삼산이라 불리는 조선의 손꼽히는 서원이었다
숭덕사(崇德祠)
지리산의 기운만을 닮고 싶었을 뿐 소유도 분냄도 원치않았던 남명조식
그가 생전에 바랐던 것처럼 그의 후학들도 성리학을 깨우치고 병법을 익혔다
남명선생의 학문사상을 계승하기 위한 덕천서원은 강학공간으로 이용됐던 경의당과
남명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가 있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남명의 정신이 지금 껏 살아있는 이유는
분명 공감의 깊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칼찬 선비 남명조식
남명기념관-경상남도 산천군 시천면
7년전 남명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남명기념관이 설립됐다
전승하고자 노력하는남명의 사상은 경(敬)과 의(義)다
남명이 자기 마음의 사욕을 베기위해 경의검을 차고 다녔듯
안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의를 실천하기 위해 남명은 일생을 바첬다
<신명사도(神明舍圖)>
사진 남명학고문헌시스템 http://nmh.gsnu.ac.kr/index.jsp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신명사도는(神明舍圖)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 한 것. 성곽의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여 신체의 내외부로 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을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적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알 수있다
성은 '얼굴'을 상징.성중앙 궁전에 있는 태일군은 '참 나'를 상징.
양쪽에 있는 성문은 '귀'를 상징. 일월은 '눈'을 상징. 아래쪽 성문은'입'을 상징.
중앙에 있는 '경'은 깨어 있는 의식을 상징. 항상 깨어 있어서
눈,귀, 입을 잘 지켜 깨어있는 의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 |
그리고 정신이 흩어지지 않게 하하고, 사심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게 하라고
안과 밖이 언제나 다르지 안하게 하라고 후학을 양성했다
성성자(猩猩子)
방울을 차고 다니며 그 소리가 들을 때 마다 마음을 다스린 남명
칼과 방울은 남며의 부단한 노력을 보여주는 겸손한 상징이다
신병주교수-"한 선비의 실천적인 성리학 사상이 후대에까지도 정말 잘 이어졌다"
라는 것.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주목할 점 입니다
햇볕이 따듯하게 내리쬐는 겨울오후, 작은 시골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권영달 할아버지를 만났다
오늘은 남명선생에 대한 애기를 하려고 합니다
500년전의 이야기,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남명의 처음듣는 시간을 오늘 아이들도 갖게 되었다
오래 전의 일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이야기
옛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그의 이야기가 내게 왜 필요한가?
그의 생각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그것은 지금의 나를 알 수 있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임금에게 거침없는 충언을 드렸던 남명은 명종과 선조 두임금의 존경을 받았다
그것은 그의 인생이 오로지 의로움만을 지키고자 애를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평생 소망했던 자신의 모습은 처사였다
처사를 감당키고 힘들다는 남명,그는 지리산같은 사람이었다
|
첫댓글 남명조식은 두 임금으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것은 그의 인생이 오로지 의로움만을 지키고자 애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 같은 사람 얘기 감사합니다.
샘께서도 역사에 해박하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