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통(交通)의 [ 역사(歷史) ]
목차
요약
교통은 인간의 이동 및 화물의 수송, 전달과 관련된 모든 행위와 조직체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교통로의 등장은 인류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한다. 주로 육상교통에서 시작하여 하천을 포함한 해상교통, 나아가 항공교통으로 그 영역을 넓혀 왔다. 교통수단 또한 직접 보행에서 비행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해 왔다. 교통영역의 확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교통망도 체계적으로 형성되는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정치 중심지를 중심으로 교통로가 발달해 왔다. 오늘날에는 자동차 및 철도교통이 육상교통을 담당하고 해상교통은 해외와의 교통을 맡고 있다.
정의
인간 및 화물의 수송, 전달과 관련된 모든 행위와 조직체계를 가리키는 일반용어.
개설
국토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인체에 크고 작은 가닥으로 뻗어나간 혈관을 교통로라 할 수 있다. 인체에서 혈관을 통한 혈액의 순환이 한 순간도 멈춰서는 안 되듯이, 국가에 있어서도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 요소들이 이 교통로를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개념
교통이라는 말은 흔히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넓은 의미로는 경제적 방법에 의한 재화의 이동관계의 전부와 인간 상호간의 일체의 동적 관계, 즉 인간 사회생활의 전부를 교통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좁은 의미로는 사람 · 재물 · 의사(意思)의 장소적 이동, 즉 흔히는 운송 및 통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통로에는 도로 및 철도를 포함한 육상교통로뿐만 아니라 선박에 의한 해상교통로, 그리고 항공로 등을 포괄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통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방사선식(放射線式)으로 뻗어나가게 마련이고, 전체적인 교통로는 몇 개의 간선과 간선에서 파생된 수많은 지선들로 이어진다. 또, 이들 간선과 지선, 지선과 지선들은 환상선식(環狀線式)으로 연결되어 전국의 교통망은 마치 거미줄 같은 모양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간선과 지선들은 제각기 고립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순간도 쉬임 없이 움직이고 있고, 육상과 해상, 그리고 항공교통도 삼위일체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 지구상에 교통로가 생겨난 것은 인류의 출현과 때를 같이한다. 특히, 인류가 정착생활을 영위하면서는 자기가 근거하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교통로는 확장, 개척되었을 것이고, 가까운 거리에서 점차 먼 거리에로 확대되어갔을 것이다. 비교적 작은 사회단위가 일정한 지역을 근거로 했을 때의 교통로는 그 근거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으로 뻗쳐나갔을 것이나 비교적 그 파생은 단순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단위가 커지면서는 다시 그 사회단위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확대된 주변지역으로 교통로가 재편성되게 마련이므로 전보다 한층 복잡한 교통로를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형성된 교통로는 사람의 내왕이건 물자의 교역이건간에, 그 교통이 잦아짐에 따라 간선과 지선으로 재편성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지형과 교통로
우리나라 교통의 발달은 정치 중심지를 핵으로 하여 사방으로 확산되어 나갔음은 여느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형과 지세의 복잡성은 교통로 발달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교통로의 미발달은 지역간 문화적 차이는 물론, 생활권 · 언어권 등의 폐쇄성을 낳아 오랜 동안 전통적 유습을 지속시킨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다. 그리고 3면이 바다로 둘려 있는 데다가 산지가 많다. 그것도 한반도의 남북을 달리는 높은 산맥으로부터 중국 방향으로 뻗어나간 산계(山系)가 많고, 그 사이를 흐르는 큰 강들이 놓여 있어서 남북을 종단(縱斷)하는 교통로는 제대로 발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 방향으로 뻗어나간 산계와 그 사이에 놓이는 수계는 하나의 문화권적 구분선과 같은 기능을 갖기도 하였다. 가령, 대동강을 따라 발달했던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사회, 한강에 연해서 발달한 백제사회, 금강을 연해서 발달한 백제사회 등을 이러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백제문화권이니 가야문화권이니 하는 문화권 설정은 오히려 산계와 수계를 좇아서 구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또, 산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완만하게 둔화됨으로써 언덕이 많은 반면, 평야지대는 그리 넓지 못하다. 때문에, 대륙에서와 같이 곧은 길이 적은 반면 산길과 하천을 따라 생긴 굽은 길이 많게 마련이다. 또한, 산길은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빠져나가는 꼬부랑길이며, 하천을 따라서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계절에는 내왕이 끊기는 등 장애를 받아왔다.
교통의 형태와 범위는 각 지역의 자연조건의 기준에 따라 지배되는 수가 많다. 근세에 철도를 건설하기 이전의 한국의 교통상태는 한마디로 반수반륙적(半水半陸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교통영역은 한반도를 둘러싼 서남해의 해상교통과 내륙 깊숙한 곳으로부터 서남해로 흘러들어가는 수계를 이용한 수운교통의 한 유형과, 다른 하나는 내륙 산간지역이 육로를 이용하게 되는 육운교통지역으로 나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로 평양 · 개성 · 한양 · 공주 · 부여 등 정치중심지가 한반도의 서쪽 방면에 놓이고, 또 이들이 대동강 · 예성강과 임진강 · 한강 · 금강 등의 중하류에 위치함으로써 화물수송에 있어서는 수운과 조운을 함께 이용한 경우가 단연 우세하였다. 근래에는 육운에 있어서 철도 및 자동차가 교통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자동차 교통이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자동차 및 철도교통이 육운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내륙수로를 이용한 수운교통은 점차 퇴조를 가져오게 되었고, 동시에 연해안의 해로를 이용한 조운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해운은 국내교통의 구실보다는 해외와의 교통기관 구실로서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상고시대의 교통주요 교통로의 골격형성
우리나라의 원시사회 및 상고대의 교통로가 어떠했는지는 문헌상 자세히 살펴지지 않는다. 다만, 원시사회에 보다 선진적이었던 족단(族團)들이 중국대륙과 몽고 · 만주방면으로부터 유입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들 족단의 유입 이전에도 교통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한국사의 여명기에 우리 민족이 이동해 온 경로를 크게 세 갈래로 파악하고 있다. 첫째 북방에서 발해만을 끼고 한반도의 서해안지대로 들어온 경로, 둘째 요하 상류지방에서 송화강유역 · 압록강유역에 진출하여, 거기에서 척량산맥을 넘어 반도의 동해안으로 들어온 경로, 셋째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서해안지대로 들어온 경로 등이다. 이러한 민족 이동로의 추정은 고고학적 연구성과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의 분석에 근거하는 것이다. 한국사의 시원에 있어서 우리는 고조선을 거론하게 되고, 또 고조선은 흔히 3단계 발전을 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사회발전에 관한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이들 족단들은 대개 중국대륙 방면에서 요동∼평양성 쪽으로 이동해 오고 있음을 본다. 이들 족단의 이동은 핵심족단(核心族團)의 이동이기는 하지만, 교통로를 따라 선진문화를 동반하였기 때문에 그 교통로는 선진문화 유입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이동해 오는 과정에서 그 족단들이 분해되기도 하며, 때로는 이미 자리잡고 있던 족단들과 융화, 결합되기도 하고, 또 그들을 쫓아내기도 했을 것이다.
한 예로 환웅(桓雄族)족의 이동과정에서 한 갈래는 만주 내륙지방으로, 한 갈래는 평양 방면으로, 또 다른 한 갈래는 한반도의 남쪽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족단의 이동과 정착은 만주와 대륙, 한반도와 만주, 한반도와 대륙 등에 교통망을 구성해 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내왕이 빈번한 교통로는 간선으로, 그리고 그 간선에서 수많은 지선이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기전 2세기를 전후해서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크고 작은 읍락국가(邑落國家)들이 난립하여 대략 78개 국 정도가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이들 자체 지역구조 내에서의 교통로와 다른 이웃나라와의 연결로는 한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교통망의 골격을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역구조는 핵심과 주변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읍락국가들은 각기 그 핵심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주변지역으로 교통로가 뻗어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읍락국가와 읍락국가 간의 주요 교통로가 간선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들 교통로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문헌상 자세히 살펴지지는 않지만, 정치적 · 군사적 · 상업적인 면에서 매우 치졸했을 것은 물론, 교통로의 규모도 매우 유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의 형성과 교통로
건국설화를 통해서 살펴보면, 사로국(斯盧國)은 골짜기 사이에 흩어져 있던 6촌(村)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집단이라 할 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읍락국가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때 사로국의 핵심이 경주에 두어지게 됨으로써 6촌은 그 주변지역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6촌장들에 의해 추대된 수장(首長)인 박혁거세가 6촌을 순회하면서 민정(民情)을 살피는 한편 농잠(農蠶)을 장려했다는 기사는, 핵심인 경주로부터 6촌에 연결된 교통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에 도읍을 정하면서는 점차 5부족의 근거지역들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어 갔다. 이는 핵심으로부터 주변지역인 각 부에 주요 교통로로 연결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크고 작은 읍락국가 자체 내부의 교통로 연결은 물론, 읍락국가간의 연결로들이 당시의 간선이 되었을 것이다. 가령, 고구려의 주몽(朱蒙)이 북부여로부터 남하해 온 교통로라든가 백제의 온조(溫祚) · 비류(沸流) 집단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까지 남하해 온 교통로는 읍락국가간의 주요 간선도로였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 뒤 읍락국가 가운데 우세집단이 대두되면서 점차 고대국가 형성의 기운이 싹트게 된다. 우세집단들은 북방계통에서 고구려가, 남방계통에서 신라가, 그리고 백제는 북방으로부터의 유이민집단인바, 한강 유역에 근거하면서 새 세력으로 대두된다. 이들 세력은 사방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감에 따라 핵심지를 중심으로 교통로를 재편성하게 됨으로써 이전 시기보다 훨씬 정비된 교통로의 조직과 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과정에서 군사요새지에의 축성이라든지 지방행정구역의 설정, 교통장애의 제거, 교량 부설, 산령(山嶺) 개척 등이 이루어짐으로써 교통로를 따라 전국을 법제적으로 파악하려는 교통정책으로 발전했다고 하겠다. 가령, 2세기 중엽 신라는 계립령(鷄立嶺:지금의 聞慶의 鳥嶺)과 장령진(長嶺鎭:지금의 江陵 부근으로 추정), 죽령(竹嶺)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험준한 교통로의 개척은 당시 신라의 국력이 소백산맥을 넘어 동북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에 따라 지역간 교통장애를 개척하여 주요 교통로의 연결을 나타내 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다만, 개척된 이들 교통로는 사람 내왕의 편익이라든지 상품 · 화물의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국가 유사시에 신속한 군량 수송, 또는 공납하는 여러 물건을 중앙정부에 수송하려는 목적이 더 큰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삼국은 국내성과 위례성, 경주를 핵으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는 가운데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이 편입된 지역에 중앙의 정령(政令)이 미치게 하는 행정 수행의 기능을 가지는 교통로가 정비되어 갔을 것이고, 군사적으로는 각기 전국 주요 요새지에 성책을 설치하여 외적의 방비를 기하기 위한 군사로가 개설됨으로써 삼국은 저마다의 교통망을 형성했을 것은 물론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아직 행정과 군사가 미분화된 상태였음을 알게 되거니와 전국 각 부의 중심 성과 도성(都城), 중심 성과 중심 성 등이 주요 간선이 되었을 것이고, 지방 각 성을 잇는 연결로는 지선이 되었을 것이다. 백제의 경우 전국 조직은 5부5방으로 대표되는데, 도성의 행정구역을 5부로, 전국을 5방으로 편성하였다. 특히, 전국 5방의 중심은 성(城)으로서 방령(方領)이 지방장관이었다. 그리고 예하의 지방조직도 모두 크고 작은 성[郡]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도성과 방으로의 연결로와 방과 방과의 연결로는 간선을 이루었을 것이고 방과 군, 군과 군의 연결로는 지선을 이루었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도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군사요새지에 주(州)를 설치하였고, 전국 주요 지점에는 군사주둔지인 정(停)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도성과 이들과의 연결로, 그리고 이들 상호간의 연결로 등이 간선과 지선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삼국의 교통망은 각기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간선이 뻗어 있고, 간선에서 지선, 지선과 지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교통로의 구성과 운영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지만, 이른바 삼국의 역참제(驛站制)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역참제의 채용은 삼국의 정치적 · 군사적 요청에 따라 발달한 교통로가 법제적으로 체계화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통로의 국가관리
삼국의 역참제는 5세기 후반에 비로소 설치, 실시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실시되어 진한시대(秦漢時代)에 크게 발전했다는 것인데, 삼국에서의 채용이 늦은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업무가 분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라든지, 말[馬]의 사양(飼養)의 보급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상으로는 신라 소지왕 9년(487)에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왕은 관사(官司)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사만을 가지고서는 5세기 후반 신라의 교통로 구성이라든지 운영을 분명히 알 수는 없다. 다만, ① 서울을 중심으로 우역을 사방에 설치했다는 점, ② 우역을 관할하는 관사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 ③ 관도라고 하는 교통로가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 ④ 왕명에 의해 교통로 수리를 하고 있다는 점 등을 살피게 할 뿐이다. 우역이란 교통 · 통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신라의 정치적 힘이 팽대하여 사방으로 정령을 전해야 할 필요성에서 설치된 기구이므로 신라의 발전에 따른 교통 · 통신시설의 정비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통 · 통신의 관할부서가 생겨나고 있고, 업무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관도를 수리하고 있다. 관도란 비관도(非官道)에 대칭되는 말로서 간선도로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관도가 사방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미루어 생각하건대 신라의 간선 교통로는 경주를 중심으로 동북방면으로는 동해안을 끼고 삼척 · 명주 · 양양 · 간성 · 고성 · 천정군(泉井郡:德源) · 마운령과 황초령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상주 · 조령 · 중원경(中原京:忠州) · 북원경(北原京:原州) · 춘천으로, 또한 서북으로는 영천 · 안동 · 영주 · 죽령 · 충주로, 또 대구 · 김천 · 추풍령 · 옥천 · 청주 또는 공주로, 상주 · 조령 · 충주 · 광주(廣州) · 패강진(浿江鎭:鳳山)으로, 서쪽으로는 경주 · 양산 · 김해 · 진주방면으로, 그리고 경주 · 창녕 등이 간선도로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6세기 중반인 진흥왕 때에 세운 진흥왕순수척경비(眞興王巡狩拓境碑)의 소재지와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문무왕 8년(668)에 왕이 고구려 원정을 돕기 위해 출정했다가 환국하는 길에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했다는 기사인데, 이는 신라의 서북방면에 설치된 우역의 실제를 확인시켜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에 설치하였다는 사실과 그 이용을 알게 해주는 증거이다. 그 밖에도 주요 교통로의 이용을 입증해 주는 증거물로서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라든지, 이보다 앞서서 세워진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역참제의 채택은 신라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에 관한 기록으로는 “국내성은 평양으로부터 17역(驛)을 거쳐서 이른다.”고 하였고, 발해에 관한 기록으로는 “남해(南海) · 압록(鴨綠) · 부여 · 책성(柵城)의 4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땅인데, 신라 천정군으로부터 책성부에 이르기까지에는 무릇 39역이다.”라고 하여 평양∼국내성, 천정군∼책성부까지에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미루어 생각하건대, 고구려가 국내성에 근거하고 있을 때의 대체적인 간선로의 구성은 북으로 부여성방면, 동으로 읍루방면, 서쪽으로 요하방면, 그리고 압록강 연안을 따라 그 하구에 이어지는 선, 낭림산맥을 넘어 황초령을 통과하여 동해안에 이르고, 이어 동해안을 따라 실직(悉直:三陟)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청천강 상류 연안을 좇아 내려오다가 묘향산맥을 넘어 맹산 · 양덕 · 곡산 · 춘천 · 원주 · 죽령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청천강 연안을 따라 하구까지 내려오다가 안주 · 평양 · 봉산 · 절령 · 예성강 · 임진강 · 한강 · 광주 · 충주 · 조령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였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 뒤 장수왕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김에 따라 간선도로의 재편성은 불가피하였을 것이지만, 그 노선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의 경우는 수도의 잦은 이동에 따라 도로교통의 재편성이 불가피했겠지만, 간선도로의 구성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한성시대(漢城時代:기원전 18∼475)에는 오늘날 서울 · 철원 · 회양으로 통하는 간선, 서울 · 적성(積城) · 삭녕(朔寧) · 곡산방면, 고양 · 파주 · 장단 · 평산 · 서흥 · 봉산 · 절령 · 대동강방면, 그리고 동으로 양근(楊根) · 여주 · 홍천 · 횡성 · 원주방면, 광주 · 이천 · 여주 · 충주 · 조령, 용인 · 죽산 · 괴산 · 조령, 수원 · 천안 · 차령 · 공주방면 등이었을 것이다. 그 뒤 공주시대(475∼538)와 부여시대(538∼660)에는 호남지역으로 전주 · 광주 · 나주, 그리고 영남지역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간선으로서 재편성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삼국의 간선도로들은 정치적 · 군사적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상업적 의미를 가지는 것도 물론이다.
통일신라의 도로교통망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로는 영역의 확대 및 왕권의 전제화(專制化)와 함께 전국 관할이 보다 제도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신라의 영역은 과거 고구려 옛땅의 일부와 백제의 옛땅을 합치게 됨으로써, 행정구역의 새 편성은 물론이지만, 교통로의 재편이라는 교통정책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흔히 신라의 행정구획을 9주5소경으로 표현하지만, 영토확장에 따른 군영(軍營)의 증설도 있게 되었고, 변경 연안지역에는 군진(軍鎭) 주둔의 군사지역도 설치하였다. 이 같은 요인의 생성으로 말미암아 교통로 및 교통정책은 불가피하게 재편성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5세기 말에 채용된 역참제는 통일신라에 이어져 제도적 개편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통일을 전후하여 육상교통을 전담하는 부서인 승부(乘府)의 설치를 보게 되는데(진평왕 6년, 584), 이는 진흥왕 때의 영토확장에 연유하는 제도정비의 한 예라 할 것이다. 통일 후에는 승부의 차관격(次官格)인 경(卿)을 2인에서 3인으로 늘렸다든지, 실무관리자라 할 수 있는 대사(大舍)를 2인, 사지(舍知)를 1인, 사(史) 9인을 두었다가 사 3인을 늘렸다든지, 또 장관격인 영(令)을 늘린다든지, 우역사무를 전담하는 기관을 설치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들은 확대된 영토에 대한 효율적인 교통정책을 펴나가기 위한 목적하에 교통로의 관리 · 운영 · 조직 등을 한층 중시하여 재정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9주5소경이라는 행정구역의 정비와 군영의 재정비, 그리고 군진의 설치 등으로 이들의 연결로들이 매우 주요한 교통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재편성된 교통로는 대개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① 동북쪽:동해안을 따라 삼척 · 강릉 · 천정(泉井:元山), ② 서북쪽:경주 · 청송(靑松:伊火兮停) · 충주(忠州:中原京) · 원주(原州:北原京) · 홍천(洪川:伐力川停) · 춘천(春川:朔州) · 패강진, ③ 서북쪽:경주 · 대구(大丘:參良火停) · 상주(尙州:音里火停) · 충주 · 여주(驪州:骨乃斤停) · 이천(利川:南川停) · 광주(廣州:漢山) · 패강진, 혹은 대구 · 청주(淸州:西原京) · 당성진(唐城鎭), ④ 서북쪽:경주 · 대구 · 공주(公州:熊州) · 청양(靑陽:古良夫里停), ⑤ 서쪽:경주 · 창녕 · 전주, ⑥ 서쪽:경주 · 양주(良州) · 김해(金海:金官京) · 함안(咸安:召參停) · 진주 · 남원(南原:南原京) · 임실(任實:居斯勿停) · 전주, ⑦ 서쪽:경주 · 김해 · 진주 · 광주 · 나주(羅州:未多夫里停) 등의 방사선식 교통망을 예상할 수 있고, 한편 주(州)와 주, 주와 정(停)을 연결하여 주요 간선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통기관
당시에는 교통기관으로서 인력이나 축력이 이용되었으리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후한서 後漢書』 마한조(馬韓條)에 보면 “우마를 탈 줄 모른다.”는 기록과 함께 그 주기(註記)에는 『삼국지』를 인용하여 “우마를 탈 줄 모른다는 것은 우마가 송사(送死)에 모두 쓰였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생각하건대, 말을 탈 줄 아는 족단[騎馬族團]들이 소유했던 우마는 그들이 죽으면 함께 무덤에 묻어주었던 관습에 연유하는 것으로 추측해 볼 만하며, 기마족단이 아닌 토착집단은 우마를 탈 줄 몰랐던 상황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진한조(辰韓條)에서는 “우마를 탔다.”라고 했고, 또 “마한과는 다르다.”라고 주기(註記)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아마도 마한과 진한 사이의, 기마족단으로부터의 말 타는 법의 전래에 있어서 선후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튼 신라측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5세기 초반인 눌지왕 22년(438) “백성들에게 우차의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진한 당시의 말 타는 법과는 다른 ‘짐을 싣거나 사람이 타는 우차’의 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축력에 의한 교통기관으로는 우차와 승마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증적으로 우차와 승마에 대한 그림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즉, 쌍영총 연도동벽화(羨道東壁畫) 중에 귀인(貴人)이 탄 수레를 소가 끌고 있고, 그를 호위하는 군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는 벽화가 있다. 그뿐 아니라 무용총 · 삼보총(三寶塚)의 벽화에는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장면이 있고, 1977년 발굴했다는 덕흥리고분벽화에도 수레를 소가 끌고 말은 사람이 타고 있음을 본다.
한편, 『삼국사기』의 거기조(車騎條)에서는 수레(車)와 말[鞍橋]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즉, 골품제사회인만큼 수레의 재목, 깔방석의 꾸밈새, 수레를 끄는 말의 치장 등을 진골 · 6두품 · 5두품으로 구분하여 명시하고 있고, 또한 타는 말의 꾸밈새에 대해서도 골품에 따라 남녀별로 진골 · 6두품 · 5두품 · 4두품과 백성으로 구분하여 명시하였다. 그러나 수레의 규격이라든지 형태에 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시의 교통기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기마형토기(騎馬形土器)라든지 차형토기(車形土器) 등을 통해서 미루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특히, 교통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는 산길을 개척한다든지 교량을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2세기 중엽 신라에서 계립령 · 죽령 등을 개척한 사실은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한편, 가교(架橋)를 설치하고 강을 건넌 사실은 고구려의 주몽이 남하하여 오는 과정에서 엄호수(奄虎水)에 설치한 가교에서도 발견된다. 주몽의 무리들이 북부여로부터 망명, 남하할 때 부여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자 엄호수에서 고기떼와 자라떼들이 떠올라 가교를 놓아주어 뒤쫓아오는 부여 군사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토목기술이 부족하여 다리 놓기가 어려웠으므로 하늘의 도움으로 가교를 놓았다고 신화화한 것이다. 또한, 신라 진지왕 때 비형랑(鼻荊郎)이 왕명으로 하룻밤 사이에 도깨비들에게 돌을 다듬게 하여 귀교(鬼橋)를 놓았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해상교통
상고대의 해상교통관계 기사는 그리 많지 않다. 기원전 2세기 초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衛滿朝鮮)을 공격하기 위해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제(齊)로부터 발해만으로 배를 띄워 왕검성을 공격하게 하고, 한편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출발하여 왕검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한편, 서기전 2세기를 전후한 서남해안의 연안항로에 대하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대방군(帶方郡)으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는 1만 2,000리가 된다고 하였다. 그 노정은 “(대방군으로부터) 해안을 돌아 물길로 간다. 한국(韓國)을 거쳐 때로 남쪽으로, 때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안(北岸)의 구사한국(狗邪韓國)에 닿는데, 그 거리는 7,000여 리이다. 처음으로 어떤 바다를 건너는데 거리는 1,000여 리이고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또, 남쪽으로 어떤 바다를 1천여 리쯤 건너는데, 이름하기는 한해(瀚海)라 하고, 어떤 큰 나라에 이른다. 또 어떤 바다를 1천여 리쯤 건너서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해로는 오랜 세월 동안 옛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된 교통로라 할 것이다. 따라서, 대방군 · 구사한국 · 대마국 · 한해 · 대국 · 말로국……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동시에 한반도의 서남해안의 연안항로이기 때문에 이곳의 지리적인 지식과 자연현상에 익숙한 뱃사람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와 중국, 한반도와 일본의 교통로는 대체로 한반도의 서남해안에서 중국대륙의 동해안에 이어지는 교통로를 형성하였다.
즉, 한반도와 중국의 교통로는 대체로 압록강하구 · 대동강하구 · 장산곶 · 예성강하구 · 혈구진(穴口鎭) · 당성진 · 당진 · 백강하구 · 청해진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고, 중국의 기항지는 대개 산동반도 · 요동반도 · 양쯔강하구 등이었다. 이 같은 항로 항행의 공통점은 첫째 연안항해이며 동시에 시계항해(視界航海)라는 점, 둘째 연안항해에서는 주로 밀 · 썰물을 이용하고 한바다항해[大洋航海]에서는 바람을 이용한다는 점, 셋째 선단(船團)을 이루어 한바다항해를 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일본인의 중국에의 항행에서는 신라인 또는 백제인의 해로 안내자가 동승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일본의 입당(入唐) 항로는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이용하였으나 통일 후로는 신라가 해로를 봉쇄함으로써 일본 자체의 해로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기에 있어서 신라의 해상교통은 특히 청해진을 중심으로 하여 청해진과 일본 · 중국을 연결하는 해상교통망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일본은 자체의 해로 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나라 남서해안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안전성이 있었기 때문에 해로 이용을 신라에 간청한 일도 있었다.
고려시대의 교통과 교통정책
고려왕조가 918년 한반도의 허리에 놓이는 개경(開京)에 수도를 정하게 되고, 이후 후삼국을 통일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한반도의 동남쪽 구석에 치우쳐 있으면서 신라의 핵심을 이루었던 경주와,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의 핵심이었던 평양, 백제의 공주 · 부여, 그리고 후백제의 핵심이었던 전주 등은 그 전통이 깨지고, 개경이 한반도의 정치 · 문화 · 교통 · 경제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는 전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개경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교통정책을 펴나갔다. 983년(성종 2)에 편성한 역도(驛道)는 새 교통정책의 대표적인 예이다. 새로이 편성된 역도는 전국에 분포된 525개 가량의 역을 22개의 관할구역으로 구분, 관리하도록 한 내용이었다. 이는 국내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서 왕권의 중앙집권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22개의 역도는 우선 개경을 핵심으로 하고 그 주위 사방에서 교통로가 연결되도록 편성되었다. 서쪽으로 산예도(狻猊道), 북쪽으로 금교도(金郊道), 동쪽으로 도원도(桃源道), 남쪽으로 청교도(靑郊道) 등이 개경의 사방에서 연결되었다. 따라서, 전국에 분포된 역도는 모두 이들과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개경에 통하게 되는 조직으로서 전대(前代)에 형성된 교통로를 개경 중심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22개 역도의 개략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산예도는 개경에서 황해도의 남해안을 따라 해주∼옹진, 해주∼송화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10.
② 금교도는 개경에서 금천(金川) · 평산 · 서흥, 평산 · 신계(新溪) · 곡산(谷山)으로 이어지는 역으로서 관할역 수는 16.
③ 절령도(岊嶺道)는 서흥 · 봉산 · 중화(中和) · 평양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11이었다.
④ 흥교도(興郊道)는 평양 · 순안(順安) · 숙천(肅川) · 안주에 이르는 역로와 평양 · 강서 · 함종 · 용강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12.
⑤ 흥화도(興化道)는 안주 · 박천 · 가산(嘉山) · 정주 · 선천 · 철산 · 용천 · 의주에 이르는 역로와 박천 · 구성 · 삭주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9.
⑥ 운중도(雲中道)는 평양 · 자산(慈山) · 순천 · 개천 · 영변 · 운산 · 창성에 이르는 역로와 내륙으로 양덕(陽德) · 영원(寧遠) · 희천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43이었다.
⑦ 도원도는 개성에서 장단 · 마전(麻田) · 철원 · 김화(金化) · 평강 · 금성(金城) · 회양(淮陽)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1.
⑧ 삭방도(朔方道)는 안변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덕원 · 문천(文川) · 고원(高原) · 영흥 · 정평(定平)에 이르는 역로와 남쪽으로 안변 · 흡곡(歙谷) · 통천(通川) · 고성 · 간성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42.
⑨ 청교도는 개경으로부터 장단 · 파주 · 고양 · 양주(楊州:서울)에 이르는 역로와 파주 · 교하(交河) · 김포 · 부평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15이었다.
⑩ 춘주도(春州道)는 춘천을 중심으로 가평 · 포천 · 양주 · 서울을 잇는 역로와, 춘천 · 홍천 · 횡성에 이어지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4.
⑪ 평구도(平丘道)는 서울에서 동남으로 양주 평구역을 출발, 양근 · 지평(砥平) · 여주 · 원주 · 영월에 이어지는 역로와, 여주 · 충주 · 죽령 · 영주 · 봉화에 이어지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30이었다.
⑫ 명주도(溟州道)는 강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양양까지, 서쪽으로 대관령을 넘어 평창 · 횡성까지, 남쪽으로 삼척 · 울진 · 평해까지 이어지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8.
⑬ 광주도(廣州道)는 서울에서 광주 · 이천 · 음죽(陰竹) · 충주 · 조령 · 문경에 이어지는 역로와 서울 · 용인 · 죽산 · 음성 · 괴산 · 문경에 이어지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15이었다.
⑭ 충청주도(忠淸州道)는 수원을 거쳐 진위(振威) · 성환 · 천안 · 공주 · 부여에 이르는 역로와 평택 · 아산 · 신창 · 예산 · 홍천 · 해미(海美)에 이어지는 역로와 양성(陽城) · 진천 · 청주 · 문의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34.
⑮ 전공주도(全公州道)는 전주를 중심으로 공주를 연결하는 역로와 고산(高山) · 연산(連山) · 진잠(鎭岑) · 회덕에 이르는 역로, 전주∼정읍, 전주∼부여 등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일대의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1이었다.
⑯ 승라주도(昇羅州道)는 나주를 중심으로 전라남도의 서남해안 일대에 뻗쳐 있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30.
⑰ 산남도(山南道)는 전주 · 진주 · 거창 · 합천 · 의령 · 진주, 거창 · 산청 · 단성 · 진주에 이르는 역로, 진주에서 다시 하동 · 고성 · 진해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8.
⑱ 남원도(南原道)는 남원을 중심으로 남원∼전주, 남원∼산청, 남원∼광주, 남원∼순천 등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12이었다.
⑲ 경주도(慶州道)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일 · 영덕 · 영해, 경주∼대구, 경주∼울산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3.
⑳ 금주도(金州道)는 김해를 중심으로 울산까지, 김해∼대구, 김해 · 창원 · 칠원 · 영산 · 현풍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31이었다.
㉑ 상주도(尙州道)는 상주를 중심으로 남으로 선산과 동북으로 함창 · 안동 · 예천 · 문경 등을 연결하는 경상북도의 낙동강 상류지방에 뻗쳐 있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5.
㉒ 경산부도(京山府道)는 성주를 중심으로 북으로 김천 · 추풍령 · 영동 · 옥천에 이르는 역로와 동북으로 상주, 서쪽으로 보은에 이르는 역로로서 관할역 수는 25이었다.
한편, 이들 역도는 간선과 간선에서 뻗어나간 지선을 이루어 지방 각 관읍(官邑)에 연결되었다. 따라서 그 중요도에 따라 대로 · 중로 · 소로의 3등급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대 · 중 · 소로의 구분 이외에도 구체적으로 도로의 규모라든지 연결노선이라든지는 『고려사』 등의 문헌에서 잘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983년에 “여러 역장은 그 역이 대로에 속해 있고 역정(驛丁)이 40정 이상인 경우는 3인, 중로에 속해 있고 10정 이상인 경우에는 2인, 소로에 속해 있는 경우에는 중로의 예에 따라 차정(差定)하였다.”라고 하여 대 · 중 · 소로의 구분이 있었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운영이 있었음을 알게 할 뿐이다. 『고려사』 병지(兵志) 참역조(站驛條)를 보면, 전국의 역을 6등급으로 구분하고, 그 등급에 따라 역정을 배정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6등급으로 구분된 역들을 따져보면, 전국 22개 역도 중 10개 역도에 속해 있는 역들뿐이다. 또, 이들 역의 소재지는 대개 개경을 중심으로 그 이북지방과 영동지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이다. 6등급이란 1과(科)에서 6과까지로 분류된 것을 말하는데, 1과에 속해 있는 역들은 대개 개경에서 서경을 잇는 교통로의 역들이고, 2과는 서경에서 의주, 3과는 개경에서 회양을 거쳐 영흥, 4과는 서경에서 북으로 압록강 연안, 5과는 춘천 · 강릉 · 울진 · 평해로 이어지는 역, 6과는 춘천과 강릉 등 강원도지방으로 이어지는 역들만이 속하여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개경을 중심으로 서북지방 · 동북지방, 그리고 동해안에 대한 군사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역로의 운영에 있어서는, 역정의 설치와 더불어 역의 자체경비 충당과 역로 이용자의 경비 충당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음을 본다. 즉, 983년 6월 전국의 주부군현관역(州府郡縣館驛)에 전지(田地)를 분급할 때 대 · 중 · 소로역에 따라 분급하였다. 한편, 대로관(大路館)에 전(田) 5결, 중로관에 4결, 소로관에 3결을 배정하고 있다. 그 뒤 993년 8월 공수시지(公須柴地)를 지급할 때 동서로(東西路) 대로역 50결, 중로역 30결, 양계(兩界)의 대로역 40결, 중로역 20결, 그리고 동서남북 소로역에는 15결의 시지를 배정하였다. 역제를 보면 역무를 총괄하는 최고기관은 중앙의 병부였고, 실질적으로 전국의 정역(程驛)사무를 관장하던 부서는 공역서(供驛署)였다. 공역서에서는 전국의 역관, 중국의 빈객(賓客), 조빙(朝聘)하는 순문(巡問) · 안렴(按廉) 등 여러 사명을 받드는 자와 출입장상(出入將相)의 포마(舖馬)를 기발(起發)하는 사무를 맡아보았다. 따라서, 여행에 있어서는 전마(傳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유숙하는 관역(館驛)에서 그 양식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무신정권이 생성되어 1백년간 지속되고,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몽고의 쓰라린 간섭을 받게 되는 고려 후기 사회의 역로행정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역로행정의 문란은 상대적으로 역호(驛戶)의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역호의 잇따른 유망(流亡)으로 역은 대단히 조폐(凋弊)를 면치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교통규정
역참설치의 목적은 본래 ‘명령의 전달’에 있다. 그러므로 명령의 전달자는 물론이지만, 공적인 임무를 띤 관인에 의해서도 포마(鋪馬)와 역참이 이용되고 있었으며, 이용자의 직위에 따라 역마가 지급되었다. 즉, 1274년의 기록을 보면, “각 도에 사신으로 나가는 대소관원의 말은 재추(宰樞) 10필, 3품관 및 안렴사(按廉使) 7필, 참상(參上)별감(別監) 5필, 참외(參外)별감 및 외관참(外官參) 이상 3필, 참외 2필, 참상도령(參上都領) · 지유(指諭) 등 차사원(差使員) 3필, 장교 1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실제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원인은 내외관사(內外官司)가 역마를 함부로 탔다든지, 사마(私馬)를 가지고 번거로이 말먹이를 구했다든지, 역호의 도망이나 역호의 영점(影占)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역호를 영점하는 자를 추쇄해서 본역으로 돌아가게 하고 엄히 징벌을 행하게 하였다든지, 혹 긴급하지 않은 일로 역마를 타고 횡행하면 포마와 문자(文字)를 거두고 그 직명을 전보하든지 또는 처벌하였으며, 조폐한 역호를 구휼하고, 또한 여러 역을 안집(安集)하게 하기 위한 논의도 제기되었다.
교통기관
고려시대의 운수교통은 역시 근육노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는 『고려도경』의 지적과 같이 우리 나라의 지형상의 특징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차량이나 짐 끄는 가축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군사(軍士)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지만,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車馬)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또한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화물용으로는 우차(牛車)와 잡재(雜載)를 들고 있다. 우차(또는 우거)는 제작이 간략하여 법도가 없다는 것인데,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고, 앞에서 소에 멍에를 메워 끌게 한다. 또한, 잡재는 말 잔등에 좌우로 두 개의 그릇을 옆으로 걸쳐 놓은 다음 그 그릇에 물건을 넣고 앞에서 말을 끌고 뒤에서 말을 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대개가 산지이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에는 여러 모로 불리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한편, 여객용 운반용구는 대부분이 일반 서민용이기보다 왕을 위시한 귀족용이라 하겠고, 근육노동에 의한 거마라 하겠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채여(采輿)와 견여(肩輿)를 들고 있고, 개인용으로 왕마 · 사절마 · 기병마를 들고 있다. 채여는 붉게 칠한 좌석과 가마 네 귀에 네 개의 장대[竿]를 꽂고 장대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붙이고 있으며 강학군(控鶴軍) 40인이 이를 메는데, 외국사신이 탄다. 견여는 오늘날의 가마와 같은 것으로 생각되며 외국사신과 귀족들이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육로교통기관의 근간은 역마라 할 수 있으며, 화물운반용은 우거와 잡재, 그리고 특수 여객용은 채여 · 견여와 특수마로 왕마 · 사절마 · 기병마 등이 있었다고 하겠다.
육로설비
고려시대의 육로설비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한 것은 없다. 다만 당시의 시문(詩文)을 통해서 얼마간의 지식을 얻게 된다. 특히, 시문을 통해서 잘 파악되는 것은 우리 나라 지형의 특성이라 하겠다. 가령, 꼬부랑 산길이 많아 구곡양장(九曲羊腸) 같다든지 휘청거리는 외나무다리를 두고 장구목 · 노루목 · 병목이니 하는 지형적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노폭(路幅)은 내왕이 빈번한 개경을 둘러싼 4통(四通)과 개경 · 서경 · 의주, 개경 · 회양 · 영흥으로의 길이 비교적 잘 수치(修治)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내륙수로의 이용이 많은 지역을 제외한 산세가 험한 지역에 있어서는 비록 관로라 할지라도 노폭은 그리 넓지 못했을 것이며, 특히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서는 국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을 뿐 황폐한 채로 내버려 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일반 여행자의 편의시설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면, 우선 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 가운데 제18조에 ‘정(停)’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이 어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0리 혹은 30리 정도 거리의 도로변에 느티나무 등을 심어 그늘지게 한다든지 정자를 세워서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도록 한 시설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 동구 밖에 장승을 세우는 경우가 있어서 여행자에게 인가(人家)에 가까이 와 있다는 위안감을 주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는 지형적으로 산지 · 강 · 내가 많아서 교통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관로 또는 대로에는 돌다리를 가설한 곳도 있지만 흔한 것은 아니며, 징검다리가 가설된 곳이 대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물이 깊은 곳에서는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되고, 얕은 곳에서는 발을 걷고 건너는 경우가 많아서 비오는 철이거나 물이 범람할 때는 교통이 극히 불편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인명의 손실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우리 지명 가운데 널다리[板橋] · 배다리[舟橋, 船橋] · 돌다리[石橋] · 뗏목다리[筏橋] 등은 모두 교량의 특징적인 시설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수로교통과 해로교통
고려시대에 있어서의 교통의 비중은 수로와 해로교통이 크게 차지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982년 6월에 최승로가 올린 「시무28조」 가운데, “여러 주 · 군 · 현 및 정 · 역 · 진(津) · 도(渡:나루터)의 세력 있는 자들이 다투어가며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어겼으니…….” 하는 대목이 있다. 수로와 관련이 있는 진 · 도 등에 세력가들이 다투어 큰 집을 짓는다는 사실은 진이나 도가 크게 번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992년 11월에 “주 · 부 · 군 · 현 및 관(關) · 역 · 강(江) · 포(浦) 등의 이름을 다시 정하고…….” 운운의 기록이 보인다. 역시, 내륙수로나 해로와 연관이 있는 ‘강’과 ‘포’ 등의 명칭을 새로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써 보면, 고려 초기에 이미 수로가 교통로로서 활발히 이용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륙수로와 해로의 이용을 조창(漕倉) 소재지와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기록된 표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고려의 조창을 12조창이라 말한다. ① 충주의 덕흥창(德興倉), ② 원주의 흥원창(興原倉), ③ 아주(牙州:牙山)의 하양창(河陽倉), ④ 부성(富城:瑞山)의 영풍창(永豐倉), ⑤ 보안(保安:扶安)의 안흥창(安興倉), ⑥ 임피(臨陂)의 진성창(鎭成倉), ⑦ 나주의 해릉창(海陵倉), ⑧ 영광의 부용창(芙蓉倉), ⑨ 영암의 장흥창(長興倉), ⑩ 승주(昇州)의 해룡창(海龍倉),⑪ 사주(泗州:泗川)의 통양창(通陽倉),⑫ 금포(今浦:昌原)의 석두창(石頭倉) 등과 이 밖에 서해도(西海道:황해도)에는 장연(長淵)에 안란창(安瀾倉)이 있었다.
이 가운데 충주와 원주에 소재하는 조창만이 내륙수로에 딸려 있고 그 밖에는 서남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연해안의 각 창에는 선(船) 6수(艘), 초마선(哨馬船) 1척에 1천 석을 싣고 있었고, 지방조창으로부터 경창(京倉)까지의 운임은 5석에 1석, 6석에 1석……, 외석에 1석 등등의 규정이 있었다. 한편, 내륙수로를 이용하는 충주 덕흥창의 경우는 선 20수, 원주의 흥원창에서는 선 21수와 평저선(平底船) 1척에 각각 2백 석을 싣게 하였다. 이들 조창의 설치는 지방 각지의 조세미(租稅米)를 경창에 운반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3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의 경우 조운이 교통상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다. 경창의 소재는 예성강구의 동강(東江)에 좌창(左倉), 서강(西江)에 우창(右倉)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자연적인 조건과 지형적인 특성은 조운에 따르는 해상교통사고의 빈발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즉, 우리 나라 서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며 동시에 많은 섬들이 연해안에 분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석작용이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예로부터 항해에 많은 영향을 주어왔다. 따라서, 이 같은 자연현상과 지형의 특성이 복합적으로 교통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소가 울두목[蔚斗項]과 안흥량(安興梁)과 손돌목(孫乭項)이었다. 특히, 서남해안에는 밀 · 썰물작용에서 생성된 물골[水路]이 있고, 그 밖에 풀과 등[草嶼]이 있어서 해난사고가 잦았던 것이다. 이 같은 자연조건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시도된 방법의 하나가 조거(漕渠)의 개착, 즉 운하개착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현재 충청남도 서산군 입봉면과 태안읍의 경계인 곳에 수로를 뚫어 태안반도를 가로지름으로써 안흥량의 위험을 피하고자 한 일을 들 수 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인종 때 정습명(鄭襲明)이 수천 명의 군인으로 굴착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공양왕 때 이성계가 조운의 중요성을 살펴 왕강(王康)으로 하여금 공사를 다시 시작하게 했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조창의 분포와 더불어 해운교통로의 주요 거점이 되었던 포구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포구는 대개 남서해안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내륙수로에도 몇 개의 포구가 있었으니 모두 합쳐 약 60개에 달하였다. 이들 포구에는 경창까지 운반될 조세미를 보관할 창고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울까지의 운임에 있어서도 이들 포구를 기준으로 정해져 있었다.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고,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이 대체로 서남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우리 나라의 지형조건은 좋은 포구를 많이 발달시켰다. 따라서, 이들 60여 개의 포구 외에도 많은 포구들이 발달했을 것은 물론이다. 어쨌든, 서남해안에 놓이는 이들 포구들은 조창으로서의 기능은 물론 연안 항로의 정박지 또는 기착지로서 해상교통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내륙 깊숙이까지 교통의 큰 몫을 했던 교통기관으로는 내륙수로를 이용한 수운이 있었다. 중국방향의 산맥을 좇아서 서남해안으로 흘러드는 큰 강들은 예로부터 물화의 이동과 함께 문화의 전달자 구실을 해왔다. 한강을 비롯한 임진강 · 예성강 · 금강 · 영산강 · 낙동강 · 섬진강 · 대동강 등은 내륙 깊숙이까지 항행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조세미 운반은 물론이고, 지역간 생활필수품 교류가 이를 통해서 쉽게 이루어진 셈이다. 가령, 바다로부터 고기와 소금이 내륙지방에 수송되는 한편, 시탄(柴炭)과 미곡 등이 교환되었다. 따라서, 조창과 내륙수로와 조운의 연결은 고려시대의 수로와 해로교통의 요체를 이루었다 하겠다.
대외 교통로
우리 나라의 대외교통로로서는 해상교통이 늘 중요시되었다. 다만, 중국의 교통정책이 해안개방이냐 해안봉쇄냐에 따라 추이를 달리해 왔다. 예컨대 송나라의 해안개방책은 고려와의 교역을 활발하게 했을 뿐 아니라, 멀리 서방의 아라비아 상선의 내왕도 빈번하게 하였다. 송나라와의 해상교통로를 매우 소상하게 전해 주는 자료로는 『고려도경』이 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1122년(宋 徽宗 4, 고려 예종 17, 인종 즉위년) 5월 16일 명주(明州)를 출발한 배가 6월 12일에 예성항(禮成港)에 와닿고 있다. 그간 출발에 앞서서의 행사에 소요된 7일을 제하고 5월 24일부터 항해한 것으로 치면, 약 22일이 걸린 셈이다. 그리고 송나라와 고려의 해상경계를 협계산(夾界山)으로 보고 있는데, 협계산으로부터 예성항까지는 12일이 걸린다. 대개 죽도 이후의 경과 지점들은 우리 나라 서해안의 전통적인 해상교통로로서 조선시대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같은 해로의 생성은 우리 나라 연해의 지형적인 조건과 자연적인 조건에 대하여 옛사람들의 끊임없는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사신이 내왕한 해로(海路)는 다음과 같다. 협계산(夾界山) · 오서(五嶼) · 배도(排島) · 백산(白山) · 흑산(黑山) · 월서(月嶼) · 난산도(闌山島) · 백의도(白衣島) · 궤섬(跪苫) · 춘초섬(春草苫) · 빈랑초(檳榔焦) · 보살섬(菩薩苫) · 죽도(竹島) · 고섬섬(苦苫苫:苫島) · 군산도(群山島) · 횡서(橫嶼) · 자운섬(紫雲苫) · 부용산(富用山) · 홍주산(洪州山) · 앗자섬[鴉子苫] · 마도(馬島) · 구두산(九頭山) · 당인도(唐人島) · 쌍녀초(雙女焦) · 대청서(大靑嶼) · 화상도(和尙島) · 우심서(牛心嶼) · 섭공서(聶公嶼) · 소청서(小靑嶼) · 자연도(紫燕島) · 급수문(急水門) · 합굴(蛤窟) · 분수령(分水嶺) · 예성항(禮成港). (고려도경 권35 해도 2∼6)
조선시대의 교통과도기의 교통로
조선왕조가 개성으로부터 한양으로의 천도계획에 착수할 무렵, “여러 신하를 한양에 보내어 종묘 · 사직 · 궁궐 · 관아 · 시전 · 도로 건설의 기지를 선정, 구획하게 하고 심덕부(沈德府) · 김주(金湊) 등을 특별히 한양에 남아 있게 하여 모든 건설사업을 감독, 시행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건설사업 가운데 도성 내의 도로설비는 물론, 전국의 교통망을 한양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교통정책은 태조 · 태종 · 세종대를 경과하면서 도로의 건설과 관리 및 노폭에 대해서까지 법제적으로 규정해 가고 있었다. 1407년(태종 7) 한성부는 성내 5부(部)의 방(坊)이름, 교량 · 가로 등의 이름표시가 퇴락하였으므로 다시 써붙이겠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도시계획에 관한 내용이라 하겠다. 그러나 1415년(태종 15)의 기록을 보면 “조정에서 도로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도로를 침삭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하고 노폭과 길 옆 도랑[側溝]의 넓이를 정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도성 내의 도로에 관한 법제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1426년 한성부는 도성 내의 중로는 수레 2궤가 통할 수 있게 하고, 소로는 1궤가 통할 수 있게 하며, 길 옆 도랑은 노폭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노력은 마침내 『경국대전』에 도성 내의 도로를 대 · 중 · 소로 구분,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도성 내에 있어서의 도리(道里)의 기준점은 궐문(闕門)으로 하고 있고, 각 지방과의 도리 기준점은 성문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4대문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 흥인문(興仁門:동대문) · 돈의문(敦義門:서대문)까지는 경복궁의 광화문, 또는 창덕궁의 돈화문이 그 기점이었다. 또한 전국 각 지방으로 뻗은 의주로(義州路:한양∼의주) · 우로(右路:한양∼해남) · 중로(中路:한양∼통영), 그리고 강화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숭례문이 기점이었으며, 관북로(關北路:한양∼慶興) · 관동로(關東路:한양∼평해) · 좌로(左路:한양∼봉화, 한양∼동래) 등은 흥인문이 기점이었다.
도성 내 교통망 정비에 이어 한양에서 전국으로 연결되는 교통망을 재정비하였다. 재정비된 내용은, 이전의 교통망이 개경을 중심으로 편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 한양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전국의 교통망은 우선 과도기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 과도기적으로 재편된 전국의 역도(驛道)를 살펴보면,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좌도충청도정역찰방, 우도정역찰방, 경기 · 강원도정역찰방 소관의 역들이 있고, 그 밖에 황해도의 참로찰방(站路察訪), 평안도의 관로찰방(館路察訪) 등의 역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들이 전국 각 도의 역도 중 비중이 큰 것임을 알게 한다. 이들은 찰방 소관의 역들이며, 동시에 서울을 중심으로 좌로 · 우로 · 관동로와 특별히 사행로(使行路)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는 도별로 역승(驛丞) 소관의 역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역도를 도별로 보면 경기 8, 충청도 9, 경상도 10, 전라도 7, 황해도 3, 강원도 3, 함경도 3, 평안도 1 등 도합 44개 역도이다. 이를 고려시대의 역 및 역도의 수와 비교해 보면 역수에 있어서는 525:480으로서 45개 역 정도가 감소되고 있고, 반면 역도에 있어서는 22:44로서 22개 역도가 증가되고 있다. 감소를 보인 45개 역의 분포를 따져보면, 황해도 및 평안도지역에서 많은 역이 폐쇄되고 있고, 반면 경상도에서는 30개 정도의 새로운 역이 설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역도의 대폭적인 증설은 전대에 비해 교통행정의 큰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고려시대에 비하여 행정구역의 법제화라든지, 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에 의한 일원적 지방 파악이라든지, 왕권의 전제화와 더불어 전국 파악을 신속, 원활히 하기 위하여 역의 현실적 조정과 역도의 재편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의 역의 대폭적 폐쇄에 반해 경상도지역에서의 새로운 역의 증설은 교통 · 통신의 중요도가 대륙변경지역에서 해양변경지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군사적 · 외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물화의 빈번한 교통이라는 측면에서도 다시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의 과도기적인 도로 및 역도의 재편성은 다소의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져 마침내는 『경국대전』 편찬시에 이르러 확립되는데, 역은 대개 480여 개에 이르고 역도는 40여 개에 이르렀다.
도성 내의 주요교통로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울의 교통로는 대로 · 중로 · 소로로 구분되고, 노폭은 영조척(營造尺)으로 대로 56척, 중로 16척, 소로 11척, 길 옆 도랑 2척으로 정하고 있다. 주요 교통망은 경복궁과 종묘 · 사직단, 그리고 4대문 · 4소문을 두고 가로와 세로로 연결되어 있다. 도성 내의 대로와 중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2.1. 대로
① 황토현(黃土峴: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 앞에 이르는 길, ② 황토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흥인문까지, 서쪽으로 경희궁까지 동서를 관통하는 길, ③ 숭례문에서 대광통교(大廣通橋:종로 네거리)에 이르는 길.
2.2. 중로
① 종로3가에서 돈화문에 이르는 길, ② 종로4가에서 종묘를 끼고 가다 다시 창경궁을 끼고 다시 북쪽으로 혜화문에 이르는 길, ③ 을지로 입구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길, ④ 충무로 입구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길, ⑤ 사직단 입구에서 중학동을 거쳐 청진동에 이르는 길, ⑥ 소공동 입구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 등이고, 그 밖의 길은 소로에 속한다. 한편 조선시대에 전국 도로의 기점은 창덕궁의 돈화문이었다. 그러므로 돈화문에서 출발하여 4대문 · 4소문으로 연결된다고 할 것인데, 대개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과 동대문인 흥인문을 통과하여 전국에 연결되도록 짜여 있었다.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연결되는 연결점을 들어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2.3. 서북 방면
숭례문 · 기영(畿營) · 영은문(迎恩門) · 무악재(毋岳峴).
2.4. 남쪽 방면
① 숭례문 · 이문동(里門洞) · 청파역(靑坡驛) · 와요현(瓦窯峴) · 동작진(銅雀津), ② 숭례문 · 이문동 · 남묘(南廟) · 이태원(梨泰院) · 서빙고나루, ③ 숭례문 · 이문동 · 청파역 · 당고개[堂峴] · 습진터[習陣基] · 노량진.
2.5. 서쪽 방면
① 숭례문 · 약전현(藥田峴) · 아현 · 노고산 · 양화진(楊花津), ② 숭례문 · 만리재[萬里峴] · 마포나루, ③ 숭례문 · 약전현 · 아현 · 노고산 · 광흥창(廣興倉) · 서강나루 · 밤섬[栗島] · 여의도 · 영등포.
2.6. 동쪽 방면
① 흥인문 · 동묘(東廟) · 안암동 · 제기현(祭基峴) · 무너미고개[水踰峴], ② 흥인문 · 동묘 · 안암동 · 제기현 · 안락재[安樂峴] · 중량포, ③ 흥인문 · 동묘 · 영도교(永渡橋) · 왕십리 · 차현(車峴) · 살곶이[箭串] · 송파. 특히 하삼도(下三道)로 연결되려면 한강을 건너야만 하므로 이를 연결하는 나루들로는 광나루(廣津) · 삼밭나루[三田渡] · 송파나루 · 두무께[豆毛浦] · 한강나루[漢江津] · 서빙고나루 · 노들나루[露梁津] · 마포 · 동작나루 · 서강 · 양화진 등이 있었다.
전국의 주요 교통로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역도의 정비와 함께 재편성된 조선시대의 교통로는 흔히 9대로 혹은 10대간선로로 나누기도 한다. 제1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연행로(燕行路) 또는 사행로(使行路)라고도 불린다. 간선도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통로이다. 국내사절은 물론 중국사절의 내왕이 잦은 교통로일 뿐 아니라, 특히 사절들의 숙식 및 연향(宴享)을 감당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의주까지에는 관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요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고양 · 파주 · 장단 · 개성 · 금천 · 평산 · 서흥 · 봉산 · 황주 · 중화 · 평양 · 순안 · 숙천 · 안주 · 가산 · 정주 · 곽산 · 선천 · 철산 · 용천 · 의주. 제2로는 서울에서 함경북도 서수라(西水羅)까지를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흔히 관북로(關北路)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요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다락원[樓院] · 만세교(萬歲橋) · 김화 · 금성 · 회양 · 철령 · 안변 · 원산 · 문천 · 고원 · 영흥 · 정평 · 함흥 · 홍원 · 북청 · 이원 · 길주 · 명천 · 경성 · 부령 · 무산 · 회령 · 종성 · 온성 · 경원 · 경흥 · 서수라. 제3로는 서울에서 동해안의 평해(平海)까지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흔히 관동로라고도 하며, 그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망우리 · 평구역(平丘驛) · 양근 · 지평 · 원주 · 안흥역(安興驛) · 방림역(芳林驛) · 진부역 · 횡계역 · 대관령 · 강릉 · 삼척 · 울진 · 평해. 제4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흔히 좌로 · 중로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좌로는 왜사(倭使)의 입경로로서 낙동강과 한강의 내륙수로와 연결이 편리한 교통로이기도 하다. 주요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한강 · 판교 · 용인 · 양지 · 광암 · 달내[達川] · 충주 · 조령 · 문경 · 유곡역(幽谷驛) · 낙원역(洛原驛) · 낙동진(洛東津) · 대구 · 청도 · 밀양 · 황산역(黃山驛) · 동래 · 부산. 제5로는 서울과 통영을 잇는 교통로로서 서울에서 문경의 유곡역까지는 노정이 같다. 따라서 이 도로를 중로라 할 수 있다. 주요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제4로 · 유곡역 · 함창 · 상주 · 성주 · 현풍 · 상포진(上浦津) · 칠원 · 함안 · 진해 · 고성 · 통영. 제6로는 역시 서울과 통영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전라도를 경유하여 통영에 이르는 간선인데, 그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동작나루 · 과천 · 청호역(菁好驛:수원) · 진위 · 성환역 · 천안 · 차령 · 공주 · 노성 · 은진 · 여산 · 삼례역 · 전주 · 오수역(獒樹驛) · 남원 · 운봉 · 함양 · 진주 · 사천 · 고성 · 통영. 제7로는 서울에서 제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서울에서 삼례역까지는 제6로와 같다. 따라서 좌로에 속하며, 주요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제6로 · 삼례역 · 금구 · 태인 · 정읍 · 장성 · 나주 · 영암 · 해남 · 관두량(館頭梁)……(수로)……제주. 제8로는 서울에서 충청수영(忠淸水營)까지의 교통로이다. 우로(제6로)를 따라 진위 · 소사 · 평택으로 이어진다. 주요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제6로 · 소사 · 평택 · 요로원(要路院) · 곡교촌(曲橋川) · 신창 · 신례원 · 충청수영. 제9로는 서울에서 강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주요 노정은 다음과 같다. 서울 · 양화도 · 양천 · 김포 · 통진 · 강화. 이 밖에 『대동지지』에서는 10대간선도로라 하여 서울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봉화의 동북쪽 태백산에 사고(史庫)가 두어짐에 따라 내왕을 위한 도로 개설로 보인다.
교통로의 등급
도성 내의 도로 등급을 대로 · 중로 · 소로로 3분하고 있듯이 전국 지방도로에 있어서도 대 · 중 · 소로의 등급을 두고 있었다. 규정상 등급을 두고 있었지만, 노폭이라든지 노면 등의 구조적인 차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간선으로서의 중요도와 역마 · 역호의 많고 적음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분히 도로의 이용도, 다시 말하면 교통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분류된 것이라 하겠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 · 중 · 소로를 [표 1]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속대전』에 이르면 『경국대전』의 규정과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표 1] 조선 초기의 주요교통로
교통
교통대 로중 로소 로
서울∼개성 | 개성∼중화 | 그밖의 도로 |
서울∼죽산 | 죽산∼상주 진천-황간-상주 | 그밖의 도로 |
서울∼직산 | 직산-공주-전주 | 그밖의 도로 |
서울∼포천 | 포천∼회양 서울∼양근 | 그밖의 도로 |
각종 별칭도로
간선도로 가운데는 여러 가지 특정한 목적으로 교통로의 이용이 빈번함에 따라 별명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가령, 명 · 청나라에 내왕하던 서울∼의주간의 도로를 사행로 또는 연행로라 하였으며, 왜사들에 의해 이용되었던 좌로와 중로를 때로는 왜사입경로(倭使入京路)라 하였다. 한편,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파발로(擺撥路)가 있었고, 주로 능행이 빈번하였던 연유로 붙여진 능행로(陵行路)는 특히 서울에서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까지의 교통로를 이름하였다. 한편, 해로를 이용한 사행로로서 동시에 무역로를 들 수 있다.
5.1. 연행로
연행로는 우리나라나 명 · 청나라 사신들이 내왕하던 교통로를 말하는데, 넓은 의미로는 서울에서 연경(燕京)까지이고, 좁은 의미로는 서울에서 의주까지를 말한다. 명 · 청나라의 사행 내왕은 연평균 5회 정도로 왕복 10회의 국사(國使) 행렬의 통과가 있었다. 그러므로 국내 간선도로 중 가장 교통이 번잡한 교통로였다고 할 것이고, 이에 따라 교통로의 수치(修治)도 동시에 중요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내왕사절의 숙식과 연향(宴享)을 위해 길에 인접한 관읍에는 관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5.2. 왜사입경로
넓은 의미로는 일본의 막부로부터 출발하여 서울까지의 노정을 말할 수 있지만, 좁은 의미로는 왜 사신이 3포(鹽浦 · 薺浦 · 釜山浦)에 도착하여 서울까지 내왕하는 각각의 교통로를 말한다. 특히, 왜사의 왕환로(往還路)는 육로와 수로를 함께 이용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장기체류라든지 기밀탐지 등의 보안상 문제로 왕환로가 고정되어 있었고, 체류기간 등 제한요소가 가해져 있었다. 대체로 육로의 노정은 다음과 같다.
① 제포 ┬ 부산 · 서울 (13일정)
└ 대구 · 상주 · 괴산 · 광주 · 서울 (14일정)
② 부산포 ┬ 대구 · 상주 · 괴산 · 광주 · 서울 (14일정)
└ 영천 · 죽령 · 충주 · 양근 · 서울 (15일정)
③ 염포 · 영천 · 죽령 · 충주 · 양근 · 서울 (15일정)
위의 포구에 왜사가 도착하면 위에 제시된 교통로를 따라 상경한다. 두 갈래씩 제시된 것은 인원이 많은 경우에 이용한 노정이다. 수로의 노정은 다음과 같다.
① 제포 ┬ 창녕 · 창원 · 선산 · 충주 · 광주 · 서울
│ (19일정)
└ 김해 · 양산 · 창녕 · 선산 · 금천강 · 한강 · 광주 · 서울
(21일정)
② 부산포 ┬ 양산 · 창녕 · 선산 · 충주 · 광주 · 서울
│ (21일정)
└ 양산 · 황산강 · 창녕 · 선산 · 상충 · 금천강 · 한강 ·
광주 · 서울 (23일정)
③ 염포 · 상주 · 단양 · 충주 · 광주 · 서울 (15일정)
왜 사신들은 포소(浦所)에서는 왜관(倭館), 서울에서는 동평관(東平館)에 체류하였으며, 그곳에서 휴식과 연향을 베풀기도 하였다.
5.3. 파발로
파발은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기구로서 변방의 급보(急報)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파발의 종류에는 기발(騎撥)과 보발(步撥)이 있다. 전자는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서 급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며, 후자는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서 급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파발로의 구성은 크게 3대간선으로 나눌 수 있고 3대간선에서 파생된 여러 가닥의 지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간선을 서발(西撥)이라 하고, 서울에서 함경도 경흥을 연결하는 간선을 북발(北撥), 서울에서 동래를 연결하는 간선을 남발(南撥)이라고 한다. 그런데 3대간선 중 서발은 기발이기 때문에 대로기발이라고도 하며, 북발 및 남발은 보발이기 때문에 대로보발이라고도 한다. 이 간선에서 뻗어나간 간발(間撥)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서발:안주∼강계, 안주∼벽동, 영변∼위원까지의 3개의 간발이 있다.
② 북발:북청∼후주, 부령 · 회령 · 무산까지의 2개의 간발이 있다.
③ 남발:남발은 간발이 없다.
파발을 기능면으로 파악할 때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파발로는 군용도로 또는 군사교통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파발의 조직을 보면 기발은 25리마다, 혹은 20리 또는 30리마다 1참(站)씩 두고 발장(撥將) 1인, 색리(色吏) 1인, 군정(軍丁) 5인, 말 1필씩을 배치하였다. 한편 보발은 30리, 혹 40리 또는 50리마다 1참씩 두었고 매참에 발장 1인, 군정 2인을 두었다.
5.4. 능행로
배릉(拜陵)을 위한 교통로를 말하는데, 물론 능행만을 위한 도로는 아니다. 다만, 배릉을 위한 여러 가지 노변설비가 갖추어져 있으며 또한 능행이 자주 있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광주(廣州:지금의 서울 江南區)의 선릉(宣陵) · 정릉(靖陵) · 장릉(章陵) · 건릉(健陵) · 헌릉(獻陵), 그리고 여주의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수원의 현륭원(顯隆園)이 대표적이다. 특히, 현륭원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자주 능행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특히, 능소에의 배행을 위해서 크게 고려된 것은 한강에 설치하는 주교(舟橋)였다. 일종의 임시적인 교량인데 이의 가설을 위해 전담부서인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되어 있었고, 주교 가설의 규정인 주교절목(舟橋節目)을 세세하게 규정하기도 하였다. 능행로는 왕이 자주 어거(御車)하는 통행로였으므로 매우 주의가 기울여진 교통로였다 할 것이다.
5.5. 무역로
조선왕조가 본래 적극적인 무역정책을 권장하지는 않았지만, 외교적인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와, 일본과 여진에 대한 교린정책에 입각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한 무역은 정식 사행에 의한 공식적인 무역(朝貢貿易)과 사행원을 수행한 이들, 예컨대 역관에 의한 비공식적인 사무역(私貿易)이 크게 번영하였다. 이들의 내왕 교통로를 사행로 또는 무역로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정은 대개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길을 거쳐 의주 · 압록강 · 구련성(九連城) · 책문(柵門) · 봉황성(鳳凰城) · 연산관(連山關) · 요양(遼陽) · 심양(瀋陽), 요양 · 광녕(廣寧) · 산해관(山海關) · 영평부(永平府) · 북경(北京)이었다. 해로로는 조선 초기에 명나라가 남경에 수도를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풍천(豐川)에서 배로 출발하였으나 명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는 육로를 이용하였다. 그 뒤 1621년(광해군 13)부터 다시 해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 출항지는 선천부(宣川府) 선사포(宣沙浦)에서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기착하여 육로로 북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 뒤 1627년(인조 5) 이후로는 증산현 석다산(石多山)에서 출항하여 철산부(鐵山府) 가도(假島)를 경유, 등주에 상륙하는 항해로를 취하였다. 한편, 왜로 가는 항해는 동래부 부산의 영가대(永嘉臺)를 출발하여, 대마도 · 이키섬(壹岐島) · 아카마가세키(赤間關) · 효고(兵庫) · 오사카(大阪城) · 왜경(倭京) · 나고야(名古屋) · 에도(江戶)에 이르는 노정인데 이것을 모두 계산해 볼 때 수로로 3,290리, 육로로 1,310리라는 것이다. 그 밖에 여진 · 유구(琉球)와의 육상, 또는 해상교통로도 상당히 발전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변설비
노변설비에 관하여 『경국대전』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외방도로(外方道路)는 매 10리마다 소후(小堠)를,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세우고 역을 설치한다. 후에는 이수(里數)와 지명을 새긴다.” 이러한 규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대동지지』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6척이 1보(步), 360보가 1리(里), 3,600보가 10리이며, 매 10리마다 소후를 세우되 후(堠)에는 이수와 지명을 새긴다(속칭 장승이라 부른다). 30리마다 대후를 세우고 역을 설치한다. 옛 제도에서는 대 · 중 · 소로에 각기 원우(院宇)를 설치하여 여행자들이 거쳐가게 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과한 이후부터는 원우는 모두 폐지되고 점사(店舍)가 많이 생겼다. 그러므로 혹 원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점(店)이다. 많은 점사가 생겨나는 것은 불규칙하고 변화가 많아 원과 점의 소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많다.” 즉, 노변설비로서 후가 설치되어 있어서 거리와 지명을 알게 해 주고 있고, 또 원우 혹은 점사의 이용을 할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30리마다 대후와 역이 설치되어 있어서 휴식과 숙식 등의 편의제공은 제도 · 조직면에서는 훌륭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양란을 겪으면서는 원우는 대체로 소멸되었으며, 그 대신 점사가 점차 발생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관영의 노변 편의시설 제공이 더이상 지탱될 수 없는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자생적으로 민영형태인 점사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후를 설치한 기원은 흔히 중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위효관(韋孝寬)이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을 때 길가에 10리마다 토후(土堠)를 쌓고, 그 붕괴를 막기 위해 느티나무를 심어 나무그늘이 지게 하였다는 것인데, 이를 모방하여 각 주(州)에서도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위(魏)나라의 문제(文帝)도 10리마다 높이 5척의 동표(銅表)를 큰길가에 설치하고 이수를 표시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 언제 수입되었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조선시대의 소후 · 대후라든가 장승 등은 이와 대비되는 일종의 이정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옛 도로변의 느티나무 고목들은 여행자들의 휴게소로서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흔히는 정자나무로 불리고 있고, 느티나무(槐木)뿐 아니라 회(檜)나무 · 은행나무도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여행자에게 있어서는 이정표라든지 휴게소도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원거리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숙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교통로 조직에서 역과 원이 같은 차원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원의 애당초의 설치목적은 공무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원은 공공적인 시설로서 전국 대 · 중 · 소로에 설치되어 그 기능을 감당하였는데 대체로 30리 거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원의 설치과정을 살펴보면, 조선 초기에 원을 보완, 정비하는 방법으로 인근 주민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에게 원의 책임을 맡도록 하고 있다. 원주(院主)의 설치가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원주의 설정은 교통로 파악이 전대에 비하여 중앙집권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대신, 국가는 원주에게 원주전(院主田)을, 대로에 위치한 원에는 1결35부, 중로 90부, 소로는 45부씩 지급하여 원 운영의 경제적 비용의 충당을 지원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원우조의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 약 1,210개의 원이 산재하고 있었다.
원이 공무여행자의 편의시설인 데 반하여 일반 민간여행자를 위한 시설로는 점사를 들 수 있다. 점사의 발생에 대하여는 원이 피폐된 임진왜란 후로 보고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일반 여행자의 편의시설로는 원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민가가 임의적으로 이용되었을 뿐 별다른 고려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통장애의 극복
7.1. 육로교통
노변의 시설물은 여행자의 편의제공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지만 여행자에게 교통의 자연적 장애물이 된 것으로는 강과 하천, 그리고 바다가 있다. 산령(山嶺)이 여행자에게 불편을 주고 장애가 된 것은 물론이지만, 전자에 비하여 인명의 손실은 적은 편이었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의 허리를 통과하게 되고, 경사가 급한 곳은 때로 잔도(棧道:사닥다리 돌길)를 가설하여 내왕에 편의를 도모하였다. 일반적으로 하천에는 징검다리 혹은 외나무다리 · 돌다리 등을 설치하여 교통의 저해요인을 극복하려 하였고, 강에는 나룻배를 설치하거나 뜬다리(浮橋, 혹은 舟橋)를 가설하여 강을 건너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가 일시에 많이 내리거나 장마철에는 가설된 다리들이 물에 떠내려가거나 잠겨 교통이 두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혹, 날이 가물거나 다소 강물이 불은 경우에도 행인들이 여울목으로 강을 건너는 경우가 흔히 있어서 인명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서울에서 하삼도로 통하는 나루들을 통칭하여 5강진로(五江津路)라고 하였다. 광나루 · 삼밭나루 · 사평나루(沙坪渡) · 동작나루(銅雀津) · 노들나루 등이 그것인데 통행자를 위해 나룻배가 설치되어 있었고, 나루를 관리하는 관헌이 파견되어 있었다. 한편, 왕이 행차할 때에는 하천에 뜬다리를 가설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조선 초기에 한강 연변 들에서 강무활동(講武活動)을 할 때라든지 태종 · 세종의 능에 역대 왕들이 참배를 할 때 왕의 도강을 위한 시설로 뜬다리가 가설되었다. 뜬다리의 가설방법은 돛단배를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이물[船頭]을 가지런히 두게 하여 강 양안(兩岸)까지 배설(排設)한 다음,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5, 6기(騎)의 기마가 자유로 내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뜬다리를 설치하는 데는 많은 수고와 폐단이 뒤따랐다. 많은 선박의 동원도 폐단이었지만, 한강은 특히 내륙수로로서 이용한 빈번한 교통로였기 때문에 그 설치나 철거 또한 번거롭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1789년(정조 13) 12월에는 부교에 관한 전담부서인 주교사를 설치하고 부교의 구조, 운용에 관한 절목(節目)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한편, 화물수송에 있어서는 강이나 하천을 건너고 산령을 자주 넘어야 하는 육상교통로의 불편을 피하여 내륙 깊숙이 뻗어 있는 큰 강의 내륙수로와 해상교통로를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내륙수로에 있어서도 교통장애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륙수로에 있어서 주된 장애요인은 수중 암초와 여울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통과할 때는 특히 주의를 요하였으며, 안전을 기원하는 화주당(化主堂)이 곳곳에 설치되어 계절에 따라 국가나 지방관 차원에서 안전을 빌기도 했다.
7.2.해로교통
구시대의 해상교통의 이용은 시계항해였고, 연안항해로서 밀 · 썰물과 순풍이었다. 때로, 원양항해인 경우에 연안에서의 발착은 밀 · 썰물을 이용하였지만, 한바다 항해에는 주로 바람에 의존하였다. 연안교통로를 보면, 크게 3개 노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① 경도(京都) 용산강(龍山江)에서 강화 손돌목을 돌아 충청 · 전라 · 경상도의 연해안을 거쳐 동래에 이르는 해로.
② 경도의 용산강에서 통진 · 강화의 북쪽 돈대(墩臺)를 돌아 교동(喬桐) · 황해 · 평안도의 연해안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해로.
③ 함경도 서수라를 출발하여 함경도―강원도―경상도의 연해를 따라 동래에 이르는 해로 등이다.
이상의 3대해로에서 연해안의 포구로 연결됨으로써 예로부터 해상교통의 이용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연안항해로의 이용을 법제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조전(漕轉)의 내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창의 소재지는 대개 하삼도(下三道)에 있기 때문에 서울 용산강에서 강화 손돌목을 통과하여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해로를 이용하게 되는 셈이다. 조창의 명칭과 그 소재지, 조선 수, 그리고 적재량과 조운규칙을 보면 대개 [표 2]와 같다.
[표 2] 주요조창의 실태
교통
교통도별조창 명칭선박수(척)조창소재지이용관읍수적재량발선 및 상납일
전라도 | 聖堂倉 | 12∼14 | 함열 | 함열 등 8읍 | 조선 1척당 1,000석 | 3월 15일 이전 출발 6월 10일 이내 |
群山倉 | 25∼29 | 옥구 | 영광 등 12읍 1진 | |||
충청도 | 貢津倉 | 12∼25 | 아산 | 아산 등 7읍 | 조선 1척당 800석 | 2월 20일 이전 출발 3월 10일 이내 |
경상도 | 馬山倉 : 左倉 | 20 | 창원 | 창원 등 8읍 | 조선 1척당 1,000석 | 3월 25일 이전 출발 5월 15일 이내 |
加山倉 : 右倉 | 20 | 진주 | 진주 등 8읍 | |||
三浪倉 : 後倉 | 15 | 밀양 | 밀양 등 2읍 |
덧붙일 것은 비록 조선의 발선일이 법전에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기일 내에 납부하기 위해 15∼20일 정도 앞당겨 출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박에 이용 관읍의 감관 1인, 그리고 매 선박마다 색리 1인, 사공 1인, 격군(格軍) 15인씩이 승선하게 되어 있다. 조선은 매 운송 때마다 30척이 하나의 선단을 이루어 동시에 출발하고 동시에 귀환해야 한다. 따라서, 항해의 안전을 위해 태안반도 부근의 안흥(安興梁)과 원산(元山島)에서 점검을 했으며, 또한 각 연읍(沿邑)에서는 경내의 등풀[嶼草]이 있어 험난한 해로에는 별도로 표지를 세우거나 뱃길을 익히 아는 사람이 뱃길을 순차적으로 인도하도록 하였다. 그렇더라도 운행 중에 역풍을 만나거나 바람이 잠잠할 때, 또는 폭풍을 만날 때는 연안포구에 대피하여 순풍을 대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내륙수로를 이용한 조세미 등의 운송을 위해 좌수참(左水站)과 우수참(右水站)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지형이 험난한 서남해안에서의 항해의 제1요건은 밀 · 썰물작용을 잘 이용하는 일이었다. 밀 · 썰물작용은 하루에 각기 두 차례씩 일어나며, 한 달을 두고는 달의 차고 기울어짐에 따라 각기 초승과 보름에 크게 물이 밀려오고, 7, 8일께와 21, 22일께 크게 물이 썬다. 또, 1년을 두고는 정월과 7월, 4월과 10월에 각각 크게 밀려오고 크게 썬다. 이러한 물때가 서남해안의 장소에 따라 시간차가 있어서 예로부터 이를 기억하기 쉽게 노래로 지어 부르고 있기도 하다. 특히, 물이 밀려오고 썰 때 얼마 동안 증감작용이 없는 정지된 시간을 물이 ‘맞섰다’라고 한다. 물이 완전히 밀려와서 물이 맞선 때를 ‘참(站)’이라 하고, 완전히 썰어서 물이 맞선 때를 ‘가음[邊音]’이라 한다. 따라서, ‘배를 띄우는 사람은 참을 이용하고, 배를 댈 사람은 가음을 좇아서 항해하라.’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참 이후에는 썰물작용이 일어나게 되므로 썰물을 이용해서 배를 출발시키라는 것이고, 가음 이후에는 밀물작용이 일어날 것이므로 밀물작용을 이용하여 항구에 배를 붙이라는 뜻이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우리 나라 해안에서의 조석작용을 중심으로 지역구분을 4개 지역으로 하고 있다. 즉, 서해안 일대를 포함해서 해남의 갈두포(葛頭浦)까지를 제1지구로 설정하되 밀 · 썰물작용은 11∼6m 내외, 제2지구는 갈두포에서 김해 앞바다까지로 4∼2m 내외, 제3지구는 김해에서 울산 앞바다까지로 2∼1m 내외, 제4지구는 울산 이북의 동해안지역으로서 밀 · 썰물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크고 작게 일어나는 밀 · 썰물작용과 서남해안의 리아스식 해안과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다도해라는 지형조건은 해상교통의 큰 저해요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조난사고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특히 서남해안 해상교통로상 주의를 요하는 위험처로서 강화의 손돌목, 서산의 안흥량과 관장목[冠丈項]을 잇는 곳, 해남의 울돌목[蔚乭項 또는 蔚斗項] 등 3개 처를 들고 있다. 위의 3개 처는 마치 협곡과도 같은 지형에 밀 · 썰물작용이 크게 일어나는 곳일 뿐 아니라 암초가 깔려 있기 때문에 특히 위험한 곳이었다. 평상시의 유속(流速)이 4∼6노트 정도이며 최고 11.5노트를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한 곳을 통과할 때는 참과 가음을 잘 이용해야 함은 물론 풍향을 잘 살펴서 항해를 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이곳을 통과하는 선박들이 빈번하게 조난을 당함으로써 하삼도 조세미 운반에 적지않은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서도 해상교통을 저해하는 자연조건을 극복하기 위하여 운하를 개척하려는 사업이 많이 행하여지기도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노상시설
8.1. 역참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기능을 십분 원활하게 한 것은 역전(驛傳) · 파발 · 보발의 제도적 정비로써 관원들의 여행과 통신문 전달에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역참제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천도한 이후 역참의 기능이 역시 중앙집권에 있어 중추가 되고 있음을 중시하여 역로행정을 재정비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역로행정을 총괄하는 관서는 병조였고, 우역(郵驛) 사무를 실제로 관장하던 곳은 승여사(乘輿司)였다. 역로행정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480∼537역을 약 40∼44개의 역도로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고, 역도의 중요도에 따라 대 · 중 · 소역의 등급이 있어서 역의 종사자와 마필(馬匹)의 숫자도 차등있게 배설하였다. 따라서, 각 역도는 10개 내외의 역을 관할하게 되고, 역도의 중심역에 종6품의 찰방 1인을 두고 있었다. 또한, 각 역에는 역장 · 역리(驛吏) · 역졸(驛卒) · 역정(驛丁) · 일수(日守) · 노비(奴婢) · 보인(保人) · 솔인(率人) 등이 있어서 역무에 종사하였는데, 그 종사자의 수는 역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경국대전』에 보면, 상등역 121인, 중등역 96인, 하등역 71인 등으로 신분별 정원이 정해져 있었지만, 뒤에는 신분별 구분도 불분명해지고, 정원도 증가 추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조선 초기 각 역에 딸려 있는 말이 얼마였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 40개 역도 535개 역에 5,380필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필에도 상등마 · 중등마 · 하등마 · 태마 등의 등급이 있었고, 역의 등급에 따라 마필수 및 등급의 배속이 달랐던 것으로 파악된다. 『만기요람 萬機要覽』에 의하면, 병조 직속의 청파역(靑坡驛)과 노원역(蘆原驛) 등에는 각각 역졸이 144명, 역마가 80필씩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역에서는 매일 25필의 역마가 교대로 운영되었다. 역마의 이용은 중앙에서는 출장관원에게, 지방에서는 중앙에의 보고나 진상(進上) 때 이용되는데, 이용관원의 품계에 따라 말의 지급수와 말의 등급도 달리하였다. 출장관원이 각 역에서 말을 지급받을 수 있는 증표로 마패가 발급되었다. 마패에는 발행처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마필수가 말그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다만, 왕족이 사용하는 마패는 산유자(山柚子)로 만든 원반 표면에 ‘마(馬)’자, 뒷면에 마필수를 말그림으로 새겼다. 마패의 발급은 중앙에서는 우선 출장관원의 품계에 따라 병조가 문첩(文帖)을 발급하면 상서원이 마패를 내주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나 절도사가 가지고 있다가 중앙에의 보고나 진상을 올려보낼 때 발급하였다. 요컨대, 역마의 이용은 대전(大典)에 규정된 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남승자(濫乘者) · 남급자(濫給者), 또는 역마를 반환하지 않는 자들이 자주 생겨나는 문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때문에 법적으로 제재하는 엄한 기준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즉, 역마는 원칙적으로 1일 3식(90리, 1息은 30리)을 여행하도록 규정하였고 남승 · 남급자에게 장(杖) 1백도(度)에 유(流) 3천리, 역마를 반환하지 않는 자는 장 3백도, 도(徒) 3년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이는 잘 지켜지지 않으므로 18세기 중엽 영조 38년(1762)에는 노문(路文:마패 외에 從隷者 수와 노정을 써넣은 표)을 발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역마의 충당은 전국 목장에서 사양한 말 중에서 뽑았으나 항상 부족하여 몰수한 난신(亂臣)의 말이나 민가의 말을 징발하여 충당하였다. 한편, 역의 운영경비와 종사자들의 급료 지급을 위해 각 역에는 토지가 지급되었으며, 역마 충당을 위해서는 마전(馬田)이 지급되었다. 즉, 관둔전(官屯田) 12결, 공수전(公須田)으로는 대로 20결, 중로 15결, 소로 5결이었고, 마전에서는 대마(大馬) 7결, 중마(中馬) 5결50부, 소마(小馬)는 4결이 지급되었으나 경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근대사회를 향한 교통정책교통기능에 대한 새 인식
1876년 2월 16일,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이라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정부주도형(政府主導型)의 개화를 서둘러 나가게 된다. 따라서, 그 해 4월 김기수(金琦秀)를 수신사(修信使)로 한 일본견학사절 일행이 도일을 하게 된다. 그가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바를 여행기 형식으로 엮은 『일동기유(日東記游)』 가운데 “……길이 깨끗하다. ……도로와 거리는 평평하고 곧고 바르게 되어 있어서 길 모서리가 비쭉 튀어나오지 않고 뒷골목도 구부러져 있지 않아서……”와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의 도로에 대한 정결하고 정돈된 첫인상을 토로한 것이라고 느껴진다. 이 같이 문호개방에 따라 외국 나들이를 하게 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견문과 중국의 아편전쟁(1840∼1842)을 경험하면서 보다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세계지리 지식을 통한 자각은 교통통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예로써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하는 윤선학(尹善學)의 상소에는 교통기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옛날의 범선(帆船)과 오늘의 화륜선(火輪船)은 주즙(舟楫)의 고금(古今)의 다름입니다. 옛날의 우마수레와 오늘의 기차는 차제(車制)의 고금의 다름입니다. ……옛날의 우전(郵傳)과 오늘의 전선에 의한 통첩으로 순식간에 내왕하며 마치 서로 얼굴을 마주봄과 같은 것은 역전(驛傳)의 고금의 다름입니다…….”
한편, 김옥균(金玉均)은 도로의 수치(修治)로 국가가 부강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제기했다. 그는 1882년 일본에 다녀온 뒤 “나라를 부강시키려면 산업을 개발해야 한다. 산업을 개발하려면 치도(治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는 당시 개화파의 대변지인 『한성순보(漢城旬報)』 제26호(1884년 5월 11일자)에 「치도약론(治道略論)」을 발표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치도약론에서 “당금(當今) 세계의 기운은 날로 변하고 있다. 만국이 교통하여 윤선(輪船)이 해상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으며, 전선이 지구 위를 베를 짜듯이 달리고 있다…….”고 하면서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 교통통신에 대한 새로운 개변을 논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철도회사 · 선박(기선)회사의 설립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이 시기에는 우리 나라의 역사상 교통 · 통신부문에 커다란 혁신과 변화가 있었다. 역찰방제(驛察訪制)가 폐지되었고, 한성∼부산, 한성∼의주 사이에 전선이 가설되었으며, 도로에 관한 규정도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의 도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에 대한 홍보, 반응, 그 밖에 윤선이라든지 기차의 부설 등은 개항 이후의 국내 정치정세의 불안정과 열강세력의 이권침탈이라는 와중에서 자각적 · 자주적 입장에서 근대적 시설을 갖추어 나갈 힘이 없었던 것이다.
도로 수치(修治)에 관한 새 법령
조선시대에 도로 및 그 수치에 관한 법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 · 현실적인 성문(成文)은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법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부터였다. 당시 도로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는 묄렌도르프(Möllendorf,P.G.von)의 “길은 조악하고 교량은 드물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 밖에도 이사벨라(Isabella)의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하루 낮이 걸린다. ……도로의 폭은 겨우 1m 내외로서 논둑 · 밭둑을 지나는 길고 꼬불꼬불한 돌멩이투성이의 길이다.”, 헐버트(Hulbert,H.B.)의 “……국민생활의 동맥이라고도 할 도로의 불완전함이 한국과 같음은 지구상에 비교할 곳이 없다.”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교통기관 또한 인견마배(人肩馬背:사람은 어깨로 짐을 지고, 말은 등에 실음)라는 것이어서 사람과 축력(畜力)에 의한 유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로부터 부국자강하기 위해서 도로의 수치가 우선되어야 하고 교통시설에 대한 세계적 추세로의 전환, 통신시설의 이점과 현실적 이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이러한 정세의 변이에 따라 1896년 9월 30일 내부령(內部令) 제9호로 「한성 내 도로의 폭을 정하는 건」을 규정하고 있다. 이어 1906년에는 경무청령으로 「가로관리규칙」을 발표하여 도시의 가로에 한정되어 적용하였고, 외방도로(外方道路)에 관한 것은 각 도령으로 공포되었다. 그 한 예로 1909년 10월 14일 경상북도령 제9호로 공포된 「도로보존취체규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로체계를 통한 규칙은 1911년 「조선총독부령」으로 공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말의 도로수축과 새 교통기관
17세기 이래 끊임없이 내적인 자성과 외적인 절실한 자극에 의하여 일고 있었던 실학사상의 맥락은 그 방법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민족의 자존(自存)이라는 데에 초점이 모아졌고, 부국자강해야겠다는 의지에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자주적인 입장에서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국가정책을 추진하지는 못하였지만, 낙후된 교통정책을 개변해야 할 시대적인 당위성은 도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04년(광무 8) 도로개수계획을 성안하게 되고 1905년 12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가장 우선한 사업으로 일본 본국과의 교통편의를 위한 도로개수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 계획이 이른바 1907년부터 착수하여 7개년계획으로 진행된 도로개수사업으로서 1907년에 제1기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개수, 신설된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 하며, 명분상으로는 지역간 교통의 원활을 기하고 취로사업의 의미를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침략과 수탈을 위한 도로개수사업이었고, 취로란 반일반목의 민심을 회유하는 의미가 기본에 깔려 있었다 하겠다. 7개년계획사업은 1910년의 경술국치로 실제로는 1911년에 일단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개수된 도로 현황은 대개[표 3]과 같다.
[표 3] 한말의 주요교통로
교통
교통
대구-경주 |
전주-군산 |
광주-목포 |
광양](E0005181)-진남포 |
수원-이천 |
소정리-공주 |
신마산-진주 |
해남-하동 |
경주-포항 |
사리원-재령 |
천안-온양 |
조치원-청주 |
해주-용당포 |
황주-정거장 |
신안주-안변 |
신의주-마전동 |
진남포-광량만 |
청진-경성 |
대구-칠곡 |
원산-무산진 |
함관령 · 마천령 |
마운령 · 남갈령 |
함흥-서호진 |
영흥-유도 |
전주 부근 |
한편, 새로운 교통기관으로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전차와 기차가 놓이게 되었다. 1899년 음력 4월 서울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를 전차가 운행하기 시작했고, 9월에는 최초로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철도가 부설,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의 전차는 승차인원 40명의 회전식 개방차(回轉式開放車) 8대와 귀빈차(貴賓車:洪陵參拜用) 1대뿐이었다. 이 같은 전차의 통행은 보다 신속한 교통기관으로서의 기능은 물론이지만, 시세변동에 따른 장안의 새 명물로서 선보이게 되었다. 새로운 교통기관으로 선보이게 된 것은 또한 자동차였다. 그러나 아직 교통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기보다는 황실과 조선총독부의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리무진이 이용되었다. 그래서 1911년 황실용 리무진 1대, 총독부용 1대를 들여와서 1911년 현재 국내 자동차의 수는 겨우 4대에 지나지 않아, 자동차교통은 그 기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해운교통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에 따라 부산 · 인천 · 원산의 3개 항구가 개항되었다. 문호개방은 동시에 열강의 선박들을 개항장으로 불러들이게 되어 개항장은 활기를 띠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조선왕조는 해안봉쇄책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에 해상교통기능은 연안항해가 주였고 그것도 조운과 수운 형태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박의 보유수라든지 해운선(海運船)의 화륜선화(火輪船化), 국제항로의 개설 등이 현안의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므로 1882년의 부산 및 원산항의 입항선박 수는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것도 외국선박은 거의 일본선박이었다[표 4].
[표 4] 입항선박수 (1882)
교통
교통개항장배종류외국선박국내선박
부산 | 기선 | 33척 | |
범선 | 130척 | 81척 | |
원산 | 기선 | 12척 | |
범선 | 5척 | 1척 | |
계 | 180척 | 82척 |
그리하여 낙후된 선박의 교체를 통해 최소한 연안해운만이라도 장악하기 위한 노력으로 화륜선의 구입 허가, 연안항구로부터 인천으로 향하는 세곡운반 관리를 위한 운송국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개항장에서의 기선회사 설립은 정부뿐 아니라 민간인에 의해서도 설립,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선박의 횡행은 연안운송은 물론 대외운송(주로 對日貿易)을 일본이 독차지함으로써 개항 이후 항로의 확대는 가져왔지만, 항로에서의 활동은 거의 일본선박이 독점하게 되어 국내 해운업자들은 자연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운교통의 대부분의 기능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셈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교통교통의 기본방향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이후의 교통정책은 크게 세 가지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 내지는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교통정책이었다. 그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 의주 · 원산 · 경흥(慶興) · 부산 · 목포 · 군산으로의 철도 연결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부산 · 대구 · 대전 · 서울 · 평양 · 의주……안동으로 이어지는 철도 및 도로는 만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동남에서 서북방면으로의 종관로를 이루며, 목포 · 광주 · 전주 · 대전 · 서울 · 원산 · 청진 · 나진 · 경흥……연해주로 이어지는 철도 및 도로는 시베리아로 이어짐은 물론, 만주의 동북방면과 한반도의 남서방면에서의 종관노선을 이룬다. 이와 같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엑스선(X線)으로 연결하는 철도 및 도로는 또다시 주요 연안에 연결됨으로써 원활한 병참기지로서의 구실을 감당하게 하는 정책이라고 분석된다. 가령, 서울과 인천의 연결이라든지, 전주와 군산의 연결, 함흥 · 장진 · 강계 · 만포진……통화(通化)로의 연결, 능진(陵津) · 부령(富寧) · 김녕(金寧)……신정(新井) 등의 연결은 일제의 대륙진출을 위한 교통정책의 실현이라 할 것이다. 둘째로는 군사활동을 신속히 지원하기 위한 교통정책의 실현이었다는 점이다. 본래 교통로의 개설은 군사적인 의미와 동시에 산업교역적인 기능 수행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는 균형 있는 교통정책을 펴지 않았는데, 지역적으로 항일의병 또는 독립군의 활동, 반일민중이 잦았던 경상 · 전라지방의 일부와 관북 · 관서지방의 변경지대에 비교적 많은 도로의 건설사업이 있었던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셋째는 경제적 수탈목적의 교통정책이었다고 지적된다. 즉, 목포항과 군산항 등과 연결되는 노선들의 개수는 호남 · 호서지방의 곡창지대와 연결됨으로써 미곡과 기타 농산물을 일본으로 운송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면화의 목포항’, ‘쌀의 군산’이라는 말은 일제의 농산물 수탈의 현장을 표현한 조어(造語)라 할 것이다.
초기의 도로정책
1910년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후 설치한 교통 · 통신시설은 비록 그것이 근대적인 시설이었다 하더라도 설치목적과 그 기능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그리고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에만 있었다. 그리하여 1911년 4월에는 11개 조에 달하는 「도로규칙」을 반포하여 도로의 종별, 관리 및 비용부담 등을 규정하였다. 이어 1912년 12월에는 「도로유지수선규정」을, 1914년 4월에는 시가지에 있어서의 도표(道標) 위치를 정하고, 1915년 10월에는 「도로규칙」을 개정하여 수축표준, 유지수선표준 및 감독에 관한 규정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도로의 관리 및 유지수선에 있어서 조선총독으로부터 지방장관이 맡아하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도로와 구조물의 수축표준을 규정하여 노면의 폭원(幅員)이라든지 도로의 경사, 도로 곡선부의 중심반경 등을 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량이나 터널에 대해서도 도로의 등급에 따라 규정하였다.
치도사업
일제강점 초기의 도로정책은 한반도의 대륙침략 병참기지화에 두어 「도로규칙」을 제정하고 구체적으로 치도사업을 계획, 실시하면서 1, 2년 동안은 계획을 수정하기도 하였다. 즉, 제1기 치도사업은 원래 1911년부터 1915년까지 5개년계획이었으나 중도에 수정을 가하여 1911년부터 1917년까지 7개년계획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주요 사업은 서울시 가로의 개수, 한강교의 가설, 그리고 지방국도와 지방도로의 치도사업이었다. 다음으로 제2기 치도사업은 1917년부터 1922년까지 6개년계획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과 국내 여건(북한지방의 심한 한해와 물가폭등) 때문에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6개년계획에서 14개년계획으로 수정, 추진하게 되었다. 계획추진사업의 내용은 첫째, 북선척식도로(北鮮拓殖道路)의 개발사업이었는데, 이는 북부지방의 금 · 철 · 석탄 등의 지하자원 개발을 위한 목적에 있었다. 둘째, 국경도로의 개수였는데, 특히 압록강 어귀인 신의주로부터 만포 · 자성(慈城) · 창성(昌城) · 초산(楚山) 등 압록강 중상류지역으로서 삼림자원과 수자원의 이용 목적이었다고 하겠다. 셋째, 금산도로(金山道路)의 개발이었다. 금광업 개발 촉진과 산금증가정책에 따라 행해진 것이다. 넷째, 국경교량의 가설이었다. 즉, 두만강과 압록강에 교량을 가설하는 사업이었는데, 이는 교통연락이라든가 치안 · 산업상의 목적이 그 이유이지만 실은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의 기초작업이었다고도 할 만하다.
그 밖에 함경남북도의 국방도로의 개수사업을 포함하여 기존도로의 보수 등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군용도로라든지 경제적인 수탈을 목적으로 개설, 수축되는 사업을 용이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종전의 「도로규칙」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1938년 4월 4일자로 「조선도로령」을 제정, 공포하고, 같은 해 12월 1일부터 시행하게 하였다. 특히, 지적해 두어야 할 특징은 군용도로 · 수탈도로를 용이하게 건설하기 위하여 대폭적으로 사권(私權)을 제한한 점과 도로의 4등급 분류를 국도 · 지방도 · 부도(府道) · 읍면도의 4종으로 나눈 점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가설된 교량은 대동강의 대동교와 진주교 · 낙동강교 · 남지교(南旨橋:낙동강 中流) · 부산대교(影島橋) · 금강교 · 한강교, 그리고 통영해저도로 등이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광복 당시 전국 도로현황은 국도 5,263㎞, 지방도 9,997㎞, 시읍면도 8,771㎞, 총연장 2만 4,031㎞였다.
철도
우리나라에서 육로교통기관 중 새로운 과학문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 후의 일이다. 동도서기론자 출신인 윤선학은 상소문에서 “옛날의 우마차와 오늘의 기차는 차제(車制)의 고금의 다름입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길준도 이와 비슷한 어조로 그의 『서유견문』에서 “……고인(古人)은 육지를 내왕하는데 걸음에 대신하는 물건에 말이 아니면 수레였다. 천리 먼길을 몇 달의 여행으로 간신히 도달하였지만, 금인(今人)은 화륜차의 신속함으로 반일(半日)의 공을 소비하지 아니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개항 이후 정부주도형의 개화를 추진해 나가기 위해 일본에의 수신사 파견과 신사유람단의 파견, 중국(淸)에의 영선사 파견 등으로 견문을 넓히고 과학기술 등을 교습하게 하여 부국자강의 의지를 보였지만 많은 한계점을 노출하였다. 그 중의 한 예로 정부가 철도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이를 부설할 만한 재원이나 기술상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열강들은 한반도에 대한 정치 · 경제적 침투를 노려 갖가지 이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서의 철도부설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은 일본이었다. 1890년대 초부터 철도부설을 놓고 광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서울∼인천 간의 철도부설권은 미국인 모스(Morse,J.R.)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3월 22일 기공하여 철도부설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경인철도부설권 획득을 위한 배후공작과 모스의 자금부족 때문에 1898년 12월 17일 현상인수계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京仁鐵道引受組合)이 인수하게 되고 모스는 손을 떼게 되었다. 이 같은 경인철도부설은 1899년 6월 18일부터 인천∼노량진 간에 철도가 시운전되었다. 그 뒤 1904년 7월 8일에는 서울∼인천 간 42㎞의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철도의 부설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부설, 개통된 것으로 새로운 교통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경부선은 1901년 8월 20일 영등포에서 기공(부산은 9월 21일 기공)하여 1905년 1월 1일 운수사업이 시작되고, 그 해 5월 25일에 남대문정거장에서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경의선은 1902년 3월에 착공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공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는데, 드디어 1906년 4월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광복 후의 교통교통망과 교통정책
개화 이후의 교통망은 사회변화와 교통정책의 변천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이 시기는 크게 교통망의 자연발생기 · 골격망형성기 · 정체기 · 확충기 · 보완기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화가 이루어진 이후 한말까지는 교통망의 자연발생기라고 할 수 있다. 한말까지의 교통망은 기존의 유교적 전통문화가 바로 서구문화와 접합되어 국가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여 조선시대 초 · 중기의 교통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즉, 대부분의 화물인 세곡은 조운 중심으로 수송되어 교통중심지는 포구도시였으며, 도로망은 단순히 사람들과 소량의 화물을 담당하는 소극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도로에 대한 특별한 개발정책이 수반되지 못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주, 서울∼부산 등 몇 개 노선을 제외하면 도로사정이 극히 불량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파들에 의해 제기되기 시작한 교통의 중요성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하여 한말에는 적은 예산이나마 교통부문에 상당한 정책적인 배려를 하였다. 당시의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한국지』에 의하면, 1895년 러시아 대리공사의 진언에 따라 8달러를 투입하여 서울에서 1노리(露里)∼2노리 북쪽의 북경통로(현재의 무악재일 것으로 추정)를 폭 20척으로 확장 개설하였고, 이를 계기로 매년 5만 달러씩 도로개수비를 책정하여 서울∼인천 등의 대가로와 기타 주요 가로를 개수할 것을 결의하여 서울 및 서울인근가로를 개선하였다.
또, 항만의 경우는 1876년 부산항의 개항을 시초로 1879년 원산항, 1882년 서울개시, 1883년 인천 및 양화진 등을 개방하여 이들 항만지역에 일본인들이 자유로이 거주하게 함으로써 국제항만으로서의 기능을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항만기능강화를 위한 최소한의 증 · 개축이 불가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경부터 1945년까지는 교통망의 기본골격이 형성된 시기로서, 경술국치 · 통감부 설치 · 만주사변 · 태평양전쟁 등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의 수행기였으며, 우리 나라를 대륙침략의 전초기지 내지 경제수탈기지로 고려하였기 때문에 교통부문에 대한 투자가 매우 높았던 시기였다. 이 기간에 경인선 · 경부선 · 중앙선 · 호남선 등 대부분의 간선철도망이 건설되었으며, 도로망의 경우는 「도로규칙」(1911)과 「조선도로령」(1939)의 제정으로 서울∼부산 · 신의주 · 경흥 · 강릉 · 춘천 · 목포, 평양∼원산, 공주∼대구 구간 등 현재의 주요 도로망이 개통되었으며, 부산항 · 인천항 · 목포항 · 군산항 등의 항만이 개발되어 실질적으로 우리 나라 교통망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즉, 교통정책은 일시 · 신속 · 대량 수송이 요구되는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간선철도망을 주요 항만과 연계건설하고, 또 도로망은 치안과 통치 및 철도망의 영향권 밖의 지역들에 대한 군사 · 경제적 목적을 위해 철도기능을 보완하는 방향에서 설정되었다.
이에 따라, 교통망은 철도 중심의 교통망체계로 고착되었고, 도로망은 철도망을 보완하여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는데, 특히 가장 중요한 1등도로를 서울에서 도청소재지 · 사단 · 여단 · 요새사령부 등과의 연결도로로 정의함으로써 철도노선과 대부분 중복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남북분단, 미군정과 정부 대립, 6 · 25전쟁과 전후 복구 등 1960년대 이전까지는 일련의 정치 · 경제적 혼란으로 교통부문에 대한 투자활동도 크게 위축된 정체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관성 있는 교통정책의 수립은 어려웠다. 광복 후 초기에는 석탄 · 시멘트 등 광산물의 공급을 위한 영주∼철암, 북평∼경포, 제천∼함백, 충주∼봉양간 등 산업철도망을 건설하였으며, 도로는 국도보수공사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의 중 · 후기에는 전후 복구사업이 대종을 이루며, 교통부문 복구사업비 중 철도 복구에 투입된 비용이 약 80%를 초과하여 철도복구사업에 가장 높은 정책적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962∼1971년의 제1 · 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은 우리 나라 교통망의 확충기라 할 수 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기간(1962∼1966)에는 교통부문 예산 중 64%가 철도부문에 집중된 데 비해 제2차 경제개발계획기간(1967∼1971)에는 도로부문의 투자비율(교통부문 예산 중 47%)이 크게 증가하였다. 철도망의 경우 제1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정선선 · 남포선 · 경북선 · 교외선 · 망우선 · 경인복선 및 태백선 · 영동선(일부)을 건설하여 태백지역의 산업철도와 수도권 철도망을 크게 확장하였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대단위 공단조성에 따른 포항 · 여천 · 북평 · 전주 · 광주공단 등의 지선망인 인입선의 건설에 주력하였다.
반면, 도로망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대도시 내의 도로망과 서울∼부산 · 인천 · 춘천 및 부산∼울산, 춘천∼여수 간 등 극히 중요한 구간을 포장하는 데 그쳤으나, 제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경인 · 경부 및 호남 · 영동(일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춘천∼원주, 대천∼온양, 광주∼목포 간 등을 포장하는 한편, 서울∼의정부 · 성남 및 광주∼송정리 간을 4차선화하는 등 도로망의 대폭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다. 또, 항만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공업화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된 울산공업단지의 지원항만인 울산항의 개발을 추진하였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포항공단의 지원항인 포항신항을 건설하고, 또한 인천항을 확충하여 명실공히 공업항과 상항간의 항만기능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각 항만별 전문부두를 건설하여 항만하역의 합리화를 기하였다. 따라서, 이때의 교통정책은 기존망에 대한 질적인 개선보다 신설 등을 통한 양적 확충에 치중한 적극적 교통망확충에 기조를 두었고, 기간별로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산업철도망과 공업항 개발에, 제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고속도로 건설의 확충에 정책의 기조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1972년 이후에는 교통망을 계속 확충하는 한편, 전기 확장기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소하는 교통망의 보완기로 파악된다. 즉, 제1 · 2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1981, 1982∼1991)이 수립, 시행되고, 제3 · 4 · 5차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교통이 단순히 인적 · 물적 이동에 기여한다는 소극적 견해에서 지역개발, 인구 · 산업의 분산 등 국토개발 기능이 강조되는 등 교통이 전략수단으로 파악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교통망은 교통수요에 대처한다는 측면뿐 아니라, 지역간 균형개발을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이해되어 종합적 분담정책이 수립되었으며, 교통부문 상호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투자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도시 교통문제의 해결을 위한 지하철 · 전철망의 확충과 대량화물의 수송을 위한 산업선의 전철화와 복선화가 이루어졌으며, 대도시간의 고속도로 건설과 기존국도 · 지방도의 계속적인 포장 · 확장을 통해 교통난 해소와 함께 전국의 접근 수준을 제고시켰다. 특히, 공업화정책의 적극적 수행에 따라 그 동안 투자가 미비한 공업항 및 상항의 개발이 괄목할 만하고, 국제교류의 증대에 따른 국제공항의 확장으로 국제화시대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확충된 교통시설을 보면, 철도망은 서울 및 부산 지하철을 제외하면 수도권전철 · 산업전철 · 충북선복선 · 호남선복선 등 모두 기존 노선의 용량증대에 초점을 두었다. 이에 반하여 도로망은 호남 · 영동 · 남해 · 동해 · 구마 · 88고속도로 등을 건설하여 남북축 중심의 교통망에 미약한 동서축을 크게 보완하였으며, 전주∼군산, 서울∼문산, 서울∼의정부 간 등 산업선을 4차선화함과 동시에 주요 국도를 포장하여 대도시와 중소도시 간의 접근도 향상을 도모하였다. 또, 항만개발은 공업항으로서는 삼일 · 창원 · 온산 · 북평신항을 개발하고, 부산항의 컨테이너부두의 건설과 외항개발의 추진, 인천항의 양곡 및 컨테이너부두 건설, 군산신항 건설 등을 통한 부두의 전문화를 가속시켰고, 국제공항인 김포 · 김해, 제주공항의 청사 및 활주로 시설을 대폭 확충했다.
경제개발계획기간을 기준으로 하여 기간별 교통정책을 살펴보면, 먼저 제3차 경제개발계획기간(1972∼1976)에는 제2차 계획기간에 계획된 고속도로망의 계속적인 확충과 철도의 전철화, 공업항의 신설 · 증설, 공항시설의 현대화에 정책의 기조를 두어 부문별 투자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 제4차 경제개발계획기간 중에는 각 교통부문 내 조정에 초점을 두어 철도의 경우는 확충보다 기존 철도의 용량 증대 및 운영합리화에, 도로는 고속도로 등의 신설보다는 기존 국도망의 포장사업에, 항만은 공업개발보다 기존 상항의 전용부두 확충에 정책의 기본방향을 두어 양 중심의 교통정책에서 질적 개선을 도모하는 정책전환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정책기조는 1982년 이후 안정성장정책 기본으로 더욱 강화되어 국토개발의 방향이 특정부문 · 특정사업 중심에서 탈피하여 모든 사업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려는 제2차 국토개발계획(1982∼1991)에 따라 과거 경제의 고도성장에서 야기된 부문별 불균형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립되었다. 교통정책 방향도 철도의 경우 대도시 지하철 및 전철 건설과 경영합리화에 중점을 두었고, 도로는 도시와 농촌 및 농촌 상호간 연결망의 포장사업(총 지방로 포장의 62%가 제5차 경제개발계획기간중에 이루어짐)에 높은 비중을 두었으며, 항만도 기존 상항의 정비, 확충에 치중하였다.
제6차 경제개발계획기간의 교통정책방향은 일부 애로구간에 대한 교통난 해소와 국토의 균형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1991년 도로총연장은 5만8088km로 제5차 계획기간에 비해 약 5,000km가 증가하였으며 도로포장률도 54.2%에서 76.4%로 획기적으로 제고되었다. 철도는 노선신설보다는 복선화 · 전철화 · 장대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지하철건설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항만 · 항공시설도 수출지향적인 경제정책에 힘입어 계속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섯 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고도성장은 수송수요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으며, 지속적인 교통부문 투자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교통정체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정체는 생활에 큰 불편뿐 만 아니라 물류비용을 증가시켜 국력약화의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에 들어서 이러한 교통체계상의 애로를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교통부문의 사회간접자본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전국을 9×7의 격자형, 대도시 중심 방사순환형, 간선도로망체계를 구축하여 우선순위에 따라 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또한 도로의 이용효율을 높이기 위해 첨단 도로정보시스템의 구축과 같은 질적인 개선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철도는 경부고속철도의 노선을 확정 · 착공하고, 호남 · 동서고속철도에 대한 타당성 검토에 착수하였으며, 아울러 기존 노선의 용량증대를 위한 선형개발 · 복선화 · 전철화 등을 추가하였다.
또한 자동차 증가에 따른 대도시 도로교통망 정체의 심각성이 대두되어 서울 · 부산뿐만 아니라 인천 · 대구 · 광주 · 대전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지하철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이미 이들 대부분 도시에서 지하철 공사가 착공되었다. 특히 서울시의 경우는 수도권 주변 분당 · 일산 등 신도시를 연결하는 분당선 · 일산선 · 과천선 이외에 5 · 6 · 7 · 8호선의 착공 및 준공 등 대규모 투자가 이루졌다. 국제물류화에 따른 국제물류시설의 확충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대규모 신항만건설이 검토되었고,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에 대비한 대규모 컨테이너항의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아울러 동북아 허브공항으로서의 기능을 유치하기 위한 영종도 신공항 건설이 완공단계에 이르렀으며, 국내선 전용 지방공항 시설이 대대적으로 추진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개발계획의 기간별 교통정책은 교통부문간 투자비중에서도 찾을 수가 있겠다. 즉, 제1차 경제개발계획기간인 1962∼1966년에는 철도투자가 가장 활발하였으며, 제2차 계획기간인 1967∼1971년에는 공로 부문이 총 교통투자의 약 50%에 달하고 있다. 또, 제3차 계획기간에는 공로 및 철도부문이 여전히 높은 투자비율을 보이면서 특히 해운 투자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 제4차 계획기간에는 전체적으로는 철도와 공로 부문에 대한 투자가 높았지만(철도의 경우는 전동차 등 차량구입비 포함), 항공 부문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높았음을 알 수 있고, 제5차 계획기간에는 철도에 대한 투자가 줄어든 반면 도시와 농촌간, 농촌상호간 접근도 향상을 위해 공로 부문의 투자가 크게 높아져 지역의 균형개발에 대한 정부의 교통정책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다.
제6차 계획기간에는 공로 부문이 교통부문투자의 47%를 차지하고, 도시교통을 포함한 기타부문투자도 이전보다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교통부문 투자는 주로 도로에 편중되었는데, 특히 1982년부터 1991년까지는 그 이전보다도 투자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이에 비하면 철도나 항만의 투자는 크게 감소하였는데, 이러한 투자 불균형은 1980년대 이전에 도로 부문의 투자집중에도 불구하고 교통애로구간이 증가하여 물류비가 증가하자 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도시화에 따른 도시교통문제가 심각해졌음을 반영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중앙정부, 지자체와 채권 등에 의한 교통시설에 대한 투자규모는 199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92∼1997년 동안의 교통부문 투자규모는 연평균 20%씩 증가하여 재정규모 증가율을 상회하였다. 부문별로 보면 공로 · 철도 · 지하철은 평균 증가율보다 높은 반면, 도로 · 항만은 규모는 증가하였으나 증가율은 평균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다. 이 기간 중에는 인천국제공항, 광양 · 아산 · 부산신항만, 경부고속철도의 국책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대도시권의 도시철도사업이 본격화되었다[표 5].
[표 5] 기간별 교통부문 투자비율 (단위 : %)
교통
교통구분\기간1962∼19661967∼19711972∼19761977∼19811982∼1985총결산 중 교통부문 투자액
7.09 | 10.37 | 9.56 | 7.10 | 6.70 | |
자료 : 예산개요(경제기획원, 1970∼1985). |
국내수송구조
철도가 부설되기 이전까지는 우리 나라의 국내수송은 사람의 통행은 비록 세로(細路)에 불과하였지만 주로 도로가 담당하였고, 화물의 통행은 강을 중심으로 한 조운이 담당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이와 같은 수송구조가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통행은 단거리통행이었고, 화물(주로 지방에서 왕도로 운반되는 세곡)은 일시 대량수송이 가능하고 수송비용이 저렴하며, 또 전통적으로 항해술이 발달된 조운을 이용하는 것이 크게 유리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00년대 초 이후 철도건설 초기 이후 자동차의 발달은 미미하였고 도로여건이 불량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객 및 화물수송은 철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철도가 조운의 대량화물수송에 비하여 신속성 · 경제성 측면에서 크게 유리하였기 때문이며, 여객의 경우에는 민간공로 수송수단의 발달이 늦어 지역간 수송은 철도 이외의 다른 수송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후기부터는 대도시지역의 가로 개량사업과 지역간 도로가 다소 확충됨에 따라 단거리수송을 중심으로 공로수송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하여 철도의 절대우위 분담체계에서 거리대에 따른 분담구조가 점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는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에 따라 도시 내 도로뿐만 아니라 지역간 간선도로망도 대폭적으로 포장,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망의 개선이 크게 이루어지고 공로 교통수단도 크게 발달하였다. 1962년의 수송수단별 분담체계를 살펴보면 여객의 경우 철도가 총 여객통행(인㎞)의 51.0%를 담당하였고, 공로가 47.5%를 분담하여 철도와 공로는 거의 대등한 분담체계를 유지하였으나 단순수송량(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각각 13.0%, 86.4%로 나타나 공로의 분담이 크게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화물의 경우도 수송량 · 거리(톤㎞)에서는 철도가 87.2%, 공로가 8.5%로 철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수송량(t)만으로 보면 철도와 공로가 각각 48.6%, 45.9%를 점하여 비슷한 분담체계를 보인다. 따라서, 1960년대의 분담체계는 여객의 경우 단거리수송은 공로가, 중 · 장거리는 철도가 절대우위를 보이고, 화물의 경우는 철도가 절대우위 상태이나 공로가 과거에 비해 철도분담을 크게 잠식하여, 전체적으로 거리대에 따른 수송수단간 분담체계의 분화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경인 ·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효시로 전국적인 고속도로망이 형성되고, 수출입 화물량도 크게 증대함에 따라 항만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철도도 전철화 · 복선화 등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괄목할 변화는 공로 부문의 급성장이다. 즉, 항만의 경우 주로 수출지향적 경제정책에 따른 국제항의 확충에 치중하였으며, 철도의 경우는 대도시 지하철건설을 제외하면 주로 전철화 · 복선화라는 질적 개선에 치중한 반면, 공로 부문은 고속도로망의 건설과 함께 국도 · 지방도 등에 대한 포장 · 확장사업의 적극화로 질적 · 양적 개선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의 수송구조를 살펴보면 여객수송의 경우, 대도시운송에서는 지하철 · 전철의 확충으로 철도분담이 증대되고 지역간 수송에서는 공로분담이 크게 증가하였다. 화물수송의 경우 대량 및 중 · 장거리수송은 철도 · 해운수송분담이 높아지고, 단거리화물은 공로분담이 크게 증가하여 전체적으로는 공로우위 분담체계를 나타내고, 다만 화물종류에 따른 수단별 특화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1985년도의 분담체계를 보면, 여객의 경우 수송인으로 보면 철도 · 공로의 비율이 각각 4.4% · 92.6%로 공로분담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으나, 대도시 지하철 수송분담은 1976년 0.6%에서 1985년 2.9%로 연평균 28.5%(같은 기간 공로수송량 증가율 8.6%)씩 늘어나 지하철 중심의 단거리 분담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지역간 수송에서는 고속도로 통행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71년 총 공로여객수송 중 고속도로 이용객이 14.0%에서 1985년 17.9%로 증가되어 중 · 장거리의 공로분담률이 높아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화물의 경우 1985년 말 철도 · 공로 · 해운의 비중이 각각 23.2% · 62.5% · 14.3%이고 수송거리가 감안된 수송톤㎞ 측면에서는 각각 39.6% · 22.9% · 37.5%의 분담구조를 보여 같은 기간 동안 연안수송량이 비교적 높은 증가를 하였으며, 거리별로 볼 때 해운이 341㎞/t, 철도 222㎞/t, 공로 48㎞/t으로 나타나며, 무연탄 · 양회 · 광석 · 유류 · 비료 등 대량화물의 1차수송은 대부분 해운 및 철도가 분담하는 반면, 이들 화물의 2차수송과 일반화물은 공로가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의 여객수송분담을 과거의 변화과정과 함께 살펴보면 도로는 전체 수송수단중(비영업용은 미포함) 1991년에 86.8%, 1996년에 83.2%를 차지하여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83% 이상의 높은 수송분담률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공로 부분을 영업용과 비영업용(자가용)으로 구분할 때, 1990년대 이후 점차적으로 영업용수송분담은 낮아지는 데 비해 비영업용(자가용)의 수송분담률이 높아지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도로에 의한 수송실적이 기타 교통수단에 비하여 너무 높아 수송수단별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철도의 여객수송 분담률은 지하철과 일반철도를 합산하여 살펴볼 때 1985년의 경우 7.3%를 보임으로써 매우 저조한 수송 분담률을 나타내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지하철의 이용으로 전체 수송인원 중 일반철도의 4.6%보다 많은 8.4%가 지하철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도로의 혼잡 등으로 인한 일부 수요가 지하철로 수단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1996년의 경우 지하철 및 일반철도에 의한 수송분담률은 16.5%로 나타났고, 이 중 10.6%가 지하철의 분담률이었다. 또한 일반철도와 지하철은 수송분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수송량도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해운에 의한 여객 수송은 반도국가이면서도 매우 비중이 낮다. 연안여객 수송도 일부 섬에 연육교가 건설되어 이용객이 줄어들고 있었다. 다만, 관광수요가 증가하면서 최근에 다시 연안 여객 및 국제 페리 여객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화물의 수송수단별 수송실적을 살펴보면, 화물의 경우도 대부분 도로를 통한 수송량이 가장 높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철도에 의한 화물수송이 도로보다 우위에 있었던 반면, 1971년에는 도로 부분의 화물수송비율이 매우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꾸준하게 지속되어 1976년 화물수송의 분담률은 도로 62.0%, 철도 28.9%를 보이고 있으며, 1985년에는 도로 62.5%, 철도23.2%로 나타나 철도의 화물 수송분담률이 급격히 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1996년의 경우는 철도의 화물 수송분담률이 8.6%로 나타났고 반면 도로의 화물수송 분담률은 68.7%로 나타나 화물의 공로 수송분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편 해운의 화물 수송분담률은 1960년대 이후 1970년대 말까지 계속 감소하다가 1985년 14.3%, 1996년 22.7%로 나타나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항공에 의한 화물수송은 미약하지만 5년 단위 변화율을 살펴볼 때 계속 배 이상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공로 부문의 여객수송거리는 1962년도에 전체 수송수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수송수단별 수송량의 비율과 비교할 때 현격히 감소된 비율로서 도로의 경우 장거리 통행보다는 중거리 · 단거리의 통행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거리를 감안한 수송수단별 분담율을 5년 단위로 살펴보면 도로의 경우 1981년에 73.9%로 1985년엔 73.1%로 되었고, 도로의 수송실적은 1991년 63.5%, 1996년 58.7%로서 약간의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철도는 일반철도의 경우 수송분담률이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를 보여 철도의 이용이 감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물 수송거리에 의한 수송실적은 1965년 공로에 비해 철도의 수송량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것은 동년 단순 화물수송실적중 공로의 화물수송분담률과 철도의 화물수송분담률, 해운의 화물수송분담률을 비교한다면 수송량에 비해 철도를 통한 화물의 거리가 높다는 것이고, 철도수송은 장거리 수송이 가장 많다는 것을 말해 준다. 1970년대 이후 공로를 통한 수송량은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반면 철도를 통한 수송실적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1981년 철도의 수송실적은 전체의 45.8%였으나 5년 후인 1985년에는 39.6%, 1991년에는 29.2%, 1996년에는 16.5%로 감소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해운의 경우, 1962년에는 수송분담률이 매우 미미하였으나 1971년에는 약 7배가량 증가하였고, 1976년 28.2%, 1991년 49.6%에서 1996년에는 59.1%로 점유율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는 해운을 통한 화물의 수송거리도 길어지고 수송실적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수송구조
국제수송수요는 국내수송수단과 분담체계와는 달리 비교적 분담구조가 단순하다. 즉, 개화 이후 항공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여객과 화물 모두 선박을 주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였고, 광복 이후 경제개발에 따른 소득상승으로 여객은 항공, 화물은 선박으로 점차 수송수단이 특화되기 시작하였다. 개화 초기에는 오랜 쇄국정책과 폐쇄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하여 국제교역은 극히 부진하였고, 특히 상공업에 대한 천시사상과 ‘제후국은 사사로운 외교관계를 가지지 못한다(諸侯國人臣無私交).’라는 관념체계가 그대로 이어져 국제간의 교역을 크게 중시하지 못하였다. 강화도조약 이후에는 일본의 강요에 의한 교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880년대 초까지는 약 90%의 물동량이 일본과의 교역량이며, 1882년 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韓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된 이후 청일전쟁(1894)까지는 청나라와 일본의 대등한 무역관계가 형성되었으나, 전쟁 이후 다시 승리국인 일본 중심의 무역체계를 형성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의 교역은 민족자산의 수탈과 만주사변 · 태평양전쟁의 수행을 위한 전쟁물자보급이라는 차원에서 쌀 · 두류 등 농작물과 석탄 · 철광 · 연 · 원목 · 금 · 은 등 천연자원을 반출했으며, 반입품은 일본에서 생산된 전쟁수행물자가 주종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남북분단과 미군정, 6 · 25전쟁 등 정치 · 경제적 혼란이 가증되어 민간무역은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수입물량의 대부분은 국제교역이라기보다 전후복구물자 및 구호품이 대종을 이루었고, 수출품은 민족항일기와 유사한 형태로 천연자원 중심의 석탄 등 원자재가 대부분이었다. 안정을 찾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점차 수출입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국내 산업시설이 미약하여 제품수입 · 원료수출의 무역형태는 초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한편, 여객수송은 개화 이후 민족항일기까지는 주로 한국∼일본 간 페리선박을 이용한 통행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장거리항공망이 형성됨에 따라 점차 항공수요가 증대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초부터는 항공여객의 분담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공업화는 궁극적으로 수출산업의 육성에 기초를 두었고 자연히 수출지향적 정책이 우선하게 되어 국내산업의 고도화가 함께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국제해운 및 항공수송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경제개발 초기단계부터 현재까지 국제여객수송은 연평균 70% 수준씩 증가하였고, 화물은 연평균 90% 수준씩 늘어나 국내 수송량의 평균증가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국제수송량은 공업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수행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의 약 10년 사이에 가장 많은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두 차례에 걸친 유류파동에 따라 국제적인 경기후퇴와 함께 증가율이 크게 둔화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개발과 함께 국제여객 및 화물의 수송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러한 여객 및 수출입화물 수송수요의 증대에 대비하여 제2민항의 출범, 공항의 확장, 대형부두건설, 공업항 등의 신항만 건설, 연안화물부두의 확장과 기존 시설의 유지보수, 항행보조시설 등 중점을 두어 투자하였다. 항공여객은 1988년부터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내국인의 출국도 크게 늘어났다. 1985년 약 440만 명에 불과하던 국제선 여객은 1990년 927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1997년에는 1,549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환승여객이 국제선 항공여객의 14.3%를 차지하였다. 1996년의 항공여객은 1985년 44만 명의 3.6배인 1,600만 명에 달하고, 해운의 화물은 1996년의 해운화물은 1985년의 1억 3,300만t의 3.3배인 4억 4,100만 톤으로 매우 높은 증가를 보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이전의 시설투자에도 불구하고 급증하는 국제화물수요를 시설수요가 따라가지 못하였다. 여러 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해 오면서 무역규모의 증가에 대비하여 항만시설을 계속 확충하기는 하였지만 해상화물량 및 시설 소요화물량이 항만시설능력을 항상 초과하여 왔으며 현재에 와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위기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1986년 이후 1991년까지 항만시설의 연평균 증가율은 총화물량의 증가율(12.7%)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또한 접안시설의 확충은 GNP 실질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서 이루어져 항만기본시설의 부족이 누적되어 왔다[표 6].
[표 6] 국제수송량의 증가추이 (단위 : 천인, 백만t, %)
교통
교통수송량분담률수송량분담률수송량분담률수송량분담률수송량분담률해운항공해운항공
구분\기간 | 1966 | 1971 | 1976 | 1981 | 1985 | ||||||
여객 | 12 | 8.4 | 38 | 7.0 | 63 | 3.0 | 51 | 1.5 | 65 | 1.5 | |
131 | 91.6 | 508 | 93.0 | 2,014 | 97.0 | 3,229 | 98.5 | 4,382 | 98.5 | ||
계 | 143 | 100.0 | 546 | 100.0 | 2,077 | 100.0 | 3,280 | 100.0 | 4,447 | 100.0 | |
화물 | 8.4 | 100.0 | 28.5 | 100.0 | 55.8 | 100.0 | 105.3 | 100.0 | 133.0 | 100.0 | |
- | 0.0 | - | 0.0 | - | 0.0 | 0.2 | 0.0 | 0.3 | 0.0 | ||
계 | 8.4 | 100.0 | 28.5 | 100.0 | 55.8 | 100.0 | 105.5 | 100.0 | 133.3 | 100.0 | |
자료 : 교통통계연보(교통부, 1972∼1986). |
항만물량의 품목별 수출입 구성비를 보면, 경제개발계획 초기에는 과거와 같이 섬유류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조품이 수입되고 원료가 수출되는 후진국형 무역구조를 보였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는 무역구조가 개선되기 시작하여 수입되는 품목은 원유 · 유연탄 · 철광석 · 양곡 · 목재 등 상품제조를 위한 연료와 원료가 대종을 이루게되었다. 반면, 수출품은 전자 · 시멘트 · 비료 · 기계 · 화학제품 등 제조품이 주종을 이루어 점차 선진국형 무역구조로 전환되었으며, 특히 컨테이너 화물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1994년 관세청 수출입화물총계에 의하면 항만을 경유한 화물은 수입 2억 5,867만 8,000M/T, 수출 6,425만 7,000M/T로 총 3억 2,293만 5,000M/T에 달하고 있다. 화물의 품목을 보면 양곡은 인천항이 약 75%를 담당하며, 철강제품은 인천항 · 광양항 · 마산항 · 부산항 · 울산항 및 포항항 등 6대 항만에서 3,360만 6,000t이 처리되었다. 석탄의 경우 3,966만 8,000t으로 포항항 · 광양항 · 군산항 · 마산항 · 동해항 등에서 주로 처리되었으며, 컨테이너는 4,13만 8,000TEU의 92.7%가 부산항에서 처리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만기요람(萬機要覽)』-재용편-
『고려도경(高麗圖經)』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동지지(大東地志)』
『교통정책의 변화와 과제』(국토개발연구원, 1998)
『한국도로사』(한국도로공사, 1981)
『교통통계연보』(교통부, 1972∼1997)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6-13 작성자 청해명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