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요한 3,14-15)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께 연이어 질문을 던지는 니코데모의 모습에서 진리와 지혜를 향한 그의 강한 열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그 이전의 내용과 더불어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는 니코데모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진리와 지혜에 대한 강한 열망은 있었지만,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진리와 지혜를 받아들일 믿음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3,9)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니코데모의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그 내용이 담고 있는 뜻과 깊이와 넓이가 너무 깊고 넓고도 심오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도대체 이미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의문에 사로잡힌 니코데모는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이러한 의문에 답을 해 주려 하시기보다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탓하십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사실 율법학자이자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는 자신이 바리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이 분이야말로 하느님이 약속한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니코데모의 믿음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아닌 예수님이 이루신 기적에 바탕을 둔 불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의문과 의혹에 사로잡혀 이것저것을 묻는 그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하시기보다 그의 믿음의 불완전함을 일깨워 주시고 온전한 믿음, 곧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 그 분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8)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모든 지각과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는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특별하고도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방식은 우리의 눈에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며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은 바로 그 방식의 특별함으로 우리의 눈에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어 보일지라고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특별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바로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순수한 믿음뿐입니다. 내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그것을 믿지 못하여 의심하며 고민하기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며 했던 그 말씀 그대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그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믿음, 하느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 그 믿음을 요구하시며 그 믿음으로 통해 당신의 크고도 깊은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위한 표징으로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시며 바로 그 표징을 우리가 성당을 들어오며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 눈으로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오늘 복음말씀을 인용한 복음환호송의 말씀이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요한 3,14-15)
오늘 독서의 사도행전의 말씀이 전하듯 초기 교회 공동체는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으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살아가면서도 그 누구도 궁핍한 사람 없이 살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통해 당신의 깊고도 큰 뜻을 이루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의 방식을 믿고 하느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십시오. 그러면 자애가 넘치는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의 그 믿음을 보시고 여러분 안에서 당신의 큰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삶,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사랑으로 새로 거듭나는 삶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에 소중한 도구이자 그 사랑의 수혜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묵시 19,7.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