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석
짐 자무쉬(Jim
Jarmusch) 감독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 1984)을 처음 본 게 언제 어디서였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대학에 들어간 뒤니까 아마도 90년대 중반의
코아아트홀이나 동숭아트홀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남들이 흔히 보지 않을 것 같은 작가주의 영화를 애써 찾아다니는 풍조가 있었는데 따르꼽스끼(A.
Tarkovsky)나 왕 자웨이(王家衛)의 영화를 뜻도 모른 채 소비하던 무리에 나도 끼어 있었던 셈이다.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조감독 시절 얻어낸 자투리 필름으로 만들었다는 이 장편 독립영화가 우리의
감수성에 끼친 영향을 일일이 가늠할 능력은 없지만 황량하고 삭막한 흑백화면 위를 가득 채웠던 어떤 상실감만은 고스란히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뉴욕의 빈민가를 전전하던 깡마른 두 청년 윌리와 에디에게 어느정도 공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머리 위에 삐딱하게
얹은 낡은 페도라와 주류문화에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아웃사이더 이미지에 대한 선망 비슷한 감정도 조금은 스며 있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영화의 주인공들은 플로리다로 떠난다)에 ‘멋진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따윈 영화 속은 물론이려니와(플로리다의 도박장에서 윌리와 에디는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한다)
현실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어쩌면 「천국보다 낯선」의 진짜 주인공은 ‘떠남’ 그러니까 정처 없는 여로(旅路) 자체인지도 몰랐다. 로드무비라는
용어가 일상어로 흔해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거기서도 우리(‘우리’라고 해도 될까?)는 조금 비켜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겨우 남아 있던 쇠퇴기의 운동권문화에 대해서나 이른바 X세대로 표상되던 주류 소비문화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미국 로드무비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조차
‘우리’ 자신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같고도 다른 선망과 체념
민주화 이후 세계화를 연호하던 문민정부 시대에 이른바 기본계급에서도 거지반
탈락하다시피 한 출신성분(?)의 영향이었을까. 그나마 가장 싼값에 자신을 투사할 수 있었던 게 영화니 음악이니 하는 문화상품들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 무렵에 펑크록을 기반으로 하는 홍대 인디씬이 번성했고 ‘우리’는 그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던 모종의 상실감을 열렬히 선망했다.
그렇다. 우리는 ‘선망’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희망이나 ‘다른 세상’ 따윈 거짓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영화와 음악
속에서 우리는 거꾸로 다른 세상과 닮은 무언가를 언뜻 목격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은 앞서나가 있는 것처럼, 요샛말로 치면
‘힙’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테니까.
힙스터 혹은 힙스터 문화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영화 속
윌리와 에디의 페도라와 빈티지 패션은 조금 달라진 형태로나마 힙스터의 상징이 되었다. 서평 형식으로 씌어진 김사과의 산문 「힙스터는 어디에
있는가」(『0 이하의 날들』, 창비 2016)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힙스터들은 더이상 창조적이고 급진적인 반문화가 태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존의
반문화를 패션이자 라이프스타일로 소비하는 최첨단 소비집단이다. (…) 힙스터 세계에서 삶의 모든 영역은 패션이 되어버린다. 아니 새로운 패션을
위해서 현실을 액세서리화한다. 이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하층계급의 스타일을 열심히 수집해온 것에서 잘 드러난다. 노동계급들이 마시는 맥주, 그들이
입는 옷, 그들이 사는 지역의 거친 풍경, 빈티지에 대한 애호, 언뜻 이 모든 것은 타자에 대한 열린 태도로 느껴지지만 힙스터들은 오직 멋져
보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가난한 자들이 가진 생생한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이
슬럼가에서 내쫓기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내쫓는 움직임의 최전선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14~15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된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이 유입되면서 기존의 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이라는
사회학 용어가 사람들 입에 쉽게 오르내리게 된 배후로 흔히 힙스터 문화가 지목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인데, 이제는 이러한 진단조차
얼마간 익숙해진 게 사실이기도 하다. 홍대 힙스터의 아이콘이었던 혁오밴드가 인기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한 이후 주류 스타덤에
흡수되어버렸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문제를 자본 탓으로 돌리는 발상들은 상투적이다. 게다가 더
나쁜 경우 그것은 자본의 위력에 대한 체념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자본의 지배가 엄연한 현실이더라도 그 안에는 그것을 상대화할 계기들이 언제든
싹트기 마련이지 않은가.
진짜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
쎌럽들의 찬사 속에 새 싱글곡 「Everything」을 발매한 원조(?) 힙스터
‘검정치마’가 국내 최대 기획사 중 하나로 꼽히는 YG 계열의 레이블 하이그라운드를 통해 복귀한 정황도 힙스터 문화와 자본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확신’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검정치마의 음악에는 여전히 자본의 포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혹은 그것에 반하는 듯한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넌 내 모든 거야”를 반복하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가사가 거꾸로 ‘내게 너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순도 높은 고립과 상실의 감정을
전달한다면, 두터운 고양감을 위주로 하는 사운드 구성은 그와 달리 일종의 해방감을 제공하는데, 이는 힙스터 문화가 자본에 대한 투항인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반문화(counter-culture)의 아이러닉한 전통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혁오밴드와 검정치마가 마련한 대중적 공감대로 보건대 90년대의 ‘우리’가 「천국보다
낯선」에서 막연히 선망했던 바로 그 ‘세련된’ 상실감을 비로소 내면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힙스터 문화 자체나 자본에 의한 그것의 포섭
여부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바랐던 것은 어쩌면 윌리와 에디의 세상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윌리와 에디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그 너머의 다른 세상에 다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선망의 시절을 멀리 떠나온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곳은 나쁜 ‘다음
세상’이지 진짜 ‘다른 세상’은 분명 아닐 테니까.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16.3.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