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들 사이의 페니키아
초강대국 아시리아 치하의 페니키아
아시리아. 인류 최초의 군국주의 국가로 악명 높은 이 제국은 의외로 기원전 2500년부터 일어나서 페니키아 못지않은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나라다. 페니키아가 주인공인 이 글의 성격상 길게 다룰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지금의 이라크 북부에 자리 잡고, 긴 역사를 가졌지만 명군을 만나 몇 번 반짝했던 시절을 제외하면 결코 고대 오리엔트의 중심국가라고 볼 수 없었던 이 나라는 아슈르 단 2세(Ashur-dan II, BC 934~912 재위)가 아람인과 산악민족의 제압에 성공하면서 오리엔트의 중심국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다드 니라리 2세(Adad-Nirari II, 기원전 911~891 재위)는 정복 사업을 재개했으며, 사회 각 부문의 개혁에 성공했으며, 그의 손자인 아슈르 나시르 팔 2세(Ashur-nasir-pal II, 기원전 883~859 재위)는 지중해 연안과 이집트 변경까지 정복활동을 벌였을 정도로 강성해졌다.
이 후 국내의 분열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일시적으로 국력이 쇠퇴했지만 아다드 니라리 3세(Adad-Nirari Ⅲ, 기원전 810-783 재위)가 즉위하자 내부 수습에 성공하면서 다시 당대 최고의 강대국으로 발돋움 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기원전 746~727 재위)는 군대 개혁에 성공하면서 다시 군사적 정복에 나섰는데, 이때부터 정복지의 중앙집권적 속주화와 정복민의 강제 이주라는 전에는 없었던 ‘폭압적인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기록의 부족으로 자세한 자초지종까지는 알 수 없지만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 역시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이런 역사적 태풍을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기원전 738년경에 이르면 비블로스를 제외한 북부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아시리아의 속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티레는 어느 정도 정치적 독립을 유지 할 수 있었지만 발굴된 아시리아의 사료에 의하면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얻었던 ‘자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공물을 바친 티레의 왕은 기원전 739년에서 10년간 재위했던 히람 3세였다. 당시 페니키아는 지중해 최대의 구리 산지인 키프로스도 총독을 보내 지배했다는 사료가 확인되고 있다. 2년 밖에 왕위를 누리지 못한 히람 3세의 후계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에게 무려 150탈렌트에 달하는 금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티레를 비롯한 페니키아의 자유 역시 더 강력한 제국을 추구하는 아시리아의 군주에게는 허용할 수 없는 존재로 비춰졌다.
기원 8세기말, 티레와 시돈의 왕인 엘라이오스 Elulaios (재위 729-694년)는 아시리아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아시리아의 기록에서는 루리 Luli라고 불리고 유대 쪽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 왕이 페니키아 쪽으로 대원정을 시작했고, 공포에 휩싸인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차례로 티레의 영향권을 벗어나 아시리아에 무릎을 꿇었다. 이 과정에서 150년 이상 지속된 티레와 시돈의 동군연합 역시 붕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