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화두를 드는 연습이 다소 익숙했습니다.
분심으로 정진한 적도 있고, 다리를 바꾸지 않고 오래 앉았다가 치질에 걸렸던 경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좌선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화두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이 화두는 거울이 되어 내 마음과 세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이 거울에 오온을 비춰 볼 수 있었습니다.
색, 수, 상, 행, 식.
위빠사나를 수행하지 않지만, 저는 이 거울에 신, 수, 심, 법을 비춰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몸뚱아리와 생각, 느낌, 감각 그리고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세계를 화두라는 거울을 통해 비춰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 공부는 거울을 닦아 그 거울에 비춰진 그림자를 낱낱이 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그림자는 그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거, 특별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비록 마장이라도 의미가 있었고, 그 역경계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일들에 오히려 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저는 화두를 놓고 대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왔습니다.
간화선은 좌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진은 자나 깨나, 행주와좌 어묵동정,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두를 들고 이 거울에 비춰진 모든 부처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이 부처님은 보리방편문에 나오는 화신일 수도 있고, 보신일 수도 있고, 법신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며 이 거울에 오온을 비춰 보았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을 비춰 보고, 또 신, 수, 심, 법을 비춰 보았습니다.
8주 과정의 마인드풀니스(마음 챙김) 명상을 배울 때 호흡 명상이라는 거울에 오온을 비춰 보았던 것처럼, 사념처를 비춰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추측컨대, ‘옴마니반메훔’ 진언을 하면서, 얼마든지 이 오온을 또 사념처를 비춰 볼 수 있겠다는 판단도 내립니다.
티벳 불교라는 게 깨름직한 면이 있었는데, 그들의 만트라를 통해 얼마든지 우리의 오온과 또 사념처를 비춰 볼 수 있겠구나 하면서 경의를 보냅니다.
그들의 남녀 교합상은 욕망을 명상으로 전환(transformation)하는 순기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인드풀니스 명상에서 진행하는 건포도 명상이나 먹기 명상처럼.
그것은 조계종 스님들께서 해우소에서 외우는 ‘옴 하로 다야 사바하’ 입측진언과 다르지 않겠구나 하는 판단입니다, 똥 싸는 일상은 성스러움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어렴풋이 기독교인들도 ‘오, 주여!’하면서 이 거울을 통해 오온을 또 사념처를 비춰 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가늠하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는 걸음을 걸으면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구령 대신에 마음 속으로 일보일보에 목탁을 치며 ‘나무, 아미, 타, 불’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며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이젠 음악을 듣는 대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시내 버스 안에서도 가장 행복한 공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https://m.cafe.daum.net/vajra/2tys/104717?svc=cafeapp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우주의 총대명사 나무아미타불!
일상삼매 일행삼매로 가장 행복한 공부 성취하시길…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