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0년에 어느 성당의 미사 중에, 저희 부부가 발표한 가족 사랑에 대한 체험담입니다.)
- 가족, 사랑의 일치로 죽음을 이겨내다 -
(H)김 유영 미카엘 (W)정 미애 젬마
오늘은 가정의 대희년 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초 조직이며 그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참된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바탕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혼률이 30%를 넘어서고, 재산 문제로 형제들이 갈라서는가 하면, 심지어 재산상속을 받기 위해 부모를 무참히 칼로 찔러 살해하는 등, 가정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가정의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가정의 소중함>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의 일치가 얼마나 신비로운 힘을 가지는가>를 저희 가족 체험을 통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또 저희 가족이 <사랑의 일치를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가족 소개) 저는 5남매의 맏이 입니다. 부모님은 경북 청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남동생이 둘, 여동생이 둘 있습니다. 물론 모두 결혼하였습니다. 저희는 딸이 둘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 저는 작년 10월에 간경변 말기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의 만성간염 투병생활을 해오면서,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의 보람도 없이,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고, 정신이 혼미해져, 저 자신의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꽂은 채 있으니,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두 딸의 얼굴이 가물거렸고, 장남인 저를 자랑삼아, 고향에서 노후생활을 즐겁게 하고 계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눈앞에 맴돌았습니다. 이제 모두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간이식 수술로 과연 살 수 있을까? 간은 누구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인가? 1억원이 넘는 막대한 수술비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살신성인) 이런 저의 모습을 눈치 챈 젬마가 "무엇을 걱정합니까?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당신을 살리겠습니다. 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시다." 하고 말해 주었을 때, 백만 원군을 만난 듯 새로운 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또 예민한 시기라, 이야기를 하지 아니 했습니다만, 어느 날 아침, 다른 사람과의 전화통화를 듣게 됨으로써 알게된 큰딸 클라우디아는, 인터넷을 통해 간이식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습니다. 정상인에 비해 너무나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간경변 환자의 간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고, '아빠가 이런 지경이시라니' 하며 놀라면서, 혈액형이 같으면 간이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클라우디아는 저에게 와서 두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아빠, 간이식 수술하세요. 제 간을 드릴게요." 부모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간 일부를 아빠에게 주겠다고 나선 클라우디아의 마음이 기특하고 한량없이 고마웠지만, 시집도 안간 어린 딸의 배를 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딸에게, "그래, 고맙다. 그렇지만 좀더 생각해보자."고 말해 주었습니다.
w) 저는 청도 시댁에 내려가, 시부모님과 동생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몇 년 동안의 투병동안 병원에서는 해결 방안이 없었고 또 해결할 수 없는 걱정만 안겨 드리는 것 같아서 미카엘의 상태를 자세히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과 형제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걱정 말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하더니, 이게 뭐냐는 질책과 분노를 어떻게 받아 안을까? 몇 년째 오지 못한 이 귀향 길 미카엘은 정녕 이 길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집에 혼자 남아 있는 미카엘에 대한 염려와 시댁 가족들의 비난과 원망의 소리에 두렵고 무거운 고향 길이었는데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혼자 내려오는 저를 기다려 주시는 어머님 이었습니다. 자식의 고통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어머님의 가슴 에이는 아픔을 속으로 삭이면서 오히려 저의 손을 잡고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면서 다독거려 주셨습니다. 미카엘과 아이들 앞에서 어두운 한숨 한번 내쉬지 못하고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 졌습니다. 부모님 가슴에 이런 대못을 박는 불효를 하게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이 자리에서 칠순이 넘은 아버님부터 동생들 모두, 걱정 말라고 위로하며, 서로 먼저 간을 내어놓겠다고 말씀해주었을 때, 저는 그만 목이 메였습니다.
h) 저는 동생들, 또 제수씨 그리고 매제 모두, 어린 조카의 배는 가를 수 없다며, 서로 먼저 간을 내어놓겠다고 한다는 소식을 젬마로부터 전해 듣고 '가족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명도 나눌 수 있는 것이 가족이구나!' 생각하며, 동생들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아버지는 전화로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내가 간이식을 하면 안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가족들의 이런 살신성인의 사랑이 있는 한, 저는 이미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가족들의 이런 사랑의 일치된 모습 속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저의 치유에 대한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결국, 둘째 남동생이 자기의 간이 제일 튼튼하다고 나서서 저와 함께 지난 3월 수술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정밀 검사를 해보니 동생의 간 크기로는 수술 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와, 수술이 취소되었습니다. 이 때, 클라우디아가 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여동생이 어린 조카는 안 된다며 자기들이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저는, 모두 정밀 검사를 해보아, 가장 튼튼한 사람이 하기로 하고 정밀검사를 했는데, 집안 내력인지 모두 간 크기가 작아, 수술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결국 의사의 권유로 두 사람으로부터 간을 받아서 이식하게 되었습니다. 시집간 고모들은 시댁 눈치도 봐야하니, 자기가 아버지를 꼭 살려야겠다고 나서는 클라우디아와 남동생, 두 사람으로부터 간이식을 받는 세계최초의 수술이 이렇게 해서 지난 3월 21일 25시간 동안에 걸쳐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희생적인 사랑과 주님의 은총으로 수술은 성공 하였고, 저는 죽음을 이기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의 일치가 죽음도 이겨낼 수 있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또 사랑의 일치 속에 주님 함께 계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보통의 삶) 저희 가족들의 이야기가 각 TV, 방송, 신문을 통해 알려지고, 또 성남시장과 서암 문화 재단으로부터 클라우디아가 효행상을 받으면서, 많은 이웃사람들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동생과 클라우디아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며 쑥스러워 했습니다. 저희 가족들의 삶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모,형제, 부부,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모님은 저희들에게 물질적인 재산을 물려주시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저의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또 이웃 누구에게나 말로써 상처를 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늘 이해하려고 하셨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늘 보여 주셨습니다.
(w)제가 시집을 와서 낯선 부엌에 익숙치 못하던 시절에 아버님께서는 새벽 일찍 소죽을 끓이시며 구운 고구마를 부엌 뒷문으로 슬며시 건네주시던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저희 며느리들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을 제일로 여겼습니다. 언젠가 제가 "어머니! 저의 주변을 둘러보면 젊은 새댁들이 아이들을 핑계 대며 시댁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둘째나 셋째는 참 착해요." 하였더니 "아이구 걔네들은 아파트 다 둘러봐도 우리 형님 만한 분 안 계신다며 너 칭찬을 하더라" 하셨습니다. 나중에 셋이서 만나보니 어머님께서는 저희들이 던지는 어줍잖은 말 한마디에도 상대에게 전할 때는 당신의 사랑까지 담아 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해 이맘때쯤 시댁에 갔을 때, 집안에 있는 감나무를 보니, 감을 다 따내었는데 제일 밑부분의 감은 남겨 두었기에 이상히 여겨, 어머님께 물어 보았더니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와서 직접 감을 따보는 재미를 가지게 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 남매 모두가 자주 부모님께 전화하고, 또 서로간에 칭찬하고 격려하는 마음 씀씀이는 바로 이러한 부모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을 보고 배운 덕이 아닌가 합니다.
(h)그리고 저희 형제들은,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첫 봉급을 받아 왔을 때, 젬마는 미카엘이 다시 살아난 기쁨을 함께 나누자며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돈을 부쳐드렸습니다. 저는 매달 드는 병원비 또 만만찮은 생활비, 또 수술비로 인한 은행빚 등 생활고에 쪼들리는 젬마가 기쁘게 나눔의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젬마의 이런 점이 형제지간의 정을 돈독히 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음을 새삼 다시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와의 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노트를 준비하여 아이에게 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말을 써내려 갔습니다. 훈계나 질책은 피하고, 그날 그날의 나의 느낌을 쓴 다음 책상 위에 갖다 놓기를 반복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답장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노트가 없어도 아이들이 속마음을 잘 털어놓습니다. 이렇게 아이들과 속마음까지 나누는 생활을 하다보니 아이들과의 관계도 친밀해지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혼인성사의 뜻을 되새기면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저는 서로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포용하면서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또, 작은 일이라도 서로 상의하고 느낌을 자주 나누는 등, 대화하는 부부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로의 속마음을 잘 알고 이해하기 위해, 종종 편지를 써서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부부일치의 참 기쁨을 맛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최근에 저희가 나눈 편지를 읽겠습니다.
h) 사랑하는 젬마! 여유로운 집에서 자란 당신이, 오직 나 하나를 믿고 시집와 단칸방 살림을 시작으로 미운 정 고운 정 나눈지도 어언 20여 년. 그 동안 기쁘고 즐거웠던 추억도 있었지마는 그 보다는 당신을 슬프고, 마음 아프게 했던 수많은 사연들이 벌떼같이 날아와 가슴속 깊은 곳까지 쏘아붙입니다. 알뜰하게 살면서 조금씩 저축해 가면, 가난으로부터 차츰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란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출발한 우리였지만, 고향에 생활비를 매달 보내야 했고, 동생들 학비, 혼인비용까지 모두 준비해야 했던 우리의 생활이었기에 늘 쪼들림에 시달렸지요. 그렇지만, 미안해하는 남편에게 불평 한마디 없이 맏이로써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다며 미안한 마음을 덜어 주었던 당신이었습니다. 막내 여동생 대학 입학금을 마련할 때는, 장롱 깊숙이 간직했던 우리의 혼인반지를 선뜻 내놓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가슴속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픔으로, 눈물을 감출 수 없었지요. 내가 중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면서,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듯한 괴롭고 두려운 느낌 등에서 오는, 깊은 절망감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젬마, 당신은 나의 구원의 밧줄이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나에게, 절망에 빠져 거의 매일 잠 못 이루는 나에게, "무엇을 걱정합니까? 우리 부부 함께 노력하면 반드시 나을 수 있습니다." 라고 위로를 하면서 내 옆을 떠나지 않은 당신은 나의 진정한 반쪽이었습니다. 인생의 황금시기 20여 년을 몸담아 혼신의 정열을 다 바치고 이제 더욱 승승장구하며 꿈을 펼쳐볼 수 있는 좋은 시기에, 깊어 가는 병으로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어, 사표를 내고 나오는 초췌한 모습의 나를, 회사 정문에서 편안하게 웃음으로 맞이하며, "당신 그 동안 정말 최선을 다 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우리를 위해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하고 말했을 때, 당신의 그 따뜻한 말 한마디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과,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에 빠져있는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당신은 모를거요. 남편 살릴 일념에, 사흘이 멀다하고 철야기도를 다니면서, "주님! 미카엘을 대신하여 제가 고통을 받겠으니, 남편을 살려 주십시오!", 울부짖으며 간절히 기도했던 젬마, 나는 당신 곁에서 전율을 느끼면서 회개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오. 무공해 야채로 녹즙을 만들기 위해, 매일 산과 들을 다니며, 손과 발이 부르튼 당신의 그 정성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남편 앞에서, 또 아이들 앞에서, 당신의 힘들고 외롭고 애간장 끊는 아픔을 차마 보이지 못하다가, 미사 때마다, 주님 앞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던 당신, 당신이 내 곁에 있었기에 나는 길고 긴 고통의 시기를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천사, 당신을 두고, 결코 내가 죽을 수 없었기에, 나는 살려고 발버둥 쳤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젬마 당신의 정성으로 나는 다시 살아났지요. 이제 나는 당신이 지금까지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쳤듯이 당신을 위해 내 모두를 바치렵니다. 이제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그 모든 것, 내가 받아 내리리다. 당신은 홀가분하고 편히 행복만 누리도록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
지금 내 곁에 당신이 있음을 감사하는 미카엘이---
w)저도 미카엘에게 썼던 편지를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미카엘! 한없는 축복과 보장된 미래만이 우리의 앞날 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새 출발을 시작한지 어언 20여 년이 흘렀는가 봅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기쁘고 즐거운 소중한 추억도 있었지마는, 아픔과 좌절, 두려움과 절망의 그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아직도 지금의 평화가 혹시 꿈이 아닌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신혼 초, 우리는 한끼 죽을 먹더라도,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해야한다며 동기간의 우애를 강조할 때, 그럼 나의 존재는 당신의 몇 번째이냐며 철딱서니 없이 굴면서 얼마나 많이 당신을 괴롭히며 투정을 부렸던가요. 아이들 입학식 때 입고 갈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다고 투덜댈 때 미안해하는 당신을 더욱더 무참하게 했던 때에도, 당신은 넉넉한 사랑으로 늘 감싸주었지요. 귀한 딸 데려다가 고생시킨다고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는 친정 어머니 때문에 불편해 하는 나에게 나도 딸이 둘인데 왜 장모님을 이해 못하겠느냐고 다독거려줄 때는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만한 남편이 없고 다시 태어나도 또 만나고 싶은 당신입니다. 친정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투병중일 때, 아예 아이들 학교를 친정동네로 옮겨주며 일년 가까이 친정에 머물면서 어머니의 병 수발을 할 수 있게끔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던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겨울 얼음판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쳐 한달 가까이 기브스를 하고 있을 때, 매일 아침 식사준비를 도맡아 해주고, 필요한 찬거리를 저녁마다 사다주던 자상한 당신이었습니다. 큰아이 클라우디아가 첫생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당신이 큰 아이에게, 이제 진정한 여자가 되었음을 축하하며 지금부터 갖추어야할 여러 가지 행동거지와 조심해야할 몇몇 가지를 적은 편지를 보냈음을, 아이를 통해 전해 들었을 때, 저의 느낌은 태양을 품고 있는 듯한 환희와 기쁨이었습니다. 이러한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와, 당신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그 험난한 골짜기를 빠져 나와 완만한 구릉지 평원에서 이제인생의 새 출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사랑이 뭔지 알았으니 내가 남은 날 동안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 받는 아내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당신의 반쪽 젬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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