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6.25전쟁 으로 북에 빼앗긴 수도 서울을 탈환한 9.28수도 서울 탈환 기념일입니다.
모두들 까맣게 잊고 지냈지만 오늘과 같은 번영을 이룩하기 전 수도 서울은 북에 두번이나 빼앗겼던 곳입니다.
일제시대 인천까지 상수도 파이프를 묻게 된 사연부터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까지의 일화를 기록한 이 글 분량이 많지만 시간 날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부천, 인천 지역 거주 동문들은 그곳 '수돗길'에 얽힌 역사적 기록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1 ]
반드시 필요한 것
* 본 에피소드에서 수도(水道)는 상수도를 의미합니다. 제목의 '수도(水道)길'은 마치 '역전(驛前)앞'이라는 말처럼 잘못 쓰인 단어 같지만, 수도배관을 관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로, 즉 '수도로(水道路)'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의식주(衣食住)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만 고르라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食입니다. 설령 피에르 까르땡 같이 옷을 가지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디자이너라도 이러한 명제에는 감히 이의를 달수 없습니다. 그 만큼 인간은 물론, 모든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제공하는 먹는 행위는 중요합니다.
[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군이라 해서 결코 예외 일수 없습니다 ]
먹는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굳이 하나만 고르라면 이것도 쉽게 답할 수 있는데 바로 물(水)입니다. 물만 먹고 최장 3주를 버티지만, 물을 먹지 않고 3일을 버틸 수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인체의 65퍼센트를 차지하는 물은 가장 중요한 필수 생존요소입니다. 때문에 인류 아니 굳이 사람이 아니라하더라도 모든 생명체는 물 가까이에서 생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입니다 ]
따라서 인류의 문화와 문명도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을 배경으로 시작되어 꽃피웠고 그러한 물줄기를 따라 널리 전파되어왔습니다. 인간들은 강처럼 처음에는 물을 얻기 쉬운 곳에 정착하여 문명을 시작하였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물을 얻기 힘든 곳에도 인위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보관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인간들의 거주영역을 널리 확대하여 나갔습니다.
[ 인간 문명은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우물이나 저수지처럼 거주지 인근에 인위적으로 수원(水源)을 개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결정판은 바로 '수도(水道 Aqueduct)'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고대 로마의 유적 중 많은 과학자, 엔지니어, 사학자들이 최고로 손꼽는 것이 체계적인 수도시설일 정도로 수도는 당대 문명의 최고 결정체입니다. 오늘날도 이를 제외하고 생존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삶에서 수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합니다.
[ 고대 로마의 관계시설 ]
최근에는 수돗물의 수질을 믿지 못한다고 정수기를 사용하거나 별도로 생수를 비싼 가격에 구입하여 음용하는 것을 필수적인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이것은 마치 공기처럼 물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나온 현상입니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물을 길어다 먹거나 제한급수를 한 적도 많았는데, 이 당시에는 수도꼭지에서 물만 콸콸 쏟아져도 행복하였을 정도였습니다.
[ 물을 길러 다니던 이런 모습이 아주 오래전의 일이 아닙니다 ]
이제 생활필수품인 난방시스템, 수세식화장실, 세탁기와 같은 문명의 이기들도 수도시스템이 없다면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일 만큼 우리의 삶과 수도는 관련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대표 주거지인 아파트는 수도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체계적인 급수체계를 갖춘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앞서가는 선진국들인데 그만큼 수도가 삶의 질을 좌우하는데 커다란 작용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 지난 5월 구미에서 벌어진 단수 사태 당시에
식수보다 오히려 화장실 때문에 곤혹을 치렀습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적으로도 최고수준의 수도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만큼 현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시설이지만, 굳이 로마와 비교할 것도 없이 서구의 많은 나라들과 비교할 때, 체계적인 수도의 역사는 상당히 짧습니다. 교통, 전기, 통신 같은 대부분의 여타 사회간접자본처럼 수도 또한 구한말 개화기에 시작되어 이제 그 역사가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입니다.
[ 우리 현대사 비극 중에 수도 관리를 만들어진 위 도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
잘 아시다시피 지난 100년은 국권을 상실하는 나락까지 떨어졌다가 분단과 전쟁을 겪고 거지상태에서 경제대국까지 성장하였을 만큼, 오천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혼란기에 처음 등장한 수도는 격변의 시기를 함께하여 왔는데,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전쟁의 중심에도 놓여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2 ]
아직도 볼 수 있는 흔적
경인선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오면 종점 직전에 동인천역이 있습니다. 축현동, 인현동, 내동, 신포동처럼 근처의 행정구역명과 별개로 역이름을 따서 이 일대를 흔히 東仁川이라 합니다. 인천 원도심 또는 구도심으로 취급되는 지역인데 이제는 상가의 권리금마저 사라졌을 만큼 급격히 쇠락한 지역이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의 명동처럼 인천 최고의 번화가로 영화를 자랑하던 곳입니다.
[ 옛 인천 중심가의 관문이었던 동인천역 ]
비록 타의에 의한 굴욕이었지만 인천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해외 근대문물이 제일 먼저 들어 온 출입구가 되었습니다. 내륙운송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한 당시, 인천은 한양과 가까워 열강들이 앞 다투어 발을 들여 놓은 지역이 되었고 이때부터 인천도호부 외곽의 한적한 포구였던 제물포는 인천항으로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하였는데 동인천은 바로 그 중심이었습니다.
[ 불법적으로 강화도를 도발하는 운요(雲揚)호의 일본군
이를 계기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
이 동인천역 뒤편인 4번 출구로 나가 10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가면 솔빛마을이라는 대단위 아파트단지 뒷산 위에 있는 '수도국산 박물관'을 만나게 됩니다. 원래 이곳은 인천 구도심 부근의 대표적 서민 거주 지역이었는데 2003년에 대대적으로 재개발되었습니다. 이때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산동네의 골목모습과 생활도구 등을 일부 보존하여 박물관이 만들어졌습니다.
[ 수도국산 박물관(上)과 내부의 모습 ]
송현동은 인천 구도심 및 인근 공장지대와 가까워 호구지책을 찾고자 인천으로 이전하여 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한국전쟁이후에는 실향민들도 정착하여 거대한 달동네를 이루었습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시 송현동이지만 박물관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대를 '수도국산'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야트막한 산 정상에 흔히 수도국(水道局)이라 불린 배수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시설입니다.
[ 재개발 전 수도국산 일대(上)와 현재의 모습 ]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시설이 이곳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천이 근대화 초기에 그만큼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1900년 경 16,000여명 정도였던 개항장의 거주민(한국인 9,900, 일본인 4,200, 청국인 2,300, 서양인 63명)이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만 3배인 12,700여명으로 급증하는 등 도시의 팽창이 가히 폭발적이었는데 한마디로 한반도에서 가장 큰 증가폭이었습니다.
[ 일본인들의 급증과 더불어 도시가 팽창하였습니다
(1920년대 중앙동 일대의 일본인 거주지) ]
구한말 인천뿐만 아니라 함께 개항한 부산, 원산, 목포 등은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도시로 급속히 커 나가갔고 도읍인 한양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처럼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자연히 물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인천만 해도 1889년 현재의 북성동 파출소 앞에 큰 우물 3개를 굴착해 하루 500톤의 정도의 용수를 생산하여 인천항에 기항하는 선박에도 공급할 정도였지만 얼마안가 늘어나는 수요량을 보충하기 힘들었습니다.
[ 1897년 제물포(현재 인천항)의 모습
월미도 정상 위에 포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더불어 당시에 낙후된 위생 상태와 사방에 널려있는 오염물로 인하여 툭하면 수인성 전염병이 만연하자 체계적이고 위생적인 수도의 필요성이 더욱 요구되었습니다. 그 결과 1886년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의 보수천 상류에 대나무로 만든 배관을 연결한 초보적인 수도가 놓여 졌으나 단지 자연방류에 의한 제한적인 급수시스템이었고 취수, 착수, 정수, 배수, 급수로 이어지는 근대적인 수도체계는 20세기에 들어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 현재 유적지로 남아있는 제수변실(上)과 1940년대 지도에 표기된 수도국산의 배수지
노량진에서 취수한 물이 이곳까지 오는 배관(파란색)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
1905년 8월, 대한제국 탁지부의 위탁을 받은 日本興業이 서울, 인천에 급수를 위해 한강연안 노량진과 뚝섬을 수원지(水源池)로 하는 근대적 수도를 설계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상수도의 시작이었고 앞서 설명한 수도국산은 이 당시를 증언하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수도국산 박물관 부근에는 이때 만들어진 배수지가 남아 있어 아직도 일부 사용 중인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시설입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3 ]
역사 속에 숨어 있던 길
행정구역상 같은 인천시지만 한남정맥을 기준으로 동쪽의 부평(부평, 계양구)과 서쪽의 인천(중, 동, 남구)은 심정적으로도 별개로 여겨질 만큼 각기 다른 생활권으로 오래 동안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반면 인천대간 동쪽의 인천시 부평, 계양구와 경기도 부천시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커다란 분지 안에 함께 있는데, 지금처럼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 일대를 '부평평야'라고 불렀습니다.
[ 인천 부평구, 계양구, 경기 부천시는 예전에 부평평야라고 불리던
거대한 분지(검은색으로 표시된 구릉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부평평야는 현재 인천시 부평, 계양구와 부천시 사이에 촘촘히 조성 된 부개, 삼산, 계양, 중동, 상동지구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도시로 변하였는데,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끝없이 펼쳐진 논농사 지대였습니다. 이곳 남쪽 끝에 위치한 송내역은 이제 부천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 되었지만, 1990년대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왜 이런 곳에 역이 있어야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외진 곳이었습니다.
[ 부평평야 중심에 위치하던 중동지역의 1970년대(上)와 현재(下)
신도시로 개발이 시작된 1990년대까지도 1970년대 모습이었습니다 ]
부평평야는 거대한 도시로 개발되면서 가로, 세로로 수많은 도로들이 사통팔달로 뚫려 부평도심과 부천도심을 연결하고 있지만, 신도시 개발 전까지는 양측 사이에 있던 드넓은 평야지대가 오히려 두 (舊)도심 간의 통행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겨졌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1990년 초까지 이곳을 통해 부평과 부천을 연결하는 도로는 좁은 논둑길 밖에 없어 차량이나 대부분의 통행은 부평평야 남북 양끝을 지나는 국도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 신도시 개발전인 1990년 초 만하더라도 부평에서 바로 옆의 부천으로 가려면
외곽으로 나와 국도를 이용하여 돌아서 가야 했습니다 (1970년대 부천역 부근의 경인국도) ]
분지의 중심이다 보니 부평평야는 비만 오면 잠기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고 따라서 거주인구가 적어 자체 교통량이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한양과 제물포를 연결하는 도로도 부평평야 남북의 외곽으로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북쪽의 부평도호부옛길로 양화진(목동)~부평도호부(계산동)~가재울(가좌동)을 도보로 연결하던 소로였습니다. 오늘날은 확장되어 6번 국도가 되었고 인근에 경인고속도로도 함께 지나고 있습니다.
[ 원래 지대가 낮은 부평평야는 상습침수 구역이었습니다 (上 1975년 중동)
따라서 도로가 평야 남북의 외곽으로 날 수 밖에 없었고 그중 가장 오래된 가도가 6번 국도입니다
현재 6번 국도의 일부 구간은 아직도 작은 소로입니다 (下) ]
그리고 1882년 인천개항과 더불어 경인간에 차마(車馬)의 통행이 가능한 또 하나의 도로가 부평평야 남쪽에 수축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46번 국도인 경인가도로 현재와 차이가 많지만 대략 노선의 위치가 비슷합니다. 청일전쟁 때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침공한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도로의 폭이 보통 2미터 내외로 좁고 요철이 심하여 보행이 불편한 정도였다고 하니 오늘날 농로보다도 못한 가도였다고 짐작됩니다.
[ 청일전쟁 당시 제물포(인천항)에 상륙하는 일본군(上)과
산길 농로 수준인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군하는 모습(中)
20세기 초 경인가도의 모습 (下 사진-kkkk8155님) ]
이처럼 1990년 중반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부평평야의 외곽을 통과하여 인천을 연결하던 교통망은 이 두 도로 밖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차량을 이용하여 지척의 부평(舊)도심과 부천(舊)도심을 오가기 위해서는 외곽으로 빠져나가 북쪽의 6번 국도나 남쪽의 46번 국도를 이용하여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좁은 논둑을 걸어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만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부평과 부천을 직접 연결하던 도로망은 상당히 부족하였습니다.
[ 1990년대 중반만까지만 해도 부평평야 남북 외곽의 두 개 국도를 제외하고
인접한 부평과 부천(소사)을 직접 연결하는 도로가 없었습니다
1950년대 지도인데 부평평야가 거대한 농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찾기 힘든 사실이지만, 부평평야 남북으로 지나가는 이 두 도로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어있는 도로가 있습니다. 아니 지금도 일부는 그 흔적이 남아있어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구간도 있고 일부는 주택가 골목길로도 남아있는데 바로 이번 에피소드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인 수도길(水道路)입니다. 아마 상수도관련 업무에 종사하시는 분들이라도 이 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 국도 사이에 수도길이라는 도로가 있었습니다
(부천시 오정동 인근의 수도길 옛 사진) ]
이 글 [ 2 ]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천 옛 도심(오늘날 동인천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오늘날 수도국산이라고 불리는 야산 정상에 배수지를 설치하였다는 내용을 설명 드렸는데, 원래 인천(仁川)은 川이 들어간 지명과는 달리 상수도용으로 취수할만한 대규모 자연하천이나 저수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배수지에 저장 될 물을 외부에서 끌어와야 하였는데 바로 한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 노량진취수장과 같은 시기에 만든 뚝도 취수장의 건설모습
저런 주철관이 인천까지 매설되었고 유지보수를 위해 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한강대교 인근 노량진취수장에서 물을 취수하여 수도국산 배수지에 이르는 총 연장 36킬로미터 구간에 직경 500밀리미터의 주철관을 묻어 물을 공급하였는데, 이 배관이 1910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망이었습니다. 당시 배수관 공사 및 유지보수를 위해 배관이 지나가는 바로 옆으로 폭 4미터 정도의 도로도 함께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 글의 주제이자 이름도 생소한 수도길입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4 ]
제대로 모르고 있던 최초의 도로
혹시 집에 1990년대 중반 이전에 제작된 다이어리가 있다면 한번 첨부되어 있는 지도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국도는 아니지만 부평도심 동쪽에서 사선으로 기울어져 부천 북부를 지나 서울 신월동 인근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작은 도로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첨부된 지도는 1950년대 미군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기에도 실선 표시 내용처럼 그 도로가 정확히 그려져 있습니다.
[ 부평평야 남북의 국도 사이에 소로가 표시 되어 있습니다 ]
현재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혹은 주택가를 통과하는 골목길의 형태로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반대로 대폭 확장되어 주요 간선도로로 사용되는 구간도 있습니다. 또한 구글어스나 지도 등을 살펴보면 부평도심 우측 외곽에서 영등포까지 비스듬히 이어지는 도로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누누이 언급하였던 '수도길'인데 부천시 구간에 남아있는 이 도로의 공식명칭도 수도로(水道路)입니다.
[ 부천구간에 현재도 주요 도로로 사용되는 수도길 ]
지금은 대단위 택지로 개발되어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예전부터 august 개인적으로 궁금하였던 것이 바로 이 도로였습니다. 다이어리에 첨부된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라면 상당히 중요한 도로겠지만 실상 가서 보면 승용차 한대가 겨우 일방통행 할 정도로 작은 농로였습니다. 1980년대 이전에는 비포장 흙길이었고 이후 1990년대 이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시멘트로 조악하게 포장 된 정도였습니다.
[ 1954년 촬영된 부평 원적산로의 모습인데 부근을 지나던 수도길도 이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
그런데 바로 보잘 것 없고 이제는 일부에서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이 길이 1905년 최초의 상수도와 더불어 만들어져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한반도 최초의 특수목적 도로'였습니다. 1928년 도폭 8미터로 확장되기 전까지 경인가도의 평균 폭이 2미터였던데 비한다면 상수도 유지보수를 위해 1910년에 완공된 수도길의 폭이 4미터라는 사실은 당시 그 어떤 도로보다 컷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 1948년 부평 인근의 경인국도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커다란 간선 도로의 모습입니다 ]
어쨌든 지금까지도 인천과 서울 사이에 걸쳐서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만큼 역사를 간직한 도로인데 정확한 노선도는 2008년 발간 된 '仁川 上水道 100年'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방향으로 수도국산~인천교~가좌동~부평시장역~중동IC~약대동~원종동~신월동~오목교~영등포~대방~노량진을 ㅅ자로 우회 직진하는 코스입니다. 방향만 조금 틀었다 뿐이지 거의 직선에 가까운 도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개설 당시 수도길의 전체 노선도 ]
[ 부평 부평중학교 뒷편 (겨우 흔적만 있는 주택가 이면도로입니다 ) ]
[ 부천 신흥동 사거리 (중요 교통망으로 사용 중입니다) ]
[ 서울 오목교 부근 (중요 간선도로인 오목로로 사용 중입니다) ]
노량진부터 수도국산까지 물을 보내려면 서울-부천 사이에 위치한 원미산과 부평-인천 사이의 원적산을 반드시 넘거나 비켜가야 했는데, 당시 기술 여건으로는 부득이 낮은 곳을 찾아 최단거리로 연결하다 보니 그런 모양을 가지게 된 셈이었습니다. 노량진 취수장이나 수도국산은 이제 유적지화 되었고, 원미산을 넘기 위해 가압하던 신월동 유수지나 인천시 가좌동, 도화동의 펌프장 등은 아직도 존재하거나 그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 한강에서 취수한 물이 인천으로 공급되기 전 중간 기착지였던 신월동 유수지
사진 속 우측 세번째 소로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수도길입니다 ]
그런데 수도길을 유심히 보면 알겠지만 인천항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 최단 코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천항과 공항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도로라면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 될 수 있는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만들어진 수도길은 현재의 농로보다도 형편없지만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근 6번 국도나 46번 국도와 비교하여도 결코 손색이 없는 대로(?)였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의 대로가 이 정도였으므로 수도길은 훌륭한 진격로라 할 수 있었습니다 ]
더구나 인천항~김포공항~한강을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형태여서 전쟁 초기 한강하구를 도강하여 김포를 석권한 후 인천을 점령하려던 북괴군 6사단도 , 전쟁의 균형추를 순식간에 돌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후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동진하며 올라가던 미 해병 1사단도 모두 이 길을 주목하였습니다. 아니 워낙 도로가 없어서 너무나 당연히 이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5 ]
굴욕의 침공로가 되다
한국전쟁 초기에 인상적인 기동을 보여주었던 적군은 방호산이 이끄는 북괴군 제6사단이었습니다. 비록 서울 점령이나 경부 축선 공략을 담당한 주력은 아니었지만 전사에 길이 남는 놀라운 우회기동을 선보여 아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부대였습니다. 동 부대는 서울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1950년 6월 27일 한강하구를 도강하여 김포반도로 상륙하였는데, 북괴군 중 최초로 한강을 건넌 부대로 기록됩니다.
[ 북괴군 6사단은 서울 점령이전에 한강을 최초로 도하하였습니다 ]
당시 서부전선에서 북괴군의 전략은 기갑부대를 앞세운 주공이 문산과 의정부 축선을 이용하여 서울을 압박하는 동안 조공 역할을 맡은 6사단이 배후를 돌아 한강 이남을 선점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적으로 바다에 연한 넓은 한강하구에만 의존하여 김포반도에 대한 방어책이 전무하였던 아군은 북괴의 이러한 전략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서울로 진입한 북괴군 T-34전차 ]
서울을 포기한다면 아군은 한강을 건너와 방어에 임하여야 했는데 만일 북괴군이 김포를 석권한 후 안양까지 내려와 경부가도를 아군보다 먼저 점령한다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험에 빠지는 형국이었습니다. 북괴군 6사단의 김포출현은 그 만큼 아군 방어 전략에 커다란 위기의식을 불러왔고 아군은 시급히 가용한 자원을 모아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조하여 방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 김포지구사령부가 급조되어 방어에 투입되었습니다 ]
전쟁 초기에 국군의 유일 기갑전력이었던 기갑연대의 M-8장갑차까지도 투입되었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남산정보학교병력을 근간으로 해서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방어군을 꾸렸지만, 화력의 부족과 급조된 조직이라는 한계로 말미암아 유기적으로 방어를 펼치지 못하였고 중구난방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적을 막아내는데 역부족이었습니다.
[ 1949년 인천항에 하역되는 미군 공여 M-8 장갑차
전쟁 발발 당시 국군 유일의 기갑장비였습니다 ]
6월 30일 오류동 일대를 북괴군이 점령하면서 오늘날 김포, 부천, 서울 양천구 지역을 북괴군에게 내주었으나 최복수 참모장이 격전 끝에 전사하고 지휘관 우병옥 대령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을 정도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결과 북괴군 6사단의 진공을 예상보다 2일 정도 늦추는 성과를 얻었고, 그 결과 한강을 도강한 아군주력의 퇴로가 확보되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최선을 다해 적의 진공을 막아내었습니다 ]
경인가도를 점령한 북괴군 6사단은 이후 아군을 추격하여 남진하는데 일부 주력을 서쪽으로 돌려 인천공략에도 나섭니다. 그 이유는 인천항을 통하여 후퇴할 수도 있는 아군 잔여병력을 소탕하고, 다음 글에 설명하겠지만 일제 때 조병창으로 만들어져 미군정 시기에는 보급창(ASCOM)으로 이용되었던 부평의 국군병기창을 조기에 점령하여 아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신속히 꺾기 위해서입니다. ( 관련글 참조 )
[ 전쟁 직전 촬영된 부평의 국군병기창 (舊 조병창) ]
이 때 오류동까지 남하 한 북괴군이 부평과 인천을 공략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 바로 수도길이었습니다. 수도길을 따라 직진하면 거대한 국군병기창이 있는 부평은 물론, 인천항을 신속히 점령 할 수 있는 최단거리 통로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북괴군의 작전에 관한 자료는 밝혀진 것이 많지 않아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6사단 14연대 예하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수도길로 서남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위 지도처럼 북괴군 6사단은 최단 통로인 수도길을 이용하여 인천을 점령합니다 ]
당시 국군 주력이 경부가도를 따라 후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부평과 인천을 이 정도의 병력만으로 충분히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자 경제의 중심지인 경인축선이 이렇게 적에게 능욕 당하는 데는 불과 하루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북괴군의 남침로가 되었던 수도길은 이처럼 굴욕의 가도로 전락하였습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6 ]
반격의 통로로 지목 된 곳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진두지휘하며 총 연출한 한국전쟁 최대의 작전이 개시됩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인데, 이 한방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려 낙동강방어선을 근근이 방어해 내고 있던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아마 세계전사를 구석구석 뒤져봐도 최악의 상황까지 밀려 있다가 이 같이 단 한방에 반전을 이룬 예는 이전에도 드물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입니다.
[ 한국전쟁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이 당시 인천에 투입된 상륙군은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제7사단으로 구성된 미 제10군단이었습니다. 그중 그린, 레드, 블루비치를 통하여 먼저 상륙할 선봉부대는 전통의 미 해병 1사단이었습니다. 서류상으로 제1, 5, 7연대와 직할부대로 구성되었지만 제2차 대전 종전 후 축소되었다가 한국전쟁에 투입되면서 증강 중이었기 때문에 작전 직전까지 7연대의 전개가 완료되지 않았고 대신 국군 해병 제1연대가 임시로 배속된 상태였습니다.
[ 3개 방향으로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당일 인천항 교두보를 확보하고
둘째 날 부평 초입인 만월산에서 함봉산의 능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Ascom City로 표시된 부평에서 김포비행장으로 향하는 수도길이 보입니다) ]
미 해병 1사단은 후속 상륙 할 부대들을 위해 최대한 빨리 인천항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교두보가 확보되면 이를 즉시 후속부대에게 넘긴 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다음에 상륙할 미 7사단은 안양, 수원 쪽으로 남동진하여 낙동강에서부터 치고 올라올 미 제8군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 확보된 인천항으로 9월 18일 후속 상륙하는 미 7사단 32연대
당시 미 32연대 병력의 반은 사진처럼 징집 된 한국인이었는데 바로 최초의 KATUSA였습니다 ]
미 해병 1사단은 우선 목표인 서울을 최대한 빨리 탈환하기 위하여 2개의 가도를 따라 진격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현재의 경인국도는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고 여기에 더불어 선택한 회심의 축선이 바로 '수도길'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중간 거점이 몇 군데 있었는데, 바로 부평과 김포공항이었고 수도길은 이곳들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통로였습니다.
[ 부평(ASCOM)부터 1개 연대씩 진격로를 나누어 서울로 진격하였습니다 (上)
수도길은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초입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下) ]
김포공항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의 필요가 없지만 부평도 중간 병참선으로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부평에는 일제 때 만들어진 군수제조시설인 '조병창'이 있었는데, 해방 후 1948년까지 미군이 남한을 군정 통치하였을 때 이곳을 'ASCOM(the Army Support Command)'이라는 병참기지로 운영하였고, 미군 철수 후에는 국군이 '병기창'으로 운용 중이던 당시에 보기 드문 전략적 군사시설이었습니다.
[ 현재 병기창터에 일부 남아 있는 주한미군 기지인 Camp Market ]
때문에 부평의 우선 확보는 서울 탈환을 위한 중간 거점을 장악하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병기창 동쪽은 곧바로 수도길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수도길은 부평도심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인천까지 연결되었는데 일제 시대에 조병창이 만들어지면서 배관만 지나고 서쪽으로는 도로가 끊겨진 상태였습니다. 일본이 이곳을 군수기지로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상수도망이 지나가는 곳이라서 공업용수의 확보가 쉬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 병기창 동쪽의 수도길을 통하여 부평과 김포공항이 연결됩니다 (上-1960년 지도)
대로와 교차되는 저 골목길 입구가 바로 서울 탈환의 역사적 시작점이었습니다 (下)
우측 신축 빌딩은 예전에 부평수도국이라 불리던 가압장이 있던 곳입니다 ]
어찌 되었든 이러한 부평의 중요성은 공격을 하는 아군도, 방어에 나선 북괴군도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전력의 대부분을 낙동강에 올인하고 있던 북괴군이 최후의 기갑 예비라 할 수 있는 서울 주둔 제348독립땅크연대 소속의 전차까지 출동시켜 아군의 진격을 막고자하였던 곳도 바로 인천에서 부평으로 넘어오는 유일 통로인 경인가도의 원통이고개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인천에서 부평을 연결하는 유일 통로인 원통이고개에서 격전이 펼쳐집니다
(당시 부평 초입의 원통이고개에서 피격된 적 전차) ]
인천항에서 원통이고개까지는 거의 한 방향으로만 진격할 수밖에 없는 외통길이지만 이곳을 돌파하여 부평을 확보하면 이후부터는 수도길을 비롯한 다양한 진격로를 확보할 수가 있어 북괴군도 이곳에서 아군을 막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서울로 가는 중간에 보급망으로 사용할 기지가 있고 수도길을 이용하여 김포공항과 서울로 향하는 지름길을 확보할 수 있는 부평을 놓고 피아는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을 벌여야 했습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7 ]
번개 같은 쾌승 그리고 전진
서울 탈환의 중간거점이라 할 수 있는 부평을 놓고 9월 17일 06시경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가 부평역 서남쪽 고지(현재의 백운역 남쪽 부평삼거리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이때 전차 6대를 앞세운 북괴군 제18사단 22연대 2대대와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화력 면에서 본다면 북괴군이 절대 유리하였는데 그 만큼 적들이 부평을 방어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당시 원통이고개에서 피격된 북괴군 전차 ]
다행히도 적들을 먼저 발견한 아군은 이미 일대의 고지들을 선점하여 매목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습니다. 북괴군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태로 미 해병 5연대 2대대가 쳐 놓은 그물 안으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더글라스(Okey Douglas) 상병이 발사한 2.36인치 로켓포탄이 선두에 섰던 T-34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였고 불시에 기습을 받은 북괴군은 우왕좌왕하였습니다.
[ 아군이 매복한 고지 사이의 고갯길로 진입한 순간 (上)
2.36인치 로켓포의 명중탄(1번)을 시작으로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下) ]
동시에 부평삼거리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아군의 엄청난 불벼락이 북괴군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적들은 산개하며 저항하려 하였지만 숨을 곳이 없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여서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좁은 도로를 뒤 돌아 후퇴할 수 없었던 일부 T-34들은 도로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우측 밭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고꾸라지면서 돈좌되었고 아군의 요격에 차례차례 격파되어 나갔습니다.
[ 기습 공격을 받고 탈출을 시도하다 돈좌된 후 격파된 T-34 (上)
아래 사진 중간에 위 피격 전차가 보입니다
나머지는 진격로 확보를 위해 도로 밖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下) ]
전투가 개시된 지 30분도 되지 않아 북괴군은 완전히 격멸된 반면 아군의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한 엄청난 대승이었고 전사에는 이를 '부평전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히 일부 잔당들이 시내로 퇴각하였지만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었고 아군이 부평을 점령하는데 거칠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09시경 시내 중심에 있던 국군 병기창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고 도심 속 잔적 소탕은 후속하여 진입한 한국 해병대가 담당하였습니다.
[ 인천상륙 당시 시내 수색을 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 ]
국군 병기창의 신속한 탈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군이 전쟁 초기에 후퇴하기에 바빠서 병기창에 유기하였던 약 2,000톤의 야포, 박격포, 기관총탄을 고스란히 재 확보하는 전과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인천항으로부터 진군을 개시하면서 점차 보급로가 길어지기 시작할 무렵에 진격로 중간지역에서 생각지도 못한 귀중한 보물을 확보한 셈이었습니다.
[ 부평 도심의 병기창을 탈환한 후 부대가 나뉘어 진격이 개시되었습니다
(ASCOM으로 사용 중이던 1948년 촬영된 부평 국군병기창) ]
거점을 성공적으로 확보한 14시경 미 해병 5연대 2대대는 수도길로 접어들어 김포공항을 향한 진격을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김포공항까지는 평야지대를 쭉 관통하는 일직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평지에 놓인 도로라서 만일 매복한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방어하기 어려운 여건이기도 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는 선봉 D중대에게 전차와 3.5인치 로켓포 및 75밀리미터 무반동총을 배치시켜 화력을 증강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 김포공항 탈환을 위해 수도길로 진격하는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
당시 수도길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부천 오정동이나 원종동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
이제 전쟁초기 단 하루 만에 인천이 북괴군에게 점령당하는데 사용되었던 굴욕의 수도길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구원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도로의 폭이 좁아 일렬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보다 더 넓고 더 빠르게 김포공항을 지나 한강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선봉에 섰던 2대대는 간헐적인 북괴의 저항을 물리치고 죽 뻗은 수도길을 따라 진공을 계속하려 그날 저녁 김포공항을 탈환합니다.
[ 탈환한 김포공항에 파괴되어 방치 된 북괴 공군기 ]
김포공항을 탈환한 미 해병 5연대는 여기서 진격을 멈추지 않고 9월 18일 드디어 한강변의 개화동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개전 초에 피눈물을 흘리며 허겁지겁 도망쳐 건너왔던 한강을 다시 건너기만하면 서울이 목전이었습니다. 맞은편 대안은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행주였고 이곳의 중요성은 결사항전에 나선 북괴도 잘 알고 있어 덕양산(125고지)에 화력을 집중 배치하여 아군의 도강을 막으려하였습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8 ]
적의 뒤통수를 강타한 회심의 공격로
한강 도달 당일, 마음이 앞서서 불비한 상태로 도하를 시도한 미 해병 5연대는 덕양산에 진지를 구축한 북괴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인천상륙 후 최초의 패배를 기록하며 출발점인 개화나루터로 후퇴하였습니다. 이것은 서울 탈환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편이기도 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해 북괴군이 군사적으로 서울을 방어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였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인천상륙 후 최초의 패배로 기록 된 행주나루 전투 상황도 ]
아군은 즉시 전열을 정비하여 9월 20일, 미 해병 항공대의 강력한 엄호를 받으며 한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전쟁 내내 그랬듯이 아군이 장악한 제공권은 항상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실 최초 도하에는 실패하였지만 아군이 행주나루 방향으로 도하한 것은 북괴의 예상을 벗어난 진공로였습니다. 북괴는 아군이 경인로를 거쳐 한강 인도교 방향으로 진격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경인로를 따라 노량진까지 진격한 미 해병 1연대 병사 ]
따라서 북괴군은 부평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마분리(부개동), 송내촌(송내), 주막거리(오류동), 영등포에 계속하여 방어 병력을 파견하여 경인로를 방어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이곳을 통해 서울로 향하던 미 해병 1연대의 진격은 상대적으로 늦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수도길을 이용한 미 해병 5연대가 행주나루로 건너와 서울의 북서쪽에 나타나자 북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경의선 방향으로의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 수도길을 통하여 김포공항을 탈환하고 한강을 건넌 후 서울로 진격합니다 (上)
연남동 인근에서 경의선을 따라 도심으로 진격하던 미 해병 5연대 1대대 3중대원 (下) ]
[ 도심으로 진입할수록 전투가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
그 절정이 9월 23일 시작된 연희고지전투였습니다. 연희고지는 수색, 마포 방향에서 도심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목을 감제하는 위치였는데,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북괴군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무려 3일간 벌어진 격전 끝에 2,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북괴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결국 후퇴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28일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됨으로써 드디어 수도 서울은 완전히 탈환되었습니다.
[ 서울 탈환 직후 중앙청에 게양된 유엔기 ]
전쟁 초 서울을 내주는데 불과 3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후 이를 탈환하는데 13일 걸린 점은 그만큼 북괴군의 저항에 심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특히 인천에서 출발하여 한강남단까지 진격하는데 불과 3일이 걸린 점과 비교하면, 강을 건넌 후 서울 수복까지 10일이 걸렸다는 사실은 그만큼 전투가 격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수도길이 얼마만큼 최고의 진격로였는지를 반증하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 서울로 진격 도중 유지 보수 중인 소사역(현 부천역)인근의 경인가도
이처럼 도로가 열악한 환경에서 수도길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
수도길의 남북으로 경인가도(46번 국도)와 6번 국도가 지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누누이 설명한 것처럼 이들 도로가 당시에는 수도길보다 특별히 좋거나 차량이 빨리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의 루트라도 아쉬웠던 당시에는 지도에 가느다랗게 표시된 길이라도 사용이 가능하다면 최대한 이용하여야 했고 그것은 깊게 생각하고 말고도 할 것 없는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도로를 사용하여야 했고 그중 수도길은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
알아 본 것처럼 적의 저항을 물리치며 부평에서 한강 남단까지 불과 하루 만에 석권하게 된 데는 수도길의 역할이 컸습니다. 즉, 水道길은 首都를 탈환한 寶路였습니다. 이후 수도길은 전쟁 내내 주요 통로로 그 역할을 다하였는데, 특히 1951년 경기도 소사역(현재 부천역)과 김포공항을 연결하는 9.2킬로미터의 김포선철도(1980년 폐선) 개통 전까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보급품을 김포공항(K-14)에 수송하는 길로 사용되었습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9 ]
폐허 속에서 논의 된 새로운 서울
한국전쟁 중 정부는 서울의 복구를 놓고 상당히 고민하였는데, 이때 논의 된 내용 중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만일 그 당시 제기된 의견대로 서울의 재건이 이루어졌다면 수도길이 지금의 강남대로나 테헤란로처럼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메인스트리트가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수도길 만큼이나 알려지지도 않고 아는 이들도 드문데 이번 기회를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 수도길이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대로가 될 뻔하였습니다 (최근의 테헤란로) ]
서울은 전쟁 발발 6개월 동안 적에게 두 번이나 피탈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특히 1950년 6월 28일부터 9월 28일 사이에 있었던 첫 번째 인공치하는 그동안 하나의 민족이었던 남북이 원수가 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계급투쟁을 선동하며 대주 대낮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테러를 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행태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잔악한 인간들의 광기라 할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 서울을 점령한 북괴는 잔혹한 광기를 연출하였습니다 ]
따라서 1.4후퇴 당시에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거동이 불가능한 이들을 제외 한 대부분의 시민들이 북풍한설에도 불구하고 남부여대하여 피난길에 올랐고 이때 가장 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만큼 매서운 겨울 추위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지난여름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학정이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그렇다보니 중공군이 서울을 재점령하였을 때는 마치 유령도시처럼 텅 빈 상태였습니다.
[ 혹한에 수많은 이들이 피난길에 올랐을만큼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은 잔인하고 무서웠습니다 ]
이처럼 500년 고도 서울이 피탈, 탈환, 재피탈을 반복하며 전선의 중심에 계속하여 놓이다보니 엄청나게 파괴된 것은 불문가지였습니다. 신나게 서울에 무혈입성한 중공군이 추위를 피할 곳이 없어 쩔쩔맸을 만큼 서울은 그야말로 폐허로 변하였습니다. 그런 점은 다시 부산으로 피난 간 대한민국 정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정부 내에서 한강 건너에 서울을 재건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였습니다.
[ 서울은 극심하게 파괴되었고 재건이 논의 되었습니다 ]
곧바로 정부에 '수도재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51년 3월 7일 부산에서 첫 회의를 가졌는데, 이때 새로운 서울이 위치할 지역으로 영등포에서 부평에 이르는 부평평야 지역이 집중 거론되었습니다. 기존 서울은 상징성이 큰 사대문 안만 복구하고 문화, 거주, 경제 관련 시설은 허허벌판에 새롭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거주 형태로 '아바트(아파트)'를 언급한 점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 1951년 2월 16일 새로운 서울 건설에 대한 보도내용 ]
그런데 1952년이후 해당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점으로 유추할 때 논의로만 끝났던 것 같고 당시 여건으로 신도시를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영등포에서 부평에 이르는 지역을 개발하기로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고 1930년대 일제가 동양의 맨체스터(Manchester)로 만들겠다며 공업벨트 설계까지 마쳤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완공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이때 설계를 기초로 구로동에서 부평에 이르는 수출산업공단이 조성됩니다.
[ 새 서울의 중심이 될 수도 있었던 1954년 당시 부평공설시장
(현 부평시장역 인근으로 수도길과 부평로가 교차하여 수도사거리로 불리던 당시 번화가였습니다) ]
일제 때 계획했던 공업벨트나 정부가 구상하였던 신도시는 위치상으로 대략 수도길을 중심으로 하는 부평평야에 들어설 예정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다림질 하듯 이 지역을 평평하게 매립하여 격자형으로 개발하겠지만 당시 기술수준이나 경제여건을 고려한다면 기존에 있던 도로를 최대한 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목로처럼 확장 되어 주요 간선도로로 이용 되고 있는 수도길 일부 구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 결국 신도시로 개발되고 수도길도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장고개에서 오정동에 이르는 실선이 수도길이 지나던 곳입니다) ]
그랬다면 수도길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중심가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무학대사가 이곳을 도읍지 후보로 삼았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오늘날 부평평야가 거대한 신도시로 탈바꿈한 것을 보면 비록 수도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바뀔 운명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최신식 신도시로 개발되다보니 비스듬했던 수도길 대부분도 함께 사라지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 계속 )
首都를 탈환한 水道길 [ 끝 ]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흔적
전쟁이후에도 수도길은 한동안 경인지역을 연결하는 주요루트로 사용되었지만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경인가도와 6번국도가 현대식 도로로 점차 확충되고 1969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교통망으로써의 기능은 군데군데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타도로와 달리 촌락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무인지대라 할 수 있는 평야를 관통하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 평야지대를 관통하던 수도길은 점차 쇠락하였습니다 (1954년 당시 부평평야) ]
수도길은 100여 년 전 한강에서 인천까지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한 배관을 매설하고 이를 관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임시도로였지만 본연의 목적 외에 고난의 시기에 군사적으로도 이용이 되었습니다. 이후 부평평야를 관통하던 수도길은 농로 등으로 사용되다가 경인지역이 점차 커가며 확장되어 주요 도로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흔적도 찾지 못할 만큼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 일부 구간의 경우 그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
특히 1900년대 초에 수도길을 따라 만들어진 배관 규모만으로는 늘어나는 경인지역 인구에 대한 수돗물 공급이 부족하고 노량진 인근의 취수원이 오염되자, 1973년부터 한강상류의 팔당댐을 취수원으로 하여 수도권지역에 상수도를 공급하는 '수도권광역상수도'망이 건설되었는데, 이때부터 배관 관리라는 수도길 본래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어 기억에서 사라진 도로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를 아는 이들도 거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 광역상수도망의 건설로 수도길은 기능이 완전 상실되었습니다 ]
그런데 그 목적과 달리 전쟁에 이용된 기구한 역사도 그렇지만 수도길의 이면에는 좀 더 서글픈 우리의 현실이 숨어있습니다. 인천은 서울보다 먼저 수도급수가 개시된 도시로 1910년 10월 30일 통수가 이루어지고 같은 해 12월 1일부터 급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송현동 수도국산 배수지에서 인천도심으로 급수할 수 있었던 용량은 인구 7만 명이 1인당 하루 112리터를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 초기의 수도관 매설 모습 ]
이것은 1960년대까지 충분히 사용하였을 정도로 20세기 초에 매설한 배관과 이를 관리하기 위한 수도길은 상당히 훌륭한 사회간접자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에 이러한 혜택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당시 인천 도심을 장악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수도의 시작도 1905년 2월, 인천거주 일본인들에게 수도를 설치해 달라는 거류민 대표 토미타(富田耕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을 정도였습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수원지로 노량진 취수장과 함께 개통한 뚝도 취수장 ]
그리고 수도 망 완공이후에도 송현동 배수지에서 각 가정까지의 수도 설치료와 사용료가 한국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비쌌기 때문에 도심외곽에 모여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수도라는 것이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수도국산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민거주지였는데, 바로 머리 위에 배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길어먹기 위해 통을 지고 도심까지 나가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 식민지인들에게 수도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1920년대 물을 긷던 모습) ]
다시 말해 문명의 이기인 수도가 우리나라역사에서는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주의자들과 그들 대리인들의 편의를 위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도뿐만 아니라 근대화 초기의 교통, 통신 수단 또한 대부분 이런 요구조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시작된 것인데 툭하면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표면적인 모습보다 이렇게 내면에 감춰진 진실을 새겨들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 관련글 참조 )
[ 생명수의 통로였던 수도길 위에 있었던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50년 9월 17일 수도길을 이용하여 서울로 진격하는 미 해병 5연대의 모습) ]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상수도 초기역사와 더불어 이와 관련하여 경인지역을 관통하던 잊혀 진 도로에 얽혀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수도라는 자체가 문명의 이기이고 수도를 통해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역사적 의의를 절대로 잊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희미하게나마 현재 흔적이 드문드문 나타나있는 수도길을 기억하여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끝.[ august 의 軍史世界 ]
첫댓글 수도길의 역사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두세번에 나누어 읽고 있습니다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오늘이 내
입니다. 
초대받아 서울 갑니다. 내 
을 맞아 수도 서울을 탈환한 미 해병대와 수도사단의 장병 여러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매우 뜻깊은날 생일이라니! Happy birthday!
오늘은 그만 읽고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