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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안동 ←반변천 임동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별도 탐방] ① 안동 ←반변천 임동
안동시 임동면 반변천 ― ‘임하호(臨河湖)’
반변천(半邊川)의 ‘본류’는 경상북도 영양군 북쪽에 솟아 있는 일월산(1218.5m)과 백암산(1003.7m)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에서 주왕산에서 발원한 ‘주왕천’과 구암산(807.7m)에서 발원한 ‘용전천’이 합류하여 임하호(댐)에 흘러들고, 안동시 길안면 신덕리에서 면봉산(1220.6m)에서 발원한 ‘길안천’이 북류하여 임하댐 아래의 반변천에 유입되고, 안동시 정하동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임하댐’은 반변천(半邊川) 하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와 임하면 임하리에 사이에 건설되었다. 지형적으로 강폭이 좁은 위치에 물막이 댐을 건설한 것이다. 임하댐은 낙동강 유역 수자원 종합개발을 위하여 1984년 12월 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완성된 다목적댐이다. 대한민국에서 9번째로 준공한 댐이다. 댐 축조는 1990년 완료하였다. 1991년 발전설비를 갖추고, 그해 12월 담수를 개시하였다. 92년 임하댐 준공기념식과 상업 발전을 시작했다. 연간 5억 9200만m3의 용수를 공급하며, 연간 발전량은 9670만kWh이다. — 영천댐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도수로가 2001년에 개통했고, 안동댐과 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수로도 건설되어 있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안동시 임동면 무실마을
낙동정맥의 지맥인 일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남쪽에 우뚝 솟은 아기산(峨岐山)은 임동면 수곡리의 진산이다. 옛날에는 봉화터로 쓰였으며 한발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많아 비를 내렸다고 한다. 무실(수곡) 마을에서는 마을의 당산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보름날 아기당에서 고사를 지낸다. 이 산은 임하호를 조망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아기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웅장한 임동교, 수곡교와 중평단지가 한 폭의 병풍처럼 보인다. 한 개의 자치단체인 안동에는 두 개의 다목적댐이 있다. 여기 아기산은 안동호․ 임하호 두개의 다목적댐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전국 유일한 곳이다. 또한 정상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안동의 최고봉인 학가산(882m)과 안동시가지 용상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멀리 일자봉과 월자봉으로 유명한 일월산(1218m)이 시야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시계가 좋은날이면 와룡산(461m)과 도산 서부리에 위치한 한국 유학의 본산인 한국국학진흥원을 볼 수 있다. 아기산은 정상부근이 우뚝 솟아 있어 사방의 조망이 어느 산 보다도 아름답다. 산자락 북에는 봉황사(뒤에 와서 황산사라고 했음)란 신라의 유명한 고찰이 자리하며 산의 서쪽 아래에는 ‘전주 류씨’ 집성촌인 ‘무실마을’이 있다.
‘무실마을’
임하댐을 중심으로 하여 상류는 임동면이고 하류는 임하면이다. 지금은 임하댐으로 수몰된 옛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는 ‘무실마을’을 중심으로 ‘전주 류씨’는 450년 이상 세거해왔다.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따서 전주 류씨를 ‘무실 류씨’라 불렀다. ‘의성 김씨’의 ‘내앞마을’은 댐의 아래쪽 임하면 전천리에 위치한다.
반변천 하류의 임하댐은 1984년 12월에 착공하여 1993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해 당시 3개군(안동, 청송, 영양) 6개면 35개 리가 수몰되었고, 1,793세대 10,241명이 이주했으며, 문화재는 33점이 수몰되었다.
특히 1980년대 임하댐 공사로 인하여 400여 년을 이어오던 전주 류씨의 집성촌인 무실(水谷)·박실(朴谷)·한들(大坪) 등 수곡리 일대가 물속에 잠겨버렸다. 그리하여 류씨 집안사람들은 안동 시내와 타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또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인근 산자락으로 터를 옮겨 새로운 고향을 만들었다. 솟을대문 앞에 ‘기봉구려(岐峰舊廬)’라고 쓴 돌비가 있는 무실종택(宗宅)과 기양서당(岐陽書堂), 류치명(柳致明)의 정재종택(定齋宗宅) 등 대표적 문화재들은 댐 수위(水位)를 고려하여 원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옮겨서 지었다. 전주 류씨들는 임하댐 물 위 수곡교를 따라 출입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과거 무실마을을 그리워하는 ‘망향정’이 있다.
또 다른 일부는 1987년 구미시(龜尾市) 해평면(海平面) 일선리(一善里)에 새 터전을 잡아 옮겨가면서 그곳을 '수류우향(水柳寓鄕)'이라 명명하여 집성촌을 조성하였다. 이 마을은 구미시에 의해 문화재마을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 윗대에서 예안으로 이거한 류정원(柳正源)의 '삼산종택'은 예안면 주진리에 있다.
무실의 ‘전주 류씨’
전주 류씨(全州柳氏)의 시조는 류습(柳濕)이다. 고려 말 전주(全州)에 살면서 완산백(完山伯)으로 봉해졌으므로 ‘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 류습의 첫째 아들 류극서(柳克恕)는 직제학에 오르고 둘째 아들 류빈(柳濱)은 영흥부사를 지냈고, 류빈의 둘째 아들 류의손(柳義孫)은 세종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류의손의 증손 류윤선(柳潤善)은 1500년 생으로 한양에 세거하였는데, 류윤선은 백형(伯兄) 류윤덕이 경상도 영주군수로 부임되자 형을 따라 영주(榮州)로 이거하여 터를 잡았다. 이후 류윤선은 영주에 살던 반남 박씨(潘南朴氏) 사직(司直)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었고, 그 아들 류성은 장성하여 청계 김진의 맏사위가 되어 처가가 있는 내앞마을 인근인 무실에 터를 잡아 무실[水谷] 류문을 형성하게 되였다.
안동 지역의 전주 류씨는 ‘무실 류씨’로도 불리는데, 무실의 입향조(入鄕祖)는 류윤선의 아들 8세손 류성(柳城, 1533~1560)이다. 류성이 1550년 경 안동의 ‘무실마을’(임동면 수곡리)에 정착하고 후손들이 크게 문호를 넓혀 세거해 온 것이다. 류성(柳城)은 안동 ‘내앞마을’(현 안동시 예안면 천전리)에 살던 의성 김씨(義城金氏) 청계(淸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어 처가의 농장이 있는 ‘무실마을’에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청계공(淸溪公)은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이니, 류성과 학봉은 처남매부지간이다. 무실에 정착한 류성(柳城)은 25세에 요절하였는데, 그 두 아들은 임진왜란을 맞아 결연히 의병(義兵)을 참여하였다. 맏아들 기봉(岐峰) 류복기(柳復起, 1555~1613)는 곽재우(郭再祐) 의병과 함께 창녕 화왕산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작은아들 류복립(柳復立)은 외숙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따라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하였다.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는 전주 류씨는 대개 류복립을 파조로 하는 묵계공파 후손들이다. ‘반쟁이 류씨’로 알려진 이 후손들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송문리 ‘반쟁이’를 중심으로 용인시 처안구 남동 마평동, 운학동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안동지방에 살고 있는 전주 류씨는 모두 류복기(柳復起)의 후손들이다. 류복기는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류우잠(柳友潛), 류득잠(柳得潛), 류지잠(柳知潛), 류수잠(柳守潛), 류의잠(柳宜潛), 류희잠(柳希潛)이 그들이다. 이들의 후손이 임동면 수곡리 ‘무실’을 근거지로 하여 임동면 박곡리, 마령리, 고천리, 삼산리 등지에 취락을 이루고 세거하게 되면서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이어졌다. 문과 출신 10여 명, 생원·진사 30여 명, 문집 출간 112여 명에 이르렀고, 특히 퇴계학통을 계승한 도학(道學)의 대가가 배출되어 행실과 학문으로 이름 있는 선비가 끊이지 않아 이 지역의 명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나주목사를 지낸 류정휘(柳挺輝), 밀양부사를 지낸 괴애(乖厓) 류지(柳榰), 청백리에 오른 함벽당(酒岩堂) 류경시(柳敬時), 공조참의에 오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 형조참의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대사헌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1702~1761) 등은 밝은 치적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백졸암(百拙庵) 류직(柳稷, 1602~1662), 호곡(谷) 류범휴(柳 休), 대야(大埜) 류건휴(柳建休), 노애(蘆厓) 류도원(柳道原),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1773-1827), 수정재(守靜齋) 류정문(柳鼎文) 등은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상변통고(常變通政)》 22권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과 50여 권의 문집을 남긴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은 영남 유학의 거봉으로 퇴계학맥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지만, 전주 류씨는 영남에서 가장 많은 문집을 낸 가문으로 16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900여 권의 문집을 냈고, 저술과 강학을 통하여 후진을 양성한 명문가이다. 이들 중에서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백졸암(百拙庵) 류직(柳稷), 정재(定齋) 류치명, 호고와(好古窩) 류휘문, 삼산(三山) 류정원 등 다섯 분이 불천위(不遷位)에 추대되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순국한 류시연(柳時淵), 개화기 선구자로 협동학교를 창설하고 신교육과 사회 개혁에 매진하면서 자주적 민족사관으로 저술한 새로운 역사책 《대동사(大東史)》 10권을 남긴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의거의 주역이었던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구국 활동에 생애를 바친 단주(旦洲) 류림(柳林) 등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많다.
400여 년을 이어오던 전주 류씨의 세거지 수곡, 박곡, 한들, 마령 등은 임하댐 건설로 모두 수몰되어 종가를 비롯한 일부는 옛 수곡마을 뒷산에 이주단지를 만들어 옮겨갔고, 다른 일부는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새 터전을 마련하여 집단적으로 옮겨갔다.
전주 류씨 집안의 학문
영남에서 가장 많은 문집(文集)을 남긴 명문가
동양고전과 한문에 해박했던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은 안동 무실(水谷)의 류씨(柳氏) 집안을 두고, ‘전영지최(全嶺之最)’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전 영남(嶺南)에서 최고(最高)’라는 뜻인데. 조선조에 걸쳐 한 가문에서 가장 많은 문집(文集)이 냈다는 말이다. 무실 류씨에서 문집을 낸 인물이 100여명이나 나왔다.
무실마을의 문화유적
전주 류씨 무실마을의 유적으로는 류복기를 제향하는 기양서당(岐陽書堂)과 무실종택, 류성의 아내 의성김씨 정려각(旌閭閣), 정재종택(定齋宗宅), 만우정(晩愚亭)은 임동면 수곡리에 있고, 예안면 주진리에 삼산 종택(三山宗宅)과 삼산정(三山亭)이 있다.
류성의 현손인 류익휘(柳益輝)가 지은 만령초당(萬嶺草堂), 류승현과 류관현 형제가 수학하던 삼가정, 용와 종택과 침간정(沈澗事), 류장원이 강학하던 동암정(東巖亭), 류건휴가 강학하던 대야정(大埜亭), 류휘문의 고택, 류정문의 고택, 근암(近庵) 류치덕(柳致德)의 고택, 류승현의 현손 류치검의 고택 등은 구미시 해평면(海平面) 일선리(一善里)에 새 터를 잡아 옮겨갔다.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전주 류씨 동성마을 ▶ 낙동강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여 배나드리 또는 뱃나들이라 하였다. 주진(舟津)은 배나드리의 한자 표기이다. 임동면 수곡리에 살던 류석구(柳錫龜)가 분가하여 주진리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류석구의 아들 류정원(柳正源)이 이름을 떨쳐 전주류씨 집성촌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조선 말기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대동사(大東史)》를 저술한 류인식(寅植)도 주진리 출신이다.
무실종택
무실종택은 입향조 류성의 아들 기봉 류복기을 통해 세워진 무실의 종가로, 일명 기봉구려(岐峰舊廬)라고 한다. 무실마을은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영덕 방면으로 20km 정도 가다가 임하댐 건너편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임하호를 가로지르는 다리(수곡교)를 건너면 수곡리, 무실마을에 든다. 이 마을은 안동시 임하면 수곡리인데 임하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현재 마을 아래쪽에 있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실종택은 전주 류씨 무실파의 대종가로 1988년 현 위치로 옮겼다. 안동 지역의 전주 류씨는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의 7세손 류윤선(柳潤善)이 한양에서 분가하여 영주에서 거주하다가 그 아들인 류성(柳城, 1533~1560)이 의성 김씨 청계(淸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어 안동 무실[水谷里]에 정착하고 후손들이 크게 문호를 넓혀 세거해 온 가문이다.
‘무실문중’은 퇴계학통으로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류성의 아들 기봉 류복기와 문규를 제정한 류복기의 아들 도헌 류우잠(柳友潛)이 그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 후 월회당 류원현이 문중의 화목과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종택에 걸린 ‘岐陶遺業’(기도유업)은 류성의 아들 기봉(岐峰) 류복기와 손자 도헌(陶軒) 류우잠(1575~1635)의 충성심과 학문탐구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자는 뜻의 가훈으로 후손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도헌 류우잠은 창석 이준, 경당 장흥효, 표은 김시온 등 당시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형제간 효우를 돈독히 하고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되니, 후손들은 그 성취를 ‘岐陶遺業’ 즉 기봉(岐峰)과 도헌(陶軒)의 유업(遺業)이라고 부른다.
[무실종택의 구조와 배치] ▶이 종택의 건립 년대는 알 수 없으나 1600년 후기 또는 1700년경의 건축물로 추측되며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임동면 수곡리 691번지에서 1988년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그 후 1991년 봄에 사랑채부분이 화재로 인하여 수리하였다. 옮겨오기 전 이 건물은 마을의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아기산을 의지하고 반변천을 바라보며 서북향하고 있었다. 토석담장을 두른 대지의 좌측에 편재하여 대문간채, 몸채 등이 보이고 우측마당에는 터밭이 일구어져 있었다. 터밭 뒤쪽 철문을 열고 뒷동산으로 20여m 올라가면 담장 없이 3칸 사당이 있었다. ▲ 평면도
정침은 口자형이지만 전면 좌측의 사랑채가 돌출한 형이다. 중문간의 우측에 갓사랑방 한 칸 반이 있고 이 갓사랑방에서 우측으로 돌출한 부분의 전면에는 사랑 마당 쪽으로 개방된 3칸에 길쭉한 사랑대청을 설치하고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이 대청의 뒤부분에 2칸을 면하여 2통칸의 큰사랑방을 배치하였는데 두짝 여닫이문과 3분 합들문을 각 칸에 달아 대청으로부터 출입하도록 하였다. 갓사랑은 아들이 거처하고 큰 사랑은 아버지가 기거하는 공간으로 하였다.
입향조 류성(柳城)
무실의 입향조 류성(柳城, 1533∼1560)은 시조 장령공 류습의 8세손이며 인의공 류윤선의 세 아들 중 큰 아들이다. 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영천(榮川 지금 안동군 녹전면 원천리 남양촌)에서 청계 김진 공의 사위가 되어 그 인연으로 내앞에서 가까운 안동의 수곡으로 이주했다. 부인은 학봉 김성일의 누이인 숙인 김옥정인데 류성은 병약하여 불행히도 28세로 세상을 뜨니 그 때 숙인 김씨의 나이 25세였다. 류성은 슬하에 형제를 두었으니 복기(復起)와 복립(復立)이다. 류복립은 부제학공 류윤덕의 아들 참봉공 류지에게 출계(出系)하였다.
무실 정려각(旌閭閣)
‘무실정려각’은 1635년에 류성의 처인 숙인 의성 김씨의 정렬(貞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류성의 부인 김씨는 청계공 김진의 딸이자 학봉 김성일의 누이이다. ― 24세에 남편을 잃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 28세에 음식을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인조 13년(1635)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정려비문에는 ‘절부 고유학류성처 문소김씨지려(節婦故幼學柳城妻聞韶金氏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절조가 높은 부인, 젊은 학자 류성의 아내 김씨 부인의 아름다운 덕을 기린다는 뜻이다. 1988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의병장 류복기(柳復起)
류복기(柳復起, 1555년∼1617)는 유성(柳城)의 아들로 자(字)는 성서(聖瑞)이고 호는 기봉(岐峰)이다. 기봉은 명종 10년(1555) 을묘 10월 23일에 수곡 본가에서 출생하여, 광해 9년(1617) 3월 22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였다. 도량이 깊고 두터웠으며 기개가 있고 민첩하며 용기가 있었다. 6세에 아버지[류성]를 잃고 또 9세에 어머니[숙인 김씨]를 여의었으며, 그 후 외조부 청계 김진(金璡)이 집으로 가 양육되었다. 성장하여 외숙인 학봉 김성일(金誠一)에게 수학해서 문장과 덕행으로 향리에서 존경을 받았는데, 일찍이 한강 정구(鄭逑)가 말하되 “류모는 더불어 심성을 논할만하다”고 하였다.
38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와 의병을 창의하여 팔공산회맹(八空山會盟)에 참여하고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도 활약하였으며, 병란 뒤에는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길에 가득하니 길가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끓여 먹여 살린 자가 많았다. 춘호(春湖) 류영경(柳永慶)이 가까운 친족으로서 그 행의(行誼)를 듣고서 한 번 보자고 요청했으나 권문(權門)에 출입하는 것을 꺼려하여 가지 않았다. 조모 박씨를 섬기는데 효성을 다하고 과부가 된 숙모를 모셔와 모친처럼 섬기었다. 그리고 조상을 모시기를 지성으로서 하였으니 그의 행실은 가히 후인의 모범이 된다고 하였다. 선조 40년(1607)에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제수되었고, 손자 부윤 괴애(乖厓) 류지(柳搘)의 귀(貴)로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으며 임란 창의의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류복기(柳復起)의 묘소는 임하면 동쪽 임당산에 장사하니 선친 류성 묘의 후록(後麗)이다. 배위는 영덕정씨(盈德鄭氏)니 참봉 정진(鄭搢)의 딸로서 명종 8년(1552) 계축에 나서 인조 원년(1623)에 졸하니 향년 71세였다.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는데 우잠(右潛), 득잠(得潛), 지잠(知潛), 수잠(守潛), 의잠(宜潛), 희잠(希潛)이며, 맏딸은 동래인 진사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에게, 둘째딸은 천의인 생원 이명원(李明遠)에게, 셋째 딸은 안동인 김원(金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기양서당(岐陽書堂)
기양서당(岐陽書堂)은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무실)에 있다. 회헌(檜軒) 류의손(柳義孫, 1398〜1450)과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 1555년∼1617))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곳이다. 처음 설립할 당시인 1615년에는 류복기가 서재로 건립하여 학문 연구하며 후손들을 교육하던 곳이었다. 1716년에 후손들에 의해 서당으로 중창하였고, 그 후 추원사(追遠祠)를 세워 1780년에 류복기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806년에 류의손의 위패를 추봉(追奉)하였다. 1988년에 현위치로 옮겼다.
매년 세초 정월 6일에 후손들이 사당에 정알(正謁)의 예를 갖추며 봄·가을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享祀:제사)를 지낸다. 류의손은 조선 초기의 학자로 세종때 이조참판·예조참판을 지냈으며, 류복기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바 있다.
사당인 추원사(追遠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강당인 역락당(亦樂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2칸 크기의 방(房)이 딸려 있다. ‘역락(亦樂)’이라는 강당명은 논어의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이며, 강당에 딸린 양쪽 방에도 각각 ‘숭덕재(崇德齋)’와 ‘광업재(廣業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밖에 전사청과 고사가 현존한다.
기양서당은 안동 입향 전주 류씨가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장소이다. 임하댐 수몰지역 내에 있던 건물로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지금도 춘추 향사는 물론 하계교양강좌 등을 통해 조상의 유덕을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애당(水涯堂)
독립지사 유진걸이 세운 고택
안동에서 영덕으로 향하는 34번 국도, 반변천을 따라 가면 아름다운 임하호가 한 눈에 펼쳐진다. 임하호를 가로지르는 다리(수곡교)를 건너면 수곡리에 든다. 다리를 건너면 마을 앞에는 반변천, 그리고 뒤쪽의 아기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수곡(水谷)이다. 고풍스런 '무실마을'이 한눈에 나타난다. 그 초입에 수애당(水涯堂)이 자리 잡고 있다. 길목에는 망향정(望鄕亭)이 물속에 잠긴 옛 마을을 그리며 서 있다.
무실마을은 전주 류씨(全州柳氏)의 집성촌이다. 15세기 말에 입향조 류성(柳城)이 정착한 후 후손들이 약 600년 동안 살아왔다. 원래는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 612번지에 있었으나, 마을은 댐이 들어서기 몇 해 전 아기산 자락의 현 위치로 옮겨왔다.
수애당은 원래 수애(水涯) 류진걸(柳震杰)이 부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1939년에 건립한 사가(私家)이다. 독립운동가 류진걸 선생은 일제강점기 서울 민중대회에 참석해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동포의 연합추도식에서 참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학생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일본 최대 대창토건(현 대성건설 전신)에서 나진·선봉항만 공사, 동해남부선 철도공사 등에 일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1939년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수애당(水涯堂)을 지었고, 효심이 서린 고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임하댐 수몰(水沒)로 인해 1987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복원했다. 물가와 가까운 위치다. 수애당 건축을 총괄한 이는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운현궁을 보수한 대목수다. 그래서인지 운현궁과 비슷한 구조다. 남향인 대문채를 중심으로 'ㄷ자'로 배치해 아늑함을 더했다. 조선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한옥에서 양반가의 기품이 느껴진다. 고택과 그 앞의 '임하호'가 빚은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애당(水涯堂)은 틀어짐이 없다는 춘양목으로 지어 보존상태 아주 양호하다. 건물은 3동(棟) 29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7간 측면 2간이다. 큼직한 건물 말고도 우람한 솟을대문만 보더라도 이곳이 안동 반가의 위용을 드러난다. 서편의 담을 돌아 정문에 이른다. 정면 5칸의 솟을대문이 위풍당당하다. 전형적인 양반가의 풍채다. 대문채는 대문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외양간과 창고를, 오른쪽에 통간 온돌을 두었다. 중문과의 사이에는 자그마한 장방형의 행랑마당이 있고 곧 안채와 중간채의 마당으로 길이 열린다. 경상북도에서는 조선 후기 건축 양식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198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했다.
수애당 유숙 — 고택체험프로그램 운영
수애당은 전통가옥에서 지닌 불편한 부엌, 화장실, 세면장을, 고택 외부형태의 변경 없이, 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지금 수애당은 수애 류진걸의 손자 류효진—문정현 부부가 30대 중반부터 고택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옥에서 일반인들이 유숙할 수 있는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한다. 여행객들이 쾌적하게 머물면서 마음의 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베개 높이부터 방의 온도까지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인다. 나뭇결의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한옥, 따뜻한 향토방에서 잘 수 있으며, 안동에서 재배하는 제철 식재료로 조리한 전통적인 상차림을 한다. ☞ 수애당 전화번호 : 054) 822-6661
정재종택(定齋宗宅)
퇴계의 학문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종택
정재종택(定齋宗宅)은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영덕 방면으로 안동대학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지나 20km 정도 가면 수곡마을로 가는 수곡교와 동안동농협주유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100m 정도 더 가면 정재종택(定齋宗宅)이 나온다. 이 종택은 원래 임동면 대평리(한들)에 있었고, ‘만우정’은 임하면 사의리에 있었는데, 1987년에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박실[朴谷],무실[水谷], 한들[大平] 등 전주 류씨 마을이 수몰됨에 따라, 종택은 정재 류치명의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시원하게 펼쳐진 임하호가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고택. 300여 년의 시간을 안고 서 있는 정재종택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종택이다. 널찍한 흙 마당 너머에 한옥이 기품 있게 서 있다.
“사물은 각기 마땅한 곳에 머물러야 천하가 안정된다. 인경(仁敬)에 머물러서 군신(君臣)이 안정되며, 효자(孝慈)에 머물러서 부자(父子)가 안정되며 신의(信義)에 머물러서 벗이 안정된다. 이는 성인이 천하가 한결같이 움직이는 까닭이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군자는 그 평범한 자기의 자리에서 행하고 그 밖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 평범한 자리에서 근거하는 것이 머무는 것이니, 그 밖에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곧 안정(安定)이다. 그러므로 (중용에서) 말하기를 ‘군자는 평범한 지위에 거처하여 천명을 기다린다’고 했으니, 마음의 평정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집을 ‘定齋'(정재)라고 했다. 안정은 곧 머무는 것이다. 머무는 것에도 도(道)가 있으니, 이르기를 ‘군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나의 방을 ‘反求庵’(반구암)이라고 했다.” (필자 졸역) ☜ 名堂室小說(명당실소설) 현판 (48x111cm)
종택은 정침, 대문채, 행랑채, 사당 등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은 口자형 평면구성인데, 그 전면의 사랑채는 사랑방, 사랑마루, 갓사랑, 책방이 있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안방, 부엌, 찬방, 대청, 누마루,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이 있고 우측에는 장마루 청판을 깐 고방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祠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그리고 종택과 조금 떨어진 곳에 만우정(晩憂亭)도 있고, 종택 뒤에는 정재의 묘소(墓所)도 있다.
정재종택에는 멋스러운 정자 만우정(晩憂亭)이 있다. 대문 밖으로 나와 왼쪽으로 난 풀밭을 조금 걸어가면 아담한 팔작지붕 홑처마 집이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만우정은 류치명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널찍한 마루와 방이 하나 있다. 앞쪽에 임하호수가 시원하게 보이고, 호수 너머로 산이 쭉 펼쳐져 있다.
무실 전주 류씨의 학문
입향조 류성(柳城, 1533~1560)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립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류우잠(柳右潛)의 증손인 류봉시(柳奉時, 1654~1709)가 무실에서 분가하여 근처 위동에 터전을 잡았으며 그의 두 아들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과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에 따라 재지기반이 확고해졌다. 무실의 전주류씨는 모두 류복기의 후예들이다.
류승현(柳升鉉)은 박실[박곡]에 터를 잡아 박실의 파조가 되었고, 류관현(柳觀鉉)은 한들[대평]에 터를 잡아 한들의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용와 류승현의 아들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수정재(壽靜齋) 류정문(柳鼎文) 3대가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됨으로써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양파 류관현 이후의 세계는 류통원(柳通源)—류성휴(柳星休)—류회문(柳晦文)—정재 류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진다. 류치명은 입향조 류성의 11세손이다.
무실로 이어져 온 퇴계 학맥의 계보
정재종택(定齋宗宅)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종택이며 그의 고조부인 류관현(柳觀鉉, 1692~1764)이 1735(영조 11)년에 지었다. 류치명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외증손으로, 외증조부 대산(大山)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일반적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은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잇고, 이어서 경당 장흥효(張興孝)—갈암 이현일(李玄逸)—밀암 이재(李栽)—대산 이상정(李象靖)—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으로 계승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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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이현일(李玄逸, 1627~1704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중신이고 유학자이다.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원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에서 출생하고 자랐으나 40세 되던 해에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로 옮겼다. 아버지는 재령 이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 장씨로 알려진 안동 장씨(安東張氏) 장계향(張桂香)으로 유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딸이다. 역시 학자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아우이다. 그가 태어난 영덕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은 그의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정부인 안동 장씨는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여중군자로 추앙을 받는 분이다.
조선 현종, 숙종 때의 남인 중진으로 남인의 이론가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힌다. 특히 이현일은 이황(李滉)의 적통인 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의 학통을 모두 이은 퇴계학파의 적통인 외조부 장흥효(張興孝)와 중형 이휘일(李徽逸)을 사사(師事)하였다.
숙종 초에 학행(學行)으로 미수 허목(眉叟許穆)과 백호 윤휴 등의 추천을 받고 지평에 특채되었으나 견해를 다소 달리하였다. 성균관 좨주(祭酒)·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그 후 이조참판으로서 세자시강원찬선(贊善)이 되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찍이 조사기(趙嗣基)의 죄를 구원하려 하다가 함경북도 홍원군(洪原)으로 귀양 갔으나, 서인 사헌부장령 안세징(安世徵) 등의 계속된 핵청(覈請)으로 종성군에 이배됐다가 곧 석방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서인과 노론의 종주인 이이의 학설을 정면 비판한 덕에 관직과 사후에 내린 시호를 여러 번 거두어들이기까지 했으며 문집을 간행했을 때 관할 수령을 파면시키고 문집들은 수거하여 불살랐다. 그 뒤 추탈과 복권을 반복하다가 1909년에 가서야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갈암집(葛庵集)》, 《홍범연의(洪範衍義)》 등이 있다.
밀암(密庵) 이재(李栽)
밀암(密庵) 이재(李栽)는 1657년 지금의 영양군 수비면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이 재령(載寧)인 그의 가계는 할아버지[이시명], 아버지[이현일], 자신[이재] 등 3대에 걸쳐 ‘7현자(七賢者)’ 혹은 ‘7사림(七士林)’을 배출한 명실 공히 당대에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이재의 아버지 7형제 모두가 출중한 유학자들이었고, 그 중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은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또 이들의 학통이 퇴계학맥의 정통에 속했다. 퇴계 문하의 3걸인 정구(鄭逑),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을 두루 사사한 장흥효(張興孝)의 외손자가 이휘일, 현일 형제들이다. 따라서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의 학문은 영남학맥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퇴계 (退溪) 이황(李滉)에 연원(淵源)을 둔 영남학맥의 여러 갈래 중 가장 뚜렷한 맥을 이어받은 밀암 이재(李栽)는 계승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그의 학문은 외손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게 한 공로자이기도 했다.
그가 33세 때 숙종을 특별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 이현일을 따라 몇 차례 상경하며 명유(名儒)들과 교유를 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정변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현일이 밀려나면서 이재의 생애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현일이 유배길에 오르자 그는 시종 따라다니면서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 《창구객일(蒼狗客日)》이다. 영양-강릉-양양-원산-함흥-홍원까지 1천5백리를 갔다가 그 이튿날 다시 서울까지 되돌아왔다가 서울-포천-김하-천령-원산-영흥-함흥-홍원-북청-마운령-마천령-길주-명천-종성, 2년 뒤 다시 전라도 광양까지 3천리 거리를 이배(移配)하는 동안 지체한 역, 유숙한 곳은 반드시 명시하고 앞서 떠난 곳에서 다음 머문 곳까지 일일이 거리를 기록해 두어서 당시의 여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재는 유배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지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연구는 중단하지 않았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부친의 시종을 드는 여가를 틈타 주자서(朱子書)등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일과를 정하여 한 치의 착오도 없이 각종 경서를 읽었다. 이러한 이재의 태도를 흐뭇하게 생각한 이현일은 ‘너는 나의 학문과 사상을 빛낼 사람이다’ 고했다. 8년간의 적소생활에서 풀려난 그의 아버지가 안동군 임하면 금소에 금양(錦陽)이라는 초당을 짓고 우거하자 사면팔방(四面八方)에서 유생들이 모여들어 배움을 청했다.
이때 이재는 찾아오는 유생들을 먼저 만나서 강론 질의를 거친 연후에야 연로한 아버지를 찾게 하였다. 한 평생 효성과 학문으로 일관해온 그가 48세때 대학자이며 뛰어난 정치가였던 아버지 이현일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애통함이 끝날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부인마저 잃고 연이어 세 아들마저 잃는 비운을 겪어면서도 학문에 대한 정열의 불꽃을 끄지 않았다.
그는 당시 영남에서 두드러진 명유들이었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고재(顧齋) 이만(李만)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끝없는 사색과 독서를 통하여 회심처(會心處)가 있으면 그때그때 기록하여 두었다가 《금수기문(錦水記聞)》이라는 책을 엮었다. 72세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진리탐구에 마지막 정렬을 불태웠다.
아버지가 “나에게 기대했건만 지금 내가 곤궁하고 능력이 없어 아버지의 유업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하며 집필에 전력하여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주자강록간보(朱子講錄刊補)》, 《주전집람(朱全集覽)》, 《심경질의고오변(心經質疑考誤辨)》 등이다. 이밖에 그는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과 함께 이현일의 문집(文集)을 간행하고 권두경과는 《도산언행통록(陶山言行通錄)》을 공저했다.
그가 74세로 생을 마치니, 세간에 말하기를 ‘구제밀찰(九祭密札)’이라고 했다. 제문(祭文)은 구사당(九思堂)이요 서찰(書札)은 밀암(密庵)이라고 한 것이다, 영남 유림 대부분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그의 높은 학덕을 추모했다. 그의 묘비명에는 ‘징사(徵士)’로 표기되었다. 징사는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도 않고 오로지 인격수행과 학문에만 전심한 기절 높은 선비에게만 주어지는 영예인 것이다. 정승 3명이 한사람의 ‘징사’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文臣)이자 대표적 성리학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소퇴계(小退溪)’라 불릴 정도로 출중한 선비였다. 한산 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밀암의 외손자인 대산은 진정한 학문 수행에 천착함으로써 도학(道學: 성리학)을 다시 꽃피우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낸 그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대표적 거유(巨儒)로, 퇴계 이후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퇴계 이황을 제일 존경하고, 평생 도학을 공부하며 퇴계학 정립을 위해 노력한 그는 52권 27책에 모두 2,157판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제자 인명록인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에 올라있는 문하생만 273명에 이른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望湖里)에는 한산 이씨(韓山李氏) 일족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대개 지역과 씨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이들 씨족은 본관이 한산(韓山임에도 영남 지방에서는 ‘소호리(蘇湖里) 이씨’라고 부를 정도로 오히려 안동에 익숙하다. 행정명이 망호리(望湖里) 임에도 소호리가 입에 익었다. 한산 이씨가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광해군 때의 일이다. 서애 류성룡의 사위인 이문영(李文英)은 목은 이색의 맏아들 후손으로 찰방 벼슬을 하다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가 외숙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서애 류성룡의 셋째아들)을 사사했는데, 광해군 때 대북(大北) 정권의 전횡에 염증을 느껴 회인현감 직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옮겼다. 수은의 아들 효제(孝濟)는 운천(雲川) 김용(金涌, 학봉 김성일의 조카)의 손서요, 증손자인 태화(泰和)는 밀암 이재(갈암 이현일의 셋째아들)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들인 대산 이상정과 소산 이광정 형제는 문명(文名)이 높았다.
대산(大山)은 5세에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14세가 되어서는 외할아버지인 밀암(密菴) 이재((李裁, 1657~1730)에게 나아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밀암은 갈암 이현일의 셋째 아들이다. 시경, 서경, 중용, 맹자, 태극도설, 주자서절요, 근사록, 가례 등 성리학과 예학에 대한 공부를 함으로써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20세 때 외조부이자 스승인 밀암이 별세한 후 그는 달리 스승을 정하지 않고 동생 이광정과 함께 서로 탁마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1735년 과거(대과)에 합격한 대산은 이듬해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의 권지승문원부정자라는 관직을 처음 맡았으나, 1개월 남짓 후에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여러 자리를 거쳤으나 사직을 반복, 실제 관직생활은 급제 이후 45년 동안 6년 정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짧은 관직생활은 정치적 환경 탓도 있겠지만, 벼슬보다는 학문에 침잠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 대산의 적성에 더 맞았기 때문이었다.
관직을 떠나서는 학문을 닦고 저술을 하며, 제자를 가르치는데 열성을 다했다. 더 앞선 학자를 찾아가서 탁견을 구하고, 동학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학들에게는 자신의 학식과 체험을 가르쳤다. 그것이 그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고향 마을의 대산서당(大山書堂), 고향 마을 인근의 고산정사(高山精舍)와 고운사 등이 그의 학문 공간이었다. 안동시 남후면에 대산을 배향하는 고산서원 이있다.
그의 학문은 더욱 익어갔고, 그를 찾는 제자들의 발길은 더욱 잦아졌다. 이렇게 오로지 참된 학문의 길을 갔던 대산이기에 그의 문하에서 ‘호문삼로(湖門三老)’로 불리던 동암(東巖) 류장원, 후산(後山) 이종수, 천사(川沙) 김종덕을 비롯해 손재 남한조, 묵헌 이만운 등 뛰어난 학자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호문(湖門)은 대산 문하를 말한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은 대산 이상정의 가르침을 받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의 제자이다.
대산은 선현들의 도학(성리학)을 정리하고 주요 내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이기휘편(理氣彙編)》, 인간의 칠정에 대해 논한 《약중편(約中編)》, 퇴계의 학문 요체를 결집한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선현들의 심신수행에 대한 글들을 채집·분류하고 약주(略注)한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등 높은 수준의 성리학 연구물들을 누구보다 많이 남겼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류치명(柳致明, 1777년∼1861년)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한평(寒坪) 류회문(柳晦文)이다. 외가인 안동부 소호(蘇湖,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출생하여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 류범휴(柳範休), 정종로(鄭宗魯), 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장시도사(全羅道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되었고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부사(楚山府使), 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853년(철종 4) 가선대부에 오르고 한성좌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같은 해 풀려났다. 1856년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857년 문생들과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이듬해 85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선생문집(定齋文集)》· 《예의총화(禮疑叢話)》· 《가례집해(家禮輯解)》· 《학기장구(學記章句)》· 《상변통고(常變通攷)》· 《주절휘요(朱節彙要)》· 《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 《태극도해(太極圖解)》· 《대산실기(大山實記)》· 《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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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義氣)의 무실 사람들 (1)
무실 전주 류씨의 의리와 구국활동
무실 류씨의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는 의병에 참여하고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도 의병과 독립만세 운동의 중심에 섰다. 특히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순국한 류시연(柳時淵), 개화기 선구자로 협동학교를 창설하고 신교육과 사회 개혁에 매진하면서 자주적 민족사관으로 저술한 새로운 역사책 《대동사(大東史)》 10권을 남긴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의 주역이었던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구국 활동에 생애를 바친 단주(旦洲) 류림(柳林) 등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많다.
의기(義氣)의 무실 사람들 (2)
전주 류씨 정재종가의 독립운동
정재 류치명 종가는 퇴계학맥을 이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3대가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재종가의 인물이 독립운동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독립운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의병항쟁 때이다. 일제강점기의 의병은 전기(1894~1896), 중기(1904~1907.7), 후기(1907.8~1909)로 나뉘는데, 안동의병은 전기(前期)에 집중되어 있다.
임동면 챗거리장터 3.1 운동을 주창한 독립운동가 류동환도 그의 자손이다. 무실 문중 키는 챗거리 장터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안동의 독립 만세 운동 중심에 섰다.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이 시행됨에 따라 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 안동의병이 결성되었다. 이 때 정재 종가의 류지호(柳止鎬, 1825~1904)와 그의 맏아들 류연박(柳淵博, 1844~1925) 분연히 움직임이 나타난다. 류지호는 70세의 노령임에도 당대 최고 지도자로서 의병장을 선임하거나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참여하였다. 류연박은 참모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두 부자 말고도 류치명의 생가 동생인 류정호(柳廷鎬, 1834~1907) 또한 덧붙여야 한다. 그는 다섯 명으로 구성된 도서기(都書記)를 맡았으며 그의 맏아들은 참모를 맡았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무실마을 사람들은 네 명 더 간부진에 들어 있었다.
《안동의소파록(安東義疏爬錄)》에는 전체 46명의 의병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무실마을의 사람은 모두 6명이다. 류연박과 류정호 외에 중군을 맡은 류완(柳琓, 1860~1930)과 서기를 맡은 류연즙(柳淵楫, 1853~1933), 류회식(柳晦植, 1858~1932), 그리고 출령을 맡은 류헌호(柳憲鎬, (1841~1913)가 그들이다. 여기에 기록된 무실마을 사람의 대다수는 집안의 동생이나 조카들이다. 또한 《적원일기赤猿日記》라는 청송의진(靑松義陣)의 일지에는 류벽호(柳辟鎬, 1839~1901)가 안동의진의 소모장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류시연(柳時淵, 1872~1914)은 무실 류씨를 대표하는 의병이다. 류시연 선생의 자는 박여(璞汝), 응만(應萬)이고 호는 성남(星南)이다. 임동면 수곡리 한들 출신이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여 의병 항쟁을 한 인물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권세연을 대장으로 하는 안동의병진이 결성되던 무렵, 영양의 김도현(金道鉉)과 함께 1895년 2월 17일 청량산에 의병 결성을 논의하였고 소모장이 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류시연을 대규모 의병진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07년 군대해산 이후에도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지방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특히 서쪽의 문경 이강년(李康秊) 의병진, 동쪽의 제천의 신돌석(申乭石) 의병진과 연계하여 연합작전을 펼쳤다. 1911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2년 무기 구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영주 반구왜경에 붙잡혀 사형언도를 받고 1914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기(義氣)의 무실 사람들 (3)
전주 류씨 교육활동과 3·1만세운동
임하와 임동지역에 머물렀던 류치명의 정재종가는 의병활동에서 그치지 않는다. 1907년 현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있는 내앞마을에 있던 협동학교가 1912년 10월 정재종택으로 이전되었다. 협동학교 교장으로는 류연갑(柳淵甲, 1850~1920)이, 토지 소유자로는 류동태(柳東泰, 1880~1923)라고 적혀있다. 협동학교가 이전되면서 혁신과 변화를 정재종가가 이어받아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임동의 챗거리 장터에서 일어난 3 · 1운동 또한 정재종가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때 계기를 만들었던 인물은 류동시(柳東蓍, 1886~1961)이다. 그는 류치명의 증손자로 고종의 장례에 참가하려고 상경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게 된다. 거리에 가득한 태극기와 만세시위행렬의 인파들을 보고 그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다. 집안의 어른들에게 서울의 상황을 알리고 이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 때 핵심인물로 드러난 인물이 류동시의 숙부인 류연성(柳淵成, 1857~1919)이다.
류연성(柳淵成)은 협동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류동태(柳東泰), 그리고 이균호(李均鎬, 1891~1955)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였고, 관청을 부수는 것이 독립의 시위운동이라고 역설하면서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3월 15일 류연성(柳淵成)은 류동수(柳東秀, 1887~1978), 류교희(柳敎熙, 1886~1965), 박재식(朴載植, 1888~1927), 박진성(朴晉成, 1877~1930) 등과 ‘챗거리장터’ 동쪽의 공동타작장에서 함께 모여 논의 하였다. 그 결과 21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 뜻을 모았다. 협동학교에서는 만세운동에 쓰일 태극기와 독립선언서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협동학교가 정재종택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챗거리 장터에서의 만세운동 준비는 정재종가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임동 만세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류연성(柳淵成)은 군중들에게 시위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이끌었다. 이 때문에 그는 징역 7년 형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형이 확정되고 7일 만에 그는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류연박(柳淵博)은 의병활동에서 참모역할을 한 후, 파리장서에도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재종가의 종손이었던 류연박은 협동학교의 이전 때 집을 제공했던 당사자이다. 이후 류치명의 손자인 류동저(柳東著, 1892~1948)는 안동공립보통학교가 1920년 5월 23일에 안동청년회를 조직할 때 두 번째로 기부금을 많이 낸 것으로 신문에 기록되었다. 또한 안동청년회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강연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1년 후 새로운 사업의 일환으로 학술강습회에서도 그가 강사로 활동한 것이 확인된다. 이 같은 청년운동 이후 노동 · 농민운동에서도 정재종가의 인물이 보인다. 류연갑의 손자인 류주희(柳周熙, 1892~1965)는 결성 때부터 참여하였고 총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앞서 언급한 류동저 또한 함께 활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임하에 자리 잡은 정재종가의 3대 독립운동활동은 전통적인 유림 집안에서 현실의 민족문제를 어떻게 맞서 나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의병항쟁에서부터 만세운동, 청년운동,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나라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되찾고자 힘썼다. 협동학교를 세운 주역들이 만주로 옮겨 독립군기지를 세울 때, 그들은 지역에 남아 지역의 정신을 하나로 모은 것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투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실류씨 정재종가의 사람들은 올곧은 마음으로 지역의 유림 및 군중들을 어우러지게 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노력했다. 오늘날 임하댐 건설로 인해 그들이 머물렀던 마을은 수몰되었지만 그 정신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출처] [경북정체성 탐방 - 안동] 10. 무실마을|
오늘날의 무실 사람들 (4)
학자를 많이 배출한 전주 류씨
무실의 전주 류씨는 전통적인 학자 집안이다. 오늘날에도 그 문벌이 이어지고 있다. 알려진 대로 살펴 보면, 류영(시인, 영문학자), 류원식(육군준장), 류정기(충남대), 류세희(한양대), 류탁일(부산대 국문과), 류기룡(경북대), 류점기(성균관대), 류점숙(영남대), 류안진(시인, 서울대), 류치송(국회의원), 류청(국회의원), 류성근(전북대), 류상수(전북대), 류문희(전북대), 류석춘(연세대 사회학), 류정호(이화여대), 류광찬(전주교대 총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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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마을 전주 류씨가 이주한 ‘일선마을’
구미시 해평면 일선문화재마을
낙동강 구미보 위쪽 낙동대로 옆 들판 안쪽에 고택이 들어선 일선마을이 있다. 이곳은 1987년을 전후해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안동시 임동면 수곡(무실), 박곡, 한들, 용계마을에 살던 전주 류씨 일부가 구미시 해평면 일선마을로 옮겨와 새로운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이곳은 뒤로는 태조산 앞으로는 낙동강이 흘러 무실과 비슷한 자연환경을 갖추었다. 마을 앞에 '水柳寓鄕'(수류우향)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안동 무실마을[水] 전주 류씨[柳]들이 깃들어 사는 마을[寓鄕]이라는 뜻이다.
마을의 뒤편으로 이주민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류해정 공이 지키고 있는 수남위 종택(경북문화재 제51호)과 용와종택, 침간정(경북민속자료 18호), 호공와종택(경북문화재 제57호), 무실마을의 작은집인 근암고택(경북문화재 제55호), 임하댁(경북문화재 제58호)이 자리잡고 있다. 또 안동의 양반들이 자제나 인들에게 학문과 예를 가르치는 만령초당과 삼가정(경북문화재 제50호), 동암정(경북문화재 제52호), 대야정(경북문화재 제554호) 등 많은 문화재와 민속자료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안동과 무실마을의 역사적 의미
근래 안동에서는 안동을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말한다. 유서 깊은 안동 지역의 진성 이씨들은 벼슬보다 자신을 갈고닦는 수양에 힘쓴 조선 성리학의 거봉 퇴계 이황을, 풍산 류씨들은 국난 극복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으로, 영천 이씨들은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농암 이현보로,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들은 퇴계의 학통을 잇고 수많은 제자를 둔 학봉 김성일로, 고성 이씨들은 독립운동 집안의 석주 이상룡으로, 무실의 전주 류씨들은 영남 최고로 많은 문집을 발간하고 퇴계 학맥의 정통을 잇는 정재 류치명으로 ―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산다.
임하댐의 건설로 홍수 조절, 수질 개선, 낙동강 중하류 물 부족 해결, 관광 시설 등등의 풍요로운 국가를 위한 노력은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임하댐의 건설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이어온 명문가 무실마을을 지면에서 지워내었다. 물밑으로 사라진 무실마을은 전주 류씨(全州柳氏)가 성리학의 뿌리를 내린 고절한 학문과 의리의 고장이었다. 그 무실마을과 챗거리장터가 미래 가치를 예측도 할 수 없을 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었다. 수몰된 무실의 챗거리장터는 간고등어의 본고장이며 무실 종가의 역사적 가치와 그들의 학문적 업적 그리고 민족독립에 헌신한 고절한 선비정신을 우리의 푸른 역사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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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만휴정(晩休亭) 원림
만휴정은 안동시 임하(면) 반변천에서 길안천을 따라가는, 안동(임하)에서 영천으로 가는 35번 국도로 18km떨어진 위치에 있다.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이다. 조선시대에도 학문을 닦은 후 조정에 출사해 유생(儒生)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선비들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와 속세를 잊고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만휴정(晩休亭)은 조선 전기의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말년에 귀향하여 지은 정자다. 안동 김씨 김계행(金係行)은 17세에 진사가 되고 50세 되던 해 식년시에 급제하여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다. 연산군 때 대사간에 올랐으나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다.
처음에는 풍산 사제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칭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를 ‘보백 선생’이라 불렀다. 보백(寶白)이란 재물에 대한 욕심 없이 곧고 깨끗함을 뜻하는 ‘청백(淸白)’을 보물로 삼는다는 의미다. 1501년 고희를 넘긴 김계행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일찍이 마련한 지금의 ‘보백당 종택(寶白堂宗宅)’에 정착하고, 산속 계곡의 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만휴정(晩休亭)이란 ‘늦은 나이에 쉰다’는 뜻으로 김계행이 말년에 얻은 정자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름이다. 만휴정은 김계행의 장인 남상치(南尙致)가 지어 처음에는 쌍청헌(雙淸軒)이라는 당호로 불렀다. 김계행이 만년의 늦은 나이에 이곳을 은거생활의 장소로 즐겨 사용한 것에서 이름이 만휴정(晩休亭)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김계행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삶의 전형을 보여준 올곧고 강직(剛直)한 선비였다. 그는 자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했으나 청렴을 제일로 하는 청백리의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만휴정 원림은 독서와 사색을 위한 정원(亭苑)이다. 묵계리에서 길안천에 놓인 하리교를 건너 지류를 따라 올라가면 ‘송암계곡’에 다다른다. 이곳을 지나면 먼저 암벽의 단애 위로 흰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송암폭포’의 시원한 모습이 보이고, 그 위로 조금 올라가면 암반 위를 흐르는 물길로부터 조금 안쪽에 ‘만휴정(晩休亭)’이 자리하고 있다. 만휴정은 이 계류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데 마치 외나무다리와 같이 폭이 좁은 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다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만휴정(晩休亭)은 석축 위 끝단에 가로세운 낮은 담장 안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만휴정의 마루에 오르면 계자난간 앞으로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내려다보이고, 고개를 들면 앞산의 산허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무르게 된다. 또 위쪽으로는 암반 위를 흘러내려 이룬 소와 계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고졸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쪽 소의 큰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만휴정은 인공적인 요소가 극히 절제된 구성을 보여준다. 이곳을 짓기 위해 축조한 석축과 담장, 소박한 정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원림(園林)의 전부다. 본래 우리나라의 원림은 인공적인 일본의 정원이나 과장된 중국 민가정원과는 달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자연 요소를 차용해서 정원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만휴정은 이러한 한국 고유의 소박한 원림 형태를 잘 보여주는 정원이다.
만휴정에서 늦은 삶을 여유롭게 보낸 김계행은 8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는 자신의 처소인 보백당에서 임종하면서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항상 돈독한 우애와 지극한 효심을 갖도록 하라. 그리고 절대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는 청백리의 삶을 후손에게 유지로 남겼다. 1706년(숙종 32) 안동 지방의 유림들은 보백당 김계행, 응계 옥고(玉沽) 선생의 학문과 청백리 정신을 높이 기려 묵계서원(黙溪書院)을 짓고 이들을 주향자로 향사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9세손인 부친은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삼근(金三近)이고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 상락김씨) 삭영감무(朔寧監務) 김전(金腆)의 따님이다. 김삼근의 장자는 10세 김계권이요 둘째가 바로 김계행이다. 김계행의 재취부인인 의령남씨는 ‘쌍청헌’ 남상치의 막내딸이다. 남상치는 벼슬이 통정대부행사헌부장령을 제수 받고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 일운(日暈)을 펼쳤다. 계유정난 때 안동으로 낙향하여 길안 거묵역에 ‘쌍청헌’이란 정자를 짓고 후일 김대행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내외묘사(內外廟祠)를 당부했다.
☞ (신) 안동 김씨의 시조는 태사(太師) 김선평이다. 김계행은 시조 김태사의 10세손이다. 성종 때 김계행은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을 지냈다. 김계행은 후에 장동김씨로 불리는 (신) 안동김씨 청음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金生海) 가문의 여명기에 안동김씨의 문호를 연 중흥시조나 다름없었다. 조선조 전기 안동 김씨 초기에 가문을 이끌던 원로급 문장으로 군림하였다. 그의 형인 김계권(金係權)은 학조(學祖), 영전(永銓), 영균(永鈞), 영추(永錐), 영수(永銖) 등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제5자 김영수가 바로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고조부인 장령공이다. 김영수(金永銖)는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그쳤지만 당대의 유수한 인사들과 교류하여 하였다.
1447년(세종29년) 17세에 식년시 2등 15위로 진사(進士)가 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성주 향학교수(鄕學敎授) 시절 조카인 김계권의 장남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성주에 들러 중부(仲父 김계행)에게 인사나 올리고 가려고 하였다. 당시 학조대사는 세조 때부터 국사(國師)로 있었는데 정희왕후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성주수령(星州守領)이 통인(通人)을 시켜 선생을 관아로 불렀으나 가지 아니하고 장조카인 학조가 찾아와 인사를 하게 하였다. 그때 ‘중부(仲父)의 관직을 상부에 청탁하여 승차하도록 하겠다’고 하자 김계행은 크게 노하여 회초리로 다스리며 "내 관직이 승차한들 무슨 얼굴로 세상 사람을 대할 것이며 또 다음에 조상을 어떻게 뵈올 것이냐? 본래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타이르고 다시는 대사(大師)를 만나지 않았다. 김계행의 심기가 얼마나 올곧은지 짐작할 만하다.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또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김계행의 이런 강직함은 그가 지낸 관직만 일별하더라도 금방 드러나는데, 홍문관의 경우 교리(校理),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 대사간(大司諫)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과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그리고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보백당 김계행은 조선 전기 영남 유림에 몇 안 되는 중량급 인사였다. 조정으로 나아가서 성종을 보필하며 명관으로 조야에 성망이 높았다. 그리고 사림파의 영수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동갑내기로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사귀었다. 이 인연으로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등 10명과 함께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다가 장형을 치르고 풀려나기도 했다. 특히 영의정 인재(仁齋) 성희안(成希顔)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희안은 숭유정책의 신진사류로서 임금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으며, 1506년 진성대군을 옹립, 중종반정의 거사를 성공시킨 1등 공신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1498년(연산군4년)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풍산 사제(笥提)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배가 없으니,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고 한 자신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1506년 76세 되던 해 고향에서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계행은 일찍이 1461년 31세 되던 해에 안동부 길안(吉安) 묵계(黙溪) (현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 만년의 휴식처로 삼았는데, 특히 1501년 71세 되던 해 송암(松巖) 계곡의 폭포 위에 장인 남상치가 지은 지은 만휴정(晩休亭)에서 자연을 벗 삼으며 지냈다.
1517년(중종12년) 12월 17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87세로 천수를 다했다. 그후 1706년(숙종32년)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安東) 길안(吉安) 묵계(黙溪)에 묵계서원(黙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10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인데 1868년(고종5년) 3월 12일 시호가 문헌(文獻)으로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 1732년(영조8년) 초간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광무5년) 중간 되었다.
보백당은 "청백"의 표상이다. 그 기상이 푸르고 성품이 깨끗했으며 푸르기가 청옥 같고 깨끗하기가 백옥을 닮았다. 절개가 얼음과 같이 쨍쨍했다. 서예 유성룡이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 칭송했다. 보백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맏이는 참봉, 둘째는 진사, 세째는 생원, 다섯째는 군수로 아버지가 물려준 가보 "청백"을 지키며 사랑했다.
맏딸은 상주 함창(이안) 찰방 박눌(朴訥)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다섯을 낳아 모두 문과에 급제를 시켰다. 김계행의 둘째딸은 안동 하회의 진사 증판서 유자온(柳子溫,1453~1502)에게 시집을 갔다. 풍산 유씨 유자온(柳子溫)은 서애(西厓) 유성룡의 증조부이다. 외증손 입암 유중영(柳仲郢)은 예조참의 승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외현손 겸암 유운룡(柳雲龍)과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피실골에 있으며, 묘표(墓表)는 외손 영의정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기(記)하고, 외현손 직장(直長) 박수근(朴守謹)이 썼다. 그 후 비석이 상하고 묻혀 11대손 김이선(金履善)이 쓰고 외후예(外後裔) 이장우(李章瑀)가 다시 써서 세웠다.
묵계서원
묵계서원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과 응계(凝溪) 옥고(玉沽)를 봉향(奉享)하는 서원으로 조선 숙종 13년(1687)에 창건되었다. 보백당(寶白堂)은 조선 초기 성종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명신이며 응계(凝溪)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바 있다. 고종 6년(1869)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祠堂)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없어진 건물들을 새로 짓고 서원을 다시 지었다. 강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 기와지붕 건물로 가운데 6간은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는 이를 관리하는 정면 6간, 측면 5간 ㅁ자형의 주사(廚舍)가 있다. 서원 입구의 문루는 읍청루(挹淸樓)이다. 서원 중 다른 건물은 모두 후대에 복원한 것이나 주사는 서원이 훼철될 때 헐리지 않고 남은 것이다. 고건물답게 부재를 다룬 수법에 격조가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 묵계 보백당종택 *
묵계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침과 사랑채인 보백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의 팔작지붕 집으로, 보존 상태가 좋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우물마루를 깐 4칸 대청과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이며, 대청의 왼쪽 측면과 뒷벽에는 판벽에 문얼굴을 내어 미세기 창을 달았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앞쪽에는 삼문이 있고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계속] ☞ 안동 서후면 송야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