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천하
송영길 소나무당 대표가 11월 6일 검찰의 징역 9년 구형을 받고 ‘저를 기소한 검사가 김건희 여사를 무혐의 처분한 검사’여서 ‘(중형 구형을)예상은 했다’는 신문 기사에 하늘을 쳐다보고 혀를 끌끌 차는데 문득 갑신정변 삼일천하 주역들의 죽음이 주마등으로 스쳐간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12월 7일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이 문제였다. 김봉균과 이희정, 신중모, 이창규 등은 모반과 대역부도의 죄로 지금 서울시청 부근 군기시 앞, 이윤상과 이점돌, 차홍식, 서재창, 남홍철, 고흥종, 최영식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천안에 살던 김옥균의 동생 김각균은 형의 정변 실패 소문에 곧장 경북 칠곡으로 도망쳤으나 어사 조병로에게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옥사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기는 천안 감옥에서 7여 년 옥고를 치르다 효수, 어머니 송씨 부인은 누이와 함께 음독했다. 김옥균의 처 유씨와 젖먹이 딸은 1893년까지 10여 년간 옥천 관비였다가 1914 논산에서 죽었다.
김옥균의 누이동생 김균은 정변 당시 기계국 주사인 남편 송병의와 함께 충북 옥천군 청산면으로 피했다. 그러나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지라 비상을 마셨고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기적처럼 살아 송장 없는 초상을 치른 뒤, 경북 영천 신녕으로 숨었다. 1년 뒤 송병의는 새장가를 들고 천안으로 이사했다. 1918년 박영효가 일본에서 김옥균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가져와 무덤을 쓸 때다. 박영효가 제문을 읽다가 목이 메어 통곡하는데 머리 허연 할머니가 무덤을 붙잡고 울었다. 바로 김옥균의 누이였다. 그렇게 죽었다 되살아나 남편과 다시 혼인을 치른 김균은 충남 서천군 동면 판교리에서 60여 년을 더 살았다.
박영효의 큰 형인 박영교와 아버지인 참판 박원양은 자살을 택했다. 박원양은 죽기 전 박영교의 아들인 열 살 난 손자를 먼저 죽였다. 박영효의 둘째 형 진사 박영호는 이름을 바꾸어 전라북도 진안의 산중에 숨었다가 청일전쟁이 끝난 뒤 하산하여 목숨을 건졌다.
임오군란 무렵 영의정을 지낸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은 ‘자식으로 기르면서도 역적을 몰랐으니 만 번 죽더라도 어떻게 속죄할까’ 탄식한 뒤 열 살이 채 안 된 손자를 독살했다. 대궐을 향해 머리 조아리고 독약을 마셨다. 홍영식의 처 한씨도 형 홍만식의 권고로 자살을 택했다.
서재필의 아버지 진사 서광언은 아내와 함께 자결했고 처와 자식은 독약을 마셨다. 형 서재형은 은진 감옥에서 죽었고, 동생 서창필은 처형되었으나 서재우는 훗날 사면되었다.
서광범의 아버지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은 감옥에서 죽었다. 서광범의 아내 김씨는 끝까지 절개를 지켜 갑오년 이후 남편과 다시 살았다.
한의사이자 개화파의 스승격인 유홍기는 제자들이 갑신정변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시기가 너무 이르다며 만류했다. 그러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김옥균 등이 도망치자 그들과 함께 두던 바둑판을 도끼로 쪼개 아궁이에 밀어 넣고 수표교의 약국에서 행방을 감추었다. 그 뒤 오대산의 중이 되었다가 전남 장성 송산마을에 묻혔다.
갑신정변의 행동대장격이던 신중모는 참형 되었고, 윤영관은 보부상들에게 참살되었다. 박제경은 수표교에서, 오감은 관철교 부근에서 민중들에게 붙잡혀 참살되었다.
전제군주와 수구파는 집권만을 위해 누구든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문 시켰다. 갑신정변 당시 어리석은 백성들도 수구파에 휘둘려 개화 잡귀 씨를 말려야 한다며 돌멩이를 던졌다.
그렇다면 오늘의 국정농단 세태는 어떠한가? 후안무치에 고집불통의 혼군도 문제지만 누구에게 돌멩이를 던져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민주당이 ‘내가 윤상현 복당시켰다는 명태균 녹취록을 공개했다. 두 번 다시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말자. 역사에서 배우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호남일보 2024.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