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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얄타는 우크라이나 크림주이자 크림반도 남쪽의 해안 도시다.어원은 '물가(水邊)' 란 뜻을 지닌
흑해 북쪽 연안의 휴양 도시다.바로 이곳에서 미국(루즈벨트),영국(처칠),소련(스탈린)이란 3조폭
두목들이 전쟁 사업가들을 대신해 만난 때는 1945년 2월이다.일본이 항복하기 6개월 전이고,독일이
항복하기 3개월 전이다.이 얄타회담에서 체결한 표면 협정내용은 1946년에 부분적으로 공표 되었
으나,두목들 간의 이면 약속인 비밀협정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다.그러다 세상이 동서냉전 체제로
확실하게 재편되고 자리를 잡은 1954년 3월 16일에 가서야 발표 되었다.그것도 언론에서 강력하게
재촉하자 미 국무성이 마지 못해 발표한 것이다.스탈린이 죽고 난 다음에 겨우 발표를 한 것이다.
당시에도 소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이 발표에서도 이것이 비밀 협정이었다는 말은 없었다.
2, 이 조폭들의 비밀협정 내용을 보면,이 세상은 얄타 회담이 열리기 훨씬 전이자 이탈리아가 항복
할 즈음에 이미 당시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 지역과 점령지역에 대한 재분배를 논의했고,더불어 독일
과 일본이 언제쯤 항복하고 망하게 할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이 얄타에서
의 비밀 협정은 결국 1943년 년말에 이루워진 카이로 회담 결과의 추인과 확인 수순에 불과했다.그
내용을 보면,
유럽및 중화민국(장개석)과 연계된 협상 내용들을 제외하고 일본과 관련된 내용들만을 보면," 러일
전쟁때 일본에 뺏긴 사할린(樺太) 남부지역과 인접 도서(島嶼)들을 소련에 반환 할 것,그리고 쿠릴
열도(일본의 치시마<千島>열도)를 소련에 양도 할 것"
이란 내용이 있다.즉 세상을 재편하여 영토를 나누는 것이다.
3, 對日 전투에 소련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보상의 차원에서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승전국이
되었을때 미국이 소련에 양보한다는 것이다.당시 사정은 승전국 맘대로 였던 것이지 남의 사정이나
다른 약소민족 국가들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았다.처음에 미국은 쿠릴열도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
나 사할린 남부만을 가지고는 대일참전 유혹점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소련의 입장을 들어주어 쿠릴
열도의 할양을 양보한 것이다.이런 약속은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26일)이 발표되고 소련이 북
중국과 만주로 진공한 이후에 요구한(1945년 8월 16일) 홋가이도의 절반분할 요구를 제외하고는
소련의 요구를 미국이 모두 들어 주었다.그러나 홋가이도 절반 대신 임자없는 땅 한반도만 반토막
났다.
4, 이 얄타에서 미국의 루즈벨트(트루먼 역시 그랬다)는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 참전을 요구 했던
이유는 연합군 측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미국의 혼자 힘으로는 큰 고전을 할 것이고
더불어 희생이 클것이라고 본 것이다.희생의 증명은 그후 1945년 4월 1일 부터~6월 21까지,2개월
21일 동안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오끼나와 상륙작전이 잘 설명해준다.미국은 오끼나와 상륙
작전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의 활약과 일본인들의 玉碎작전에 휘말려
악전고투를 하여 미국도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미국은 여기서 겁을 먹었다.미군의 오끼나와 희생
은 결국 미국의 소련의 대일 전쟁용 물자 지원(수송)을 서두르게 해줬다.
5, 오끼나와 상륙 작전에서 일본군(7만7천여명 사망)과 일본 민간인들의 희생(14만 9천여명 사망)이
훨씬 컷지만,당시 미군의 사상자만 해도 8만 명이 넘었었다.여기에 미국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럽 전선에서의 독일군은 1942년 8월 21일~1943년 2월 2일까지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지금의
볼고그라드)의 늪지대에서 지체하면서 소련군에 참패를 했고 또 주력군을 잃었다.이곳에서 독일군의
참패는 제2 차 대전의 승기가 연합국 측으로 넘어가게 하는 분수령이 됐다.그럼에도 히틀러가 독일의
정예군을 이곳에 보낸 이유는 석유 유입을 봉쇄한 연합국 측에 대항해 카스피해 지역의 바쿠 유전에
서 석유룰 확보하기 위해서 였다.
6, 일본은 이미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에 의해 주력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미국은 태평양이란 앞마당을 맘대로 사용할수 있었다.상대가 있는 전쟁임에도 이후 부터의 일본
해군과 일본군들은 미국의 잠수함과 전함,항공모함들을 피해 다녀야 할 정도로 전황이 열악했다.
그러다 주축국인 무솔리니(이탈리아)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후 2개월후인 1943년
9월에 항복하자 전황은 급속도로 변했다.이때부터 세 조폭(미,영,소) 두목들은 카이로 와 테해란을
오가면서 세계를 어떻게 나눠 먹을까 란 궁리에 몰두한다.물론 이들 뒤에는 전쟁사업가란 대자본가
들이 있지만 이들은 전세계 시민들을 향해 연극을 잘해야 했다.그래서 정치가들을 양복과 제복을
입은 배우라고 하는 것이다.이들이 하는 연기는 배우들과 달리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이때만 해도
동양은 말할것도 없고 서양 사람들도 전쟁이 사업차원에서 벌어 진다는 것을 몰랐다.
7, 이때는 제2차 대전 종전후 세상에 대한 재편 작업이 어느정도 완성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즉
그들끼리의 식민지(점령지) 재분할 지도가 완성이 되어 있었다고 보면된다.연합군 측에 의해 지나
치게 미화된 1944년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하지 않았어도 독일은 항복할수 있었고 패전
했을 것이다.이런 행위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어도 일본이
망했을 것이란 실질과 맥을 같이 한다.이때의 독일군 방어선은 유럽 전지역에서 무너진 형국이라
그냥 무혈입성이란 실질을 보여 준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이면 그림이다.이것을 연합국 승전의
한 장면으로 포장하기 위해,또 폼잡기를 위한 작전이었을 것이다.이때는 이탈이아가 오래전에 항복
(1943,9)하여 남부 유럽전선은 평정 되었고,독일군들도 물자의 부족으로 전의를 상실하여 전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였다.소련이 다 이겨놓은 전쟁에 미국,영국,캐나다 등의
연합군이란 세력들이 소련 밥상에 숫가락을 얹어놓는 경우와 같았던 것이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의 진실이다.
8,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2개월이 지난 1943년 11월(12월에도)에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또 테해란에서
'미,영,중,소' 란 조폭 두목들이 교차 회담이란 형식은 갖추지만,이미 결정된 내용들의 추인이 대부분
이었고 당시의 중국(장개석) 참석은 업저버에 불과 했었다.바로 이 회담들에서 반도는 "독립이 아닌
해방" 이란 말만 나왔다.이말은 한반도는 또 다시 남의 어떤 손에 넘어 갈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동시에 사할린 반환과 쿠릴열도의 양도 또는 처분이란 말이 나왔다.이때는 이미 세상을 동서
냉전 구도로 바꿔서 한반도 지역을 냉전의 완충(충돌)지대 쯤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그 결실은 냉전의 시험장으로 6.25 전쟁이란 것이 있게 만든다.미국과 영국,그리고
소련은 최소한 2차대전 종전 2년전인 1943년 중 하반기 쯤이 되면 독일과 일본이 패전,항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이쯤에서 미국의 루즈벨트는 1943년 11월
테해란에서 미국의 손실(희생)을 줄이고자 소련의 對日參戰을 강력히 요청하게 된 것이다.
9, 루즈벨트와 스탈린 간에 맺어진 비밀협정에는 소련군의 극동지역 대일참전은 독일군이 항복을
한후 60일 에서 90일 이내에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었다.마침내 독일군이 1945년 5월 8일 항복을
하자마자 스탈린은 유럽전선에서 소련의 주력군(정예군) 150만명을 조용히 극동으로 이동시켜
약속한 마지막 날이자 90일째 되는 날인 1945년 8월 8일 전격적으로 만주와 북중국을 향해 쓰나미
처럼 진격하여 일본 최강 정예인 100만의 관동군들을 초토화 시킨다.즉 소련군들이 일본 본토에서
미군들의 활동을 평이하게 해주기 위해 일본의 주력군들을 만주와 중국 대륙에 묶어 놓는 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실제로 2차대전시 독일과 일본의 항복에는 미국보다 소련의 공로가 지대하다.
두 승전국 들은 전후에는 겉으로는 서로 원수가 되어 냉전이란 명목하에 대립했으나 실제로는
동서에서 군비경쟁 사업을 거들면서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이들 중에는 종류와 성격은 달리
하지만 기독교 계열의 일신교를 신봉하는 국가들이 많았다.이들은 서로를 하나님으로 죽였다.
10, 유럽전선에서 독일에 승리한 군대는 소련군이지 미군이나 영국군이 아니였다.특히 스탈린
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 5개월 남짓의 독소간의 혈전은 양측 모두 합쳐 200만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로 치열했고 비참했다.만약 이때 소련이 없었으면 독일군들을 유럽의 연합군들이
물리칠수 없었을 것이다.그러기에 미국이 제2차 대전에 개입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이 미국 진주만
폭격만을 학수고대 했던 세력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유럽의 영국과 미국 이었다.이 전투에서
도 소련군들의 물자(전비) 지원은 미국에서 전담 했지만 인명 손실이란 병력은 모두 소련이 담당
해야만 했었다.따라서 전쟁은 물자가 풍부하고 돈많은 놈이 이기는 것이다.돈벌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나라간 맺은 조약이나 협정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이른바 독일과 소련이 1939(8,23)년
에 체결한 獨蘇불가침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나,1941년에 체결한 日蘇중립조약을 파기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였다.
11, 그렇다면 소련군이 극동으로 진출하여 일본을 상대로 할일은 무엇일까?,단순히 과거 러일전쟁
패배의 복수를 위해서 만은 아니였을 것이다.미군이 일본 본토를 침공할시 최소한 50 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낼것으로 판단하여 부담을 서로 나누자고 적극적으로 소련의 대일 참전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면 소련은 꽁짜로 극동의 대일전선에 뛰어 들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생기는 것이 있으니까
협조한 것이다.우선 러일전쟁때 빼앗긴 사할린 남부 지역을 찾게 됐고 덤으로 쿠릴열도를 얻게 된
것은 물론,중국에 대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 된 것이다.관동군들과 싸워 이긴 만주
(동북 3성 지역)에서 소련의 혜택은 잠시였지만 아주 컷었고 동유럽에서의 친소 위성국가 설정사업
이란 이권도 얻었다.이것은 모두 미국과 소련 사이에 맺어진 비밀협정 속에 들어가 있었다.특히 옛
프로이센이자 독일제국이 시작된 땅은 대부분 폴란드와 소련것이 되었다.또 일본이 만주지역에 설치
했던 수많은 산업시설들을 소련으로 뜯어 간것도 그렇고 스탈린이 참전 댓가로 미국에 요구한 전쟁
물자는,
'150 만명 군대의 2개월치 식량,연료,수송기구(차량),기타 군수품,비행기 5천기,탱크 3천대,자동차 7천
5 백대,'등을 1945년 6월 30일까지 인도를 요구해 그중의 80%를 기한내에 소련에 인도했다.
12, 일본에 잔혹했던 포츠담 선언(1945,7,26)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기 20일 전에 나왓다.그 구체적
인 내용을 보면 원폭의 실험장이 되지 말라고 충고하는 면이 있으나 일본 군부 강경파들이 이것을 알리
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특히 포츠담 선언에 일본의 영토를 한정하길,'일본의 주권은 혼슈,홋가
이도,규슈와 시코쿠와 연합국이 지정하는 도서 지역으로 국한한다' 로 되어 있다.따라서 현재의 일본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에 속한다고 억지를 쓰는것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것이다.미국
중심의 연합군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1946년 1월 연합군 사령부 훈령은 류구
(오끼나와) 열도를 포함한 1천개 섬을 일본 영토로 하되, '독도,치시마 열도,하보마이열도,에토로프군도,
시코탄 섬' 등을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고 했다. 일본은 더이상 독도를 탐내지 말고 홋가이도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하보마이 군도,시코탄 섬,에토로프 섬' 을 우선 일본 영토로 확보해 놓고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우겨야 할 것이다.그러나 이섬들의 현주권국인 러시아에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왜냐!
러시아가 강자니까.
13,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들이 일본에 요구한 것은 일본이1914년 이후에 점령한 모든 지역에
서 철수하라고 한 것이다.물론 이 요구 사항은 일본이 들어줄수 없는 내용이란 것을 다 알고 한 것이다.
이 요구 조항에 한반도는 들어가지 않는다.한반도는 1914년 이전에 일본 영토가 되었기 때문이다.그
효력의 시작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소련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패전국 배상 대신 美日간 테프트-카쓰라
밀약에 의한 보상으로 반도의 지배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승인을 했기 때문이다.따라서 그들은 '처음부터
독립이라고 말하지 않고 핍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어떤 강자에 의한 새로운 정부를 반도
에 세워진다는 것은 다음의 일이었다.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것이 있다.연합국(미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1914년 이후의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고,포츠담 선언에서는 이후 일본의 주권이 미치는
지역을 '혼슈,홋가이도,규슈와 시코쿠 그리고 연합국이 지정하는 일부 섬지역' 으로 한정했다.
14, 그렇다면 만주는 1931년에 점령한 곳이니 중국에 당연히 넘겨 줘야 했지만 반도는 미국의 승인하
1910년 경에 넘겨진 것이라 허공에 뜬 지역이 된 것이다.즉 한반도는 갈곳없는 떠돌이 겸 무주공산의
땅이 된 것이다.이제 부터는 말하지 않아도 알수있는 것은 승전국인 소련과 미국의 맘대로 인 것이다.
그러나 선제적 기득권은 언제나 자본의 보루인 미국에 있었다.그래서 미국은 소련이 요구한 홋가이도
분할 양도는 거절하고,대신에 한반도를 38선 기준으로 자른 것이다.따라서 한국인들,일본인들의 의견
과는 관계가 없었고 그들은 승자로서 우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태평양 전쟁 당시 반도는 준 일본국
(일본의 생명선)의 처지로서 美蘇의 처분만 바라보고 있었다.따지고 보면 준 전범국가의 땅이라고 말
할수도 있었던 것이다.그러기에 해방후 일본의 전범 졸개들이 미국을 믿고 반도 남한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15, 사실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대전과 일본을 주축으로 생겨난 태평양 전쟁은 세계경제의 회복이란
차원에서 자본가들이 고의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이른바 '세계의 경제공황' 타계책의 일환에서 비롯한
것이다.1929년 10월 뉴욕 월가에서 시작된 세계경제공황은 세월이 가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1939년 독일발 2차대전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일어났다,경제공황은 대체로
물자는 쌓여 있으나 구매력이 없어 소비가 되지 않을때 발생하는 것이니 만큼,세상은 물자소비를 위한
사업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구매력을 가질수 있는 일자리를 동시에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 했었다.
이때 미국의 루즈벨트가 시행한 뉴딜정책이란 것도 약간의 도움은 됐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결국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본가들은 세계경제 전반에 걸쳐 부흥을 가져올 일시적이고 전격적인 사업인
'전쟁사업' 을 선택한 것이다.
16, 기초적인 먹거리에서 부터 수많은 제조산업과 함께 연금과 보험에 이르기 까지 인간,사회전반의 광범
위한 규모로 경제부흥을 일으킬 사업은 결국 전쟁밖에 없었다.따라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어 분위기
가 무르익어 갈 즈음,자본가들은 교묘한 덫을 설치하여 꿩먹고 알먹고 식의 양면 대결 전쟁을 선택한다.
전쟁은 무진장의 소비를 필요로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역동적인 생산과 소비로 세계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댓가는 수많은 인명이 전장을 통해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것과 바꾼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이유와 목적이 없는 전쟁에서 草芥와 같이 사라졌다.전쟁의 시작으로 전세계의 여러 공장
들은 돌아갔고 전쟁 특수로 인해 넉넉한 임금을 받은 노동자들은 본격적으로 소비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이 전쟁의 특수로 세계의 공황은 어느정도 해결 되어가고 있었다.
17, 당시 세계 경제를 공황상태로 부터 회복 시키는데 최대의 공로자들은 미국의 루즈벨트나 트루먼,
영국의 처칠,소련의 스탈린이 아니다.최대의 공로자는 자본가들의 꾀임에 빠져 반대편 푸들 노릇을 한
'히틀러(독일)와 무솔리니(이탈리아),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자' 였다.우리는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사실 큰 전쟁에서 이기고 지게하는 것은 간단하다.전쟁은 돈으로 하는 전략 사업이기 때문에 항상 돈
많은 놈이 이기는 것이다.비유 한다면 노름판과 같다.자본가 들이자 전쟁사업가들은 양편(연합군과
주축국) 모두에게 돈을 대출해 준다.그러다 자기가 돈을 벌면서도 이기게 하고자 하는 편에 돈(물자)을
더 대주고,지게 하고자 하는 편에 돈(물자)을 적게주면 승패는 자동적으로 판가름 난다.그러나 아무리
경제가 불황이라고 해도 전쟁은 멈춰야 한다.왜냐! 늙은이와 돈많은 강자들은 전쟁을 사업으로 하고
있으나 젊은이들과 약자들은 국가와 민족이란 허상에 쫓겨 또 강자들이 만든 전장에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18, 일본은 반성할 줄 모르는 전범국가로서 백인들이 하던 제국주의 흉내를 내다가 돈의 덫에 걸려 폭망
한 것을 세상이 알고,또 당신들도 세상에 꽁짜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제2차 대전이란 전쟁이 끝난후
미국과 소련중심의 양분구도 세상(동서냉전)에서 나머지 국가들은 양진영의 위성국가의 자격으로만 존재
할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전쟁 이전에는 힘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인 식민지 모국에서 직접 통치했
지만 종전후에는 과거 식민지 지역과 점령 지역인 위성국가들의 경제를 장악해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면
정치는 자동으로 따라 온다는 것을.그래서 그들은 위성국가들에 이러 저러한 여러종류의 차관이란 이름
으로 돈을 빌려주며 빚을 안겼다.그리고는 빚을 갚기에 허덕이게 만들었다.우리는 이것을 식민지란 말
에서 위성국가(경제적 식민지)란 명칭으로 바꿔 불렀다.그런후 말 잘 듣는 현지 대리인을 정치 지도자로
뽑거나 선택하게 하여 간접통치를 하게 한것이 지금에 이르렀다.다시는 군산복합체들과 전쟁 사업가들
에게 속아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첫댓글 성공회대 김명호교수의 중국인이야기라는 책에서 러시아군 150만의 만주진입 뿐만 아니라 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중국본토에 걸쳐서 50만이 주둔헀다는 사실과 장개석이 현 베이징인 북평에 진입시 외곽에 미군부태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미 해병대 병력이 10만 이상이 주둔하고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성도와 항주에는 미국비행장이 있어 일본 폭격비행단이 있었기도 했구요.이제는 짜고치는 고스톱에 말려들지 말아야 지요.
1929년 미국 대공황은 xx자본세력 카르텔의 짜고친 고스톱이었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 대공황을 이용해서 대다수의 도시중산층을 빈민화 시켰지요, 그리고 그 대안으로 뉴딜사업으로 포장된 쑈를 벌였는데 실상 뉴딜사업의 핵심은 일자리를 잃은 대다수 도시중산층 노동자들을 거의 밥값정도의 헐값에 노동에 동원한 것이고 정확히 이것은 공산당빨갱이식 노력동원과 맥을 같이합니다. 왜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에서 공산당빨갱이식 노력동원을 했을까요? 영미
xx자본세력의 지배층과 공산당빨갱이는 그 맥과 뿌리를 같이하기 때문이지요.이렇게 노력동원하다가 2차대전을 기획한후에 이 노동자들을 대거 병기제조산업에 투입
그러니까 애초부터 대공황은 미국을 거대한 하나의 무기산업국가화 시킬려는 거대한 셋트영화의 멍석깔기 였을 가능성이 커보임,미국을 거대한 무력국가로 만들려면 거대한 무기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그럴려면 전쟁이 필수적임, 거대전쟁이 있어야지 거대한 전쟁산업국가화 시킬 수 있고..그럴려면 대다수인구의 기존직장을 떨구어버리고,
일단 실업자로 만든후에....전쟁이 터진후에 전쟁무기만드는 사업장에 값싼 일자리라도 던져주면 실직자들이 된
대다수 미국중산층은 넙죽 절하면서 받아먹게 되어있음....대규모의 인구를 무기산업과 공동운명체로 만드는 수법이며...이렇게 많은 인구를 무기산업에 밥줄이 묶이게 만든수법
늘 긴 댓글을 열심히 써주셔서 감사 합니다.
2차대전의 핵심인물인 히틀러, 스탈린, 루즈벨트,처칠...이 4명의 서양인 모두 특정종족과 연관이 있음, 히틀러는 로쓰차일드가의 아들이 식모를 건드려서 낳은 사생아의 아들로 회자되는 인물이며,,,실제 히틀러와 나찌당이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는데 뒷돈을 대준 세력이 xx자본 세력임, 또한 히틀러와 나찌당이 독일을 장악할 수 있도록 사전에 독일정권을 장악하고 독일경제를 개판쳐놓은 세력은 xx자본세력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유다족이 독일경제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독일인들은 점점 가난해짐,독일을 장악한 그것들은 종이돈을 무지막지 찍어냄,
찍어낸 그 돈으로 아마 금,다이아등을 마구 사들였을 듯,,처칠역시 모계쪽이 그쪽
루즈벨트는 본인과 마누라 둘다 유다족임, 원래 네덜란드계 유다족으로 유다족이 네덜란드를 장악하고,,나중에 영국대혁명을 이용해서 영국섬의 실권을 장악하게 됨, 이때 이들에게 협력한것이 크롬웰일당. 물론 현재 영국에선 이 크롬웰을 영웅화해서 애들한테 가르침, 루즈벨트==Rose(=빨강==빨갱이=피)+ Belt... ...로쓰차일드(롯쉴드==로즈(빨강,적색)+쉴드(휘장))....붉은색 휘장으로 지들끼리 알아먹는 비밀신호? 이집트에서 탈출할때 이집트인들한테 야훼가 저주를 내릴때
지들족속은 집대문에 양의피(붉은색==피)를 발라서 야훼의 저주를 피했다??? 하여간 빨갱이와 장미..피...다 연관이 있어보이고..
스탈린은 원래 러시아인도 아니고...원래 그루지야태생으로 죠셉(요셉)쥬가쉬빌(쥬가==유다의,쉬빌==자손)...이 원래 그루지야시절 이름이었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그걸보아 원래 유다족이고...서양인이 분석한 것에 의하면 당시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지역이 러시아 짜르 통치관할이었을 당시....현재 아제르바이잔 바쿠가 당시에 거의 유일한 거대유전 지역이었는데..이 유전개발권을 둘러싸고 스웨덴의 노벨가문과 영국의 로쓰차일드족속이 경쟁하고 있었는데....스탈린은
이 로쓰차일드의 똘마니비스무리였다고 함. 그래서 노동자들 선동해서 유전공사 파업선동하고 하면서 노벨가문을 물먹이는 역할을 하는 선전선동 똘마니출신였다 함
그러다가 이 xx자본이 자신들과 적대하던 러시아짜르를 무너뜨릴려고 공산주의를 이용해서 평등,자유,농노해방이란 구호등으로 농노와 노동자들을 선동해서 러시아를 무너뜨리려고 할때...이 바쿠등에서 똘마니로 써먹던 요셉 쥬가쉬빌같은 지들족속 똘마니색히들을 러시아로 잠입시킴. 당시 뉴욕등지에서만 이 xx족속들 수백명이 러시아로
잠입해 들어갔다고 함...결국 2차대전은 xx족속 기획...xx족속 주연....xx족속 주연배우상, 조연배우상..
거기다가 xx족속이 영화의 수익까지 몽땅 가져간 한편의 거대한 할리우드 영화랑 비슷함.
2차대전이 지들끼리 짜고친 고스톱임을 숨길려고 한국전을 매개로 해서 이후 냉전쑈를 벌이며 서로 적인 척
@부리코맥 앞으로 한국인들이 처신해야 할 문제,개선해야 할 국내적 사안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모두 독립을 얘기하지않고 해방만을 얘기하는지 알겠습니다. 그들계획에 독립계획은 없었군요.
당시 갈라놓고 냉전을 기획하기위한 전장의 장으로 상정했었네요.
주변국들의 충돌의 지형학적 소비의 場으로 선택돼 그결과 5백만참사를 불러왔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데.. 사드배치로 국제충돌의 소비의 場으로 다시 전락. 현실이 딱하네요..
닭만 가두면 끝이 아닐 듯. 바른 언론이 제로상태인 현실의사슬을 끊을때가 됬습니다..
허접한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바로 돈(재물)이기 때문이지요.사드는 일본과 미국을 방어하는무기지 한국 방어용이 아니란 것은 박사모 이외는 세계가 다아는 얘기지요.한국은 우선 돈에 녹은 언론이 바로 서기만 해도 됩니다.그러면 정치인과 관료,재벌들을 비롯한 사회권력들이 못된짓을 못하겠지요.그게 바로 정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