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묵산재 시향을 마치고 세종대왕 유적지를 둘러보다.
1. 묵산재(墨山齋)는 문정공 1배 성산군 부인의 시향이다. 부인은 조선 개국공신 배극렴(裵克廉)의 친 누님으로 문정공과 두 딸이 있다. 첫째는 성산이씨 가문 이용(李瑢)에게, 둘째는 순흥안씨 안경공(安景恭)에게 출가 하였다. 묘는 경산지(京山誌)의 내용을 알게 된 영동(永同)의 종인이 알아내, 1830년 경인년에 초기 단장을 한 후 1838년 무술년에 위토를 마련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용은 문정공 장인이 졸하자 목은 이색에 간청하여 묘지명을 쓰게 한 분이기도 하다. 안경공은 젊은 조선 개국공신이기도 하다.
2배 상당군 부인 청주배씨는 문정공과 이북 개경 대사현 율촌 언덕에 있다. 시향은 파주시 아동동 둔전재에서 단을 설치 음력 매년 10. 01. 함께 하고 있다. 이 때 아들 7세조 공간공(恭簡公) 휘(諱) 홍(洪)의 시향도 있다.
2. 안평대군 태실은 파손 되었다.
시향 후 김천 방향 성주관내 월항면 인촌리 산 8의 태실 유적지를 가보니 파괴된 흔적이 확실이 보인다. 대군은 문정공 증 손녀의 부군(2째 손자 정숙(貞肅)공 휘(諱) 연(淵)의 사위)으로 세조의 1살 아래 동생이며, 계유정난에 강화도에 유배 사약을 받는 화를 입어 이 왕자의 태실도 이리 망가지게 되었다.
3. 이 유적은 2003. 3. 06. 대한민국 사적 제 444호로 지정되고, 유네스코 등록도 되었다.
태실 19기중 14기만 남고, 5기는 위와 같은 유사 한 사유로 망가지고, 유일 하게 조카 단종의 태실도 있었는데 그리 되었다. 태실위치에 성주이씨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없애고 1438년부터 4년 걸쳐 조성되었다가 이 후 1453년 계유정난에 이어 1455년 단종이 영월서 사사되어 이러한 화를 입게 되었다 한다.
그림 1 묵산재 시향 필자 참례
그림2 경술년 1850년 묘역 관리 내역.
그림3 시향 참석 묘역 전경
그림 4 세종대왕 왕자(王子) 태실(胎室) 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