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에 대한 가르침 (내속의나를찾아서 p117) 루카
예수님은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로 성장해야 한다. 영성의 대가들이 가르친 기도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기도가 첫째이다.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
루가 사가는 복음의 곳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고독 그리고 산과 밤. 아무 곳에서나 기도할 수는 없다. 간단한 기도라면 때와 장소를 가릴 필요가 없지만 심오한 기도는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주며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이끌어낸다. 심오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소와 침묵이 필요하다.
루가 복음사가는 많은 군중들을 접하고 난 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예수님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병을 고치려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떼지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5, 15-16).
예수님은 큰 사건을 앞두고도 혼자 기도하시려고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 12사도를 선택하기 전(6, 12 참조),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기 전(9, 18 참조), 영광스러운 변모 전 (9, 28 참조)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자신은 어떤가? 한적한 곳으로 피신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가? 굳이 '일상사를 떠나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지 않더라도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자신 있게 단언하는 신자들이 간혹 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혼자 있으면 자신에 대한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천진성(더 심한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참는다)은 기도 중에 “너는 네 자신 앞에 있다. 너는 너 자신밖에 관심이 없다. 너는 현실을 피하고 있다”라는 식의 독백 내지는 정신적 곡예에서 탈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문 과학의 부산물인 의심으로 인한 악영향이기도 하다.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기도하기 위하여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 명상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도하기 위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할 필요를 느끼셨다.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의 긴 기도를 무시하고, 그분을 따른다면서 고독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예수께서는 항상 성부의 존재 앞에, 성령의 활동 안에 머무르셨으면서도 종종 사람들과 떨어져 있을 필요를 느끼셨다. 그런데도 우리가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 오늘의 묵상 (220524)
지난 주일부터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일까요? 특별히 ‘죄’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이를 좀 더 뜻을 살려 번역하였습니다. 곧 “그분(성령)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동이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제 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그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실수와 잘못이라는 수렁 속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다.”라고 자책하며,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죄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광주가톨릭대 교수)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 (따뜻한 편지 2345)
미국 프로야구에서 ‘42’는 특별한 숫자입니다. 어떤 선수들도 달 수 없는 전구단 영구결번이지만 1년에 딱 하루, 4월 15일엔 특별한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서 모든 선수가 42번을 달고 경기를 뜁니다. 그 선수는 바로 재키 로빈슨, 1947년 4월 15일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메이저리그에 등장한 최초의 흑인 선수입니다. 흑백 차별이 엄존했던 그 무렵엔 혁명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미식축구, 농구, 수영, 테니스, 육상 4개 종목에서 활약하며 모든 종류의 운동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역대 NCAA 최고의 운동선수로 꼽을 만한 대학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전차부대에 장교로 임관했지만, 부당한 인종차별에 맞서다가 면직당했습니다. 그 뒤에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팀과 계약하며 본격적으로 야구계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7년에는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흑인이 '백인의 전당'을 처음 밟은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상대 팀뿐 아니라 같은 팀 선수들도 그를 무시했고 군중의 야유와 협박 편지가 쇄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무시무시한 경기력으로 데뷔 첫해 신인상을 받았고 10년간 히어로로 불리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재키 로빈슨 덕분에 메이저리그를 짓누르고 있던 인종차별이란 큰 벽은 허물어졌고 유색인종의 운동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편견이라는 단어의 뜻은 ‘특정 집단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가지며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결국 편견은 사실도 진실도 아닌 한 사람 또는 특정 집단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편견의 안경을 쓰고 삽니다. 투명하고 깨끗한 안경, 얼룩진 안경, 깨진 안경, 색안경.. 다른 사람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에 어떤 안경이 씌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 오늘의 명언
우리가 모두 편견을 비난하지만 아직은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
– H. 스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