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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투봉(501.5m/487m).약사봉(467m)./경기 포천 도평리
산행일자;2019년 11월16일(토). 날씨;맑음. 산행거리;11.6km. 산행시간;약4시간30분.
교통편 및 비용;
<갈때>동서울터미널(06;50)-(사창리행버스/9.300원/1시간30분)-도평리버스터미널(08;20)
<올때>도평리버스터미널-택시5,000원-이동버스터미널근처 원조이동갈비(구 전주갈비) 뒷풀이.
이동버스터미널(17;10)-(시외버스/8800원)-동서울터미널(18;50)
산행코스;도평리버스터미널-서울방향도로-도리돌마을 체험장이정표-삼거리(우측아스팔트 1차선도로)-콘크리트1차선도로-고속화도로밑 통과 - 3거리(우틀)-건축중 방치된공장건물 입구 -사실상 등산로 초입-양성이씨/여산송씨 합장묘-조망바위- 세미릿지 바위봉-지도상 감투봉정상(헬기장)- 실제 감투봉-벙커봉으로 Back-부드러운 능선(좌; 승전부대 사격장)-능선갈림봉(cf.직진;외약사동.각흘산향)우틀-약사봉- 부드러운 능선길- 삼거리 갈림길 (좌; 약사계곡) 우틀-부드러운 능선길- 등로 좌측 그랜드케년 협곡-재무부 강국장 묘지- 임도(좌향)-무명교- 도로우틀-47번도로 교통표지판 백운계곡 방향-조랑말표지석-신망애표지석-도평리버스터미널
■감투봉(501.5m/487m)은 경기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소재한 산이다. 감투봉은 봉우리가 투구처럼 생겨 유래했으며 구름 기둥이 늘 높이 솟아 있다고 전한다. 높이 때문에 이름을 얻은 지도상 감투봉(501.5m)과 모양 때문에 그 이름이 생긴 실제 감투봉(487m)이 있다.
지도상 감투봉(501.5m)은 헬기장으로 되어 있고 실제 감투봉보다 높이가 더 높지만 육산이다. 조망은 없다.
반면 실제 감투봉(487m)은 지도상 감투봉에서 동쪽으로 약500m 거리에 있는 바위봉이다. 등산로가 없어 오를수 없는 바위봉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도상 감투봉(501.5m) 정상에서 약100m 진행한 군 벙커봉 3거리에서 우측으로 실제 감투봉(487m)을 왕복할 수 있다. 등로는 양호하고 마지막 암벽도 좌측으로 휘돌아 어렵지 않게 정상에 설수있다. 바위틈 사이 등로따라 정상에 쉽게 오를수있고 정상은 의외로 육산으로 되어있다. 장쾌한 한북정맥과 각흘산. 광덕산. 여우봉. 사향산이 조망된다.
■약사봉(467m)은 경기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소재한 산으로 감투봉과 능선으로 연결되는 산이다. 지도에는 무명봉이지만 내약사동과 외약사동 사이의 근처에서 가장 높은봉이기에 약사봉이란 이름을 얻은 듯 싶다. 고 장준하선생이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 산이다. 장준하(張俊河)1918~1975)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군사 독재 정권에 과감하게 항거하여 민주화 운동 인사들과 지식인들에게 상징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장준하 추락 사건이 의문사(疑問死)로 규정되는 것은 장준하의 사회적 위치와 정치적인 영향력이 막대했다는 데에 있다. 장준하가 박정희군사 독재의 거대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믿는 가장 큰 근거는 그가 당시 정권에 ‘빼내야만 하는 눈엣가시’였다는 점이다. 독재 권력에 맞서 꺾이지 않는 의지로 민주주의와 자유, 민권을 외쳤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감옥에서 나온 후 건강을 위해 백기완·이철우 등과 함께 등산길에 오르곤 했다. 1975년 8월 중순은 36℃를 오르내릴 정도로 무더웠기 때문에 등산은 무리였다. 장준하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림 산악회의 김희로(시인), 김용환, 김용덕(산악회장) 등은 굳이 등산을 강권하였다. 이에 장준하는 그리 높지 않은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으로 등산한다는 얘기에 이를 수락하였다. 그는 커피 보온병과 샌드위치 2인분을 배낭에 넣고 예전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버스에 올랐다.
장준하는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오전 11시 30분경 약사 계곡 입구에 도착했다. 30여 분 동안 계곡을 따라 올라가던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등산로가 시작되는 계곡 상류에 여장을 풀었다. 이때가 12시 무렵, 곧이어 장준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행과 따로 떨어져 혼자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하였다. 이것이 산악 회원들이 장준하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2시간 뒤 장준하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2시간 동안 장준하와 함께 있었다고 주장하는 K 씨는 장준하가 홀로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는 얘기를 듣고 곧장 뒤따라갔다고 한다. 12시 25분, 식사 장소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서 K 씨는 경계 근무 중이던 군인 2명과 얘기를 나누던 장준하를 발견했다고 한다. 군인들과 헤어진 뒤 K 씨는 장준하와 함께 산을 타기 시작해 약사봉 정상에 오른 뒤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K 씨에 따르면 하산하는 과정에서 장준하가 빨리 내려가자면서 길도 없는 가파른 벼랑길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장준하가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오던 중 나무가 휘어지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장준하(張俊河)선생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한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민주화운동가시다. 평안북도 삭주 출생.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인 장석인(張錫仁)이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 쓰저우(徐州)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탈출해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1월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곧바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었다. 특히 미국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주관하는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에 특파되었으나 작전 도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광복 이후 잡지 『사상계』를 간행하였고, 민주화운동에 활발하게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나, 옥중 당선으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중 1975년 의문의 등산 사고로 사망했다.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예과를 거쳐 도쿄의 니혼신학교(日本神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었다. 이후 중국 쓰저우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김준엽(金俊燁)의 도움으로 중국의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 린취안(臨泉) 분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약칭 한광반)에 입대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여가를 이용해 잡지 『등불』을 발간했다. 한광반의 훈련에 한계를 느끼고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2개월간 혹한, 배고픔과 사투를 벌인 끝에 1945년 1월 30일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도착 후 시안[西安]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李範奭) 휘하에 배속되었고, 유엔군 중국전구사령부(中國戰區司令部) 웨드마이어(Wedemeyer, A. C.) 휘하에서 미국 전략정보국이 주관하는 한미합작 특별군사훈련을 받았다. 특히 국내의 후방에 침투할 목적으로 조직된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에 자원해 수송기를 타고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일본 항복 소식을 듣고 귀환했다. 한편 이곳에서도 교포들의 친목잡지인『제단(祭壇)』초판 300부를 발간했다. 광복이 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로, 1945년 12월 김구와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이 되었으나,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에서 수학했다. 1951년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잡지 『사상』을 창간했다. 이어 1953년 피난지에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했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이듬해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에 복귀했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연이은 민주화운동 참가로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무조건 즉시 석방하고 자유언론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사망 경위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를 조사했으나, 변사사건기록 폐기, 수사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가정보원 자료의 미확보 등으로 2004년 그의 사망이 공권력의 직·간접적 행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2012년 8월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했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99년 그의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매년 1∼2회 전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따라 가는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행사를 열고 있다.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2012년 8월 파주시가 추모공원으로 조성한 통일공원으로 옮겨졌다.
2019년11월16일(토)(06;50) 의정부역에서 138-5번 버스도 가능하지만 전철환승 등 시간 거리 고려하여 동서울 터미널 출발하는 사창리행 버스에 탑승합니다. 동서울 터미널이 주차 용량의 한계에 도달 배차를 받지 못해 약10여분 늦게 출발합니다. 한숨 자고나니 일동, 이동 지나 (08;20)토평리버스터미널에 도착합니다. 우측으로 가야할 감투봉이 우뚝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약사봉을 먼저할경우 약사1교까지 차도를 오래(약20여분) 걸어야 하고 감투봉을 먼저할 경우는 차도를 5분 정도만 걸어도 되고 감투봉을 먼저 오르는 것이 암릉 릿지구간을 통과기가 쉽기에 지도상 감투봉. 실제감투봉 왕복. 약사봉. 삼거리에서 직진 그랜드캐년협곡위 등로-재무부강국장묘지 도평리버스터미널로 예정 진행합니다.
0km 0분[도평리버스터미널](08;20)
버스터미널에서 47번도로상 인도 따라 서울 방향으로 Back 도로 따른다. (08;24)도리돌마을(탁주/동장군체험장) 공사현장을 지나고 (08;25) 3거리에서 47번도로를 버리고 90도우향 아스팔트1차선 도로따른다. 콘크리트 도로로 바뀌고 고속화도로밑을 통과하여 3거리에서 우측도로를 따르면 공사가 중단된 공장 건물에서 도로가 끝난다.[1.2km][20분]
1.2km 20분[사실상 등산로초입](08;40~08;50)[10분]
공사가 중단된 건물 개방된 대문을 들어가서 우측으로 출입이 가능한 열려있는 울타리 쪽문이 들머리다. 열려있는 대문 앞 전신주 있는 우측은 철조망과 구거지대로 통과가 불가능하다. 공사가 중단된 공장건물 열려있는 큰문으로 2m 들아가면 우측 쇠막대기 울타리 겸용 잠기지 않은 쪽문이 들머리다.
쪽문으로 나가 고랑에서 조금 오르기 힘든 90cm 정도의 경사를 오르면 소나무 밑 공터다. 약10분간 등산준비하고 (08;50) 잘 정비된 등로 따라 오른다. (08;53)양성이씨와 여산송씨 부부합장묘지 뒤로 등로가 이어진다. 급경사 오름길을 오르면 세미클라이밍 바위 암릉 전망대다. (09;05~09;07)[2분]암릉전망대에서 물안개 피어오르는 환상적인 조망을 즐기고 다시 오름길 오르면 2번째 세미클라이밍 바위봉을 오른다.
능선오름길에서 (09;25)다올 고산마루님 표지기를 만나니 반갑다. 이후 등로는 육산으로 변하고 마사토 능선 오름길 오르면 (09;50)지도상 감투봉 정상 헬기장이다.[1.5km][60분]
2.7km 90분[지도상감투봉](09;50~09;55)[5분]
고 한현우님의 오래된 비닐코팅 정상표지판이 낡아 떨어져 있어 끈으로 보수하여 붙히고 삼각점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어 포기 한다. 선답자님들의 낡은 표지기 몇장이 바람에 나부끼는 그런 봉이다. 조망은 시원치 않다.
인증사진 남기고 낙옆 쌓인 능선길 100m 정도 가면 3거리 벙커봉이다. 우측으로 약 1.1km거리의 실제 감투봉을 왕복한다. 등로가 없어 오를수없다는 정보는 잘못 된 것이고 실제 감투봉을 향한 등로는 양호하다. 푹신한 등로 따르면 바위암벽이 길어 겁을 먹을만한 바위봉 아래 선다. 우측으로도 길이 있으나 오를수 없을듯 하여 좌측으로 허리길 따라 우회 한다. 감투봉을 오를만한 다람쥐길이 바위사이로 연결되고 쉽게 정상에 설수있다.[1.3km][30분]
4.0km 125분[실제 감투봉](487m)(10;25)
정상은 의외로 육산이다. 장쾌한 한북정맥과 가리산이 조망되고 우측 으로 관음산. 사향산이 조망된다. 발아래로는 도평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유일하게 '배창랑과 그일행 =山君들'표지기 걸어 인증사진 남기고 왔던길을 되돌아 내려선다. 하산길에 바위봉을 몇장 사진으로 남기는 여유도 부려 본다. 삼거리벙커봉으로 돌아온다[1.2km][15분]
5.2km 140분[삼거리벙커봉](10;40)
삼거리벙커봉에서 우측으로 내림길 내려선다 . 능선 좌측으로 여우봉이 유혹하고 승진사격장 표지들이 보인다. 낙옆이 푹신한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3거리능선갈림봉(cf직진;외약사동.각흘산향)에서 우틀하여 내려 섰다가 오르면 약사봉정상이다.[2.8km][45분]
8.0km 185분[약사봉](11;25)
작은 공터가 있을 뿐 어떤 내세울만한 특징도 없는 봉우리다. 퇴색된 이름 없는 리본 하나만이 외롭게 걸려있다. 내약사동과 외약사동 사이의 근처에서 가장 높은봉이기에 약사봉이란 이름을 얻은 듯 싶다. 약사봉 표지기 걸고 인증사진 남긴다. 고 장준하선생이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 산이다. 36도 한여름에 이름도 없는 이 삭막한 봉우리를 왜 찾았을가~? 잠시 묵념의 시간을 보내고 하산길에 든다. 등로는 너무 편하다. 추락사고가 날수없는 등로다.
(11;55)삼거리 갈림길 (cf좌 ;약사계곡 유원지 약사1교 향)에서 우틀 하여 부드러운 능선길을 걷는다. 한북정맥능선이 장쾌하게 조망된다. (12;05) 등로 좌측으로는 그랜드케년 협곡이다.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릴정도의 직벽 낭떠러지길이다. 등로는 안전시설이 없으나 위험하지는 않다. 산마루가 끝날 즈음 좌측으로 잘 가꾸어진 묘지가 보여 내려선다.
(12;15)재무부 강국장 묘지다. 또 다른 묘지 예정지(?) 공터가 있고 건너편에도 잘 정비된 묘지가 보인다. (12;20) 임도에 내려서 우측에 약사천을 끼고 좌향 임도 따른다.용도를 알수없는 원두막 같은 여러동의 창고동 (감전주의 표지판 부착된)을 지나
(12;25)무명교를 건너 우틀 도로 따라 (12;29)생수공장 창고를 지나 (12;30) 47번도로를 만나 우틀하여 교통표지판 백운계곡 방향으로 고속화도로 입체교차로 따라 백운계곡 방향 따른다. (12;45)조랑말표지석과(12;46)신망애표지석를 지나 (12;50)도평리버스터미널 원점 회귀 산행종료한다.[3.6km][85분]
11.6km 270분 [도평버스정류장](12;50)
주변에 마땅한 음식점도 씻을곳도 없어 이동면으로 이동 할려는데 138-5번버스가 방금 떠나 1시간이상 기다려야 되겠기에 이동택시콜(031-532-8259)하니 5분만에 도착 이동버스터미널 근처 원조이동갈비집(택시비5천원)으로 갑니다.
지난번에도 신세진 근처 장암리 경로당에서 씻고 새옷 갈아 입습니다. 원조 이동 갈비집으로 가서 생갈비 안주에 복분자1; 소주1 비율로 섞은 혼합주로 (14;00~16;40) 즐거운 뒷풀이 합니다. (17;00)경 이동버스터미널에서 버스표 티케팅(8,800원)하여 동서울터미널에(18;50) 도착합니다.
2호선타고 종합운동장역에서 (19;10) 9호선 환승하여 (19;50) 가양역도착 (20;00) 귀가 합니다.
08;20 포천시이동면 도평리 버스터미널입니다.
08;24 도리마을(체험장) 공연장입니다.
08;25 47번도로를 버리고 90도 우향 1차선 아스팔트 도로따릅니다.
08;31 마을도로가 콘크리트 도로로 변하고 고속화도로아래를 통과 합니다.
08;40 사실상 등산로 입구 인 공사가중단된 공장건물 우측 쪽문이 들머리 입니다.
08;40~08;50[10분]쪽문(사진 붉은색 원형안)를 통과하여 소나무아래 공터에서 산행준비 10여분 합니다.
(08;53)양성이씨와여산송씨 부부합장묘지입니다.
(09;05~09;07) 바위암릉 전망대에서 조망입니다.
(09;05~09;07) 바위암릉 전망대에서 조망입니다.
(09;05~09;07) 바위암릉 전망대에서 조망입니다.
(09;05~09;07) 바위암릉 전망대에서 조망입니다.
(09;05~09;07) 바위암릉 전망대에서 조망입니다.
(09;05~09;07) 바위암릉 전망대에서 조망입니다.
(09;05~09;07) 바위암릉 전망대에서 조망입니다.
09;25 고산마루 다올님 표지기 만나니 반갑습니다.
09;50~09;55 [5분]지도상 감투봉 정상 故 한현우님표지기 수선하여 부착합니다.
09;50~09;55[5분] 지도상 감투봉 정상 선답자님들의 표지기입니다.
09;50~09;55 [5분]지도상 감투봉 정상인증 사진입니다.
10;22 감투봉 정상아래서 실제 감투봉 입니다.
10;23 실제 감투봉 정상을 오르면서 표지기 부착중 입니다.
10;23 실제 감투봉 정상모습입니다.
(10;25)실제감투봉 정상은 의외로 육산입니다. 유일한 표지기(배창랑과 그일행=산군들)걸고 인증사진 남깁니다.
1025 조망입니다
10;45 3거리벙커봉으로 되돌아옵니다.
11;25 약사봉 정상 입니다. 무명봉이 약사봉으로 변한 탓인지 이름모를 선답자님의 표지기가 유일하게 1장 붙어 있어 배창랑과그일행 표지기와 약사봉.
11;25 약사봉 인증사진입니다.
12;05 그랜드캐년 낭떠러지위에서 조망입니다.
12;05 그랜드캐년 낭떠러지위에서 조망입니다.
12;05 그랜드캐년 낭떠러지위에서 조망입니다.
12;07 그랜드캐년 낭떠러지위에서 조망입니다.
12;08 그랜드캐년 낭떠러지위에서 조망입니다.
12;15 재무부 관리국장 강씨묘지입니다.
12;20 임도 모습입니다.
12;25 무명교에서 도평리방향 약사천 조망합니다.
12;25 무명교에서 약사1교방향 약사천 조망합니다.
12;27 뒤돌아본 실제 감투봉입니다.
12;30 해찬여울 연수원입니다.
12;30 도로교통표지판 백운게곡방향 고속화도로 인터체인지 빠져 나옵니다.
12;45 조랑말 표지석입니다.
12;46 제2도평교 입니다.
12;46 신망애 표지석입니다. 12;50 도평터미널에 도착 산행종료합니다.
산행지도
e-동아지도
오록스맵지도 트랙이 많이 튀었습니다. 보기싫어서 흰색으로 수정했습니다. GPS충돌인듯 싶습니다. 시간은 맞는데 거리가 23.01km를 가리킵니다.ㅎ
오록스맵 트랙입니다.
감투봉.약사봉.경기포천019-11-16 0819__20191116_0819.gpx
첫댓글 "배창랑과 그일행 산군들" 오래된 표지기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래전 백두대간 1차가 끝날 무렵 그동안 등대처럼 신세지던 부산 건건산악회 표지기와 준.희님의 표지기에 감동받아 대간동지 일행들의견 모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은 비용이 저렴한 천을사용했는데 수명이 너무 짧이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표지기입니다.
표지기 10년 생존을 은 약5~10%정도 됩니다.ㅎ
그때 일행들은 산을 접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새로운 일행들이 생기고~~
감사합니다 ~^^
약사봉에서 웃으시면서 인증사진이 해맑은 미소년같습니다..
백만불의 미소를 가지고계십니다 선배님
다녀오신 흔적 잘보고 갑니다
지맥(최수찬)님
곱게 봐주시는 지맥님은 마음이 맑으신 분으로 생각됩니다.
늘 건강하시고 안산즐산 이어가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
산세도 만만치 않은 감투봉과 장준하선생의 애환서린 약사봉이군요.
약사봉을 지나시면서 또다른 느낌이셨겠군요.
암봉에서 보는 운해의 장관도 멋을 더합니다.
덕분에 즐감합니다.^^
에이원회장님
감투봉.약사봉이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의 현장인탓인지 .우축 명성지맥 사이에 넓게자리잡고 있는 승진부대 사격장 탓인지
산님들로부터 외면 받고있습니다.
조금은 쫄면서들어 갔는데 등로 확실하고 부드러운 산책코스 같은 산길였습니다.투구봉쪽의 손맛이 조금있지만~~
날씨가 쌀쌀합니다.
건강하시고 안산즐산이어 가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