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소설은 단숨에 읽힌다. 그토록 잘 읽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 박완서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생동성, 문체의 날렵함, 자연주의적 관찰의 탄탄함으로 이룩한 독자적인 스타일이 어우러져 풍부한 사실적 실감이 넘치는 소설로 잘 빚어진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 속내를 후벼 그 안에 숨은 끈질긴 욕망과 위선과 이중성을 파헤치는 그 직정적인 문체는 읽는 이의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준 듯 상쾌함을 넘어서서 통쾌하기까지 하다. 사람의 변덕스러운 욕망과 그것을 넓은 테두리로서 감싸는 시대, 그리고 개개의 욕망과 시대가 만나 빚어내는 풍속에 대한 통찰은 뭉툭한 법이 없다. 퍼렇게 벼린 칼로 정확하게 그 핵심을 파고든다. 노년에 접어든 박완서의 필력은 더욱 원숙해지고, 사람살이에 대한 통찰은 소름끼칠 정도로 더욱 적확해졌다. 작중인물의 입을 빌어 아무렇지도 않게 발설되는 “모든 인간관계 속엔 위선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돼 있어, 꼭 필요한 윤활유야.”(「마흔아홉 살」)라는 발언도 우리 안에 숨은 그 많은 위선과 허위와 이중성을 날카롭게 적시해낸다. 가난한 시절 구박스런 태생의 이력으로 저 먼 이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작중인물이 코끝으로 끼쳐오는 밥 뜸 드는 냄새 앞에서 보이는 반응 ; “녹물은 안 들었는지 몰라도 밥 뜸 드는 냄새에는 무쇠 냄새도 섞여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연기가 벽의 균열을 통과하면서 묻혀온 흙냄새도, 그 모든 냄새와 어우러진 밥 뜸 드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아 이 냄새. 이 편안함. 몇 생을 찾아 헤맨 게 바로 이 냄새가 아니었던가 싶은 원초적인 냄새.”(「후남아, 밥 먹어라」) 이 후각적 진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들, 곧 삶이 숨긴 무수한 비의(秘意)들을 단숨에 끄집어낸다. 『친절한 복희씨』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노년을 다룬 것, 온갖 신산스런 경험을 감싸 안으며 관용과 그리움으로 넉넉해진 회고조의 문체로 기운 것 등은 작가의 나이가 벌써 칠순을 넘겼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터다. 처음에 실린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마지막에 실린 「그래도 해피 앤드」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가난을 겪으면서 나이를 먹은 자의 내면 기억에 침전된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염렵하게 갈무리하는 솜씨는 손끝에 무르익은 장인의 솜씨 바로 그것이다. 박완서의 소설들은 항상 같은 지점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인생이라는 극점이다 !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그 남자네집」이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청년과 구슬 같은 처녀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눈 교분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나’는 돈암동 성북서 언저리에 우연히 들렀다가 오십 년 전의 ‘그 남자네집’을 더듬어 찾고, 연탄불과 카바이드에서 훅 끼쳐오는 냄새 속에서 떠오르는 추억에 잠긴다. “나는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드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는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차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 같은 걸 감지한 건 아니었을까.” 집안 남자들을 전쟁통에 다 잃고 졸지에 가장이 된 젊은 여자는 제 가슴을 파고든 사랑의 관능 앞에서 죄스러워한다. 그것은 불온한 열정이며, 걷잡을 수 없이 분출하는 화냥기다. ‘그 남자네집’ 정원에 핀 갖가지 꽃들은 ‘나’의 가슴에 타오르는 젊음의 화냥기와 정확하게 조응한다. “향기 짙은 흰 라일락을 비롯해서 보랏빛 아이리스, 불꽃 같은 영산홍, 간드러지게 요염한 유도화, 홍등가의 등불 같은 석류꽃, 숨가쁜 치자꽃, 그런 것들이 불온한 열정 ― 화냥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분출했다.” ‘나’는 노년이 되어서 자기와 그 남자는 “플라토닉의 맹목적인 신도”였으며, 플라토닉이란 무정란의 사랑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들이 “신봉한 플라토닉은 실은 임신의 공포일 따름인 것”이었음을 담담하게 토로한다. ‘나’는 그 남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선택해서 결혼을 한다. “그래,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 그게 내가 벼락치듯 깨달은 정답이었다.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그의 집도 우리 집도 사방이 비 새고 금 가 조만간 무너져 내릴 집이었다. 도저히 새끼를 깔 수 없는 만신창이의 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새끼를 위해 그런 집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굳이 ‘그 남자네집’을 어렵게 찾아내 기어코 그 집안을 기웃거리는 것은 이룰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사랑의 순진성과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뿌리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현실적 선택, 그쪽으로 나가도록 부추긴 제 안의 영악함에 대한 옹호로 읽혀진다.
박완서의 인간 탐구는 철저하다. 소설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 탐구라면 표제작 「친절한 복희씨」는 그 요구에 충실히 부응한다. 소설쓰기는 익명성으로 떠도는 사람들, 객체성에 지나지 않는 인물들에 다름의 실감을 만들어 저마다에게 이름 부여하기, 혹은 발랄한 개성 부여하기다. 박완서는 시골에서 상경한 한 처녀가 겪은 신산스런 체험을 낱낱이 적으면서 ‘착한 복희씨’라는 개성을 부각시킨다. 물욕과 식욕과 성욕의 덩어리 그 자체인 남자의 후처 자리에 들어가 아들 딸 잘 낳고 노년을 맞은 복희씨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착한 여자”다. 아니 그것은 남들의 시선이 규정한 정체성이다. 착한 여자라는 규정은 사람들이 믿고 싶은 바에 따른 단순화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속을 빤히 알기 때문에 기대에 어긋나는 태도로 일관했다. 잘난 척도 못난 척도 하지 않았다. 거만도 겸손도 떨지 않았다. 아는 것도 묻고, 거친 상소리는 못 알아들은 척했다. 군식구들의 역할이나 성깔, 버릇, 능력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이름도 외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이름과 얼굴이 헷갈리는 것처럼 얼뜨게 굴었다. 영악하게 잇속을 챙기는 시장통에선 얼뜨게 구는 것도 일종의 전술이었다.” 복희씨가 얼뜨게 구는 것은 진짜 얼뜨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의 생존 전략이요, 사람과 부대끼며 살면서 얻은 삶의 지혜다. 사람들은 복희씨의 속내를 숨긴 그 전략과 지혜까지 꿰뚫어 보지는 못 하고 그 얼뜸을 착한 속성의 발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어쨌든 “버스차장을 목표로 상경한 천방지축 촌년이 방산시장에서도 알부자로 알려진 가게 주인”인 남자의 집에 점원 겸 식모로 들어갔다가 남자의 강압으로 몸을 빼앗기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독하게 이를 갈”지만 결국에는 그 남자의 후처 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착한 여자가 불가피한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복희씨는 남들이 보는 것처럼 마냥 녹녹한 여자이기만은 아니다. 남자의 강압으로 제 몸의 정결함을 더럽힌 피해자며, 남자의 모든 욕망과 필요에 부응하는 듯하지만 실은 자기모멸감 속에서 묵묵히 견뎌내며 복수를 꿈꾼다. “나는 그 짓을 하는 동안을 견디기 위해 내가 지금 하는 것은 말이나 소를 혹사시키기 위해 모질게 채찍질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내가 지르고 있는 비명은 내 소리가 아니라 채찍질을 당하는 마소의 비명인 것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꿔 생각했다. 착각도 길들이면 진짜 같아지는 법이다. 착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변태를 어떻게 살의(殺意) 없이 참아낼 수 있었겠는가.” 박완서는 온갖 굴욕감을 견뎌내는 복희씨의 내면에서 번뜩이는 날선 반감과 살의를 들춰내 까발린다. 이 반감과 살의는 교묘하게 변형되어 “나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이 가뜩이나 욕심 많은 그이를 더 많이 벌어 오도록 끊임없이 부추기고 닦달질”한다. 그런 방식으로 착한 복희씨는 그 남자를 “모질게 착취”한다. 그 남자는 중풍으로 쓰러진 말년에도 넘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젊은 여약사가 있는 약국에 가서 정력제 처방을 조른다. 중풍 든 남자는 그 정력제 처방이 위험하다고 거절하는 제 딸 또래가 되는 여약사에게 기어코 복희씨를 보낸다. 저 욕망의 하염없음이라니 ! 차라리 연민이 솟을 정도로 그 욕망은 염치없고 비루하다. 박완서는 착한 여자의 기구한 일생을 늘어놓지 않는다. 남자의 변태스럽고 비루한 욕망을 만천하에 일러바치면서도 그것에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는 착한 복희씨의 모질고 독한 일면을 기어코 나란히 내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희씨는 착한 여자라는 객체성에 매몰되지 않은 피와 살을 가진 발랄한 개성을 지닌 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박완서의 소설들이 말하는 바는 언제나 한결같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고, 인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