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05.25.金. 미세먼지 맑음
05월20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기다란 장대를 세 개씩 고무 끈으로 묶어서 다리를 벌려 세워놓고 장대 아랫부분은 말뚝을 박아 끈으로 고정시켜놓았습니다. 너른 법당 마당에 그렇게 만들어놓은 장대 지주가 서른 개 가까이 서있어서 지주와 지주 사이를 섬유 밧줄로 연결시켜 기다랗게 연등을 걸 공간을 회랑回廊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절 초입인 다리에서부터 도량 마당까지 이어지는 경사 길에도 길 양편으로 줄을 쳐서 연등을 걸 요량을 해놓았습니다. 그 경사 길을 퉁탕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차를 몰아 올라가고 있는데 스님께서도 밀짚모자를 쓰고 길섶에 서있어서 경적을 짧게 빵~ 하고 울리며 손을 흔들어보았으나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듯했습니다. 도량마당으로 차가 올라가자 일단 장대 지주 사이로 조심조심 들어가 장독대 옆으로 주차를 시켜놓고 차안에서 난 화분을 꺼내 들고는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 양쪽 앞으로 단정하게 놓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보살님이 따로 봉투에 담아준 꽃 리본을 가장 실한 난 줄기에 걸어 앞쪽에서 잘 보이도록 가지런히 펼쳤습니다. 내 아이들 이름이 부처님 양편으로 놓인 화분에 선명하게 떠오르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법당에서 나왔더니 스님께서 법당으로 올라오시면서 난 화분을 요모조모 살펴보셨습니다. 잠시 난 화분을 뜯어보시더니 “화아, 화분에 꽃이 저렇게 많이 피어있는 것은 또 처음 보겠네. 저게 호접란胡蝶蘭 종류지요. 꽃밭에 나비가 가득 앉아 팔랑거리고 있는 것 같군요.” 잠시 후 법당 돌계단을 함께 내려오면서 스님께서 두런두런 일러주었습니다. “예 말이요. 오늘은 차를 저 아래쪽 주차장에 세워야 하는 것이 규칙이니까 말이요, 차부터 빼주셔야겠거든.” “예 그러지요” 공양간에는 보살님들이, 마당에는 서너 분의 거사님들이 각자 맡은 일에 따라 분주한 몸놀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절 초입에서부터 도량 마당에 이르는 경사 진 길에서 쳐다보면 기다란 도량 터가 사단四段의 층층이 계단으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가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안쪽 한 단 위로 스님 어머님 묘탑이 모셔져있는 1층, 두 번째가 삼사백여 평가량의 텃밭이 있어서 고추와 배추와 상추와 가지, 호박, 쑥갓, 참깨와 들깨, 무, 콩, 땅콩 등을 심어 먹는 2층, 작은 요사와 샘과 창고와 법당과 스님 처소가 있는 등 가장 넓고 평평한 땅이 있는 3층, 그 위쪽으로 서너 길 높게 지금은 놀리고 있어서 잡풀만 무성하지만 언젠가는 그 터에 선방이나 차실과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 하는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단계 도량의 목탁암 구조입니다. 차를 돌려 아래쪽 주차장으로 몰고 갔더니 풀을 가지런히 깎아놓은 주차장에 벌써 차량 너덧 대가 나란히 줄을 서있었습니다. 나도 맨 안쪽으로 차를 대놓고 슬슬 도량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샘으로 가서 손을 씻다가 신도회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회장님께서 나를 매우 반겨주시면서 초파일에 멀리서 일부러 와주셔서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두어 차례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말을 목탁스님이 내게 해주어야 사리에 맞을 것 같았는데 목탁스님께서는 호접란 꽃이 화아~ 예쁘다는 말과 차 빼라는 말밖에 해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목탁암 신도라야 몽땅해서 열 명이 될까 말까 한 정도일 텐데 회장님께서는 신도회 회장직을 꽤 오랫동안 성의를 다해서 수행을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목탁암 신도회에는 우리 사회 통념에 반해서 회장님은 있는데 총무는 없습니다. 아니 총무 직이 없다기보다는 그 자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걸로 봐서는 목탁암 재무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법당 마당에서는 재근 씨와 회장님 부군께서 장대 지주 사이로 섬유 밧줄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오셨다는 손사장님은 톱과 커다란 전지가위를 들고 다니면서 너무 울창해져버린 나뭇가지를 솎고 골라내어 모양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나는 회장님 부군께 “선배님 잘 지내셨지요.”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목탁암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분들과 자리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는데, 목탁스님께서 나에게 “저 양반이 신도회 회장님 부군이신데 아마 집이 고등학교 선배가 되실 것 같으니 족보를 한번 따져 보시구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족보를 따져보았더니 칠 년 선배가 되시는 것 같아서 나는 선배님으로 호칭을 정했습니다.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재근 씨와도 반가운 악수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창고에서 면장갑을 한 켤레 찾아들고 장대 지주 쪽으로 걸어갔더니 재근 씨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니 아니, 거사님까지 덤빌 것 없어요. 이일은 이제 다 끝났으니 저녁공양 후에 연등이나 걸도록 합시다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배님께서도 “멀리서 운전하고 왔으니 잠시 차실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좀 쉬지 그러시나.” 라고 권하시는 바람에 슬그머니 면장갑을 벗어놓고 차실로 들어갔습니다.
차실에 쌓여있는 책들을 주우욱 훑어보았더니 새 책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목탁암에 온 지 거의 일 년만이니 그 동안 독서광인 스님께서 광주 헌책방을 드나들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잔뜩 구입해 놓았을 것입니다. 가방을 열고 집에서 읽다 가져간 <댈러웨이 부인>을 꺼내놓고 벽에 등을 기대고 방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쌓여있는 책 중에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우선으로 골라 놓고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어 1권을 펼쳐보았습니다. 시詩는 첫 줄에서, 소설小說은 첫 장에서 독자의 눈을 사로잡지 못하면 그 책은 영영 읽혀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내 이름은 빨강>도 역시 파격적인 출발을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첫 줄에서부터 두개골이 부서진 채 우물에 빠져 죽은 자의 독백으로 시작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흥미로운 시선으로 서너 쪽을 읽고 있는데 노 보살님께서 먼데서 오시느라고 시장하실 터이니 우선 요기라도 하라면서 오늘 맞춰온 손 두부와 묵은 김장김치에 양념을 버무려서 가져다주었습니다. 양념과 참기름을 더한 묵은 김치에다 투박한 손 두부를 싸서 한 입 가득 밀어 넣었더니 빨강과 하양의 기막힌 맛의 조화와 운치가 입안을 압도해버렸습니다. 한 입 또 한 입 하다 보니 어느새 한 접시나 되었던 두부가 몽땅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입맛을 다셔가면서 방바닥에 놓았던 책을 들고 두어 페이지가령 더 읽고 있는 참인데 재근 씨가 방으로 와서 공양을 드시라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읽던 책을 덮어놓고 공양간으로 건너갔습니다. 건넌방에는 너덧 분의 거사님 상이 차려져있었고, 공양간에는 보살님들의 상이 차려져있었습니다. 천장암에서도 새로 오신 공양주보살님 신심과 음씩 솜씨가 뛰어나 일요법회 후 점심공양을 하는 즐거움이 대단한데 이곳 목탁암 공양은 보살님들의 음식 우려낸 솜씨가 내 어릴 적 입맛이라 즐거움에 영롱한 추억을 동반해주었습니다. 밥상위의 나물만해도 여남은 가지가 넘는데다 특히 죽순나물과 열무얼갈이겉절이가 다정하게 혀끝을 파고들었습니다. 간이 딱 좋은 시래기된장국도 아주 맛이 그만이었습니다. 하얀 쌀밥을 한 그릇을 다 먹고 한 번을 더 퍼서먹었는데도 입안에 달콤한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공양을 올리고나자 후식이라면서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식혜를 한 그릇씩 담아 내왔습니다. 달부드름한 식혜가 소화에 도움을 준다고하는데 그야 어떻든 맛이 있으니까 또 한 그릇을 다 먹었습니다. 실은 차게 해야 제 맛이 나는 대표적인 음식이 식혜와 수정과이긴 하지만 이럴 때는 함께 먹는다는 분위기에 도취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맛나게 먹었습니다. 엿기름에 우려낸 웃물에 쌀밥을 말아 더운 방에서 삭힌 식혜는 나중에 밥알이 위로 떠올라오는데 설탕을 적당량을 넣은 후 그 밥알이 혀끝에서 깔깔하게 느껴졌을 때 최상급 식혜로 치는 것이라서 쉽고 간단한 듯한 식혜가 의외로 까탈스러운 조리기법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을 제외하고는 근래 몇십 년 동안 혀끝에서 삭힌 밥알이 탱탱하고 깔깔한 느낌이 도는 식혜를 먹어본 기억이 없으니 그저 알맞게 삭아 당도를 잘 조절한 식혜라면 이만하면 좋은 식혜로다 하면서 고맙게 식혜를 즐기려고 했습니다. 이때가 오후6시경을 한참 지나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도량 진입로와 법당 마당에 등을 걸고 법단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을 진설해야했습니다. 붉고 노란 연등蓮燈도 걸고, 온통 새하얀 영가등靈駕燈도 걸고, 주렁주렁 띠 장식을 한 팔각등八角燈도 걸고, 이제는 산중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주름등도 걸었습니다. 초파일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일단 집으로 돌아갈 분들은 돌아가시고 절에 남아있는 분들은 일찌감치 잠자리를 준비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모두 새벽부터 일어나서 상차림 음식과 절에 찾아오는 손님맞이와 초파일 법요식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대부분 잠자리에 들고 마지막까지 분주하시던 스님께서 세수와 양치질을 마치고 차실로 들어온 시간이 자정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이제부터 차분하게 차를 우려 마시면서 두세 시간이상을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푹 빠져있을 터인데 오늘밤에는 삼십여 분가량 앉아 있다가 바로 자야겠다면서 스님 처소로 들어갔습니다. 나도 벽에 등을 기대인 상태로 책을 보았는데 <내 이름은 빨강>이 아니라 스님께서 툭 내밀었던 정장이 간결한 일본 소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소재로 소설을 쓸 생각을 했는지 아이디어가 독특한 신박한 소설이라는 스님 말씀에 나도 호기심이 동해 <내 이름은 빨강>은 덮어놓고 ‘내가 일을 하면 언제나 비가 내린다.’ 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사카 코다로’의 <사신死神 치바>라는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이를 테면 사신死神 치바가 저승사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며 세상물정과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새벽 두시가 넘어가자 나도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해우소에 다니러 마당으로 내려갔는데 초승달은 이미 산등성이 너머로 저버렸고 까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가득했습니다. 그중에는 유독 빛나는 별 두세 개가 하염없는 소원처럼 하얀 빛을 끊임없이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보았더니 새벽5시10분경이었습니다. 공양간에는 벌써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이런 날일수록 오직 하나 뿐인 세면장 겸 화장실을 매끄럽게 사용하는 기회를 잘 잡아야합니다.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이른 시간에 빨리 이용을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바로 세면장으로 달려가서 씻고 닦고 날렵하게 빠져나왔습니다. 도량 마당도 쓸고, 등도 정리하고, 내 옷가지와 가방보따리도 한쪽으로 잘 챙겨놓았습니다. 오늘은 공양간이고 건넌방이고 차실이고 간에 무시로 사람들이 들어 다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나서 아차, 내가 아직 초파일 등을 접수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등 꼬리표를 하나 써 주십사했더니 “예? 집이 등은 벌써 써놓았는데요.” 하시면서 “해마다 초파일이면 집이 가족 등은 항상 켜지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러셨군요. 이번에는 아버님 영가등靈駕燈도 한등 켜려고 하니 스님께서 직접 하나 써주세요.” 했더니 스님께서 책상에 앉아 아버님 영가등靈駕燈 꼬리표를 척척 써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손에 들고 있던 붓펜을 내게 넘겨주시면서 “올해 초파일 등 접수는 거사님이 좀 해주셔야겠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파일 하루 뜬금없는 등 접수를 내가 보게 되었습니다. 아침9시가 넘어서자 등 접수하러 오는 신도님들이 스님 서재 겸 종무소에 가끔 들려주었습니다. 오전10시가 지나서 법요식 시간이 다가오자 스님께 “저어 스님, 법요식에는 참석해도 될까요?” 했더니 “아니, 등 접수를 보는 분이 자리를 떠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법요식에 참석을 해도 안하는 것처럼, 법요식에 참석을 못해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등 접수를 보시란 말이요, 잉.” 등 접수를 보게 되면 보시금을 담은 봉투에 주소와 이름과 생년을 써서 나에게 건네주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봉투에 쓰인 것을 보고 꼬리표를 작성해서 주면 신도님들은 꼬리표를 들고 가서 법당 마당에 걸려있는 등에 붙여놓고 오게 됩니다. 가까운 화순에서 뿐만 아니라 광주나 대구에서도 등 접수가 들어왔습니다. 조금씩 시간이 늦어질수록 더 먼 구미나 창녕, 마산이나 부산에서도 등 접수가 들어왔습니다. 요즘에는 사전 등 접수가 전화나 메일을 통해서도 꽤 많다고 하니 아마 제주도나 서울에서도 등 접수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등 접수를 받는 동안 나는 그분들을 모르지만 그쪽에서는 나를 알고 있는 분들이 있었던 모양으로 스님께서 종무소에서 등 접수를 받고 있는 분이 혹시 누구냐는 질문을 몇 차례인가 받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님께서 그 질문에 답을 했다는 한 문장이 괜히 가슴속을 심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분이지요.” 오늘 따라 스님의 투박한 염불소리와 함께 길었던 법요식이 끝나고 거사님들과 북적거리는 차실에 둘러앉아 점심공양을 했습니다. 모후산 목탁암에서는 아기 부처님 관불식灌佛式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십 년 이래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탁암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 바로 6년 전이었으니까 아기 부처님 관불식은 여태껏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