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mo 느티나무 / 김길수 (2024. 5.)
커피점 이름이 ‘olmo’다. 개점 날 초청되어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찾아가니 눈에 익은 장소다. 커피점 뒷동산 느티나무가 시선에 들어왔다. 낯이 익은 나무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아프다. 아픈 나무를 다시 만나니 인연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점은 느티나무 동산 아래에 있던 허름한 집이 헐린 그 자리에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olmo에 대한 뜻을 물어보니 스페인어로 느티나무란다. 호기심에 인터넷 검색을 하니 포르투칼어로는 느릅나무라고도 번역이 되어있다. 결국 카페 이름은 언덕 위 느티나무를 뜻한 셈이다.
2000년도 중반 처음 이 느티나무를 만났다. 광주의 푸른 길을 이어간다는 “잇다” 모임 탐방길에서다. 먼 거리에서 눈으로만 익혔던 느티나무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모습에서는 위엄이 있었다. 수령 400년인 느티나무는 동산 봉우리 맨 꼭대기에 자리했고, 산자락을 휘감은 마을은 광주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합수점으로 펼쳐진 들판은 넉넉함이 느껴지고 주변 시골 풍경으로 수수함이 깃들어 있었다. 느티나무가 서 있는 꼭대기에 오르는 언덕길은 협소했지만, 느티나무가 시내를 내려다보는 풍모는 마치 수호신처럼 위엄있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 나무와의 두 번째 만남은 느티나무주인이 찾아와 느티나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이루어졌다. 다시 찾아가 나무를 만났을 때는 산자락 능선을 허물어 두 동강을 내고 포장도로를 만드는 중이었다. 마을을 순회하는 차량의 통행을 자유롭게 하려고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 일부를 잘라낸 상태였다. 그 후 나무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서너 번 찾았고 오늘 또 만났으니 분명 나무와의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저녁노을에 비치는 느티나무를 바라보니 나무주인의 지친 얼굴과 겹친다. 노인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노거수에 그토록 애착했을까! 죽어가는 나무를 살려달라며 본인의 소유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꺼내 보이던 노인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무의 무성한 세력은 사라지고 잘린 가지에 버섯이 피었다. 늠름한 기상을 보였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아픔은 줄기에 종기처럼 피어 있는 버섯들이 말해주고 있다. 교통 편의를 명분 삼아 마을의 노거수나 마을 숲이 쇠퇴하거나 사라지는 모습은 마음 아픈 아쉬움으로 남는다.
느티나무는 예부터 마을 사람들의 소통장소뿐만 아니라 미세먼지를 차단해주고, 태풍을 막아 주기도 하며 때로는 흉년과 풍년을 예측하기도 했다. 음으로 양으로 느티나무의 큰 덕을 보았지만, 요즈음 마을 사람들은 무심한 척 외면하고 있으니 애석하다.
옛 속담에 “큰 나무 덕은 못 보아도 큰 사람 덕은 본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olmo라는 커피점은 느티나무 이름표를 달고 있지 않은가! 과거의 역사를 품고 있는 나무는 인간에게 베풂이 크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자연 사랑을 매스컴에서는 외쳐대지만, 개발과 맞닥뜨린 현실은 정반대다. 바로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 위주의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느티나무는 결국 가지 하나가 희생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 것이다. 나무주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뿌리가 잘려 나간 느티나무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무주인은 자신이 얼마나 능력이 없다고 자책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덴 것처럼 마음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도 느티나무는 ‘olmo’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olmo에게 찬사를 보낸다. 수세樹勢가 약해졌을지라도 카페를 수호하는 나무가 되었다. 부채를 든 마을 어르신 몇 분이 느티나무 동산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어둠이 짙어지니 olmo라는 카페의 불빛이 선명해진다.
olmo라는 이름표를 다는 순간 쓸모없음에서 쓸모 있으므로 변한 느티나무는 카페지기이고 노거수이며 마을의 명목으로 명성을 되찾았다.
카페를 찾는 사람들에게 느티나무는 인문학자가 되어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첫댓글 김길수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카페에서도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