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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공서열제를 폐지하자
정규직이 이미 기득권이다
최근 기간제 교사 정규직 전환에 대한 제외 방침에 열 받아 글을 썼더니 억울하다는 전교조 선생님의 반론과 전화를 받았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낯모를 선생님들께 미안하다. 하지만 거리감을 어쩔 수 없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전교조 선생님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그런 의견을 주신 분들 자체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분들로 나름 개선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넘을 수 없는 거리감은 역시 내가 지금도 기간제로 일하는 탓인지 모르겠다. 전교조의 논리처럼 수 십 년 쌓여온 교원적체 문제에 대해 통계는 모르지만 나도 충분히 안다. 그러나 형평성 논리로 기간제 문제와 예비교사 문제를 한꺼번에 다루는 것에 대해, 그러며 기간제가 이미 평등한 대우를 받고 차별이 없는 것처럼 얘기하며 합리화하는 톤에 대해 몹시 거북했다. 같은 노동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상황에서 만고의 진리가 되는 것은 노동계급 내에서도 정규직 자체가 기간제에 대해 중간관리자로서 기득권이자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절반이 계약직인 상황에서 정규직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중간계급화한 기득권 계급이다. 특히 공무원이든 준공무원이든 공무원 신분은 더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인 전교조는 기간제 교사들의 편에 서서 함께 고통을 분담하며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였다. 노동계급 내부의 계급화를 부인하고 싶겠지만, 정규직과 기간제 사이에는 이미 20년 지속된 계급화가 존재한다. 전교조의 태도는 현행 제도의 운행에서 얻을 수 있는 기득권을 고수하며 중간관리자 내지 소시민화한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공서열제는 국가의 관리수단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그것은 그 직업이 철밥통이기 때문이 아닐까? 안정된 직장이 우리는 보수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지금같이 변화가 심한 시대에 철밥통을 갖는다는 것은 곧 기득권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은 아니더라도 사회의 중간관리자로서의 소시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1997년 IMF 위기 이후 공무원과 교원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이 되었다. 다른 직장에 비해 임금이 월등하지는 않지만 국가의 행정기관에서 일을 하며 평생직장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평생직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직장 생활을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호봉이 높아져 월급이 오르고, 퇴직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안정된 연금생활자가 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해서 급격하게 직업이 사라지는 마당에 국가라는 최고의 직장에서 근무함으로써 국가로부터 완전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지금 국가시스템을 지탱하는 관료제와 관료제를 지탱하는 연공서열에 의한 임금차별은 구조적 개혁을 가로막는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교사가 되려고 매달리는 이유는 그 직장이 우리사회에서 소위 가장 안전한 철밥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기득권의 양보와 나눔은 하려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의 호봉제 즉 연공서열제는 중앙집중적 국가의 위계관료사회를 지탱하는 임금제도다. 국민복지정책에 의존하지 않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한 임금체계다. 어디든 조직에 소속되어 오래 몸 담아야 한다. 조직에 오래 몸담고 있는 자들에게 우선권과 이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조직에 대한 복종과 충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평생직장이 됨으로써 회사와 개인이 일체가 된다. 내가 곧 조직이다. 산골에서도 ‘역군은(亦君恩) 이샷다’를 외치던 조선시대 양반들과 비슷한 사유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와 내 가족이 사는 것은 국가나 회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국가와 회사권력에 대한 충복은 될지언정 양심적 시민이 되기 어렵다. 특히 한국과 같은 권위적 위계사회에서는. 조직에 대한 높은 충성도는 중앙집중적 권력에 대한 조폭적 충성을 보여줄 뿐이다. 이런 회사가 합리적인 회사고, 이런 국가가 민주적 국가일 수는 없다. 이런 조직에서는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되어 있다.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연공서열제도이다. 연공은 능력이나 성과와 무관하다. 물론 능력과 성과가 진급과 관계 되어 있기에 승진시험에 매달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진급을 위한 시험은 그야말로 지급을 위한 시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이 참된 성과가 될 수 없다. 오직 개인의 승진으로만 귀결될 뿐이다. 이러다 보니 진급을 위해서라도 상급자에 잘 보여야 한다. 아부와 복종이 체질화될 수밖에 없다.
연공서열제는 적폐제도다
물론 연공서열제도 순기능이 있다. 사회 변화가 적거나, 인구가 꾸준히 늘 경우 오히려 사회의 안전장치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다. 급격한 노동 인구감소와 노령화, 그리고 4차 산업혁명으로 직업지형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연공서열제는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사회구조를 재조직하고 국민복지 제도의 개혁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사회를 비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대표적인 적폐제도일 뿐이다. 고액 연금생활자를 없애고 대신 기본소득에 의한 소득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연공서열제에 의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혹은 누릴 것을 기대하는 관료형 직장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본전생각이 날 것이다. 군대나 똑같다. 그럴 경우 과도하게 예산이 낭비되고 일자리 창출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 원칙은 합리적 사회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칙이고, 최상위 소득계층과 최하위 소득계층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것은 민주사회의 과제다. 하지만 임금차별에 의해 안정을 이뤄왔던 기득권층이 누려야할 이익을 포기하겠는가? 당장 당신이 폐지될 학과의 교수라고 생각해보라. 원자력과의 교수와 학생들이 원전 폐지를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득권이란 이미 누린 이익뿐 아니라 지금 또 앞으로 누릴 이익이 모두 포함된다.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서라도 연공서열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연공서열제도는 국가중심의 위계사회의 차별에 의한 지배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군 제도도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의무병 제도는 사실 청년 노동착취 제도에 다름 아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것을 생각했더라면 사병들에 대한 대우를 이토록 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무작정 범죄인 취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무라며 강제하니 사병 월급이 담배값도 안 되었던 것이다. 장교와 사병의 대우가 천양지차인 사회가 합리적이고 민주적일 수 있겠는가? 개값도 안 된다는 자조어린 말을 내뱉으며 군생활을 했겠는가? 군대 내 계급은 있어도 대우에는 계급이 없어야 한다. 그게 민주사회의 군대다. 그래야 국방의 의무가 신성한 것이 된다. 내면화된 계급의식이 이렇게 무섭다.
일반 사회에 계급이 없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든 계급장 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투명해지고 합리적이 된다.
직장을 옮기는 것도 죄인가
학교를 옮기기 위해 정규직으로 있던 학교를 그만두고 기간제 교사 면접을 보러 다니며 나는 바보취급을 받았다. 옮길 직장을 잡고 학교를 그만둬야지 학교를 그만두고 옮길 직장을 구한다는 것이다. 학교도 좋은 선생을 구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닌가? 그래야 담임이든 보직이든 미리 조정을 할 수 있다. 아무리 마음이 떠난 직장이라도 그 정도의 배려는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역시 우리나라에서 직장을 옮기는 것은 상식적으로 바보짓이다. 연공서열제에 의해 호봉과 연금 등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못 누리기 때문이다. 기간제로 전락하자 덕분에 호봉수 혜택을 제대로 못 받아 임금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직장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뒤 대안학교에서 다시 정규직을 그만둘 때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없었다. 자발적 퇴사였기 때문이다. 정말 황당한 논리다. 적성에 맞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 두고 새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 사이 경제적 어려움을 실업수당으로 보조해주는 것이 당연히 국가의 의무고 국민의 권리 아닌가? 내가 무슨 배신자란 말인가? 아무튼 귀촌을 하며 나는 다시 한 번 직장을 그만둔 처벌 아닌 처벌을 받게 되었다. 도대체 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차별받을 요건이 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한국사회가 구조적으로 차별과 배제에 의해 작동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왜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을 수 없고,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사하고 직장을 이동하는 것에 불이익을 줌으로써 차별을 하는가? 이 모든 것이 비민주사회와 위계적 권위주의 사회의 사례인 것이다.
연공서열제는 왜 자유를 억압하는가
도대체 일생을 투자할 만큼 값진 직장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사회와 사람에 기여하는 직장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 나도 그런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시대 자체가 자본주의 시대고 사회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자본주의란 그야말로 사익추구를 제일의 목표로 두고 경쟁하는 사회다. 회사도 개인도 온통 사익만을 추구하는데 어디 공익과 의미 따위가 있는가? 고상한 이상을 비웃는 비루한 현실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민주적인 사회를 추구한다면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들을 적극 지지해줘야 한다. 직장보다 인간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당신이 평생직장을 만났다고 치자. 그런데 그것이 사람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조직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국정원과 삼성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국정원이 한 온갖 비행이 몇 년 사이 계속 언론에 떠들썩하지 않은가? 무노조 원칙을 위해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불법 세습을 자행한 삼성은 어떤가? 국정원이 대한민국의 안전을 수호하고 삼성이 대한민국의 대표기업이라며 합리화할 텐가? 하지만 이들 거대한 조직에 몸담고 충성을 다하고 있는 요원 혹은 사원들은 무엇일까? 국가라는 이념체, 회사라는 이익체가 일생과 바꿀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일까? 이들이 제공하는 연공서열제의 안정과 내 양심과 자유를 맞바꿀 가치가 있을까? 대가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데. 영혼을 팔 수 있는가?
그렇다. 연공서열제는 위계적 조직의 지배를 용인케 하는 배타적 차별제도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평생 한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우선 사람 자체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존재다. 관심에 따라 다른 일로 옮겨가는 것이 쉬워야 자기도 찾고 자아도 실혈할 수 있다. 그래야 개인이 건강하고 그래야 사회도 건강해진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상식에 따라 합리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다.
천만다행으로 적성과 관심에 딱 맞는 직장을 잡았더라도 그것이 평생 유지되는 것은 정말 특수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연공서열이라는 임금과 노후보장의 유혹이 그래서 무섭다. 그것은 직장이 인생의 지옥이 되는 경우에도 마다하기 어려운 악마의 유혹이다. 가두리양식장의 그물이며, 자유로운 사람을 낚는 미끼다. 누구도 폭풍 속에 육지를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공서열제의 위계사회에 적응해 곧 자신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행동의 자유가 모두 포함된다. 양심과 상식은 물론 정의도 포기하곤 한다. 삶의 모든 것을 거기 헌납하고 고액의 연금생활자 늙은이가 되고 싶어 한다. 참을 수 있다면 어떤 모욕도 스트레스도 참으려 한다. 철밥통 그것을 위해! 상명하복 복지부동 구태의연을 내면화하고 보수주의자의 길을 기꺼이 걷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포기하는 길 아닌가? 연공서열의 기득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어떻게 기득권 보수주의자가 안 될 수 있겠는가? 예외가 있을지언정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렵다.
내부 고발자는 내부자들에게 연공서열의 위계를 위협하는 암적 요소로 타자화 되기 십상이다. 왕따와 차별의 두려움 때문에 조직의 음모적 결집은 더욱 강해진다. 각종 갑질과 성희롱이 빈번히 발생하는 것도 연공서열의 유혹과 편익 때문이다. 감히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권위주의적 위계사회를 허물고 사회를 민주화하기 위해서 연공서열의 차별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없다
어제 친구와 전화를 하며 국공립학교 교사들에 비하면 오히려 사립학교 교사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임용고시로 교사가 된 국공립 교사들이 사립학교 교사들을 우습게 본다는 것이다. 전도된 실력주의는 억울하면 너희도 임용고시를 봐라 라는 폭언을 내뱉기도 한다. 우스개로 사립학교 교사들은 정교사지만 사고로 죽어도 순직인정이 안 된다고 한다. 순직이야 준다고 해도 마다하고 싶지만, 역시 차별은 옳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차별이 존재할 수 있는가? 국가의 지배와 관리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인근 국공립 교장과 교사들을 만났다. 인상이 좋지 않다. 번드르르한 전문가와 관료의 모습이 강했다. 승진에 혈안이 되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모습이나 남 어려운 처지에 대한 공감 없이 성과와 실적 위주의 교육정책에 매몰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농촌의 토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교사들을 보면서 제국주의시대의 서양 선교사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의 예의와 자신감이 싫다. 소위 교육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이렇게 양산되어 왔구나 싶어 무서운 생각이 든다. 교육 관료주의의 병폐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던 차에 사립학교의 전교조 친구한테 정교사 내부의 또 다른 차별 이야기를 들으니 위계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은밀한 차별이 다시 어이없게 느껴졌다. 연공서열에 따른 위계사회라는 점에서 국공립학교는 또 다른 관료 사회인 것이다. 관료들의 교육은 이미 조선 500년을 통해 격하게 경험하였다. 관료제의 비효율성도 뼈저리게 경험했다. 하지만 관료는 아직 우리사회의 계급이고 종교다. 최고 권력을 지닌 국가의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다. 밥그릇 싸움의 이전투구에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내 인생의 에너지가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소위 국민을 위해서라도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국가 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관심은 언제나 제도권 밖으로 향해 있다. 권력의 시스템관리로부터 벗어나 사람끼리 자생하고 상부상조하는 작은 사회의 대안이 국가 관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부에서 이렇게 외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임금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누구에게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