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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여러분들의 기도덕분에 은총과 행복의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지 벌써 보름이 지나갔습니다.
순례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좀 많이 걸렸습니다. 다시 한 번 회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6월 28일은 설레임의 마음으로 기다리던 서 유럽 성모발현 성지순례의 길을 떠나는 날이다.
각 처에서 모인 순례단의 인천공항에서의 첫 만남은 서먹서먹했지만 기대에 찬 눈망울은 빛났다.
이번 순례는 오후 2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네델란드의 암스텔담, 벨기에의 반뇌, 프랑스의 파리와 루르드, 알프스산의 고지에 있는 샤머니와 영봉인 브레망 등정, 이탈리아의 밀라노, 피렌체, 아씨시 그리고 로마의 바티칸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10박 11일간의 일정으로 되어 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암스텔담 공항에 내린 시간은17시 40분(현지시간 ; 이하 같음)으로 우리나라와 시차는 7시간이 늦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벨기에의 반뇌성지 입구에 있는 조그마한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서 유럽은 저녁시간이 길어 그 때에 어스름이 시작되었다. 백야라는 말이 실감났다. 그러나 해뜨는 시간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여 밤이 무척 짧은 셈이다.
둘째 날
피곤함도 잊은 채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성지를 산책하며 "기적의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성지 안내를 담당한 수녀님은 수녀티가 전혀 없는 74세의 초라한 시골 할머니였다. 키는 작고 허리는 약간 굽고 수녀복도 입지 않고 베일도 쓰지 않고 손은 일을 많이하여 시골 농사꾼 손 같았다. 그러나 성지 안내를 하시는 목소리 만은 힘이 넘쳤다.
반뇌(Banneux Notre - Dame)는 아르덴느 해발 325m 고원에 있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다.
1933년 성모발현을 목격한 마리에뜨 베코(Mariette Beco)는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12살의 소녀였다.
성모발현은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사이에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로 마리에뜨에게 8번 나타나시어 세속적이고 물질중심적인
생각으로 하느님과 멀어져 가는 현실적 위기를 일깨워 주셨다. 성모 마리아는 루르드 발현 때처럼 흰옷에 푸른 허리띠를 두르고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숙인 채 합장하고 묵주를 늘어뜨린 모습으로 발현하셨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날짜와 남기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1933년 1월 15일 일요일 ; 마리아, 손짓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다.
-1933년 1월 18일 수요일 ; 이 물에 손을 담그렴,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1933년 1윌 19일 목요일 ;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다.
이 샘은 모든 나라를, 그리고 병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1933년 1월 20일 금요일 ; 나는 작은 성당을 원한다.
-1933년 2월 11일 토요일 ; 나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왔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1933년 2월 15일 수요일 ; 나를 믿어라, 나도 너희를 믿겠다. 기도 많이 하여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1933년 2월 20일 월요일 ; 나의 사랑하는 아이야, 기도 많이 하여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1933년 3월 2일 목요일 ; 나는 구세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기도 많이 하여라
잘 있어라 하시며 마리에뜨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성호경으로 축복하신 다음 떠나 가셨다.
이와 같이 성모님은 당신을 철저히 신뢰할 것을 바라시며, 루르드에서처럼 샘물을 지적해 주시고, 기도 많이 하라고 당부하시면서, 궁핍해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병들어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정신적으로 가난하고, 하느님을 멀리하여 영성적으로 가난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남기시고 떠다 가셨다.
치유와 회개의 기적을 일으키는 이 성지는 1949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조용한 가운데 순례객들이 찾아와 기도를 바치는 성모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파티마나 루르드에서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은 커서 모두 수도자가 되었는데 마리에뜨는 결혼하여 어려운 가정의 주부로서 가정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마리에뜨는 지금도 생존해 계신데 연로하셔서 바깥 출입을 못하시어 만나 뵐 수
없다는 것이 아쉬었다.
우리 일행은 성모님의 말씀에 의해 지어 놓은 작고 소박한 성당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감동의 미사를 봉헌하였다
동분서주 바쁘신 수녀님을 뒤로한 채 13시 20분경 반뇌성지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시간을 18시 50분경이었다.
셋째 날
파리 시내에 있는 외방전교회를 방문하였다.
1658년 팔뤼신부가 설립한 외방전교회(1664년 교황청 인가)는 아시아의 반 그리스도 국가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교회 설립과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창설하여 아시아 지역으로 4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1831년 9월 9일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4세의 조선교구 설정과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우리 신앙선조들의 열망과 브뤼기에르 소 주교의 목자로서의 열정과 사랑으로 신앙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 하였다.
외방전교회 본부에는 선교사들과 동양의 성직자, 회장, 평신도등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이 잘 보관되어 있다. 진열장에는 치명자들이 사용했던 물품이나 박해도구로 사용했던 것들이 진열되어 있다 우리 한국 순교자들의 유품은 따로 보관되어 있는데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들에게 입국하는 방법을 알리는 라틴어 친필도 있고, 1839년 기해박해 상황을 라틴어로 쓰고 박해장면을 그린 그림의 복사본도 볼 수 있으며, 조선교구 4대 교구장인 베르뇌(Berneux) 장 시메온 주교가 사용했던 기도서, 십자가, 중국 옷, 전례용품들, 그 밖에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유품과 1981년 10월 18일 거행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여의도 신앙대회 사진도 있다. 특히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떠나기 전에 가족들과의 석별의 정을 담은 그림 앞에서는 가슴 뭉클함을 진하게 느끼기도 하였다.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사제품을 받으시고 외방전교회 본부 건물 뒤 정원에 있는 성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옆문을 통해 세상에 파견될 때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는 안내자의 말을 들었을 때는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당시 신학생들은 선배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이 성모상 앞에서 떼 데움(Te Deum ;감사가)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그 성모상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한국순교성인현양비"가 서 있다
우리 일행은 한국 초기 교회 때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2대 주교를 비롯해서 한국에 최초로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시고 김대건 안드레아 등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중국으로 보내신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님 등 한국에서 순교하신 10명의 외방전교회 주교와 신부님들의 영정이 모셔저 있는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분들의 영혼이 우리를 반기는듯 하였으며 친근감과 숙연한 마음이 교차되었다.
외방전교회의 가슴 뭉클한 사연들을 마음에 담고 기적의 메달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적의 메달 성당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Saint Vincent de Paul)와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악 수녀에 의해 설립 된 "자비 수녀회"소속 성당으로 파리 시내 한 복판에 있으며 많은 순례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당 제대 위편 벽에는 성모님의 첫 번째 발현장면이 그려저 있고, 정면에는 메달과 같은 모양의 성모상이 있다. 우측에는 두 번째 발현모습을 조각한 성모상이 있으며 그 밑에는 돌아가신지 57년이 지난 1933년 시복을 위한 시신 발굴 당시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라브레 수녀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성모님의 첫 번째 발현은 1830년 7월 18~19일 밤이었다. 까트린느 라브레(Catherine Laboure) 수녀가 수녀원 소성당에 있는데 발현하시어 "좋으신 하느님이 당신에게 하나의 임무를 맡기려 하십니다. 그 임무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 임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을 하면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반박을 받을 것이지만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시대가 좋지 않습니다. 불 행이 프랑스를 덮칠 것이고, 왕자가 뒤집힐 것이며, 전 세계가 온갖 종류의 불행에 의해 뒤집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대로 걸어 나오세요, 거기서 믿음과 열정을 갖고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널리 내려질 것입니다. 은총은 강한 자에게도 약한 자에게도 모두 내려질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두 번째 발현은 1830년 11월 27일 대림 첫주일 전날인 토요일 저녁이었다. 라브레 수녀가 소성당 강론대 옆에 있는데, 성모님이 흰색 옷을 입고 공 모양의 둥근 것을 밟고 서 계셨다. 그리고 아주 귀해 보이는 둥근 물건을 양손으로 떠받치고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라브레 수녀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둥근 물체는 전세계 특히 프랑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는 나에게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의 상징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성모님 주위에는 타윈형의 판같은 것이 형성되었는데 그 판에는 금으로 된 글씨로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새겨져 있었다. 성모님은 "이 모형대로 메달을 새기도록 하세요, 이 메달을 지니는 사람은 커다란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그 은총은 믿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내릴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애용하는 기적의 메달은 이와 같이 성모님께서 두 번째 발현하시어 라브레 수녀에게 보여주신 것을 그대로 메달형태로 만든 것이다. 타원형으로 된 이 기적의 메달 앞면에는 죄를 상징하는 뱀의 머리를 밟고 있는 상태로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신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다. 그 주위에는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십자가가 "M"이라는 글자를 들어올리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M'은 성모 마리아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수난의 신비에 깊이 동참하고 계신 성모님을 상징하고, 그 밑에 두 개의 심장, 즉 왼쪽의 가시관에 둘러싸인 것은 예수 성심을, 오른쪽의 칼에 찔린 모습을 한 것은 성모성심을 의미한다, 또 그 주위의 12개의 별은 예수님의 12제자 즉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사도가 될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신덕, 애덕, 망덕의 메시지를 담은 이 메달은 가톨릭 교리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모님 발현 2년 후 첫 메달이 만들어졌고 처음에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메달"이라고 불리다가 메달과 관련된 많은 기적들이 알려지면서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메달 보급과 함께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신심도 널리 확산 되었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에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청은 이에 앞서 1836년 성모 발현과 기적의 메달에 관한 내용을 모두 인정하였다.
오후에는 파리를 상징하는 노트르담(NotreDame) 대성당을 순례하였다. 이 성당은 1163년 모리스(Maurice de Sully)주교의 주도하에 건축이 시작되어 1245년경에 완성되었는데 중세 고딕식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노트르담이란 "우리의 어머니"란 뜻으로 파리를 성모님께 봉헌한 기념 성당이다. 파리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기도 하며 파리시의 가장 중심부에 있다. 성당 정면은 세부분으로 나뉘어지며 세 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중앙문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성상과 사도들의 동상도 있고 천국과 지옥도 있으며 축복 받는 모습과 저주 받는 모습도 있다. 오른쪽 문은 성녀 안나의 문으로 성 마르셀 동상이 있으며 이 성당을 지은 모리스 주교와 루이 12세 왕의 동상도 있다. 왼쪽문은 동정녀의 문으로 세개의 문 중 가장 정교하다. 위편의 초승달 모양의 판에는 죽음과 영광, 성모승천 등이 조각되어 있다. 9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이 성당 둥근모양의 왼쪽 창문에는 구약을, 오른쪽 창문에는 신약을 상징하는 13세기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비롯하여 18세기 이전의 오르간 등 17~18세기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 루이 9세가 갖다 놓았다는 예수님이 쓰셨던 가시관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깊은 큰절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가시관을 쓰시고 피투성이가 되시어 십자가를 끌고 골고타 언덕을 힘겹게 오르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여 끓어 오르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주님, 주님이 쓰셨던 그 가시관을 저에게 씌워 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쓰는 것이 마음 편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지고 가신 그 십자가를 지금도 내려놓지 못하고 계시니 어찌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안일한 신앙만을 추구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 멘
다음에는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 위에 있는 예수성심성당을 순례하였다. 몽마르트르는 옛부터 성지로 전해져 왔는데 파리 최초의 주교인 성 디오이시오(St. Denis)가 이 언덕 밑에서 순교한 후 이곳은 "순교자들의 산"이라는 뜻으로 몽데 마르티르(Mont des Martyrs)로 불리다가 현재에는 몽마르트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몽마르트르의 예수성심성당은 1807년 독불전쟁 당시 프랑스 국민을 예수 성심께서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며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으로 로마식과 비잔틴식을 절충해서 건립하였다. 이 성당에는 건립 당시 소화 데레사 성녀가 봉헌한 물품도 전시되어 있으며 1835년 이후 밤 낮 없이 성체가 현시되어 있어 언제나 성체조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성전은 길이가 100m나 되며 4개의 둥근 천정과 높이가 65m나 되는 한 개의 큰 원형 돔으로 덮혀 있다. 높이가 91m에 달하는 종탑에는 서 유럽 최대의 종이 걸려 있으며, 각종 조각, 그림, 모자이크 등이 참으로 정교하며 인상적이다. 이 성당은 천정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여기서 파리의 장대한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예수회의 창립자인 성 이냐시오(St. Ignatius)가 1534년 8월 15일 동양의 사도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과 함께 서원한 뜻 깊은 곳이며 예수회가 창립된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저녁식사 후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개선문을 관광하고 센(Seine)강에서 계획에 없는 유람선을 타며 하루의 피로를 달랠 수 있었다.
넷째 날
아침 일찍 서둘러 버스로 기차역으로 가서 한국에서도 타보지 못한 TGV를 타고 루르드(Lourdes)로 향했다. TGV는 출발부터 연발을 하더니 루르드 전 역에서는 고장이 나서 다음 열차로 갈아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루르드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넘어서 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루르드 자유순례를 하였다. 말로만 듣던 성지 이곳 저곳을 드러 보고 기적수도 마셔보고 오래간 만에 여유 있는 오후를 즐길 수 있었다.
루르드는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 산기슭에 있는 소도시이다. 이 성지는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 사이에 18 번에 걸쳐 성모 마리아가 벨라뎃다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에게 발현한 곳으로 많은 병자들이 이곳을 방문한 후 치유되어 유명해 졌다. 휴일이면 순례객이 넘쳐난단다.
이 곳에 성모님께서 발현한 시기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신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고 속속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성모 마리아는 흰옷에 푸른색 허리띠를 두르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발현하셨다.벨라뎃다는 성모발현을 목격한 14살까지 문맹이었고 종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을뿐만 아니라 천식까지 앓고 있었다. 1858년 2월 11일 목요일 정오 경 땔나무를 줍기 위해 가브강변의 동굴 근처에 갔을 때 동굴의 움푹 들어간 곳에서 후광이 빛나고 하얀 옷에 하얀 베일과 파란색 허리띠를 두르고 양발 위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아주 젊은 여인을 보게 된다. 벨라뎃다는 2월 14일과 18일 또 다시 동굴로 갔다. 그때 동굴의 젊은 여인은 "앞으로 15일 동안 매일 이곳에 와 주겠습니까?"하고 묻자 벨라뎃다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2월 19일 금요일부터 3월 4일 목요일까지 매일 아침 동굴에 갔으며 2월 22일 월요일과 26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동굴의 젊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2월 24일 수요일은 "회개하시오, 죄인을 위해 기도하시오, 죄인의 회개를 위한 상징으로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시오"라는 멧시지가 들려왔다.
다음 날인 2월 25일 목요일에는 손가락으로 샘물의 원천을 가리키며 그 물을 마시고 씻도록 하였다. 지금은 깨끗하게 정비가 되어 있지만 그 당시 동굴은 몹시 지저분 하였으나 기적수가 샘솟았다.
이 샘물꼭지 성벽 제일 높은 곳에 한글로 "마시고 씻어라"는 구절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반가움과 자부심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3월 2일 화요일에는 "사제들에게 전해 이 곳에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오게 하고 이 곳에 성당을 짓게하시오"라는 멧시지를 남겼다.
3월 25일 목요일에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다. 이로서 벨라뎃다는 전 세계에 루르드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의 전령자가 되었다. 그 뒤에도 두번 더 성모님의 발현이 있었다. 벨라뎃다 성녀는 "나는 사랑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지 않겠습니다." 는 신념으로 살다가 34세에 선종하였다.
이와 같이 그녀의 증언, 기도와 회개운동, 많은 치유기적등으로 1862년 1월 18일 성모님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었다.
이 곳에는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기념 성당이 세워져 있다. 동굴 위에 건립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과 로사리오 대성전, 지하성당 그리고 20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성 비오 10세 대성전과 1988년에 현대식으로 지은 성 벨라뎃다 성당 등이 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은 13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종루의 높이가 70m나 되며 금색으로 칠해진 중심부에는 성모님이 벨라뎃다에게 원죄 없는 잉태를 알려 준 말씀이 새겨져 있다 입구 중앙에는 왕관을 쓴 루르드의 성모상이 있으며 성당 후면에는 여러개의 소성당들이 있다. 비오 10세 대성전은 축구장 만큼이나 큰 성당인데도 내부에 아무런 지주나 기둥이 없이 지어졌다. 이 성지는 전 세계에서 해마다 수백만 명이 순례하는 대표적인 성모 발현 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우리 일행은 밤 9시부터 성모님을 꽃가마에 태우고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촛불 봉헌 로사리오 기도에 참석 했는데 촛불을 든 환자들의 행렬이 꼬리를 이었다. 이 환자들을 돕는 봉사자들은 자비로 봉사에 참여한단다. 이곳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휠체어, 지팡이, 목발등 치유받은 환자들이 놓고 간 물건들은 "종교가 기복적으로 흐른다."는 이유로 교황청 지시에 따라 말끔히 치워졌다.
우리 일행은 여섯명이 합창단에 합류하여 성가를 합창했고 로사리오 기도 선창도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다섯 번째 날
루르드에 있는 벨라뎃다 성녀의 생가와 마을을 둘러보고 성 비오 10세 대성전에서 거행되는 성체강복에 참여했는데 분위기가 차분하면서도 엄숙하고 성가대의 찬송도 좋고 거룩한 은총의 시간이었다
오후 2시 부터는 기적수에 온 몸을 담그는 전신 침수가 있었다. 이 침수 예식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었다.
주님, 제 영혼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주소서 아 멘
기적수 침수를 위해 기도하며 점심 한 끼를 봉헌했는데 시장한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루르드 순례를 마치고 저녁 9시30분에 야간열차를 타고 제네바로 향하였다. 생전 처음 타보는 야간열차의 낭만은 좋은 추억꺼리였다.
야간열차는 한 방에 침대가 좌우에 3층씩 6개가 있다. 그런데 안내자 말이 세개층 중에 중간층 침대를 접으면 앉아서 이야기하기가 편하니 잠이 않오면 그렇게 하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그래서 어떤 자매들이 안내자 말대로 하였다. 한참 깔깔대며 수다를 떨다가 자려고 침대를 다시 펴려니 펴지질 않았다. 한 참 난리를 치다가 승무원을 찾아 겨우 해결 하여 앉아서 날밤을 새야하는 곤경을 면할 수 있었다. 침대를 펴려면 공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여섯 번째 날
기차에서 새우잠을 자고 준비한 도시락을 까먹고 09시 20분경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차창 밖으로 알프스의 설경을 감상하며 샤머니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 경이었다. 샤머니는 알프스산 해발 905m에 있는 관광산업 도시로서 성당이 하나 있다. 10시에 미사가 예약되었는데 도착이 늦어 그 성당에서는 미사를 하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 호숫가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알프스산 중턱 호숫가 잔디밭에서 만년설을 배경으로 드리는 미사, 생각해 보라, 얼마나 멋있겠는가? 낭만이 흘러 넘치지 않는가? 그러한 행복한 시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겠는가? 아~멘 입니다.
현지식 스파겟티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케이블카를 타고 알프스의 영봉인 브레망에 올라 만년설로 덮혀 있는 알프스의 설경을 감상하였다.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자연의 신비 앞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은 시야가 가려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었다. 스키 매니아들이 스키를 어깨에 메고 스키화를 무겁게 신고 다니는 모습이 몹시 이국적이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이 만년설도 지구 온난화에 의하여 산 아래쪽 눈은 자꾸 녹아 눈덮힌 부분이 점점 산정상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지구를 보호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만년설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까웠다.
설경에 취해 흥분된 마음을 좀 추스리고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버스를 이용하여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이탈리아의 밀라노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경제 중심도시로서 패션, 오페라, 음식 등이 특히 유명하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이 이곳에 있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은 3159개의 거대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고 135개의 유리 첨탑이 치솟아 있다. 가장 높은 첨탑에는 밀라노를 수호하는 황금의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 밑에서 보니 하늘 높이 계신 성모님이 새까맣게 쳐다 보였다. 이 성당 외벽에는 3000개가 넘는 정교한 조각작품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조각품들이 많았다. 이 성당은 1386년에 착공되어 무려 450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어 19세기 초에 겨우 마무리 되었다. 지금도 부분적으로 보수공사를 진행하고 있어 공사가 끝일 날이 없단다.
이 성당은 하늘을 찌를듯한 수많은 첨탑과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외형에서 보듯 이 성당은 건축가, 조각가, 유리화가, 공예가 등 수많은 당대의 예술가들에 의하여 오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탄생되었다. 시간이 늦어 성당 내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성당 주변에는 스칼라좌가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상과 그의 제자들의 상이 조용한 곳에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일곱 번째 날
아침 9시에 경제중심도시인 밀라노를 출발하여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피렌체로 이동하였는데 버스로 3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피렌체는 로마 북서쪽 233km지점에 아르노강을 끼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중심지로 13~15세기의 예술품이 많이 있다.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 같았으며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먼저 도착한 곳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이었다. 이 성당은 아르노 강 북쪽, 피렌체의 중심부에 있는 피렌체의 상징물로서 두오모 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오면서 더욱 유명해진 곳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주도적 역활을 한 피렌체에 어울리는 대성당 건립을 대망하던 시 당국과 모직업자인 길드의 합의에 따라 1296년에 착공하여 100년이 넘는 오랜기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성당 외벽의 초록색, 흰색, 분홍색 등은 칠한 것이 아닌 천연 대리석인데 이 대리석으로 모자이크 된 장식이 우아함을 더하며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은 남쪽 문 위에 있는 수태고지 조각이다.
한편 이 성당의 핵심이며 피렌체의 상징인 돔은 1420년에 착공하여 1463년에 완공되었으며 외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하다. 높이가 100m가 넘는 이 돔은 8개의 대리석 아치와 그 사이를 메우는 8쌍의 구면 삼각형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풍부하고도 힘찬 외관은 그야말로 피렌체의 상징이라고 내세울만 하다. 이 돔은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460개의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보는 고풍스러운 피렌체의 모습은 장관이다.
또한 성당 내부는 예술의 도시의 대성당에 어울리게 부속 미술관이 있으며 많은 조각품과 회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베첼로와 카스타뇨 등의 프레스코 벽화 "최후의 심판", 기베르티 등의 스테인드 글라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등이 유명하고 성당 옆에 있는 지오토 종탑과 단테가 세례를 받았다는 세례당도 유명하다. .
산조바니 세례당은 11~12세기에 L.기베르티에 의해 건립된 8각형의 전형적인 토스카나 지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 된 종교건축물이다. 외벽이 백색과 녹색의 천연 대리석으로 단장되어 있고 큐풀러(천장) 정면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천체도, 신, 규약 성경의 에피소드,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생애, 세례자 요한의 생애 등이 비잔틴 풍으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세개의 출입문은 부조판이 끼워져 있는 청동문으로 되어 있다. 남쪽 문에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부조가 있고, 북쪽 문에는 신약성경 관련 부조가 있으며, 동쪽 문에는 구약성경 관련 부조가 있는데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천국의 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천국의 문은 르네상스 조각의 대표작이다.
이와 같이 성당 내,외벽이나 천장 등에 성경 관련 그림이나 조각, 부조 등을 만드는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당시 글 모르는 많은 신자들에게 공부시키는데 활용하기 위함도 한가지 이유였다고 한다.
꽃의 성모 마리아 대 성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단테 생가가 있는데 검소한 3층 벽돌 구조로 되어 있었다. 단테는 집 가까운 곳에 대성당이 있는데도 그곳으로 다니지 않고 집 앞에 있는 지역 성당으로 다녔다고 하니 단테 성품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았다.
미켈란젤로 광장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많은 조각품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피렌체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지오토의 종탑이 시내를 지배하는 듯 중심에 우뚝 서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피렌체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떠난 시간은 저녁 7시가 다 된 시간이었으며 평화의 도시 아씨시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지 2시간 후인 9시가 다 되어서 였다.
여덟 번째 날
아씨시는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도시이다. 이 곳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씨시는 옛날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젊은 프란치스코는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1202년 아씨시와 페르시아 긴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그 후 병들어 눕게 되면서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단테의 말대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회개의 삶을 시작하려고 할 때 마침 나환자를 만나 그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그의 삶은 바뀌기 시작한다. 또 어느 날 반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고상에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말을 듣고 즉시 성당수리에 착수하였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도 교회의 머리이자 어머니인 교회 건물이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는데 가난한 수도자 한 사람이 갑자기 달려와 어깨로 교회를 떠밭혀 세우는 꿈을 꾸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부호의 아들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가난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가난한 삶을 시작하면서 내적인 부를 많이 얻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1209년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 중에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가지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 9~10)는 복음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다.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해야 할 일이다."하며 몹시 기뻐하며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았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생활하여야 할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던 그는 성경에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마르 6, 8),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는 구절들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이렇게 프란치스코의 철저한 청빈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수도회를 만들어 인가를 받았다. 그들은 한 헛간에서 자리를 잡고 관상과 노동, 구걸과 설교를 병행하던 중 헛간 주인에게 쫏겨나 아씨시 외곽에 있는 현재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때부터 이곳은 수도회의 영원한 요람이 되었다.
1224년 9월 17일 새벽에 프란치스코는 알베나 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받았다.
현재의 프란치스코 대성전은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회가 집회장소로 사용하던 작은 성당에 큰 성당을 덮어씌어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본으로 단순하게 건축하였다.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 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고 28개의 벽화에는 성인의 생애를 담은 그림이 이채롭다. 그 중에 쓰러져가는 성당을 프란치스코가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성당 한 편에 세워져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 상은 흰 비둘기 한 쌍이 계속해서 지키고 있다. 그 비둘기들은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창 밖에는 자신의 욕망과 싸우기 위해 맨 몸으로 굴렀다는 정원이 있는데 그 정원에 피는 장미넝쿨에는 가시가 없다고 한다. 하찮은 비둘기와 장미도 성인을 알아 모시는듯 했다.
성당 부속 건물에는 성인이 돌아가신 방도 있다. 이 곳에서 우리 일행은 성인의 성덕을 기리며 미사를 봉헌하는 은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성인의 축복기도가 지금도 또렸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ㅇ 주께서 그대를 강복하시고 보호하소서
ㅇ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ㅇ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시어 평화를 주소서
ㅇ 형제여 주께서 그대를 축복하리이다.
성녀 글라라 성당은 프란치스코 대성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상적인 것은 독특한 모양의 영광의 십자고상,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께서 입으셨던 옷과 글라라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글라라 성녀의 얼굴은 700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 새까맣게 화석이 되어 있다. 성당 별실에 진열된 두 분의 남루한 옷은 수백 년 전에 입고 다니셨던 거룩한 옷이다. 사제와 수도자의 권위가 절대적인 이 시대에 사제와 수도자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호의 아들이, 귀족의 귀한 딸이 청빈의 삶으로 활짝 핀 그 아름다움이 오늘 날 두 성인을 높이 평가 받고 뭇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며 더욱 사랑 받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라라는 나이 18세 때 프란치스코의 강론을 듣고 수도생활을 결심하게 되었다.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최초의 여 제자가 되었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2회 즉 "글라라 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1240년 사라센 대군이 아씨시까지 침입하여 왔을 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여, 나는 당신이 사랑하는 동정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나이다. 청컨데 당신이 직접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보호하사 적군의 손에 넘기지 말아 주소서" 하며 뜨거운 기도를 바치고 성광을 모시고 적군 앞에 나서자 성광에서 기이한 빛이 발사되어 적군은 눈이 부셔 퇴각해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와 수도원 순례를 마치고 16시경에 아씨시를 출발하여 로마에 도착한 시간은 18시 30분경이었다.
오늘은 7월 5일 대건 안드레아 축일이며 내 영명 축일이다.
로마 바티칸 시국 입국도 축하하고, 내 축일도 축하하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술과 안주를 간단히 마련하여 신부님 방에 모여 축하파티 겸 평가회를 갖었다. 나는 이번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예수님 시대로 돌아가 예수님과 성모님, 사도들과 함께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은총과 감사와 행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영명축일 축하까지 받으니 몸과 마음이 하늘을 나르는 느낌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아홉 번째 날
이제 성지순례도 막바지에 다달았다. 날씨는 아침부터 몹시 뜨겁다. 그래도 그늘에 들어가면 금새 땀이 식어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은 바티칸 시국 내에 있는 여러 성지들 즉 바티칸 박물관, 성 베드로 성당등을 순례하게 된다.
바티칸 시국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로서 로마 북서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국가이다. 외교상으로는 교황이 바티칸 시국을 대표한다. 바티칸 시국은 가톨릭 교회가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도 교황이 주권을 행사하며 통치하는 국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29년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와 교황 비오 11세간에 라테란 조약이 성립되어 바티칸 시국이 탄생 되었다.평균 인구는 1000여명으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대부분이다.
바티칸 박물관(The Vatican Museum)은 성 베드로 광장 오른 편 성벽을 따라 5~6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데 역사가 500년이나 되며 역사는 물론 규모나 전시 내용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이 곳에는 고대 이집트의 미라와 상형문자를 비롯해서 그리스, 로마제국,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각종 예술품들이 총 망라되어 소장품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아직 분류 되지 않은 미술품과 공개 되지 않은 예술품이 꽤나 된다니 더욱 그렇다. 미술품과 고대 유물들, 카타콤바에서 발굴된 석관들, 초기 로마의 일상생활 용품들, 고대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벽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과 천정에도 가득하다. 그 많은 작품들을 그 믾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감상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냥 수박 겉핧기 식으로 구경하며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 박물관이야 말로 "와서 보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박물관의 마지막 부분에는 시스티나 성당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은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교황의 비공식적인 의식을 행하는 곳이며, 교황의 유고시 비밀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건물 자체는 평범하나 내부의 벽화나 천장화는 르네상스 회화의 보고임을 알 수 있다. 식스토 4세 교황은 피렌체와 움브리아의 대표적인 화가들을 불러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 편에는 모세의 생애를, 왼 편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그리도록 하였다. 이들 그림에는 르네상스의 도래가 가까운 젊은 작가들의 싱싱한 감각이 넘치고 있다. 원형 천정에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명을 받아 창세기의 내용을 프레스코로 나타냈다. 빛을 창조하시는 하느님, 하늘, 해와 달, 바다와 육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는 모습, 선악과를 따먹는 모습, 낙원에서 쫏겨나는 아담과 하와, 노아의 방주와 홍수 등의 그림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고 슬퍼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제대 뒤에 있는 최후의 심판 그림은 가톨릭 교리를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최대 걸작으로, 그 당시 커다란 충격과 반향을 일으켰으며 현재까지도 이것을 능가하는 작품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의 5대 바실리카 중 하나로 교황청에 인접해 있는 총 대주교좌 대성전이다. 최초의 베드로 성당은 90년 경 교황 아나글레토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한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운 작은 경당이었다. 그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믿은 바티칸 언덕에 바실리카식 성당을 건립하였다. 326~333년 경에 건축이 시작되어 30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는데 이 성당은 세계 최대의 성당 중의 하나이며 독창적인 구상과 중앙의 거대한 돔 양식은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성당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분수가 있는 아트리움(Atrium)이 있고 회랑으로 둘러싸인 이 아트리움을 지나면 성당으로 통하는 5개의 문이 있다. 맨 오른 쪽 끝에 있는 문이 성년에만 열리는 성년문(Porta Santa)이다. 이 성년문에는 성경의 여러 장면들이 새겨저 있다. 중앙의 청동문은 피라레테가 옛 베드로 성당 문으로 만든 것으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모습과 순교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두줄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3개의 통로로 나누어지고 중앙 통로와 양쪽 통오가 교차되는 곳에 교황제대가 있다. 수도회 창립자들을 그린 거대한 그림으로 장식된 중앙 통로를 지나 중앙의 대제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제대 위에는 미켈란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상징하여 세운 돔은 직경이 42m나 되며 내부는 성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제대 밑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과 많은 교황들의 무덤이 있다. 제대 앞 오른 쪽에는 청동으로 만든 성 베드로 동상이 있으며, 대성전 맨 끝에 있는 창문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는데 비둘기의 날개 길이가 1.5m나 된다. 그 창문 밑에는 베드로의 의자도 있다.
성전 내부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걸작품들로 가득차 있는데 그 중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성 론지노의 조각, 성체 경당의 제대 등이 특히 유명하다.
대성전 앞의 타원형 광장 중앙에는 로마제국의 칼리골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베드로 사도가 처형된 원형경기장에 세웠던 오벨리스크(Obelisk)가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옮겨저 이곳에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25.88m로 청동사자 네마리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맨 위에 십자가가 있고 그 아래에는 교황 알렉산델 7세의 가문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광장 둘레는 벽이 없는 두 겹의 기둥이 둘려져 있고 그 위에는 대리석으로 조각한 142명의 성인들 상이 세워져 있다. 이 광장은 전 세계 백성을 인자하게 두 팔로 안고 있는 인류의 어머니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다음은 라테란(Lateran) 성 요한 대성당을 순례하였다. 이 성당은 로마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주교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전이다.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식 대성당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멜키아데스 교황에게 라테란 궁전으 기증할 때 함께 지은 것으로 로마에 있는 성당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으며 다른 어떤 성당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도 예외는 아니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교회로 대접 받고 있다. 898년 지진으로 붕괴되었다가 세르지오 3세 교황에 의해 재건되어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 되었으며 모든 총 주교좌 성당을 대표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되었다. 1309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까지 모든 교황이 이곳에서 대관식과 착좌식을 하였으며 제 1~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성당 정면에는 "구세주 그리스도(Christo Salvatore)"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정면 꼭대기에는 6m나 되는 석상들이 있는데 가운데 그리스도를 모시고 옆에는 성 암브르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등 교회 박사들이 있다. 현관 오른쪽에는 성문이 있으며 왼족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석상도 있다. 중앙의 청동문은 포로 로마노의 원로원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중앙 통로 양쪽에는 사도들의 석상이 있는데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을 볼 수 있다. 그 위에는 성경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있으며 또 그 위에는 예언자들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천장에는 많은 교황들의 문장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 후 교황 레오 13세는 지상과 천국의 일치를 상징하는 모자이크로 후방을 개수하였다. 중앙 제단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석상이 있는데 두 사도의 두개골을 모시기 위해 만들었다. 중앙 제대 앞에 교황 마르띠노 5세의 무덤이 있는 것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 묶이어 매맞으신 기둥을 가져온 공로 때문이라고 한다.그 외에 카타콤바에서 옮겨 온 많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고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삼나무 식탁도 보존되어 있어 성 목요일 교황께서 집전하는 만찬미사는 현재에도 이곳에서 봉헌된다.
성 베드로 광장 입구 오른쪽에는 성 계단 성당(Scala Santa)이 있다. 이 계단은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총독부 건물에서 가져온 것으로 수난의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 빌라도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이 계단을 성 계단 이라고 부르며 이 계단이 있기 때문에 성 계단 성당이라고 부른다. 이 계단을 에루살렘에서 옮겨온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로서 옛 라테란 궁에 설치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은 1589년 교황 식스투스 5세 때이다. 계단 영쪽에는 군중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빌라도와예수님께 입맞추는 유다 석상이 있다. 나무로 싼 28개의 대리석 계단 위로는 많은 순례자들이 기도하며 무릎으로 기어 오르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계단을 무릎으로 힘겹게 기어오르며 "너희는 인내로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는 말씀을 묵상하였다. 계단을 오르면 성 로렌쪼의 소성당이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데 일반인의 입장은 금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거룩한 곳은 없다." 라는 문구가 말해 주듯이 이곳의 제단에는 인간의 손에 의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모셔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 천사의 손에 의해 기적적으로 이룩되었다는 작품이다.
주님, 저희들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던 날 밟고 오르셨던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기어 오르며 주님 수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닥쳐 올 모든 일을 아시면서 이 계단을 오르실 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저는 지금 몇
계단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땀이 비오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리셨습니까? 주님 연약한 저희를 굳센
믿음으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다음은 로마의 4대 성당 중에 하나인 성모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를 방문하였다. 352년에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이 성전은 서 유럽에서 처음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성전이다. 성전이 이곳에 세워지게 된 사연은 리베리오 교황 때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서 로마의 귀족인 요한 부부의 꿈에 나타나시어 "에스퀼리노 언덕 위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워라, 그곳은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 날 이들 부부는 "찌는듯한 삼복 더위에 정말 눈이 내렸을까?" 하는의심을 하면서도 꿈에 본 그곳으로 가 보니 정말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이 사실을 교황께 알리니 교황도 현지를 방문하여 이를 확인하고 성모님의 순결을 상징함이라며 감탄하여 이곳에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요한 부부도 사재를 털어 성전 건립에 봉헌하였다. 그후 교황 식스토 3세는 431년에 열린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의를 발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의 구조와 모습으로 재건축 하였다. 이 성당은 눈이 온 곳에 지어졌다하여 성모 설지전 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전은 전형적인 바실리카식으로 정면 출입문은 4개의 기둥과 5개의 문으로 되어 있으며 긴장, 박력, 웅장, 균형의 건축미가 인상적이다.
성전 내부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여러가지 조각품으로 장식된 바닥은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도 아름답다. 나무로 된 천정은 르네상스 때 작품으로 금으로 도금되어 있다. 중앙 회중석 위의 모자이크들은 5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구약성경의 내용들로 꾸며져 있다. 제대 뒷부분 왼쪽에는 아브라함이 멜키세덱에게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장면부터 야곱과 천사가 씨름하는 장면까지 , 오른 쪽에는 모세부터 다윗까지의 주요 사건들이 묘사되어 있다. 제대 아래에는 베들레헴의 예수님 구유 잔해가 보관되어 있어 성탄 때에 따로 구유를 꾸미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교리를 선포한 교황 비오 9세가 이를 경배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도 있다. 제대 위에는 성모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어린시절이 모자이크되어 있고 뒷면에는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모자이크되어 있다. 바로 밑에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수님 잉태 예고, 예수님 탄생, 삼왕의 경배, 아기 예수의 성전 봉헌과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 모자이크되어 있다. 성전 광장 중앙에는 하나의 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원주형의 성모 마리아 기념주가 있는데 그 위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 상이 있다. 이 성모 설지전 성당은 확실히 아름다운 성전 중의 하나이며 성경 내용을 압축해서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 성전이다. 건축 양식은 물론이고 모자이크도 르네상스 때의 우아함과 바로크 양식의 장엄함과 화려함 등 그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성전은 예술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풍습과 역사까지도 전해주고 있는 산 증거이다.
이번에는 좀 음침한 카타쿰바(Catacumba)를 순례하였다.
이곳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교 박해 때 사용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지하 묘지이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노예라 할지라도 죽으면 그가 묻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장지는 허락되는 분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비록 중형을 받은 죄인이라 하더라도 연고자가 시신을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지 조성에 관한 로마 법은 주거지역 안에는 장지 사용이 금지되어 있어 성 밖에 묘지가 조성되었는데 접근이 쉬운 간선도로 가까운 곳을 선정하였다. 이교인들은 사람이 죽어 묻히는 장소를 "죽은자들의 도시"라고 불렀단다. 그러나 점차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기다리고 있는 곳, 잠자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단다. 무덤은 희망이 없는 어둠의 공간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의 장소이자 안식처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역죄로 처형된 순교자들의 시신이 법적으로 보호를 온전하게 받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고 순교자들의 무덤훼손을 막기 위해
지하묘지를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만든 지하 굴들은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벽면을 측면으로 굴착하여 시신을 안치하는 구조가 대부분이고 통로가 연결되는 복도 내부에 직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방을 만들어 무덤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카타쿰바의 벽화는 구원에 대한 깊은 열망과 희망 그리고 복음적 내용이 대부분이라 하지만 남아있는 것이 없어 확인할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죽음을 그 당시 사람들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의 길, 희망찬 순례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주님, 불쌍한 제 영혼을 구원하소서
마지막 날
순례 마지막 날인 오늘은 아쉬운 마음으로 성 바오로 대성당을 순례하였다.
성 바오로 대성전은 콘스탄틴 황제의 뜻에 따라 성 바오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성 바오로 사도를 아쿠아스 살비아스(ad Aquas Salvias)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사도께서 순교하실 때 몸에서 분리된 그의 머리가 세 번이나 땅에서 뛰었고 또 그곳에서 샘이 솟았다고 한다. 지금 그곳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있으며 근처에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도원도 있다. 사도께서 순교하신 후 그의 유해는 오스띠엔세 길 옆에 모시게 되었으며 콘스탄틴 대제 때인 4세기 초에 그의 무덤 위에 세운 성당은 386년에 크게 증축되었다. 1823년 7월 15~16일에는 큰 불이 나서 거의 다 타버렸다 그 후에도 다섯 번이나 원인 모를 큰 불이 더 나 이 성당에는 촛불 봉헌대가 없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너무나도 훌륭한 실내 장식과 장중한 모습에 압도되며 아름다운 벽과 정교한 천정 모습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눈꽃모양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우리에게 경건한 신앙심을 자아내게 해주는듯 하였다 다. 중앙부 끝에는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의 조각이 있고 13세기의 걸작으로 치는 거대한 촛대도 명품이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칼과 성경을 든 성 바오로 사도가 서 있는데 칼을 든 사도의 모습은 모든 이단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사도 바오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도의 참수형을 뜻하기도 한다. 디모테오 2서 4, 6을 보면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오로 성인은 순교할 것을 알고 준비하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이 성당의 작은 경당에서 주님의 배려와 은총 속에 성지순례를 은혜롭게 마칠 수 있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미사를 봉헌하였고 그에 앞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며 고해성사의 시간도 갖었다.
나는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천상의 삶을 산 느낌이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과 함께한 꿈 같은 열흘이었다.
나는 성지순례를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 9)하신 말씀처럼
주님 대전에 넓은 풀밭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렸다.
사랑 가득한 성모님 발현 성지와 그리스도의 향기 가득한 대성당들을 순례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곳 외에 여러 곳에서 수백 번 발현하셨다. 왜 이렇게 자주 발현하시는 것일까?
이렇게 자주 발현하시는 이유와 의미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인본주의와 과학만능 사상으로 하느님과 신앙, 교회와 구원을 불신하는 시대,
하느님을 등지고 사는 시대, 신앙을 잃은 시대...
이러한 시대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 없어서 그러시는 걸까?
이러한 시대가 우리 앞에 오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일까?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구세주의 모친이시며 교회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뜻을 전하러 오시는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발현하시어 많은 기적을 보여주시며 "너희는 세상의 죄악을 두려워하고 회개하여라, 닥쳐올 징벌을 피하도록 보속하고 끊임 없이 기도하여라," 하시며 우리에게 믿음의 삶,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끊임 없이 당부하고 계신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사도들, 성인 성녀들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계실까?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과 정결과 청빈의 삶을 살면서 느낀 참되고 완전한 큰 기쁨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편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겸손하지 못한 나, 인내심이 부족한 나, 남의 탓만 하는 나, 회개하지 못하는 나,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나,.. 나는 누구일까?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들이 누구 때문일까?
결국은 나 자신이 나의 본질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의 본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인 회개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나 자신을 알자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자
이것이 성지 순례의 결론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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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파리외방전교회....
그 앞에 서서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셨을 회장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분들의 거룩한 희생이 우리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음을...
훌륭한 성시순례 체험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글 화일로 첨부활일로도 올려주시면 더 좋을 것 같군요.
함께 성지 순례를 하고 있는 듯 자세하게 나열해 글 써주신 회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마지막 글에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청빈과 순명의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각하며 저도 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해 성인의 삶을 닮으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반잠을 설치며 열심히 읽어주시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 신원을 분명히 알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게 마음같지가 않군요 베로니카 간사님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총회장님의 성지순례기를 읽으며 묵상하다보니 제가 성지순례를 다녀온듯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성지순례기를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1 저에 작고 너무나 부족한 신앙심이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총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