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에서 그리 멀지않는 영양석보 출신의 소설가 이문열은
그의 장편소설 <선택>에서
남성중심의 권위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여성들의 권리회복, 남여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저속하고 천박한 여권(女權)운동가들을
조선 중엽의 한 여인을 이시대에 불려 내어 그 여인의 입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나를 수백 년 세월의 어둠과 무위 속에서 불려낸 것은
너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웅녀(熊女)의 슬픈 딸들이었다>
<너희 괴로운 부르짖음도 내게는 성난 외침만큼이나 걱정스럽다
내가 살아왔던 시대와는 견줄 수는 없지만 지금 너희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배부르고 따뜻하며 너희 주거는 안락하다.
문명의 이기(利器)들은 옛적 수십 명의 노비가 하던 일을
대신해 주고 발달한 사회제도는 미래까지 일부 보장해준다.
거기다가 대가족의 중압도 없고 남존여비(男尊女卑)에서
오는 차별도 거의 철폐되었다.
그런데도 너희 괴로운 부르짖음이 지금처럼
이 땅에 높게 울려퍼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소설 <선택> 일부-
요즘들어 부쩍 늘어난 여성의 자기성취 목소리 즉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에서 해방되고 자기의 일을 가져라며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시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치며
어줍잖은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여성들을
400년 전의 한여인의 입을 통해 준엄하게 꾸짖고있다.
자칫 반페미니즘 문학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이문열 스스로도 밝혔듯이
분명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되고 있는 페미니즘을 비판한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우는 저속한 페미니즘을 통박한다.
소설속에 등장하여 꾸짖는 400년 전의 여인이 바로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이다.
작가 이문열의 직계13대 할머니가 된다.
정부인 안동장씨는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1551년)과 견줄만 하고
그의 한시(漢詩) 9편은 조선중엽 천재적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과 쌍벽을 이룰 정도다.
그의 덕행과 예술가로서의 자질, 부모를 공경하는 효심,
지아비를 섬기는 현부인(賢夫人)의모습,자식을 훈육하는 훈도(訓道)등은
오늘날 위대한 어머니 상으로 추앙받을만 하다.
정부인 안동장씨의 본명은 장계향(張桂香)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국토가 만신창이가 되었던
선조 31년(1598년)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패해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인
동짓달 스무나흗날 지금의 안동 서후면 금계리(金鷄里) 춘파(春坡)마을에서
부친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와 어머니 안동권씨(權氏)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일찍이 결혼한 아버지 장흥효는 자식이 없던차에 35세되는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 장계향(張桂香)이다.
퇴계학풍의 맥을 잇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수제자로
이황 학풍을 이으신 아버지 경당 장흥효 믿에서 자란 장계향은
어려서 부터 총명하고 10세의 어린나이에 <소학><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에 경신음(敬身吟),성인음(聖人吟),소소음(蕭蕭吟)등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경신음(敬身吟)
身是父母身 이 몸은 어버이께서 주신 몸이니
敢不敬此身 어찌 이 몸 조심하지 않으랴
此身如可辱 이 몸을 함부로 욕되게 함은
乃是辱親身 바로 어버이 몸 욕되게 함이어라
성인음(聖人吟)
不生聖人時 성인이 살던 때 태어나지 못해
不見聖人面 성인의 모습 뵈옵지 못해도
聖人言可聞 성인의 말씀 들을 수 있고
聖人心可見 성인의 마음도 볼 수 있어요
소소음(蕭蕭吟)
窓外雨蕭蕭 창밖에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
蕭簫聲自然 보슬보슬 저 소리는 자연의 소리여라
我聞自然聲 내 지금 자연의 소리 듣고 있으니
我心亦自然 마음 또한 자연으로 돌아 가네
그녀는 또 서예에도 능통했는데 특히 초서는 그 기풍과 필체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쓸 수없을 정도라고 찬사를 받았다.
그녀의 나이 19세 되던해 아버지 장흥효의 제자였던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1590~1674)과 결혼해서 영양 석보 두들마을로 시집갔다.
이시명은 병자호란을 피해 영양두들마을에 들어가 마을을 개척한 인물로
장계향이 그에게 시집 갈 당시에는 전처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하나 딸 둘이 있는 27세의 홀아비였다.
남편과는 8살 차이로 재취로 들어 갔을때는 전부인에서 난 아들 상일은 다섯살이었다.
장계향은 아들 상일을 친자식처럼 업고다니며 열성을 다해 키웠다.
이후 그녀는 6남2녀를 더 낳아 아들 딸을 모두 휼륭하게 키웠다.
그의 아들 상일.휘일,현일,숭일,정일,융일,운일 7명 중에서도
둘째 휘일 셋째 상일 넷째숭일은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셋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대학자가 되어 나라의 부름을 받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법에따라 나라의 판서의 어머니에는 정부인(貞夫人)이란 품게가 내려졌는데
이 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
시댁인 영양 석보에서 친정 안동서후면 금계리까지는 200여리나 떨어져 있는데
무남독녀로 친정엔 늙어 가는 부모를 돌보아 드릴 자식하나 없는 것이
장씨부인은 항상 걱정이 되었다.
친정아버지 장흥효가 한갑이 되던 해에 한살 연상의 어머니 안동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차마 혼자 둘 수 없어 시아버지와 남편의 허락을 받고
친정에 3년간 머물면서 3년상 치를때까지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는데
3년상 치르고 난 다음 장씨부인은 스스로 계모를 맞이하여
아버지께 새장가 들게 하여 대를 잇게 하였는데
계모도 또 안동권씨로 60세의 장흥효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하나는 일찍죽고 2남1녀를 키웠다.
친정 아버지 장흥효가 69세로 세상을 떠나자 장씨부인은
계모와 3남매를 시집으로 데려와 살 수 있도록 보살피고
시집근처에 친정의 사당을 짓고 조상제사를 받들게 했다.
계모가 돼야 했고 계모를 모셔야 했던 기막힌 팔자를
그의 후덕과 덕망으로 슬기롭게 잘 극복했던 것이다.
친정아버지가 살아 생전에는 아들 상일 휘일 현일을
외할아버지 밑으로 보내 학문을 익히도록 했는데
셋째 현일은 외할아버지 적통을 이어 퇴계학풍의 맥을 잇는 영남학풍의 영수가 되었다.
그녀는 또 시부모와 남편, 자식의 건강을 위해
또는 접빈객을 할때 요리를 직접 하면서 터득한
음식의 조리법과 저장 발효법 식품 보관법146가지를 꼼꼼히 기록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로 적은 <음식디미방>이란 조리서를 펴내기도 했다.
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에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가정을 지키며 친정과 시가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효의 전범을 보였고 83세로 세상을 마감 할때까지 자식의 훈도에 힘을 쏟으니
그 후대로 영양 재령 이씨 가문이 번성하여 덕망있고 휼륭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 부인의 행(行)과 실(實)과 덕(德)이 어찌 높다 아니하리
장씨부인이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책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책표지는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이나 첫장에
`음식디미방`으로 시작된다 지(知)의
옛글씨 <디>로 적혀있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영양석보 두들마을 장씨부인 기념관에 전시된 그녀가 초서체로쓴 <학발시>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요리책 <음식 디미방>
풍산읍 수곡동에 위치한 정부인 안동장씨묘소 조금 아래 남편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