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태생으로 문학 이력을 말할 때 ‘산청산’ 또는 ‘산청 화계산’으로 표기가 된다. 필자가 우리나라 문단이라는 데를 오르는 때가 1965년인데 그 무렵은 다들 ‘태생’을 ‘산(産)’으로 표기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니까 필자를 드러낼 때 반드시 ‘산청’이 들어가는 것이 필수사항이었다. 평생토록 ‘산청산’ 또는 ‘산청 태생’이라 했으니 어지간히도 산청을 우려먹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 필자는 ‘산청에서 살고 산청에서 죽는’ 산청 사람이다. 필자는 교수와 시인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므로 산청을 소재로 시를 쓰거나 산문을 써왔다. 시로서 대표적인 작품은 화계리 뒷산 ‘당그래산’을 소재로 쓴 <산에 가서>이다. 이 작품은 1965년 대학교 3학년 재학중에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에 당선된 것으로 속되게 말해 필자의 출세작이다. 이 시는 산청읍 조산공원에 시비로 서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마음이 급한 분은 스마트폰 인터넷으로 ‘강희근 산에가서’를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그러면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로 시작하는 서정시 한 편이 여러분 눈앞에 당도해 줄 것이다.
필자가 이 시를 대학 2학년 겨울방학이 되어 화계에 내려왔을 때 쓴 작품이지만 체험 내용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당그래산으로 소를 몰고 동네 선배들과 어울려 이른바 ‘소 먹이러 간’ 체험을 담고 있다. 시적 바탕은 금서초등학교 3학년의 정서가 밑바닥을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1964년도 저물어가는 12월 23일 필자는 역시 화계에 머물고 있는데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초등학교 후배 김병호군이 필자의 서울 하숙집에 들렀는데 하숙으로 서울신문사에서 전보로 당선통지를 보낸 것을 보고 그 내용 그대로 우체국에 가서 내게로 전보를 보내준 것이다. 필자는 마당에서 펄쩍 뛰었다. 가슴이 막히고 숨쉬기가 힘이 들어졌다. 아버지 어머니께 이 급보를 알려드리고 나는 견딜 수가 없어 금서 초등학교로 무작정 뛰어 갔다. 운동장을 돌고 돌았다.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뛰다가 쉬다가 걷다가 폼 잡다가 교무실을 보다가 도르래 우물쪽을 보다가 어둑발지는 운동장에서 혼자 별짓을 다했다.
그날 저녁무렵 동네 최고 어른인 진산(민 형호) 어른댁을 방문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문학에서 고등고시와 맞먹는 경사를 맞이했다. 우리 마을 우리 초등학교의 경사다!” 하시고 손을 잡아주시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첫버스를 타고 진주에 나와 '귀로' 다방엘 가서 작은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드리고 서울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신문 문화부 박성룡 기자는 당선소감 3매를 쓰고 사진을 준비하여 2일 이내로 신문사로 나와 달라고 했다. 이때의 당선소감 뒤에 붙는 약력은 ‘1943년 경남 산청산’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시의 퇴고를 모른다. 시골 화계에 계신 부모님께 이 영광을 드린다.”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을 것이다.
그 이듬해 6월에는 ‘공보부 신인예술상’을 받는데 정부가 제정한 상으로 문학을 비롯한 예술분야 신인들을 찾아내는 제도였다. 필자는 이로써 신인을 찾아 문단에 내놓는 두 가지 제도에서 2관왕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때도 펄쩍 뛰었지만 서울에서 연락을 받은 것이었으므로 감정을 절제하는데 성공했다. 그해 10월이었을 것이다. 모교인 금서초등학교 후배들이 서을에 수학여행을 온다는 소식과 환영하러 나올 사람은 서울경찰청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경찰청에 잡혀간 것이 아니라 그 서울경찰청장이 산청 출신 정우식 청장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반명환 교장 선생님과 모교의 선생님들, 수학여행반 50여명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교환했다. 이후 서울시내를 견학하는데 경찰청 차에 타서 경찰청 지프차들의 호위를 받으며 신나게 다녔다.
그 차 안에서 반교장 선생님과 동석했는데 교장선생께서 “강군! 지난 번에 공보부 신인상을 받은 것 등으로 고향이 떠들썩하네. 그러니 우리 교가를 지어주게. 현재의 우리 교가는 일제때 개교시에 지은 것이 되어 내용이 시대에 맞지도 않고 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어려운 문자들이 섞여 있어서 꼭 새 교가를 지어야 해. 부탁하네.” 하시며 일방적으로 정하시고 밀어붙이시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럼, 부족한 사람이고 아직 대학생 신분이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새 교가는 탄생되었다. 작곡은 육영재단에 관계하시던 정우식 청장님의 주선에 의해 ‘어린이집’ 음악부장이었던 분이 해주셨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흐르는 경호강 맑은 물에/ 지리산 푸르게 비치이고/ 가슴엔 저마다 가야의 빛/ 그 마음 이루어 얼이 되는/ 금서 금서 자라며 빛내자 우리학교/ 금서 금서 자라며 빛내자 우리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