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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의 꿈
남 상 진
이 바닥에서 나는
잔챙이라 불린다
한 때는
반짝이는 물결무늬 옷을 해 입고
힘차게 파도를 넘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덩치가 산만한 고래를 보고 난 뒤부터 이내 기가 죽었다
그나마
고만고만한 동류들이 있어 견디고 있는 중이다
물속 세상에서
거센 해류를 거슬러 오르는 것은
살아있음을 증명해 내는 일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
온몸의 근육을 키워
뼈대 있는 존재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기를
그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물속에서
스스로 소실점이 되는 생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끝내
고래가 되지 못하는 내가
살아남는 법은
속으로 스며들어
깊은 맛을 내는 종족으로
이름을 얻는 것이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남상진 2014년 애지로 등단 —시집 현관문은 블랙홀이다, 철의 시대 이야기.
물소리
유 계 자
철퍽철퍽
한나절 수차를 밟는 염부의 걸음이 방금 걷어 올린 미역처럼 후줄근하다
소금창고 가는 길, 짊어진 소금가마가 기우뚱
바닷물 저장고에 떨어져 버렸다
염천에 점심이나 먹고 건져야겠다며
담배 한 대 피우고 소금을 찾으러 갔더니
빈 가마만 동동
바닷물이 낳은 소금
서둘러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리고
선술집에서 만난 소금꽃 같던 여자
날 못 믿느냐며
함초같이 붉은 입술로 평생 수차의 지팡이가 되어주겠다던 그 여자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까지 저당 잡히고는 걸음을 지워버렸다
수차를 굴리다가
수차례 사금파리 같은 이름 다 잊었노라
염판에 엎드려 저녁노을에게 큰소리치다가
철벅철벅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데
온종일 돌아도 염천은 염전
맨발의 염부는 딱 한 번 염천을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고
세상에서 건진 것은 어느새 세상으로 돌아간다
나는 폐염閉鹽을 지날 때마다 철퍽철퍽 쏟아지던 물소리를 받아내곤 한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유계자 2016년 애지로 등단 —시집 오래오래오래.
붓꽃
이 병 연
혀가 하지로 가는 해처럼 길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혀끝으로 모여 들었다
말이 줄줄이
꽃으로 피어나는 저녁이었지
기쁜 소식을 전하는 혀꽃이었나요
아픔조차 영광으로 만들어버리는
너는 푸른 전령
빗속에서도 빛으로 다가와
붓을 들게 하는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이병연 1959년 공주 출생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공주대 문학석사 —2016년 계간지 『시세계』로 등단 —시집 『꽃이 보이는 날』, 『적막은 새로운 길을 낸다』 —한국시인협회, 충남시인협회, 풀꽃문학회, 세종시마루, 애지문학회 회원 등.
멍
최 병 근
돌아서면 자라나는 잡초를 맨손으로 뽑았다 여린 손바닥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 뿌리까지 뽑아내고 솎아내는 일이 이렇게도 곤고하다 저 고공철탑 위에서 홀로 시위하는 한 사내의 멍, 빈주먹으로 허공에 통점을 찌르고 있다 누군가 뽑아낸 자리는 눈부시게 견고했다 오랫동안 지켜왔던 헐렁한 대가, 밥과의 줄다리기에 그의 목울대가 울컥 뜨겁게 울린다
넋 잃은 광장에서는 공정이란 표어만 그저 나부낄 뿐이다 불온한 대기가 하늘에 걸려들었다 한 줄금 소낙비가 다 지우고 가려나 보다 울창하게 정리된 숲, 후드둑 뚝 빗방울이 관성을 따라 자꾸만 낮은 곳으로 쓸려간다 작은 잎사귀에 비를 피하던 새들, 또 무엇이 가슴에 박혔는지 더 깊은 숲속으로 휘몰리고 있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최병근 충남 보령 출생 —2020년 『애지』로 등단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배재대학교 시창작 전문과정 수료 —시집 『바람의 지휘자』, 『말의 활주로』 —현재 수레바퀴와 애지문학회, 시산맥 회원.
줄 2
— 애드벌룬
이 선 희
줄 하나만 있으면 하늘
끝까지도 오를 수 있겠다
기회만 되면 붕붕 떠오르는 이 가벼움
줄 하나에 의지해 오만과 탐욕과
착각을 가득 끌어안고 부풀어 오른다
얼마 후에 찌그러지겠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굳세게 땅을 딛고 살려고
발바닥은 굳은살 박아가며 단단해지는데
내 어디에 생긴 구멍들일까
수시로 들락거리는 헛바람
어디서 불어온 헛된 망상일까 빵빵한 기대
아무리 꽁꽁 동여매도 어느새 쪼글쪼글
허공에 떠 있는 찌그러진 애드벌룬
질기디 질긴 줄에 매달려 뒤뚱뒤뚱
목을 끊을 수도
줄을 끊을 수도 없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이선희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시와경계』로 등단 —시집 『우린 서로 난간이다』, 『소금의 밑바닥』.
웰컴투 물만골
강 정 이
진달래여자가 오줌 눈다
눈 동그래지는 헤드라이트
살찐 비둘기 보듯 무심한
진달래가 오줌 눈다
길가 나무들 낄낄 웃으며 쳐다봐도
개 짓는 소리쯤으로 흘려보내고
도로변 배수로 덮개 위에 쪼그리고 앉아
오래도록 오줌을 눈다
해우소에 앉아 있는 듯
사거리를 둘러보는 진달래여자
지나치는 덤프트럭 레미콘 포클레인
별 재미없다는 듯 오줌을 눈다
여자는 매운 겨울 털어내듯
오줌으로 온 도시를 데워주고 싶은 듯
오줌을 눈다
선정삼매에 든 엉덩이가 보름달로 부푼다
나도 진달래 곁에 앉아 꽉 찬 방광을 비운다
진달래 하나 둘 셋… 나란히 앉아
세상을 본다
물만골 계곡이 넘쳐흐른다
풀들이 일제히 지휘봉을 잡고
물만골 교향곡을 연주한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강정이 경남 삼천포 출생 —2004년 계간시전문지 『애지』로 등단 —시집 『꽃똥』.
연밭
이 수
겨울의 연밭은 폐허를 보여주기에 적당했다
어떤 감정을 숨기면서 드러내면서
마른 쇠꼬챙이처럼 웅둥그린 모습이었다
여름에 보았던 연밭은 꿈속이었다
꽃송이가 흘러 넘쳐 발랑 넘어가고
연못에서 부글부글 수증기는 피어났다
한 손에 용광로의 철물 같은 눈망울
다른 손에 태풍의 먹구름을 쥐며 떨었다
한여름의 연밭은 부풀어 오르며 어지러웠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감정을 숨기다가 견디다가
찬바람에 수그러진 꽃송이
눈빛은 멀어지고 연자육 열매는 검어졌다
겨울 연밭은 잿빛,
살덩이를 덜어 내고 벼린 뼈로 서 있다
할 말을 지우며 눈을 감은 듯
온도가 내려가는 속도를 따라 땅속으로 들어간다
땅속에서 지상으로 숨을 틔우려는지
공중으로 뻗어가지 못한 뿌리가 깊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이 수 2017년 『시작』으로 등단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수혜.
그리고 수세미
김 진 열
허공이 반이다
촘촘히 엮은 것은 단지
섬세한 본성
칸칸을 되짚으며 여문 생각을 품고
둥근 시간 속에 반걸음씩 깊어진다
까만 씨앗이 척척하지 않도록
드문드문 심어놓고
그물을 헤집어
눈부신 습관을 전한다
속으로 품은 것은 굳이 들출 필요가 없는 것
허허바다 돌아온 손에 쥐어진 바늘로
그물을 꿰매는 어부의 마음
수세미는 그 흰빛을 닮았다
발 디딜 곳 없이 공중에 매달린 몸
걸림 없는 사유가 익어간다
짜고 있는 그물에 훗날 무엇이 걸려도
상관없는 태연함은
입다문 초록이 휘어질 때까지
생각하는 일
허공은 그물로 하여 탄탄해진다
사는 것이 그물이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김진열 부산 출생 —2019년 『애지』로 등단 —시집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바다시금치
김 도 우
아이는 봄을 기다렸다
집나간 엄마를 기다렸고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렸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 짓고 동생을 돌보는
고사리 손이 얼고 부르텄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하늘을 바다에 펼쳐놓고
새끼 돌게와 놀았다
해풍이 거칠게 밀려올 때마다
발톱에 피가 맺히도록
흙을 파고들었다.
꼬부라진 다랭이 밭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납작 엎드렸던 아이
파랗게 질려
불그죽죽한 시금치
엄마의 젖처럼
깊고 달다
얼다 녹다 온몸이 붉어져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김도우 2020년 『애지』로 등단
작약을 앓다
김 명 이
보라꽃무늬 원피스 입은 작은 소녀
꽃향기 넘실대는 파란대문 집 알바를 자청했어
귀족꽃 노예가 되었기에
그을음 도배하는 연기를 마시고
먼지가 걸레를 염색하는 긴 마루를 닦았어
작약 한 뿌리 얻어 돌아왔네
담장 안 굴뚝도 이따금 허기진 시절
농가마당은 꽃밭이 될 수 없다는 금기를 어긴 채
담벼락 구석 한 뼘에 뿌리를 묻었어
사월 지나야 땅을 뚫고 해를 향해 목을 뺐지
초록 손들이 망울 틔우고 흔드는 환상통
소녀는 꽃의 광신도가 되어갔네
꽃잎 풀어놓을 때면 입술에 허언을 낳는 밤
며칠은 불행한 무덤을 헤아리거나
손가락 찢어지고 스카프가 날아간 꿈을 꾸기도 했어
떨어진 바닥에서 빛바래 간 작약
퉁퉁 부은 눈으로 한 잎 주우며
감각을 죽여 가는 일이 생의 욕구라고 가늠했네
매캐한 자유를 삼키는 유령들의 보라
향기는 수렁에 빗대어 몽롱해야 할까
장미 백합 수국 칸나의 계절까지도
뜨겁고 은밀한 몸을 거부해야만 하는 신화
고귀한 내력만이 영원한 향배인 듯
그녀는 또다시 가을 칼꽃을 예찬하고 말 것이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김명이 2010년 호서문학으로 등단 —2016년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16년 한남문인 젊은작가상 수상, 2017년 세종나눔문학 도서 선정 —시집 엄마가 아팠다, 모자의 그늘 등.
돌 깎는 남자
김 선 옥
석재 공장을 지날때 마다
톡톡톡! 새알 깨는 소리가 난다
바위는
몸통을 벗고
탁탁탁! 툭툭툭! 날개를 키우고 있었나 보다
검독수리 한 마리 큰 날개를 펴고
비상준비를 한다
저 새는, 시베리아 쪽으로 가려는 것인지
캄캄해서 차가웠던 돌 속의 세상
제 몸을 박차고 날아갈 기세다
깃털 하나하나를 달아주며
아비 같은 마음으로 다듬고 또 다듬었을
석수의 손에서 태어나고 무럭무럭 자랐던,
석공은
깎고 갈고 어루만지며 땀 흘리고 키워
멀리 떠나보내는 날은
시원하고 섭섭하고 기뻤을 것이다
아니
보낼 곳이 없어
돌을 쪼는 동안
그리 오래도록
한마디 말없이 침묵했는지도 모른다
돌을 깨던
첫 망치질에서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
검독수리의 일생이었음에
침묵하는 지도 모른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김선옥 경북 문경 출생 —2019년 『애지』로 등단.
부적 2
— 시 또는 그림
조 영 심
물감 통 하나 달랑 둘러메고 시의 길모퉁이를 떠돌아다닌 가난한 화가가 있지 시가 될지 그림이 될지 모르는 요망한 년……, 시부렁거리는 너의 목소리는 잘 그려진 잘 써진 부적이야, 그게 시야 그림이야! 비아냥거려도 시인은 그림을 그리고 화가는 시를 쓰게 되는 거지
저기 개똥밭에 장미꽃이 있어 모든 것을 백만 송이 그 장미꽃에 걸었다고 하자 말해봐, 지금 내가 떠나보낸 것은 시야 그림이야
내가 그를 밀쳐내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그림에서 나의 시를 읽어내지 못하는 동안, 물감을 쥐어짜듯 늘 배고픈 그에게 꽃은 꽃일 뿐 백만 번이고 꺾일 시일뿐 시들어버렸을 뿐
환청으로 말을 걸어오는 꽃향기, 그림에 시를 불러들인 것일까 시를 그림으로 받아 적은 것일까 이게 그림이야 시야, 옘병하네……, 니가 아무리 눈을 흘겨도
이 부적 사실 분 계셔요?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조영심 전북 전주 출생 —2007년 애지로 등단 —시집 『담을 헐다』, 『소리의 정원』 —현재 여수정보과학고등학교 근무.
찡긋 웃는다
정 해 영
기차 여행을 하다
이야기도 시들해 질 무렵
그와 내가 가방에서 꺼낸
우연히 표지가 같은 책
그는 앞부분을,
나는 절반 이상을 읽고 있다
나란히 앉아
그는 앞에 있고
나는 뒤에 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유희처럼 슬픔의
씨를 뿌리는 주인공의
젊은 날을 지나고 있고
그것이 불행의 열매로 무르익어
따지 않으면 안 되는 노년
내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가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눈부시게 올려다 보고
나는 계속 아래를 보고
눈시울을 붉힌다
가끔씩 우린 마주보고
찡긋 웃는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시작과 결말이
인사를 한다
똬리를 튼 생의
머리와 꼬리가 슬쩍 스치는
순간이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정해영 경북 고령 출생 —경북여고와 대구교육대학을 졸업 —2009년 『애지』로 등단 —‘대구문인협회 회원’ 및 ‘물빛동인’으로 활동 —시집 『왼쪽이 쓸쓸하다』.
홍수
조 성 례
저처럼 붉은 물길을 밟고 싶었던 적 있었지
흔들흔들 움직여 봐도 빠지지 않는 강한 전류는
점점 옥죄어 오면서 강하게 동여매고
붉은 물길을 기다리는 마음에 더 붉은 앙금이 내려앉은 적 있었지
일탈을 꿈꾸며 부르짖던 신음이
자박자박 물길을 밟고
기억속의 어느 젊은 여자가 함께
묵혀있던 쳇증을 흔들어 풀어놓으며
먹구름 사이로 환한 매미울음이
붉은 물길을 쓰다듬고 있지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조성례 2015년 애지로 등단 —시집 가을을 수선하다.
비늘
김 정 웅
손잡고 걷던 길에서 우리는
아마도 서로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가려던 행선지가 머뭇거리면 나무는 떨면서 이파리를 떨구었고
당신 모르게 간밤에 아팠던 자리에는 노란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이 말이 의미하는 결과를, 글썽이는 속살의 감촉을, 알아버린
아이가 어른스럽게 삼킨 말 같은
‘결국’이라는 단어보다
고요보다 두꺼운 침묵으로 쏟아 낸
‘겨우’라는 실망의 냄새가 이파리를 자꾸 떨어뜨렸습니다
바람을 잡던 손으로 당신을 잡은 손은 너무 쉬워서
가벼웠습니다 잎을 다 떨군 은행나무가
결코
가볍게 보이지만은 않은 11월 말의 쓸쓸한 저녁처럼 우리가
함께 찾던 방향은 서로의 방향보다 무겁게 아팠습니다
우리보다 서둘러 자라난 서로의 마음들이
급하게 어깨를 부딪히며
노란 비늘들을 밟고 가다 보면
결국
그 길도 생각없이 일그러지곤 했습니다
나무는 지느러미를 찾아 바다로 걸어갑니다
아침이 깨어나는데
창문에는 파도가 치는데
우리의 저녁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김정웅 2019년 『애지』로 등단.
그리움
이 정 옥
하늘의 별을 탁탁 털어 먹었다
빈 약봉지만 하늘에 놓고
창문을 닫았다
그래도 아프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이정옥 2020년 『애지』 등단.
구름을 경작하다
조 순 희
노인에게 빈자리가 생겼다
얼마 전 식은 여인 하나 흙에 심었다는 그를 위해
세 평 남짓 영토를 일구었다
몇 날 밤 가슴에 돋아난 불면에 흙을 고루 섞어
마당에 약속 몇 포기 흩뿌려 두었다
체념은 잊어야 할 마음의 다짐을 뒤척이게 하는데
지난 시간에 집착하는 그의 상념은 우물처럼 깊다
술병이 대신 우는 밤
바람이 노인의 한숨을 떠메고 담장 너머로 멀어지곤 했다
잠이 길을 잃은 날 아침은 햇살의 기울기가 비뚜름하다
내가 웃거름 주었던 약속 몇 포기 빈 행간을 채워줄 수 있을까
불면이 기댈 곳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얼마 전의 일,
추억 안쪽은 아직 떠나보낸 여인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오래도록 마음 멈추지 않을, 체념이란 그런 것이다
안으로 깊어진 그늘들 서둘러 시드는 사월
손수건 같은 흰 구름을 햇살이 들어올리자, 비의 열매들
한 뼘씩 성장을 서두른다
새 소리 따라나선 마당 끝에서 분실한 절기를 독백처럼 짚다가
그는 계절의 속도에 화들짝 놀랄 것이고
소복 같은 사연들 익어가는 푸른 고랑 사이에서
가끔은
오래전 놓친 유행가 몇 소절 파르르 흔들리곤 할 것이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조순희 2019년 『애지』로 등단 — 시집 『꽃피는 그 일』.
허물
조 옥 엽
재활용 의류 수거함 위에
한 켤레 신발이 놓여 있다
작고 귀여운 소녀 하나 반듯이 서 있다
손짓하면
곧장 걸어 나올 듯
부동의 자세로
대기 중인
사랑스런 소녀
바닥에 엎드려
귀 열고 있으면
한 아이가 걸어 나가고
한 아이가 다가오고 있는
발걸음 소리
우주의 비밀 한 가닥이
살짝 옷깃을 들추는 아찔한 순간
휘파람새 한 마리 날렵하게 허공으로 치솟는다
— 애지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조옥엽 2010년 『애지』로 등단 —시집 『지하의 문사』.
첫댓글 시들이 다 멋집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