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과 삼류(요13:21-30)
2022.7.24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다(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2013). 처음 듣는 사람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등과 류는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뉘앙스가 다르다. “등(等, 1등, 2등, 3등)”은 순위나 등급 또는 점수를 나타내고, 주로 외형적인 의미가 강조된다. 반면에 “류(流, 1류, 2류, 3류)”는 질적인 가치를 나타내고, 주로 내면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흔히 쓰는 고질, 저질이라는 표현들도 다 류에 해당하는 말들이다.
우리들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다양한 상황(학교, 직장, 경기장, 사회 등)에서 어떤 때는 1등을 못하고 2등이나 3등 심지어 때로는 꼴등을 할 때도 있다. 이때 빠지기 쉬운 생각의 오류가 있다. 그것은 “1등 = 1류 = 성공자 = 능력자”, “2등, 3등 또는 꼴등 = 2류, 3류 = 실패자 = 루저(loser)”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등수나 점수가 곧 나의 존재나 가치가 일류인지 삼류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지고, 자신의 가치를 부당하게 낮게 생각한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 많고, 배운 것이 많거나 배경이 든든한 집안 출신이면 일류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세상에는 외형은 일등 같은데(재산, 학벌, 능력, 외모, 인기 등), 그 내면과 생활은 쓰레기 같은 삼류들도 많다. 아무리 많은 것을 움켜쥐었고,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반칙과 편법으로 그것을 이루었다면, 그 사람은 삼류이다. 대체로 삼류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이기적이고, 행동이 천박하다. 남을 이해할 줄 모르고, 양보와 배려정신은 없다. 인격적인 품위보다는 동물적인 본성이 더 강하다. 정의, 상식, 공정과 같은 말들을 앞세우지만, 뒤로는 합법적인 불의를 행한다. 그러면서도 “법대로”를 강조한다. 이런 모습들이 삼류의 특징이다.
반대로 돈 없고 배운 것이 없어도 일류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마라톤에서 일등은 못했어도 심지어 꼴찌 했어도 박수를 받는 감동적인 장면을 우리는 종종 본다(사진:2017년 댈러스마라톤대회 결승선).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에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이라는 가사도 있듯이, 과거 꼴등같은 어려웠던 환경에서도 자녀를 향한 부모님들의 사랑만큼은 일류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등보다는 일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삼등을 했다고 해서 삼류가 되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나 성도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등은 못되어도, 삼류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연륜이나 믿음이나 직분으로만 보면 일등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신자들이 사회에서 비난받는가? 심지어 왜 교회 안에서까지 상처주고 상처받는 일이 생길까? 언행과 생활이 삼류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대 주님이 제자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일등이 아니라, 일류 성도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주님이 기뻐하는 일류 성도가 되어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많 은 가르침들을 우리에게 준다. 성경의 가르침들 중에서도 특별히 이 시간에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그 중요한 한 가지 가르침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회개(悔改)이다. 회개는 뉘우치고(뉘우칠 회), 돌아서는 것이다(고칠 개, 바꿀 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은 누구나 욕심에 끌려 실수하거나 영적인 태만에 빠지고 심지어 마귀의 미혹 등에 빠져서 죄를 범할 개연성을 늘 갖고 있다. 그러나 일류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시편51편의 다윗 왕처럼 그것을 깨달았을 때, 돌아서서 바꾸는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오늘 설교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최후의 만찬을 하셨던 자리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들 중의 일부이다. 그런데 26절 말씀을 보면, 주님이 베풀었던 숭고한 일류사랑과 이를 거부한 가룟 유다의 삼류선택의 결정적인 분깃점이 되는 의미심장한 말이 하나 나온다. 바로 “떡 한 조각”이라는 말이다.
다 같이 요한복음 13장 26절 말씀을 읽어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요13:26)
예수님은 예수님을 팔자가 누구인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그 떡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이 이전에도 이미 주님은 반복해서 여러 차례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주님을 팔 것을 언급하셨다(요13:10, 요13:21).
그렇다면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주신 떡 한 조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식사 중에 상대방을 향한 최고의 사랑과 우정의 표시로 자신이 먹을 떡을 떼어주는 관습이 있었다. 자신이 먹을 떡을 떼어 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 주님이 떼어주신 떡은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시던 떡이다. 놀랍게도 주님은 마지막으로 드시고 힘을 내서 십자가를 져야할 그 귀한 떡을 떼어 준 것이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떼어 주셨던 떡 한 조각에는 ‘여전히 그를 아끼고 사랑하고 계시다’는 주님의 마음과 것은 ‘속히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두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다. 떡 한 조각을 사이에 두고 가룟 유다와 주님은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은 주님의 이러한 말씀과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요13:28-29). 그런데다른 사람은 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주님이 누구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린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게 누군가? 바로 가룟 유다이다. 가룟 유다는 이전부터 반복되는 주님의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인 것을 알았다. 아마 그는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 뜨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갈등도 되고, 마음도 뜨끔했지만, 글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종 선택은 거절이었다. 그가 주님의 마지막 떡 한 조각까지 거절하기로 선택한 그 순간이 바로 비참한 삼류 인생으로 전락한 분깃점이다.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삼류인생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은 그가 실수하고 넘어졌던 것 때문이 아니라, 돌아서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27절 말씀을 보면, 그가 이처럼 끝까지 악한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배신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순간에 마귀가 그에게 들어가 버렸다(“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단순히 미혹되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탄이 그 속을 지배했던 것을 뜻한다.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 순간에 그는 사탄 충만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매순간 다양한 형태의 떡 한 조각들을 반복해서 내미신다. 그 떡 한 조각이 때로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어떤 물건이나 상징물 일 수도 있다. 때로는 누군가를 통한 성경적인 권면의 말일 수도 있다. 때로는 나의 마음을 콕찌르는 설교 말씀이나 묵상 중에 감동된 성경귀절일 수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심금을 울리는 찬송가사나 어떤 일의 진행을 막으시는 주님의 싸인들, 건빵 한 봉지, 전도지 등과 같은 것들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내 마음에 찔림과 영적인 갈등이 왔을 때, 그 순간 돌아설지 말지를 결정하는 그 선택이 바로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이 일류일지 삼류를 결정하는 분깃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주민 여러분들이여, 가룟 유다에게 당신이 드실 마지막 생명의 떡 한 조각을 내미신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바로 이 시간 우리 모두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이다.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 떡 한 조각을 내미신 주님이 나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확신한다. 주님은 우리들이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일등이 이전에 일류 신자가 되기 원하신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시간 주님의 사랑의 떡 한 조각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자. 이 시간 기도할 때,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성령님이 내 안에 나를 다스려 주실 것을 간구하자. 그래서 남은 생애는 사회에서 교회에서, 우리의 성품과 인격과 삶이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겠다고 우리의 결심을 주님께 올려 드리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일류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실 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