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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후에(Hue)여행, 그리고 월남
두 명의 시클로 운전사는 우리를 매표소에 내려놓더니 2시간 후에 다시 태우러 오겠다고 했다. 말인 즉 왕궁구경을 하고 우리가 나오면 바로 점심을 먹고는 왕릉 구경도 마저 그들이 책임지겠다는 것인데 그때는 왕릉이 저마다 거리가 떨어져 있는 관계로 오토바이로 모시겠다는 것이다. 넉살 좋은 두 명의 청을 우리는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40만동(우리 돈 2만원)에 계약을 하고 우리는 왕궁구경을 나섰다.
후에(훼)지도
나라이름 월남(베트남)의 유래는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후에의 왕궁은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 남쪽 정문인 오문(午門)과 태화전(太和殿),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현임각(顯臨閣), 깃발탑 등의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앞서 말한 대로 미군 군수기지 총집합이라 할 다낭 근처로서 위치상 북위17도선 DMZ아래 큰 도시인 까닭에 월남전 최악의 전투가 이곳에서 발생하여 건축물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최근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할 것이다. 정말 전쟁이 무섭다.
오문
현임각에는 역대 왕들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우리로 치면 종묘에 해당한다할 것인데 우리가 광화문을 기점으로 좌측에 종묘가 있고 사직이 오른쪽 이듯이 이들 또한 오문에서 보자면 좌측에 있다. 가장 중앙에 위패가 모셔진 완 왕조를 세운 초대황제인 가륭제(嘉隆帝 쟈롱) 완복영(阮福映 응우옌 푹 아인)을 만났다. 그로부터 응우옌이라 하는 왕조는 시작하는데 중국이 겁 안 났는지 그는 황제라 칭했다. 그는 깡다구가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1802년 나라를 세우고 왕으로 즉위하고서는 이듬해인 1803년 중국 청(淸)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으로 책봉해줄 것과 나라이름을 ‘남월(南越 남 비엣)’으로 하겠다고 요청을 했다.
태화전 패방
이를 좋아 할리 없는 청나라다. 서기 938년 장수 오권이 중국군을 박당강에서 전멸시키고 천년 중국의 굴레를 벗어나 최초로 독립한 나라이름이 ‘남월’ 이다. 당연 ‘남월은 절대 안 된다. 차라리 글자만 바꾸어 월남으로 해라.' 그래서 월남(越南 비엣 남-> 베트남)이란 국명이 생겨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아무튼 이는 리 왕조 하에서 송이 일방적으로 국호를 정하고 리 왕조가 이를 조건 없이 수용하였던 예와 비교해볼 때 양국 간 관계가 상당히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던 국제 질서를 감안하여 추인을 요청하는 형식을 빌렸지만, 응우옌 왕조는 국가의 철학이 담겨있는 국호를 스스로 결정하고 이를 추인 요청함으로써 베트남의 대 중국 위상이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처음부터 후에가 응우옌왕조의 수도는 아니었다. 1804년 청의 가경제(嘉慶帝)는 완복영을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임명한다는 칙서를 내려 보냈고 1806년 완복영은 자신을 가륭제라 칭하며 응우옌 왕조를 창건하고 그때 수도를 탄롱(현 하노이)에서 중부지방의 후에로 옮겼다. 그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하노이에서 후텁지근하기 이를 데 없는 척박한 중부의 도시 후에로 왜 옮겼을까. 하노이는 이씨왕조, 려씨 왕조, 진씨 왕조의 오랜 수도였다. 당연 이씨, 려씨, 진씨들의 세력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그는 후에에서 대대로 살아온 광남 완씨(廣南 阮氏)다. 그로서는 후에로 옮기는 것은 당연하다.
깃발탑. 자릉황제인 1807년에 만들었다.
잠시 응우옌 이전 왕조를 살펴보자. 완(응우옌)왕조 이전에는 려(黎 레)왕조가 있었지만 말기에 힘 있는 장군들이 나라를 양분하여 2백년이나 통치했다. 북부월남은 정씨(鄭氏 찐)들이, 중부와 남부는 완(阮 응우옌)씨들이 통치했다. 나라전체가 크게 혼란스러워 곳곳에서 민란과 반란이 그칠 새가 없었던 때다. 그 무렵 나라를 결정적으로 뒤흔든 반란이 있었다. 1771년 월남중부 서산(西山 떠이썬)지방에서 완씨 3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세력이 너무 커져 결국 중부의 완씨 정권과 북부의 정씨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통일시켰다. 중부에도 완씨 정권, 서산의 반란군도 완씨. 이미 말했지만 베트남에 가장 많은 성씨가 바로 완(응우옌)씨다. 하지만 중부의 완씨는 왕족가문인 광남완씨(廣南阮氏)이고, 서산의 완씨는 고산지대 화전민출신인 서산완씨(西山阮氏)로 촌티 나는 무지렁이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지렁이 3형제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있다. 완씨 3형제는 당시 사회의 모순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고통 받는 대다수 농민들을 구제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농민들의 대대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었다. 서산(떠이선)반란은 월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반란이었다. 농민반란군은 1777년 남부 사이공지방을 공격하여 당시 월남중부와 남부를 통치하던 완씨 군벌정권을 멸망시키고 왕족을 대부분 살해했다. 왕족 중 유일하게 완복영(阮福映 응우옌 푹 아인)만 살아남아 배를 타고 멀리 도망치게 되었다.
앞선 글 (26.새벽을 여는 베트남 여성들)이라는 글에서 <응우옌 왕조의 개국 무렵인 1775년 14살의 왕자 응우옌푹아인이 메콩의 한 지류에서 벌어진 떠이썬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방콕으로 달아나던 길에 풍랑을 만나 배의 돛이 찢어져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 때 두 자매가 모는 조그만 배가 나타나 실려 있던 직물로 돛을 만들어 왕자 일행이 무사히 탈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자매는 직물장수였다.> 그가 도망가는 내용을 밝힌 바 있다. 그런 그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도망쳐 시암(태국), 캄보디아, 프랑스 등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는데 결국 프랑스가 월남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구실을 만들어주는 상항이 발생하고 그로 그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에게 처음 도움을 준 프랑스인은 프랑스 아드랑의 주교 피뇨 드 베엔느이다. 그는 완씨 형제의 반란을 피해 다니다가 하띠엔 (하띠엔은 베트남 최서단에 위치하고 캄보디아로 가는 국경선이 있는 작은 읍 정도의 도시로 역사적인 유적이 많은 곳이다. )의 지배자 막천사(莫天賜 막 티엔 뜨)의 저택에서 아드랑의 주교를 만난다. 그는 선교를 위해 1767년 월남에 도착했는데 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그의 장남 완경(阮景 응우옌 까인)을 데리고 월남을 떠나 1787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베르사유에서 월남(당시 국명 대월)과 프랑스 간에 공수동맹조약을 맺는다.
현임각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국왕은 보병 1200명, 포병 200명, 아프리카군인 25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전함 네 척에 승선시켜 신속하게 대월국으로 파견하고 군대는 군수품 일체, 특히 야전포를 갖춘다. 이에 대한 대가로 대월국왕은 필요에 따라 다낭과 꼰도르섬의 영유권과 주권을 할양하고대월국 전역에서 프랑스인이 상업권을 독점한다는 내요이 담겨 있다.
정권, 식민지배, 천주교 전파가 엿보이는 내용들이다. 그로 그에 대한 평가는 통일을 이루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월남에 외세(프랑스)를 끌어들였다는 부정적인 비판도 있다. 이후 응우옌 왕조는 143년이란 짧은 존재 기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중부 후에 중심의 왕조, 지금의 영토 형태로 전국을 통합한 최초의 왕조, 쇄국 정책을 추구하였던 왕조, 프랑스 제국주의에 주권을 빼앗겼던 왕조, 대중으로부터 가장 비판받는 왕조 등이다.아무튼 쟈롱황제의 통치기에 월남전역에 천주교가 활발하게 전파되었지만 그의 아들인 2대 명명제(明命帝 민망 1820~1840년)때부터 천주교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게 탄압을 받는다. 조선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천주교인들이 엄청난 탄압과 죽음을 당했었다. 이미 민망에 대해서는 인삼을 좋아하는 중흥군주로 앞서 소개를 한 바 있다.
그의 통치기에 완 왕조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 왕조가 창건되면 대개 초대 왕 때는 내전이나 반란의 후유증을 치유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기 마련이고 창건자의 아들이나 손자 때에 내치를 이루면서 번영을 맛보는 게 역사적인 통례이기도 하다. 그런데 민망은 쟈롱의 장자가 아니다. 그의 장자는 프랑스에 건너갔다고 말을 하지 않았던가. 완복영의 장남 완경(阮景)은 프랑스에 가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었고 프랑스군대와 함께 귀국했고 아버지를 도와 완 왕조를 창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맞다. 그렇다면 당연 그가 2대 황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맏형 완경은 프랑스에서 몇 년간 있으면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교회에서 영세까지 받아 천주교인이 되어 돌아왔다.
전혀 사람이 변해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병자호란 때 끌려간 우리의 소현 세자가 떠오른다. 그는 북경에 까지 가 천주교 공부를 하고 서양인들을 두루 만났다. 돌아온 소현 세자는 어처구니없게 죽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말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로 봉림 대군인 효종이 왕위에 오른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우리의 쇄국정치는 바뀌고 많은 세상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완경은 조상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는 말까지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 완경은 내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전투 중에 죽어 큰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민망은 완복영의 네 번째 아들이었지만 후궁에서 태어난 서자출신이었다.
사실 응우엔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전 영토를 직접 지배하기는 벅찼다. 그래서 조정은 나라를 북, 중, 남으로 나누었다. 중앙은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직할령이고 북부(북성 총진)와 남부(가정성 총진)는 황제의 왼팔과 오른 팔에 해당하는 개국 공신 무장이 다스렸다. 남부는 완복영의 제국을 건설할 때 적극 나서 도와준 주체로서 남부인 기질답게 똘똘 뭉쳐 거의 독립국처럼 행세를 하였다. 남부인의 신망이 두터웠던 그래서 바로 제 2대 민망이 견제한 인물이 레반주엣이라는 인물이다. 환관 출신인 레반주엣은 그가 남부를 지배할 때는 도둑이 사라지고 쌀 생산과 세수가 증대되어 물자가 차고 넘쳤으며 외국의 교역선이 사이공 강에 북적거리고 기독교들 활동도 자유로웠다.
18123년 캄보디아에서 내전이 일어나 그 나라의 왕이 사이공으로 도망쳐 와 구원을 요청했을 때 캄보디아로 들어가 왕권을 회복시켜준 인물도 바로 레반주엣이었다. 그러니까 민망황제는 그가 두려웠다. 1832년 그가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진을 해체하고 그의 죄상을 조작하여 부관참시 까지 운운하다 형을 낮추어 묘를 밀어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남부인의 구심점이 되어왔던 레반주엣의 그림자를 거두어내고 남부인을 황의 아들 딸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양자인 레반코이의 반란이 발생했고 수만의 남부인을 죽이고서야 남부직할지화의 공식적인 작업을 완성했다. 민망의 이름은 완복교(阮福晈 응우옌 푹 떤). 당시 월남에 나와 있던 서양선교사의 편지를 보면 그의 강한 의지력의 강직한 성품을 알 수 있다.
<민망제는 월남의 조정관리들에게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월남 주변 해역을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해적들도 모두 그를 두려워합니다. 전에는 만약 잡히더라도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 빠져 나갈 수 있었지만, 민망제에게는 뇌물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앙집권에 집착하였으며 유학에 소양이 깊었고 레반코이 반란 후 메콩델타지역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환으로 교육기관을 확대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남부 지식층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역사서 편찬도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에 밀착되었던 부친에 비해 민망은 외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월남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선교사의 편지가 이를 말한다.
<민망제는 유럽인과의 모든 교역을 혐오하며, 자기 아버지(가륭제)가 한 일을 전부 파괴하려 한다. 유교 신봉자인 민망제는 틈만 나면 우리를 모두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민망제가 서양을 받아들인 유일한 사례는 왕궁에 천연두가 돌자 서양 의술을 이용한 대책을 인정한 정도이다.>
민망은 프랑스인들이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게 주 목표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1833년 1월에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을 금한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는 단호히 신앙을 버려야 하며, 그러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지금 있는 교회는 모두 파괴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한때 프랑스 총독이 술의 세금을 더 걷기위해 술을 개인이 몰래 못 만들게 하자고 왕조에 건의를 할 때 황제들은 대대로 내려온 조상들에게 받치는 제사에 술을 안 내놓을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는데 그 또한 농경사회인 월남에서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교에 신봉이 큰 그로서는 그리스도교는 조상숭배와 제사를 금지하여 우리의 오랜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는 종교로 선진문물을 가진 그들에게서 배워야하겠지만 오랜 전통과 영혼까지 그들에게 팔수는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쇄국정책을 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서양세력은 동양을 침략하려고 온갖 짓을 다 했다. 통치기에 월남에서 반란이 자주 발생했는데 모두 서양세력이 뒤를 도와주고 있었다. 시암(태국)이 반란군을 계속 지원하고 있었는데 영국이 그 배후에 있었다. 그들의 검은 의도를 그는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민망은 추악한 꼴을 보지 않고 죽었다. 응우옌 왕조 3대 왕인 띠에우 찌 황제(1841~1847), 그는 늦게 왕이 되었는데 갑자기 죽는 바람에 무덤을 만들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뜨 득 황제의 명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1848년에 완공되었다 한다. 재위기간이 짧은 만큼 그이 행적도 뚜렷한 것은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황후가 더 유명하다. 띠에우 찌 제의정실이자 뜨득 제(4대 황제)의 생모인 뜨주 황태후, 지금까지 뜨주 황태후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녀 이야기를 하기 전 응우옌 왕조의 왕위계승에 대해서 말을 할 필요가 있다. 응우옌왕조 시조 자롱제는 슬하에 15황자와 18공주를 두었는데 황태자였던 까인이 1801년에 일찍 죽자 넷째아들인 담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알다시피 까인이 가톨릭에 심취하고 까인의 아들 또한 가톨릭을 믿는 터라 조정대신들의 까인의 아들을 후계로 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자롱제는 담이 황태자로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장자 직계가 아닌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결국 응우옌왕조 사상 가장 영민한 왕 민망을 간택한 것이지만 왕위를 계승하던 원칙을 깨트린 것이 되고 이는 후대에 이르러 무질서와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바로 그 혼란의 한복판에 뜨주 황태후가 자리하게 되고 그녀는 정치 불안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뜨득(투득)제의 선왕인 티에우찌 제 역시 황장자 홍바오를 놔두고 차남 홍념을 왕으로 삼았으니 이가 4대왕인 사덕제(嗣德帝 뜨득 재위 1847~1883년)로 그 역시 왕조 책봉 문제에 불씨를 남겼다. 티에우찌는 일찍이 황장자로 삼은 홍바오 대신 뜨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홍념을 마지막 순간에 후계자로 지목함으로써 1851년과 1853년에 홍바오의 반란을 초래하였고 1864년에는 그의 나머지 아들들과 추종세력들이 모반을 일으키는 정치적 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홍바오는 학업을 열심히 하지 않고 놀기를 좋아해서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홍념이 홍바오를 제치고 왕이 된 데에는 당시 황후였던 뜨주와 조정 내 최고 대신이었던 쯔엉당꿰(1793~1865)의 관련이 깊다고 전해진다. 사실 의심스러운 것은 티에우찌가 순시를 갈 때도 대동하였고 식견이 탁월하여 유서에 적힌 내용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그런데 뜨주 황태후 그녀가 어떠하기에 베트남 역사상 솝꼽는 인물이라 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진다.
자금성은 전란으로 빈 터만 남았다. 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