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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묵상글 들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축일-현실을 초월적으로 사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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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현실을 초월적으로 사는
교회는 성 스테파노의 첫 순교 축일을 의도적으로 성탄 다음날 배치하는데
잘 아시다시피 이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바로 그 다음날
스테파노가 천상에서 태어남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지요.
하느님이신 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인간인 우리가 저 세상에
오르게 되었고,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의 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 아닙니까?
아무튼, 스테파노의 순교는 그래서인지 다른 순교들보다 더욱 축제적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엔도 슈사크의 <침묵>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일본 순교자들의 경우처럼 고뇌에 차고, 처절한 그런 순교가 아니라
매우 영웅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래서 통쾌하기까지 한 순교입니다.
스테파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에 비해 너무도 월등합니다.
마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화가 나서 스테파노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는데
스테파노는 그런 그들이 안중에도 없고
열린 하늘을 통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래서 저도 이런 삶을 앞으로 살고 싶습니다.
현실을 초월적으로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혹 누가 저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여러 사람이 덩달아
저에 대해 분노할지라도 같이 미워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그런 감정들 때문에 제가 괴로워하지도 않는 삶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이미 천상적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삶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신 덕분에
제가 신성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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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동화 같은 주님 성탄의 환희를 만끽하기도 전에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님의 지상 탄일 다음 날에 순교를 기념하는 것이 합당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였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을 증언하고자 처음 순교한 성인의 천상 탄일을 축하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한 파견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스테파노 또한 회당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스테파노의 증언에는 지혜와 성령이 드러나 그 누구도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스테파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견디어 구원을 받았음’을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스테파노의 입을 통하여 자세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스테파노의 순교 직전의 마지막 발언과 연결합니다.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대조법을 즐겨 사용하는 루카의 문학적 성향도 드러나지만 그보다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그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스테파노의 자연스러운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 성탄의 환희 속에서 스테파노처럼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천상 환시를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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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탄생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천상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또한 그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서서 기도했지만, 원수들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사도 7,60),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이름 때문에~”(마태 10,22)
주님!
제 안에 새겨 두신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두오니 당신 이름에서 구원을 주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이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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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나 또 어디서나 박해를 받으며 살아왔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가 법정에서나 형장에서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그들의 변론은 현장에 있던 박해자들을 감동을 주고 반론을 펴지 못하게 한 적도 많았던 것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굳은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 자녀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으므로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19-20절) 말씀하신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하고 걱정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하고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기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나에게는 신앙심이 없다고 자책을 한다.
그러나 매 순간을 우리의 몸으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 싸움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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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의 성탄절을 지내고 난 첫 날, 교회가 기억하는 성인은 스테파노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사랑하시던 열두 제자가 있음에도 그들 모두를 앞질러서 스테파노를
먼저 기리는 것은 그가 예수님 이후 처음으로 순교할만큼 그분께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사도로까지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이 아직 스승의 부재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승을 처형한 유다교의 박해가 두려워 몸을 사리고 있었던 그 시절에 그는 스승을 죽인
유다교의 박해를 각오하고서라도 올곧게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박해를 받아 돌에 맞아 죽을 때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이
후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종할 때에 남기는 말이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이 유언은 영혼과 내세의 천국과 함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최고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이것이 스테파노가 예수님께 보여드린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본시 그는 해외 디아스포라에서 살던 유다인이었습니다. 민족적 정체성이
흔들리기 쉬운 처지에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당대 최고의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 아래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울과 함께 유다 민족의 전통적 율법을 배웠습니다.
이 당시에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그 제자들에 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돌았는데,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모범생이었던 사울은 율법을 열성적으로 옹호하는 바리사이가 되어 그들을
거짓 예언자 무리로 단정짓고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모범생이었던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믿는 무리에 합류하여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제가 되어 그 대열에 앞장을 섰습니다.
사울도 스테파노도 똑같이 해외 디아스포라 출신이었으나, 사울은 유복한 집안 출신의 엘리트로서
바리사이파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대열로 들어선 반면에 스테파노는 가난하여 차별받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편에 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초대교회 시절 사도들이 신설한 부제 직무를 맡아 하도록 선발된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직무는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활동의 결과로 신자들이 늘어나고 그중에
해외 디아스포라에서 온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들어오면서 빵 배급을 둘러싸고
그 과부들이 차별을 받아 불평이 생겨났기 때문에 제정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한 신자들 가운데서 스테파노를 포함한 일곱을 뽑아 그 일을 따로 맡겼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재정과 사회복지를 전담하면서 사도들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는데,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스테파노는 강론의 직무는 물론 복음선포의 직무까지도 수행했었던 것 같습니다.
스테파노 이후 부제 직무가 이렇게 해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순교로 인한
영적 현실을 맨눈으로 보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즉, 스테파노는 하늘이 열려 있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지상의 존재와 천상의 존재가 서로 통교하는 통공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하느님을 위해 교회가 제정하고 수행하는 직무의 품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스테파노가 지녔던 카리스마와 믿음은 매우 놀랍게도
스테파노의 처형에 찬동하던 사울에 의해 고스란히 계승되었습니다.
즉, 차별받는 이들을 옹호함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담긴 파스카 정신을 계승하는 일과
치명하기까지 올곧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일은 동문수학했던
사울이 극적으로 회심하고 ‘바오로’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고 나서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가는 관문으로서의 그리스 일대를 개척하는 선교활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했던 대상이 유력한 가문 출신이거나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들이었다는 사실,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러 새로운 곳을 개척할 때마다
유다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아감으로써 해외 디아스포라에서 차별받으며 민족 정체성의 소외감을 겪고 있던
동족에게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까지 찾아주려 애를 썼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과거의 동지였던
바리사이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자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로마 시민권을 활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로마에까지 진출해서 오늘날 서양이 그리스도교화될 수 있는
선교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사실 등이 그렇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천막 만드는 노동을 자청함으로써 보수를 받지 않고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을
자신의 명예로 삼았다는 사실은 명예를 존중하는 보수파 지식인 출신으로서의 자존심과 아울러
스테파노에게서 배우고 성령께서 섭리하신 영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사회적 약자를 돌봄으로써 진보파 선교사로서의 사회의식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는 믿음을, 특히 그중에서도 교회 안에서 직분을 받아 봉사하는 이들에게는
열정을, 또 그중에서도 선교하는 이들에게는 통공의 신비를 사는 모범을 보여준 스테파노를 기억하면서,
그를 이끄셨던 같은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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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토론토에 살 때의 기억입니다. 외국 신부님들과 한국 식당엘 갔었습니다. 김치찌개에 소주를 먹었습니다. 소주의 이름이 ‘처음처럼’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소주의 이름을 물어 보았습니다. 신부님들께 창세기의 “In the beginning"과 같은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들이 한국은 술 이름을 영성적으로 정한다고 놀라워했습니다. ‘처음처럼’이라는 글도 있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생일을 기억하는 것은 세상에 처음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2021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대림 제1 주일부터 1년 동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의 첫 번째 사제였습니다.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회 사제들의 수호성인이 되셨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수십만 마리의 누(wildebeest) 떼가 먹이와 물을 찾아 세렝게티에서 마사이마라까지 이동합니다. 250만년동안 이어진 이동입니다. 마지막 목적지 앞에는 마라 강이 있습니다. 강은 물살이 거세고, 악어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야만 파란 풀을 먹을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야만 살 수 있습니다. 많은 누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입니다. 한 마리의 누가 거센 물살 위로 몸을 던져 강을 건넙니다. 그러면 나머지 수십만 마리의 누가 따라 강을 건넙니다. 한 마리의 누가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250만년 동안 이어지는 누 떼의 이동은 없었을 겁니다. 강을 건너면서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는 누도 있습니다. 악어에게 잡혀 먹히는 누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는 약속의 땅인 마사이마라를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한 마리의 누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강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겁니다.
성탄의 기쁨이 있는 바로 다음 날, 우리는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늘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모든 권력과 능력을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탄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구세주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묵상할 과제를 부여받습니다. 마구간이라는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서 태어났음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였고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자신의 처지를 말한 적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 제자들을 파견하면서도 지팡이조차 들고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한 무소유와 자발적 가난의 모습만이 가장 제자다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탄입니다. 많은 성인과 성녀가 있지만 스테파노 성인이 예수님을 믿으며 처음으로 순교하였고,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스테파노 성인의 뒤를 이어서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테파노를 통해서 신앙인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길이기도 합니다.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란 단순히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순교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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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새벽을 열며.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빠다킹 신부님.
중학생 때 어떤 선생님이 유전에 관해 이야기하시면서, 부모가 젊었을 때 낳은 아이가 늙어서 낳은 아이보다 유전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하셨습니다. 젊었을 때의 유전자가 훨씬 건강하므로 이때 낳은 아이도 건강하다는 것이었지요. 개인의 재능을 보이는 유전자 역시 부모가 젊었을 때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조금 우울해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마흔 넘어서 낳은 늦둥이였기 때문입니다. 유전적으로 6남매 중에 제일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가고 또 신부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의 이론이 꼭 맞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6남매 중에서 막내인 제가 제일 건강한 것 같고, 운동신경도 좋은 것 같습니다. 글도 꽤 쓴다는 소리를 듣고, 말하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신부가 되면서 받은 성령의 은총이 아닙니다. 사실 이제까지 ‘나는 그런 유전자를 받지 못했어.’라는 생각으로 아예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제로 살아가면서 제 안에 숨은 유전자를 찾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오로지 주님의 말씀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문제는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스테파노가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증거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떠올려 봅니다. 주님께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훌륭한 성인으로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분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에서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광을 얻게 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온갖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안에만 머물면 그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게 됩니다. 대신 주님 안에 머물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광을 떠올리면 그 어떤 것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들에 대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셨듯이,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준비시키십니다.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얻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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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이로울 때만 남에게 친절하고 어질게 대하지 말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한다. 왜냐하면, 어진 마음 자체가 나에게 따스한 체온이 되기 때문이다(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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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듣기보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다섯 살 딸이 유치원에 갔다 오더니,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딸: 아빠 기억이 뭐야?
아빠: (아빠가 흐뭇해하며) 응 기억이란 말이야. 우리 딸이 예전에 아빠랑 강가에 가서 공놀이하다가 공 빠뜨렸던 거 생각나지?
딸: 응, 그때 초록색 공 빠뜨렸잖아.
아빠: 그래 맞아!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을 기억이라고 해.
딸: 아 그렇구나! 그럼 니은은 뭐야?
딸이 물어보는 것과 아빠가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달랐지요. 다른 사람과의 대화 중에 이렇게 서로 관점의 차이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들어줘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귀로 듣기보다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복잡한 인간관계라고 하지만, 이렇게 마음으로 끝까지 들어줄 수 있다면 다 풀 수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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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 인내와 구원 -
오늘은 어제 예수님의 탄일에 이어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입니다. 참 축일의 배치가 절묘합니다. 첫 순교자란 영예로운 호칭대로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성 스테파노의 순교 축일이자 동시에 천상 탄일입니다. 역시 순교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임을 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교황청 전속 설교가 칸타라메싸 추기경의 대림 첫 강론 중 ‘죽음은 영원한 삶에로의 다리이다(Death is bridge to eternal life)’라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새삼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 성탄은 낭만이나 감상이 아닌냉혹한 현실임을 보여 줍니다. 아주 예전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스님을 인터뷰했던 기자와의 일문일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백련암은 어떤 곳인가?”
“세상을 속이는 곳이다!”
착각과 환상중에 외관의 이상만 보지 말고 내면의 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수도원이 밖으로는 천국같이 보여도 안으로는 영적 전투 치열한 최전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제가 자주 체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한동안 피정지도후 귀원하여 집무실에 들어 왔을 때는 마치 영적 야전 사령부野戰司令部에 돌아와 다시 영적 전투를 시작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죽어야 끝나는 영적 전투의 삶입니다.
예수 성탄 츄리나 소박하게 꾸며진 성탄 구유등 목가적이고 동화같은 장면을 보면 감상이나 낭만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순전히 착각이자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성탄의 실제 배경이나 이후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얼마나 위험한 환경중에 태어난 주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불가의 석가탄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왕궁에서 왕좌로 신록 아름다운 5월 중의 석가탄일과 여관방 구유에서 12월 동지를 지나 깊은 밤 엄동설한 추위중에 맞이하는 예수님 탄일입니다. 불가의 연꽃과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의 비움을 예시하는 구유 역시 첨예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로 성탄의 낭만과 감상을 일거에 거둬버리고 성탄의 진실과 현실을 보여 주는 오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에 배치된 말씀입니다. 복음의 박해 현실이 그대로 사도행전 1독서에서 스테파노를 통해 재현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 스테파노가 사도행전에서 그 모범을 보여 줍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으뜸 제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묘사되는 스테파노는 말 그대로 치열한 영적전쟁에서 승리의 삶을 보여줍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고 적대자들과 논쟁에도 이들을 압도하는 스테파노의 지혜와 성령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우리 수도원의 가보家寶와도 같은 부원장이자 주방장인 스테파노 수사님 역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분입니다.
이런 주님의 영적 전사, 성 스테파노의 고백을 통해 평소 성인의 든든한 배경이자 버팀목이 되셨던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시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도 성 스테파노가 즐겨 기도로 바쳤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에 큰 도움이 되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이 몸 보호할 반석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바로 이런 기도를 바친 성 스테파노에게 구원자이신 당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신 예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성 스테파노의 결정적 영적 승리의 삶의 증거가 성인의 임종어입니다. 그대로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돌에 맞자 순교하면서 바친 마지막 임종어가 영적 승리는 물론 이웃 사랑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과연 내 죽음시 마지막 임종어는 무엇이 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복음의 예수님 말마디가 그대로 입증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궁극의 승리자로 구원을 받습니다. 끝까지 인내하여 영적 전투에 최선을 다하다가 순교한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인데 주님의 영적 전사戰士로서 전사戰死의 순교로 영원한 승리의 구원을 선물로 받은 성인입니다.
성밖에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도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스테파노는 성밖에서 박해자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스테파노를 죽인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앞에 두었으니, 섭리의 하느님은 스테파노의 뒤를 잇게 될 ‘신의 한 수’와도 같은 미래의 사도 바오로를 예비하고 있음을 봅니다.
새삼 ‘순교의 피는 믿음의 씨앗(the blood of martyrs is the seed of faith)’이란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스테파노의 거룩한 순교는 분명 사울에게 깊은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야는 우리와 비할 수 없이 끝없이 깊고 넓고 멀리 펼쳐져 있습니다. 더불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 섭리의 여정을 좌절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시야로 현실을 직시할 때 일희일비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와 지혜로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니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적 전투에 당신의 영적 전사로서 인내와 지혜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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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은 순수하고 이상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이렇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사도 3,44.46)
그리고 사도행전 저자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사제는 사두가이파와 함께 사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최고 의회에 세우고 심문까지도 했습니다.
교회의 정의를 ‘죄인들의 모임’이라고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거룩하지만
그 구성원은 바로 한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비록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지만 그리스도께서 머지않아 재림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계속 성장하며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우선 언어적으로 또 생활양식도 다르기 때문에 모임도 서로 달랐으리라 추측됩니다.
사도 행전 저자는 이렇게 공동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 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 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사도 6,1)
그 이유를 그리스계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꼽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와
복음선포에 전념하기 위해서 안수를 통하여 일곱의 봉사자들을 뽑습니다.
예루살렘에도 그리스도교 숫자가 크게 늘고 큰 무리의 사제들도 여기에 합세해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의 봉사자들 중에 하나인 스테파노는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고 언변도 뛰어 났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성장할수록 반대 세력도 급증해서 사도행전 저자는 회당에서 만나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인 유대교 신봉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각처에서 나름대로 언변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도 컸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러한 그들이기에 스테파노와의 논쟁에서 더 날카로운 기를 세웠고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를
상대해서 특히 그들의 광신적이고 폭력적인 기질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사도 6,54)
스테파노는 하늘을 바라보며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6,54)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합니다.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끓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6.60)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스테파노는 반대자들 앞에서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스테파노의 말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9,20)라는 주님의
말씀이 스테파노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을 증언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또한 스테파노에게
일어났고 스테파노는 끝까지 말씀에 성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하기에 이릅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복음선포의 소명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에게 박해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신앙의 길은
환영 받기 보다는 가장 가까운 이웃,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들에게까지 미움과 박해의 대상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박해와 순교의 순간이 온다면 먼저 두려움이 앞설 것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신 주님께서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용기와 위로를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희망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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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가야할 길을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가야할 길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길이다.
매 순간이
성탄이고
매 순간이
봉헌이다.
성탄도 순교도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다.
성탄과 순교는
아기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작아지는
참기쁨이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하늘이 열리듯
하느님의 성탄은
자아를
내어드려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탄이다.
삶도 죽음도
하느님안에
있다.
우리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삶이 바로
봉헌의 삶이며
성탄이었다.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는
실천하는
믿음의
삶으로 자신을
봉헌한다.
자신의 삶을
봉헌한다.
순교는 삶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은총이다.
믿음은
봉헌이고
봉헌의 절정은
순교이다.
순교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다.
성탄과 순교는
삶의 시작과
삶의 마침이다.
삶의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봉헌에서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믿음이
하느님의 뜻을
만나면
삶은 성탄이며
삶은 봉헌이 된다.
가야할 길은
봉헌이다.
봉헌의
탄생이다.
주님, 이 순간을
봉헌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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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마태 10,17)
주님 성탄 대축일 바로 다음날 우리는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죽음을 마주합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구원자께서 죄와 어둠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리라는 기대감이 무르익기도 전에 말씀은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박해를 각오하라고 일갈하십니다.
사람을 믿지 말고 경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모든 사람은 신뢰하고 사랑해야 할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이 무언가에 과도하게 집착해 광적으로 매달리면 그 영혼이 악의 놀이터가 되기 쉽습니다. 무언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귀한 생명을 노리기까지 하지요. 그런 상태를 합리화하고 고집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화를 내고 이를 갈며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는 이들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진리를 선포하는 스테파노입니다. 전자의 무리는 달려들고 몰아내고 돌을 던지지요. 사도행전 저자가 서술한 그들의 행동만으로 그들이 몹시 광분해서 이성을 잃고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이에 반해 스테파노는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성삼위 하느님을 평온히 관상합니다. 외적으로 보면 죽을 위험에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지만 스테파노는 영으로 이미 진복의 영광 안에 들고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등골이 서늘할 지경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의회에 넘기고 채찍질하고 끌고가며 죽이고 미워할 것입니다. 새로운 길이 아무리 의롭고 유익해도 기득권 세력에게는 저항하고 공격해야 할 이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 없이도 이때껏 누리며 잘 살아온 이들에게 복음은 제거해야 할 위험요소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박해와 모욕과 죽음에서 벗어나는 묘수를 알려주시기보다 "견디라"고 하십니다. "견디고 인내함"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요. 구원이 현세적 출세나 풍요를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구원에 이르는 길도 반드시 현세적 안위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걱정하지 마라."(마태 10,19)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걱정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우리 대신 말씀하시는 성령께 의탁하는 것뿐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는 훨씬 혹독할 것이기에 결단이 필요하지요.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를 둘러싼 공격과 모욕, 폭력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스테파노 순교자의 모습은 비록 육신의 생명은 사그라질지라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영광 안에 들 희망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지요. 이 희망으로 믿음을 결단하고 담담히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독려는 이천 년 전의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지금 성탄 축제 안에 있습니다. 마냥 좋고 행복한 순간만이 아니라 고통과 눈물과 죽음도 축제의 일부입니다. 구원자의 강생 안에는 이 모두가 녹아있고 우리 삶도 마찬가지지요.
주님께 신의를 다한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과 함께 구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가 구원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탄 8일 축제 둘째 날인 오늘도 거듭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성 스테파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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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오늘은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스테파노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봉사자로 뽑힌 일곱 부제 중 한 명입니다.
오늘 독서에 따르면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고, 성령이 충만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스테파노는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7,56)
그러자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돌을 던져 죽입니다.
'감히 하느님을 보다니', 한마디로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습니다.
어제는 성탄이요, 오늘은 죽음입니다.
어제는 예수님의 성탄의 기쁨을 기억했는데,
오늘은 스테파노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7,59) 하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스테파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닮았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성탄과 스테파노의 죽음을 나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성탄과 죽음이 하나이고, 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성탄이기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예수님의 성탄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은총과 능력과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를 본받아 나에게 찾아오는 시련들을 이겨내고, 스테파노처럼 끝까지 견디어 내어 구원 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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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끝까지 견디는 이
성 치뿌리아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존재 자체는 희망과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믿음이 그 열매를 맺으려면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그러나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인내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 주시는데 나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화를 내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는 것은 그저 구호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갚아야 속이 후련합니다. 내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남을 쉽게 그리고 엄하게 판단하면서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에 스테파노는 깨우침을 줍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해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고 마침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사실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이는 바로 나보다 잘난 꼴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가득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59-60)하고 외쳤습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었기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할 수 있었고 오히려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할 뿐입니다. 스테파노는 그 몫을 해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성 에드워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십자가위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은 양순함”(마태10,16)으로, 강한 것을 부드러움으로 이깁니다. 사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통을 감당하고 용서를 당연히 여기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박해와 모욕을 끝까지 견디라고요?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고 스테파노가 그 길을 따랐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이 그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인내심을 잃어버릴 때 기억하십시오! 죽음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을, 그리고 스테파노와 에드워드…성인성녀들을! 그리고 특별히 나의 결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참아 주시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구원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어리석음과 부족함, 영적으로 메마른 이들과 심지어는 사악한 이들까지 참아 견뎌야 합니다”(함께야). 왜냐하면 “하느님은 최악의 상황에 놓인 우리까지 언제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더라도 일을 완전히 망쳐 놓더라도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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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마태오 10,17-22)<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 배척 아니면 포용>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왜 순교하게 된 것일까요? 바로 유다 지도자들이 믿기 싫어하는 대상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때문에 박해도 하고, 믿음 때문에 순교도 합니다. 어떤 믿음은 서로 사랑하게 만들고 어떤 믿음은 서로 분열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사랑하고 다른 것을 믿으면 미워합니다.
사실 스테파노를 죽인 이들은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물론 ‘종교인’들이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종교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가 참 신앙인을 박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스테파노는 신앙인이었고 그를 죽인 이들은 종교인이었습니다.
같은 종교 내에서 신앙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종교인은 정치인들처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생각이 달라도 포용합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사람을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부가 꼭 생각이 같아서 한집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의견이 달라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저 생각일 뿐이기에 생각의 차이가 사람을 갈라놓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마치 북한에서 남한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족끼리도 신고하고 가둘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정권이 곧 종교가 된 상황입니다.
생각은 의견이지만 믿음은 종교를 만듭니다. 생각으로 갈라지는 일은 없지만 믿음으로는 서로 갈라집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누군가를 배척한다면 그 사람은 그 누군가를 배척하는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정권이든, 피부색이든, 나이든, 성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생각 때문에 누군가를 차별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생각이 아니고 종교입니다.
영화 ‘리멤버 타이탄’(2001)은 1971년 미국 버지니아주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무대로 한 실화입니다. 어느 날 ‘허문 분’이란 흑인 감독이 백인 ‘빌 요스트’가 맡은 고등학교 풋볼팀에 수석 코치로 부임합니다. 허문 분은 흑인 선수들로 구성된 다른 학교의 팀과 합쳐서 타이탄이란 풋볼팀을 지도해야 했습니다.
당시 인종차별이 심할 때였기에 백인 학생들과 코치진들은 흑인이 수석 코치가 된 것에 큰 불만을 가집니다. 백인들은 흑인 동료들에게 우린 절대로 섞일 수 없다며 엄포를 놓습니다. 실제로 분의 가족이 백인들의 공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교육 기관에서 이렇게 발령을 낸 이유는 흑인 인권운동 때문에 무언가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허문 분이 한 경기라도 지면 바로 자르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허문 분은 2주간의 전지훈련 중 흑인과 백인을 하나의 팀으로 만듭니다. 물론 처음엔 기분 나빠하던 코치 빌 요스트도 분 코치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그의 방식에 조금씩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가 새벽 3시부터 지옥 훈련을 시키며 아침에 게티즈버그라는 곳에 다다라 이 선수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여긴 게티즈버그다. 게티스버그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바로 이 장소에서 5만 명의 병사들이 죽어갔다. 이 푸른 초원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때 그들이 했던 싸움을 지금 우리 안에서도 하고 있다. 그들 영혼의 소리를 들어봐라. ‘증오가 우리 가족을 망쳤습니다. 난 원한을 품고 내 형제를 죽였습니다.’ 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 이 숭고한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역시 망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법만 배운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사나이다운 시합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증오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생각만으로는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증오는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고, 이미 증오하고 있다면 사랑이 아닌 다른 종교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종교가 됩니다.
어쩌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과 백인이 반반씩 합쳐진 첫 팀으로 구성된 타이탄은 그 해 13승 0패로 시즌 우승컵을 들어 올립니다. 타이탄은 그리스 신화에 신들에 대항한 지상의 거인들이었습니다. 타이탄이란 제목은 풋볼이 아닌 각자가 쌓아 올린 인종 종교 신념에 저항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분 코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무슨 종교를 신봉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을 하나로 모으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된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이비만 사이비가 아닙니다. 나를 타인과 분열시키는 무엇이 내 안에 있다면 나도 그것을 섬기는 사이비 종교인입니다. 스테파노 성인은 오늘 이런 종교 숭배자들에게 순교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정치를 종교로 신봉하는 모습입니다. 정치적 의견이 믿음이 되면 그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인이 됩니다. 나와 다른 정치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 바라봐야 합니다. 그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한다면 나는 정치를 신봉하는 사람이지 사랑을 섬기는 참 신앙인은 아닙니다.
정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대로 투표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국민의 의무요 권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되어 다른 이들을 배척한다면 정치를 종교로 신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누군가를 스테파노와 같은 순교자로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정치는 하되, 정치인은 되지 마십시오. 믿을 분은 하느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생각이 다르다고 타인을 배척하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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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충만한 성령 안에 살아간다면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앞에서도...>
충만한 성령 안에 살아간다면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앞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교회 전례는 성탄 대축일을 성대하게 경축한 바로 다음 날 인정사정없이 날아오는 큼지막한 돌들에 맞아 참혹하게 순교한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을 기념합니다.
성탄 바로 다음날 끔찍한 죽음!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탄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입니다. 탄생도 큰 가치가 있지만 죽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탄생은 이미 죽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죽음을 통해 또 다른 탄생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죽음은 어찌 그리도 예수님의 죽음과 흡사한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스테파노는 현재 예루살렘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 있는 성문 밖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 성문은 스테파노 성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스테파노는 신성모독이란 죄명으로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당합니다. 굵직굵직한 돌들을 고스란히 맞으며 죽어가던 스테파노는 십자가상 예수님과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무지막지한 적대자들은 무죄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도 모자라 극심한 고통 중에 신음 중이던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해도 해도 너무한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스테파노 역시 사람들이 들고 있던 돌을 하나하나 던질 때 마다 피하지 않았습니다. 던지는 족족 고스란히 온 몸으로 돌을 맞으며 죽어가던 스테파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행전 7장 59절)
스테파노가 고발당한 이유, 다시 말해서 신성모독죄에 걸린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적대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조리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 유명한 설교, 길고도 논리정연한 스테파노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행전 7장 56절)
스테파노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도 확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죽음이나 권세, 적대자들의 횡포 앞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리고 당당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굳건한 하느님의 지성소, 자신만의 감실을 마련했던 스테파노였기에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 안에 충만히 현존하면서 활동하신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스테파노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를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충만한 성령의 활동 속에 살아간다면 스테파노처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성령 안에 살아간다면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앞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 아래 살아간다면 매사에 감사하며,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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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6일 토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매일미사
_이문수 가브리엘 신부 집전
https://youtu.be/NBf1GQVEVNA (33:44)
•2020. 12. 26.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 (글라렛선교수도회) 집전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 신부님 강론 11분 58초부터 17분30초까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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