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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초 대전의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인삼연초연구원. 지난 20년간 인삼의 품종개발에 매달려온 최광태 박사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꼬깃꼬깃 접힌 메모지 한 장을 펼쳐들었다.
「최박사님, 곧 한국에서 국제인삼 심포지엄이 열리지요? 그때 캐나다 연구팀들이 대거 참여할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한국의 홍삼제조 기술을 입수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각별히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메모지에 급하게 갈겨 쓴 글씨는 상황이 무척 다급함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 메모지는 캐나다에 사는 한 동포가 얼마 전 그곳을 방문한 인삼연초연구원의 한 연구원을 비밀리에 만난 자리에서 최박사에게 전달해달라고 한 것.
최박사는 메모지의 주인공이 세계 인삼시장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캐나다 거주 한국 동포라고 하면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그 동포는 전화나 우편으로는 염탐될 것을 우려해 굳이 인편을 택했던 것.
최박사는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한국측이 국제인삼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려 하고 있었기 때문. 이에 대처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9월22일부터 개최되는 국제인삼 심포지엄은 한국의 인삼을 세계에 홍보하려는 일환으로 고려인삼학회가 주관하는 학술행사. 캐나다를 비롯해 중국 대만 일본 홍콩 러시아 독일 등 인삼(Ginseng)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행사에는 충남 부여에 있는 홍삼창(홍삼 뿌리 가공 및 홍삼을 원료로 한 각종 제품을 생산하는 곳)을 견학하는 일정도 잡혀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에 소속된 이곳은 최첨단 인삼 건조 기술로 한국 전통의 「6년근 홍삼」을 제조하고 있다.
홍삼 제조 기술을 빼내려는 외국인이 있다면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이곳을 노릴 수밖에 없고, 제조 비법을 아는 한국 사람들과 접선하려 할 것이 틀림없다. 최박사는 급한 대로 홍삼창 관계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대비를 부탁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홍삼 제조 비법을 아는 전·현직 기술자들과 개별적인 접촉을 시도할 경우 현재로서는 손쓸 방법이 없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크게 홍삼(紅蔘)과 백삼(白蔘)으로 나뉜다. 그런데 한국산 백삼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힘을 잃어버렸고 대부분 국내 시장에서만 유통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세계 백삼 시장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생산되는 백삼이 장악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가 인삼 종주국이라는 명성과 권위를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것은 6년근 홍삼 때문이다. 현재도 6년근 홍삼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데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그런데 한국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는 6년근 홍삼 제조기술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면 한국 인삼은 경쟁력을 잃고 끝장날 수밖에 없다』
최박사의 염려대로 현재 세계 인삼전쟁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삼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눈치챈 여러 나라들, 특히 캐나다는 진작부터 캐나다 이민을 희망하는 한국인들 중에서 인삼 재배 및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가 IMF체제를 맞아 이민 희망자가 늘자 캐나다는 여느 이민에 대한 규제는 한층 강화했지만, 인삼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우대를 받는다. 게다가 캐나다와 미국 등지의 인삼 회사들은 가끔씩 인삼 기술을 아는 한국인을 모집하는 광고를 인터넷에 띄우기도 한다.
인삼 종자 유출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산 인삼 종자는 외국 학자들이 필사적으로 입수하려고 한다. 인삼종자 연구에 매달려온 최박사는 『연구용 종자를 보내달라』는 외국 학자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려왔으나 거절했다고 밝힌다. 이 때문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외국 학자들과 척을 지게 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최박사는 이미 어느 정도는 종자가 유출됐을 것으로 판단한다. 종자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국내 학자들 일부가 아무 생각없이 외국학자들에게 종자를 건네주거나, 인삼 경작을 하는 농민들에게서 유출된 종자가 바다를 건너간 사례가 있다는 것. 이는 특히 96년 7월 국내의 홍삼전매제가 폐지된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최박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이렇게 설명한다.
『산이 많은 캐나다에서는 한국의 토종인삼 종자를 밭이 아닌 산에다 뿌려 산삼 같은 6~7년근 인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후 및 토양이 갖춰져 있다. 만일 이들이 여기서 캐낸 인삼으로 한국식 홍삼 제조 기술로 홍삼을 개발해내면 한국 홍삼은 일거에 세계 시장에서 쫓겨나 백삼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일단 세계 인삼전쟁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삼의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삼은 보통 4~6년간 밭에서 재배한 후 캐낸다. 일반인들도 밭에서 재배되는 인삼이 몇 년 됐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1년 된 인삼은 잎이 한 갈래이고, 2년 된 인삼은 잎이 두 갈래다. 3년 인삼은 잎이 3갈래, 4년 인삼은 4갈래, 6년 인삼은 6갈래가 된다. 그리고 생장 햇수에 따라 4년 된 인삼을 「4년근」이라고 하며, 6년 된 인삼을 「6년근」이라 부른다. 이 중에서 6년근 인삼을 최상품으로 친다. 인삼은 7년이 넘어가면 성장이 더뎌지고, 체형이 불량해지며, 표피가 목질화되는 등 노화현상이 나타나기 때문.
한편 채굴된 상태의 인삼은 75% 정도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흔히 수삼(水蔘)이라고 표현한다. 수삼은 1주일 이상 저장하기가 어렵고 특히 유통과정에 부패하거나 손상되기 쉽기 때문에 가공처리돼야 한다. 이때 햇볕 혹은 열풍(熱風) 등에 말린 것을 백삼(보통 하얀 색깔을 띰)이라 하고, 증기 등에 쪄서 익혀 말린 것을 홍삼(불그스레한 색깔을 띰)이라고 칭한다. 이 외에 물에 삶아 말린 「태극삼(太極蔘)」이란 종류도 있다.
그런데 인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는, 매우 까다로운 식물이다. 인삼은 비교적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를 좋아하며 오염되지 않은 사질(砂質) 양토에서만 자란다. 이 때문에 자연생 인삼은 북반구에만 분포돼 있으며, 인삼 재배지도 북반구의 극동지방에 주로 분포한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은 인삼 생육의 최적지에 해당하며, 세계적으로 한국 인삼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특이한 것은 한반도 내에서도 충북을 경계로 해 그 이북지역에서는 6년근 인삼(홍삼)이 잘 자라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그 이남 지역에서는 4년근 인삼(백삼)이 재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삼이 언제 발견돼 보혈강장(補血强壯)의 약초로 사용됐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문헌상으로 인삼을 강장제 또는 영약(靈藥)으로 약물사에 처음 기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인 전한(前漢) 원제(元帝:BC 48~33년) 때 『급취장』이다. 또 동양 최고(最古)의 의약서인 『신농본초경』(6세기 초)에는 인삼의 효능을 고려삼(고구려삼)과 백제삼으로 비교해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늦추어 잡아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최소한 20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한국 인삼의 학명은 「파낙스 진생(Panax ginseng)」. 조선시대인 1843년 소련의 과학자(C.A. Meyer)가 명명한 것으로, 그 어원을 보면 Pan은 「모든 것」, Axos는 「의학」이라는 뜻으로 만병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현재 고려인삼이 속하는 「오가피과 파낙스속 식물」로는 전세계에 6종이 있다. 이 중에서 고려인삼만 그 뿌리 모양이 다른 삼과는 달리 사람을 닮았다 해서 사람 인(人)자를 붙여 「진생(ginseng;人蔘의 중국식 발음)」이라고 불린다. 한국의 백삼을 물리치고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캐나다와 미국 삼(일명 화기삼)은 그 모양이 원추형으로 「파낙스 킨케폴리움(Panax quinquefolium)」이라는 학명이 붙었다.
파낙스 진생, 즉 고려인삼은 식물 분포상으로 아시아의 극동지방에서만 자생하는데 북위 30도에서 48도 사이인 한국, 중국 만주, 러시아 극동의 연해주 3개 지역에서만 산출된다. 고려인삼의 자생지인 이들 지역이 모두 삼국시대 우리나라 영토였다는 점과도 일치하고 있다.
세계인삼시장 전쟁터인 홍콩. 전통적으로 이곳이 자유무역지대인데다 인삼의 주요 소비국이 모두 홍콩 인근에 있기 때문이다. 1997년 기준으로 인삼의 주요 소비국은 중국 홍콩 한국 일본 대만 동남아 순. 한국담배인삼공사가 출연한 홍콩 현지법인 「홍콩유한공사」는 6년근 한국 홍삼으로 전세계 삼(蔘) 제품과 전쟁을 벌이는 야전사령부에 해당한다.
광고전도 치열하다. 한국을 비롯해 캐나다, 미국, 중국 등 인삼 생산국은 주요 인삼소비국의 TV와 신문 잡지 등에 치열한 광고전을 벌이고 있다. 홍콩의 경우 유명 배우들을 동원한 TV광고와 네온사인 등 옥외광고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한국은 「정관장 고려삼」이라는 6년근 홍삼 브랜드로 세계 최고의 품질이라는 이미지 굳히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담배인삼공사가 이들 지역에서의 광고 판촉비로 집행한 금액만 46억2700만원에 이른다. 올해의 경우 집행 예산은 이보다 늘어난 51억4800만원. 그만큼 타국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다는 뜻.
홍콩유한공사의 「야전사령관」 서원석사장은 홍콩시장에서 형성되는 인삼 가격이나 품질이 국제기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척도가 되는 제품은 아직까지는 6년근 한국 홍삼. 그 중에서도 최상품인 「천삼 십지(天蔘 十支:6년근 홍삼중 사람처럼 두 다리가 곧게 뻗은 것으로 10여 뿌리가 들어 있는 제품)」 가격이 결정된 다음에야 그 이하의 제품이 순서에 따라 값이 매겨진다. 현재 천삼 십지는 미화로 1600달러(우리나라 돈으로 288만원)라는 어마어마한 고가에 거래된다. 그 뒤를 「지삼 십지(地蔘 十支:6년근 홍삼 중 다리가 하나로 뻗은 것)」가 잇는다. 서사장의 귀띔.
『천삼 십지 같은 홍삼제품은 홍콩과 동남아의 화교, 중국대륙의 부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 고위 관리들에게 줄 선물용으로도 많이 사용되는데,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이 때문에 우리 제품을 모방한 가짜 상품들이 나돌아 단속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그러나 6년근 홍삼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인삼 제품은 인삼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이 여지없이 손상당한 상태. 현재 세계 인삼 시장은 한국과 중국, 북미(캐나다 및 미국)의 삼파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 인삼(홍삼과 백삼 포함)은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다. 홍콩 통계청이 작성한 「연대별 각국 삼별 홍콩시장 점유율」에 따르면 96년 경우 중국 삼이 2948t을 수출, 46.6%의 시장 점유율을 보였고 북미 삼이 1260t으로 시장 점유율이 19.9%임에 비해 한국 삼은 163t으로 불과 2.6%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해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 저가격 삼인 북미 삼과 중국 삼이 전체 교역규모의 96%를 차지했고 우리나라 인삼은 3%를 넘지 못했다. 「정관장 고려삼」이 물량면에서 그나마 2.6%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97년 인삼 교역에서 특이한 점은 북미 삼인 화기삼이 중국 삼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는 것. 화기삼은 426만근이라는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로 무려 1억17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 뒤를 이어 중국 삼이 286만근을 수출해 2300만 달러를 벌었고, 한국 인삼은 18만근 수출로 겨우 2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서사장의 해석.
『한국 인삼이 뒤처진 것은 경작하기가 쉽지 않은 6년근 고급 홍삼(천삼 및 지삼)의 만성적인 공급 부족과 함께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한국산 백삼이 홍콩시장에서 완전히 꺾였기 때문이다. 한국 백삼의 경우 홍콩 시장에서 지난해 불과 240만 달러의 수출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한국 백삼이 북미산 인삼보다 헐값에 팔린다는 점이다』
과연 한국의 백삼은 캐나다 및 미국의 화기삼보다 생김새나 약효가 떨어지는 것일까? 어쨌거나 홍콩 시장에서 나타난 결과는 인삼 종주국의 권위에 구멍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백삼이나 홍삼 모두 재배 햇수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종자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캐나다와 미국인들의 북미삼 판매 마케팅 전략이 인삼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홍콩과 대만에는 한국 인삼을 깎아내리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한국의 고려 삼은 몸에 열을 올리는 역할을 하고, 북미 화기삼은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 소문은 그러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인삼 소비자들에게 매우 강력하게 파고 들었다. 기후상 아열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몸의 기운을 돋워주면서도 열을 내려준다는 말에 한국삼 대신에 화기삼으로 급격히 돌아섰다는 것.
한국담배인삼공사측의 분석에 따르면 이와 같은 화기삼의 광고는 미국정부 지원기관인 GBW(Ginseng Board of Wisconsin)의 주도로 한국 인삼을 꺾기 위해 오랜 연구 끝에 내놓은 전략이라는 것.
게다가 한국 인삼을 견제하려는 중국측의 이해관계도 맞물려 중국학자들도 미국 편을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중국의 일부 중의사들은 한국 인삼은 온(溫)한 약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미국 삼은 냉(冷)한 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운 동남아 지방에 사는 사람이나 여름철에는 냉한 삼의 복용을 권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중간의 역사적 배경도 깔려 있다. 중국 남부의 윈난성에서 주로 재배되는 전칠삼(田七蔘)은 중국의서 『본초강목』에서 주 효능이 지혈(止血)작용으로 기술돼 있어 고려 삼에 비해 광범위한 약용 작용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고가인 데다 구하기도 쉽지 않은 고려 인삼을 써야 했다. 그러다 18세기 초 캐나다에서 북미 삼이 처음 발견돼 중국 상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중국인들은 이를 고려 인삼의 대체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 기자가 입수한 미국 삼 판매회사의 광고 팜플렛에서는 노골적으로 한국 인삼을 왜곡해 폄하는 대목도 있었다. 미국 삼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위스콘신주에 있는 「슈즈(Hsu’s) 인삼회사」가 제작한 팜플렛에는 한국 인삼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돼 있다.
『한국 인삼은 전세계에서 가장 자극적인 삼이다. 한국 인삼은 따뜻한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에 「불」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홍삼과 백삼 모두는 양(陽)이기 때문에 냉한 음(陰)체질의 사람들이 사용한다. 그리고 한국 인삼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복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팜플렛은 바로 이어서 이탤릭체로 글씨체를 바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한국 인삼은 매우 급격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할 때 사용해야 하며, 장기간 혹은 매일 복용해서는 안 된다. 장기간 혹은 매일 복용하려면 미국 인삼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 인삼을 노약자들에게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 광고는 한국 인삼을 폭발 약품 같은 매우 위험한 약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양의 음양 이론을 교묘히 빌려 그것이 설득력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의학서에 의하면 고려 인삼은 기가 허한 증세, 즉 인체의 생리기능이 저하된 기허증(氣虛症)에 사용되는, 가장 으뜸가는 보기약(補氣藥)으로 명기돼 있다. 말하자면 음과 양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한 약리작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북미의 화기삼은 음허(陰虛)에 사용하는 보음약(補陰藥)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즉 음기를 돋우고,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는 약이기 때문에 출혈성·감염성 쇼크·허탈증에 써서는 안 된다. 특히 위장이 찬 사람에게는 화기삼의 사용이 금기시된다.
이와 더불어 한국삼과 화기삼에 대한 약효 성분분석 대결 역시 치열하다. 한국인삼연초연구원의 남기열 박사는 북미 화기삼의 「약효 공세」가 한국 인삼을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왔다고 말한다.
인삼의 주요 약효 성분으로 알려진 「사포닌」은 현재 인삼 제품의 품질관리 지표 성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세계를 삼분하고 있는 한국의 고려인삼과 북미의 화기삼, 중국 남부 윈난성에서 주로 재배되는 전칠삼에 대한 사포닌 성분 분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포닌은 종(species)별로 크게 PD계 사포닌과 PT계 사포닌으로 나뉜다. 그런데 PD계와 PT계 사포닌을 합해 화기삼은 13종, 전칠삼은 15종에 지나지 않는 반면 고려인삼은 그 배가 넘는 30종에 이른다.
그러나 사포닌의 절대 함량 면에서는 역전현상이 벌어진다. 화기삼과 전칠삼은 사포닌의 절대 함량이 4~5%를 차지하는 반면 고려 인삼은 오히려 3~4%로 떨어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 또 세 인삼 모두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사포닌 종류 중 하나인 Rb1은 중추신경억제 및 정신안정 작용 등을 하는 성분으로 밝혀져 있는데, 화기삼이 고려 인삼에 비해 3.5~4배 높게 나타난다. 남박사의 해석.
『이를 테면 화기삼의 사포닌 절대 함량이 우리 삼보다 많다거나 Rb1의 성분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인삼 소비자들에게 화기삼의 약효가 더 좋다는 식으로 얼마든지 왜곡 선전이 가능하다. 게다가 화기삼은 다른 삼에 비해 우리 삼과 모양이 비슷하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남박사는 9월22일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국제 인삼 심포지엄도 사실은 이런 것들을 경계하려는 의도가 배경에 깔려 있는 학술행사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인삼의 약효를 사포닌 성분으로만 따져 들어가다 보니 외국 학자들에 의해 외국 삼이 우월할 수 있다는 논리에 말려들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는 것.
이를 테면 고려 인삼에서 사포닌의 함량은 몸체보다 잔뿌리(8.8%)에서 화기삼(4~5%)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게다가 사포닌 성분은 뿌리 외에도 줄기나 잎에서도 발견되며, 그 함량은 잎에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 극단적으로 사포닌 함량으로만 따지자면 화기삼을 먹는 것보다 고려 인삼의 잔뿌리나 잎을 먹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한의학에서는 잔뿌리보다는 몸체의 굵은 뿌리를 약용으로 중시해왔다. 이는 인삼의 약용가치가 높은 것은 사포닌의 절대 함량 이외의 다른 요인 때문임을 보여준다.
또 고려삼은 진정작용을 하는 PD계 사포닌과 완만한 흥분작용을 일으키는 PT계 사포닌이 균형적인 비율(1.34)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해 화기삼은 PD계 사포닌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불균형성(2.07)을 보이고 있다.
한편 비사포닌계 성분분석에서 고려 삼의 효용이 탁월하다는 것이 국내 인삼 연구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예를 들어 면역증강효과를 가져오는 산성 다당체 성분의 경우 한국 홍삼이 7.49%인 데 비해 미국 삼은 2.09%, 전칠삼은 2.25%에 불과하다. 또한 암세포 증식억제 및 종양활성을 나타내는 폴리아세틸렌계 성분 분석에서도 고려 홍삼은 북미나 중국 삼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방사선 방어 효능을 가지고 있는 열안정성 단백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 삼이 북미 삼이나 전칠삼에 비해 2~3배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남박사의 결론.
『여하간 이번에 개최되는 국제 인삼 심포지엄에서는 한국측의 대공세가 있을 예정이다. 관능 시험에서도 다른 삼에 비해 구수하고 단 냄새가 나는 고려 인삼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면서 한국 삼과 북미 삼의 온냉 논리를 깨뜨리는 행사가 될 것이다』
이처럼 한국 인삼은 성분에서도 결코 북미 삼이나 중국 삼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 인삼, 특히 백삼이 국제시장에서 참패한 것은 우리의 잘못된 인삼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비판론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간 한국의 인삼법은 여러 차례 변천을 가져왔고, 덩달아 백삼 수출의 부침은 종잡을 수 없었다.
한국의 백삼 수출제도가 전면적으로 개편된 것은 1977년의 일. 전세계를 7개 지역군으로 묶어 지역별로 지정된 업체를 통해서만 수출할 수 있게 단일화시켰다. 그 이전에는 53개 군소업체가 서로 난립, 과당경쟁과 덤핑 수출을 일삼아 백삼 수출 질서가 문란해지고, 덩달아 품질 불량으로 인해 클레임에 걸리는 등 역작용이 심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0년이 지난 87년 전두환 정권 시절에 백삼 수출 창구가 다시 전면적으로 개방되기에 이른다. 이는 국내 인삼 가격이 계속 하락세를 보이자 인삼경작 단체들이 반발했기 때문. 인삼경작단체들은 수출창구를 독점한 두산산업 등 업체들이 수출시장 개척은 등한시하고 인삼가격 형성을 주도한 것이 그 원인이라며, 수출창구를 개방하라고 거세게 요구했다.
아닌 게 아니라 76년 한국 인삼은 홍콩 인삼 시장에서 총 64t의 물량으로 13.5%의 시장 점유율(홍콩 통계청 자료)을 보이고 있었는데, 수출창구가 단일화되고 10년이 지난 86년에는 시장이 늘어나기는커녕 점유율이 오히려 7.5%로 줄어들었다. 대신 중국 삼은 7.5%(76년)에서 41.7%
(86년)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했던 것.
여하간 87년 당시 사회 전반적인 자율화 분위기와 맞물려 백삼 수출창구를 개방하는 쪽으로 인삼법이 개정됐다. 그러나 이 역시 10년이 흐른 96년 7월1일 인삼법이 개정되기까지 기대와는 달리 수출시장의 완전 참패로 나타났다.
88년 한국담배인삼공사의 홍삼을 제외한 민간의 인삼 수출(뿌리삼 수출)은 2300만 달러였는데 해가 갈수록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96년에는 774만 달러로 몰락했고, 그 이듬해인 97년에는 결국 642만 달러라는 치욕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한 인삼 수출업자의 뼈아픈 고백.
『수출 창구가 개방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 백삼은 외국 바이어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바이어들이 인삼수출업체들을 찾아와 서로 자기에게 팔아달라고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87년에 수출 창구가 개방된 이후 수출업체들이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했다. 이번에는 한국의 수출업체들이 서로 싼값에 인삼을 팔겠다고 바이어들에게 로비를 벌이는 현상이 벌어졌다. 자연히 가격 덤핑에 의해 수출 채산성이 악화됐고 이는 인삼의 품질 하락으로 이어져 백삼시장이 궤멸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백삼 수출시장이 몰락하는데도 정부 당국은 자유경쟁 논리에 따라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98년 현재 한국의 인삼 수출 시장은 이전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다. 96년 7월1일자로 인삼법이 개정돼 그간 담배인삼공사가 독점하고 있던 홍삼 전매제가 폐지된 데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담배인삼공사 자체가 민영화 대상 0순위로 확정됐다. 덩달아 홍삼사업부문도 매각해야 한다.
문제는 담배인삼공사가 전매하던 6년근 홍삼이 흑자가 아니라 적자라는 점이다. 담배인삼공사측에 의하면 해외에서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6년근 홍삼이지만, 매년 100억~150억원의 적자를 기록해왔다.
이는 연작이 불가능한 인삼의 생리적 특성 때문에 재배 면적이 감소 추세에 있는데다, 인삼경작자들이 실패 가능성이 높은 6년근 홍삼보다는 경작 기간이 짧은 4년근 백삼 경작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분석. 게다가 6년근 홍삼의 경우 투자 자본을 회수하는 데 최소한 7~8년이 소요된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담배인삼공사 관계자의 말.
『공사 입장에서는 6년근 홍삼의 경우 애초부터 경제적 이득을 보고 홍삼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비록 적자를 보지만 담배인삼공사가 담배만이 아니라 인체에 유익한 홍삼사업을 한다는 것이 공사 이미지 홍보에 도움이 될뿐더러 100여 년 동안 내려온 국가 전매사업을 이어간다는 사명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홍삼 사업이 민영화될 경우 민간 기업체가 인수하려 들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이와 관련해 6년근 홍삼 경작자들의 단체인 김포인삼협동조합의 임진호 조합장(64)은 매우 강경하고 비감한 어조로 말한다.
『6년근 홍삼 경작자들은 홍삼사업이 민영화될 경우 6년근 홍삼재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공사측에서 홍삼을 전량 수매해주었기 때문에 우리 경작자들이 버텨올 수 있었다. 6년근 홍삼 농가의 경우 홍삼이 전부 수매되더라도 평균적으로 전체 농가의 30%가 이득을 보고, 40% 정도는 거의 본전에서 조금 웃도는 정도고, 나머지 30%는 손해를 보게 돼 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크다. 그런데 정부 소속의 공사가 아닌 민간단체가 홍삼 사업을 할 경우 전량 수매한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그동안 공사측이 6년간 무이자로 빌려주는 홍삼 재배 계약금 같은 지원 혜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임 조합장은 6년근 홍삼을 재배하는 6개 조합장들이 모여 한국홍삼포 협의회를 결성했고, 홍삼사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진정서를 정부에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해외에서 더 생긴다. 그동안 6년근 홍삼은 「정관장 고려삼」이란 브랜드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다. 인삼소비의 주시장인 아시아권에서는 정부=전매청(공사)=정관장으로 인식해왔다. 말하자면 정관장은 정부가 관리하는, 그래서 믿고 살 수 있는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다. 그런데 홍삼사업이 민영화될 경우 돈으로 셀 수 없는 가치인 브랜드 이미지는 추락하게 되고 한국 인삼은 외국 삼들의 공세에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게 홍콩유한공사 서원석 사장의 진단.
『홍콩의 중국인들은 고려삼 사업을 3~4대에 걸쳐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인삼 상인(중약상)들은 우리 삼을 취급한 경력을 커다란 명예로 여길 정도다. 96년 중국이 남중국해로 미사일을 발사해 대만에 일시적으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났을 때 일반인들은 미 달러화를 구하려고 난리치고 있는 동안에 중약상들은 달러 대신에 정관장 고려삼을 먼저 챙겼다는 일화는 지금도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홍삼 산업이 민영화될 경우 의심 많은 중약상들은 절대 믿지 않는다. 사실 인삼은 겉으로 보아서 4년근인지 6년근인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서로간의 신뢰가 가장 큰 무기다. 민영화라는 것은 극단적으로 전쟁터의 군인에게서 총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국영기업 민영화 방침을 무슨 성역처럼 다루고 있는 정부의 기획예산위가 지침을 바꾸지 않는 이상 담배인삼공사의 민영화와 함께 조만간 홍삼사업도 민영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6년근 홍삼 재배업자들은 홍삼 사업 자체를 포기하거나 4년근 인삼 재배로 돌아설 것은 뻔한 일. 덩달아 4년근 인삼재배가 늘어나는 바람에 국내 인삼시장도 붕괴하게 된다. 이와 함께 한국 인삼에 가장 위협적이고 한국 홍삼 제조기술을 빼내려고 안달하는 북미 인삼업자들이 자연스럽게 세계 시장을 장악할 수밖에 없고, 이로써 2000년간 내려온 인삼의 종주국으로 권위를 자랑하던 한국도 마침내 인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다.
인삼연초연구원의 최광태 박사는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으로 불어닥친 IMF체제 상황에서 2000년 전통의 인삼을 지키지 못하고 저승에 가면 조상들에게 무슨 낯을 들 수 있을지…』 하고 말끝을 흐렸다.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첫댓글 좋은정보 .. 공부잘했습니다 ^^
좋은자료 구경잘했습니다.
유용한자료 즐감했습니다
정부와 학계의 부단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한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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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 즐감요
항상 좋은자료 감사드리구요.
산삼의 계절인 6월달에도 안산하시고 대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