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주여행과 설레임(200718)
설레임을 느낀 적이 언제쯤이었을까. 두려움이 수반되지 않는 설레임은 그 이상 설레임이 아닌 것 같다. 한평생이란 짐을 싣고 달려가는 수레바퀴는 내가 태어나는 찰라 시작해서 잠시 머물며 설레임과 두려움이란 두 바퀴를 굴리며 여행하다가 순간 안개가 걷히듯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실루엣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설픈 사주상담 준비를 게을리 한 내게 그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다가왔고 두려움을 설레임으로 온 힘을 다해 극복하고자 애쓰는 내게 찡긋 미소 지으며 사라졌다. 나는 지금 지하철 역사 벤취에 앉아 들어오고 나가는 지하철차량들과 자정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유유히 바라보며 오늘 예상치 못한 시간에 시작한 사주여행의 첫 흔적을 남기려 한다.
몸은 솜처럼 피곤하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5호선지하철 군자역통과 중 전화를 받았다. 평소 나이를 생각 않고 편하게 지내던 영우빌딩의 경비아저씨(85세)다.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전선을 연결하긴 했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아 3층 일부 사무실이 업무을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코로나사태로 여러 달째 임대되지 않던 사무실을 가까스로 임대료까지 깎아가며 삼팔따라지 건물주가 세 놓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입주사무실은 부동산프로그램 개발업체인데 오늘 밤을 패서라도 내일 구매업체대상으로 하는 아침 공공시연을 성공리에 마쳐야 한다고 건물사장까지 전화를 해 부탁을 넣었다.
천호역에서 잠실을 거쳐 아시아올림픽 맞은 편에 있는 영우빌딩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가 좀 지나서였고, 보조자 없이 사다리를 오르나리며 어설픈 실력으로 작업이 끝난 시간은 오후 9시가 좀 지나서였다. 와이셔츠가 땀범벅이 되어 냄새풍기는 모습이 안스러웠던지 경비아저씨는 미안한 표정으로 냉커피 한잔을 내게 건냈다. 경비아저씨에게 환한 미소로 답하고 짐짓 거수경례 제스처를 날리고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휘청거리기는 했어도 너무나도 행복했다.
천호역에서 상일동행 지하철5호선을 환승하자 휴대폰이 요동쳤다. 무심코 전화를 받았는데 ‘거기 사주 보는데 아닌가요?’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소용돌이에 지하철멘트까지 겹쳐, 어쩔지 몰라 당황하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스럽게 기다리며 두려움속에 안주하지 못하며 서성이던 터이어서 이 무슨 행운인가 감사한 마음도 교차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잘 견디면 행복한 사주여행이 시작된다는 양면성의 설레임으로 가슴이 벅차기 시작했다.
올게 드디어 왔다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되어버렸지만 나는 이미 연습한 대로 어눌한 가운데서도 상담자의 멘트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마주해야 된다는 그리고 피할 길을 주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당황반, 두려움반 속에서 너는 잘 해낼거야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을 정리하자 나 자신은 어느새 어벙벙한 모습이 사라지고 그럴듯한 억센 내가 되어 일일 저지르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11번 균양입니다. 무엇이 궁굼하신가요?’라고 되받았다. ‘교제하고 있는 남성이 있는데 좀 알아보려고 해서요?’라고 말하는 여성의 음성은 조용하면서도 힘 있고 씩씩해 보였다. 문득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 중 어떤 여성분이 내게 용기를 줄려고 일부러 전화상담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귀를 쫑굿 세웠다. 각본대로 지껄이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고, 게다가 상담자의 멘트를 응수하며 섣부른 나의 판단을 임기응변으로 수정해 나가는 가증스러운 나를 바라보는 것은 또 하나의 아픔이면서 자랑이었다.
‘먼져 선생님의 생년월일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을 앵무새처럼 해댔다. ‘1965년 3월 *일입니다’라고 답하자 ‘태어난 시간은요?’라고 질문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소죽쑤러 사랑채 나갈 때라고 말하시던데요?’라고 하자 ‘그럼 양력6월이니까 오후 7시쯤되었을 거예요’라 내가 말하자 ‘네, 그럴 것 같네요’하며 맞장구쳤다. ‘선생님은 음력 1965년 5월 * 오후7시에 태어나셨습니다’라 답하자 ‘아니예요. 3월입니다’라며 좀 전의 차분하던 음성이 좀 더 당당함으로 변화되었고 검연스러워 어줍어하던 마음이 서서히 안정되고 있음이 음성을 통해 감지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 여성은 우리도반중의 여성이 아니라는 느낌으로 다가와 불안이 한겹 풀리고 용기도 생기기 시작했다. 정확한 상담은 아니라도 이 여자에게 용기를 주는 상담을 하면 되겠구나라는 마음까지 열리니 그때까지 잘 구별되지 않던 핸드폰단추도 서서히 보이고 핸드폰 글자가 하나씩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로지 핸드폰에 의지하여 스피커폰을 켜놓고 상담자와 대화하며 느리게 그리고 서서히 원광만세력을 펼쳐 사주를 뽑는다. 이렇게 상황이 조금이나마 안정되니 내가 보이고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내고 있는지 두려움의 절정에 몸을 떤다. 호흡을 어렵게 눅이고 또렷하지 못한 억양을 강조하며 일들이 풀리기 시작하니 여러사람이 드나드는 역사 내에서의 소음과 행동자체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사주를 뽑으니 여덟글자가 한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멍해진 상태로 흐르기를 잠시, 뭔가라도 버벅대지 말고 망설임 없이 자신있게 말해야 한다고 하얀 머릿속은 숨가쁘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 일간甲木에 대해 말해 주어야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주에는 본래의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보통 잠을 청하다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거실에 나와 어둠속에 앉아 있을 때 느끼게 되는 참마음을 말하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라고 던졌더니 ‘예, 말씀해 주시겠어요?’라는 호기심스런 응답이 왔다. ‘선생님은 다정다감하거나 정스러운 분은 아닐 것 같습니다. 초목으로 보면 큰 나무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이 쉬게 해주고 이해배려해주니까 그들이 션생님을 따르고 싶어하지요. 선생님은 쪼잔한 것을 따지지 않고 왼만한 일은 통크게 넘기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는 대범한 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그런 편입니다. 그런대요?’라는 응답이 왔다. ‘늦봄에 태어나서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어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저는 그 남자친구를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요즘은 헤어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친한테 여자가 있는 것 같거든요? 제가 다정다감하진 않지만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그 남자한테 여자가 있을가요?‘라고 물어왔다.
‘남자친구의 사주를 알 수 있을까요? 사주를 보면 남자가 그럴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행동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는 사람인지는 판단할 수 있거든요?’라고 답하자 바로 ‘사주를 알려드릴게요. 그이는 1960년 3월 *일이고 午시 예요.’라고 했다. 午시라는 걸 아는 걸보니까 11:30-13:30시 라는 걸 아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의 말을 듣고 전달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판단이 들어 여유가 생기자 갑자기 고 교수님이 강의 중 동일한 일간이 만났을 때 역설하시던 포인트가 떠올랐다. ‘선생님과 남자친구가 똑 같은 본 참마음이시네요. 남자친구와 같은 참마음을 갖고 계셔서 어떤 일을 협의할 때는 그야말로 죽이 맞아 의기투합이 잘 되어 일이 일사천리로되기 때문에 둘이는 잘 맞는다고 천생연분일 거라고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서로 뻣대나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갈등이 생길겁니다‘라고 말하지 대뜸 ’제가 많이 참는 편입니다. 그게 많이 힘든데다 요즘 그 남자가 여자가 있는 듯한 행동을 보입니다. 그게 너무 힘들어 헤어질려고 이렇게 물어보는 거거든요? 여자가 있는게 확실한지 알고 싶어서요.‘라며 떨리는 한숨을 진정하려 애쓰며 이어갔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거나 슬펴하는 여성의 아련함과 불안감은 전해지지 않았고 여전히 당당함과 씩씩함이 내내 묻어 있었다. 과연 甲木의 심성이 이렇구나 실감하니 못내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남자의 사주를 보면 남자는 봄에 태어난 큰 나무라 선생님처럼 씩씩하고 당당해서 무슨 일을 해도 거침없이 자신있게 속된 말로 떠벌리고 다니니까 여자들이 이 남자의 겉모습을 보면 안되는게 없고 다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확끈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실제로는 여자들이 달라붙으려 대쉬해도 마음뿐이지 행동에 옮기지는 못하는 남자의 심성입니다. 주변 여자들도 호감을 갖고 몇 번 만나다 보면 눈치 채게 되니까요. 시간이 흐르면 선생님께로 다시 돌아올게 뻔합니다. 선생님이 받아 줄 것이냐 아니냐가 문제라면 문제지요. 교제한지는 얼마나 되었나요?’라고 말하자 ‘올해로 3년 되어가는데 여자가 있는 것 같아서 해어질려고요. 여자가 있나요 없나요?’로 질문을 하면서, 물에서 구해준 은인에게 보따리를 내 놓으라고 하듯 추궁했다. ‘3년이 되었으면 서로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천생연분은 누구나 하는 상상이지요, 제 경험으로 말하건데 천생연분을 100점으로 볼 때 아주 좋은 궁합이 75점입니다. 음과 양이 부딪힌다는 것은 서로 맞춰갈려고 애쓰는 좋은 현상이지요. 모난 돌이 서로의 쇠정에 맞아 둥굴어져 부드러워지기 때문이지요. 남친의 직업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라 묻자 ‘연립이나 가정집을 사서 집을 지어 되파는 일을 하고 있는데 코로나때문에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혹 그게 무슨 연관이라도?’라며 기대반,걱정반 관심있는 표정이 연상되었다. ‘선생님이 일을 하셔도 일한 만큼 결과가 따를려면 선생님께는 그 남자가 필요합니다. 그 남자가 토목건축관련일을 계속 하는 한 선생님일이 잘 되니까요. 그리고 그 남자친구에게도 선생님과 함께 하셔야 선생님의 당당함과 씩씩함으로 자기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 남자보다도 선생님이 그를 필요로 하니 선생님은 그 남자를 사랑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나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상담자는 내게 헤어지는게 좋다고 말할 것을 애써 주문하고 또 확인해야 되겠다는 의지를 통신의 힘을 빌려 전달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오래 시간을 끌어 상담자와 대화해야만 내게 유익이 된다는 그런 생각은 이미 내 맘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왜냐하면 여자 역시 사주에서 부족한 정답을 찾고 이미 거기에 맞추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상담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편이 되어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 are sorry’라며 울림을 계속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담자도 이제는 식상한 듯 머뭇거림이 전해왔다. 나는 상담자에게 마지막으로 전할 말씀이라고 하면서 ‘때로는 힘들겠지만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서로 정스럽진 못해도 의기투합이 잘되고 3년 정도 교제하였으니 때때로 다소곳한 여성으로 이를테면 귀가할 때 또는 약속장소에서 씩씩하고 당당한 여성스런 모습을 기회있을 때마다 색다르게 연출해 보여주면서 자신만의 여성으로서의 당당함을 부각시켰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라고 전하며 전화를 내려놓고 상담자의 전화끊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급한 불이 마무리되지 이제는 가방과 우산이 생각났다.혹시나 선한 사람이 이들을 발견하고 주위에 없자 역무실에 신고해 보관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역무원 사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역무원 사무실에 문의해보니, 역무원이 보관하고 있었고 몇 가지 확인절차를 거쳐 나의 신원과 내용물이 확인되자 바로 내어주었다.
다음 순서는 카드사에 분실신고한 것을 해지하여 정상화시키는 일이었다. 분실신고와는 역순서로 카드를 정상화했다. 다만, 버스나 지하철을 3일간 이용하지 못한다는 불편아닌 불편이 따를 뿐, OECD가 인정한 65세가 넘은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괜찮았고 그 이유를 알 필요조차도 없었다. 다만, 에너지를 다 써버린 폐기 직전의 축전지처럼 된 나를 저편에서 미소지으며 다정한 눈길로 응시하며 응원하는 그 분을 향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상일동행 열차접근 신호가 띠리링띠리링 멘트가 들려오고 나는 내가 이렇게 행복해해도 되는지 그저 미안해하며 상일동행 열차를 향해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