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와 책장 정리하기
주부라면 이런 일을 간혹 겪어보았을 것이다.
우연히 떡이나 반찬 등 먹을거리를 얻었는데 당장 먹기가 싫어서
나중에 먹어야지 하는 생각에 냉장고에다 넣어버린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어느 날 냉장고를 정리하던 중 발견하지만
그만 먹을 맛이 없어지거나 어딘지 상한 것 같아 결국 음식 쓰레기통에 넣게 된다.
순간 애꿎은 음식물을 낭비했다는 속상함이 든다.
이런 일은 한 마디로 욕망과 풍요가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결과이다.
나는 이런 속상함을 겪지 않으려고 냉장고 속의 음식물에 다 유효기간을 메모하곤 했다.
우리 주변에는 필요 이상으로 먹을거리가 수요에 비해서 넘쳐나고 있다.
1960~1970년대처럼 먹고 싶은 간식으로 늘 군침을 흘렸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이젠 먼 나라 얘기이다.
옛날에는 못 먹어서 병이 생겼지만, 지금은 너무 먹어서 다이어트가 유행되었다.
거리 음식이나 배달 음식처럼 사방에 달콤한 먹거리는 많으니 어린이 비만 현상까지 생겼다.
그 와중에 음식물 쓰레기는 넘쳐나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환경과 생태를 보호하라는 사명을 지키기 위해선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어느 유명 제과점에선 그날 만든 빵들을 그날 못 팔면 죄 음식물 쓰레기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여직원이 보다 못해 그 빵들을 매일 모아서
퇴근길에 근처 소년가장의 집이나 보육원으로 전달한다는 흐뭇한 기사가 오래전에 나왔었다.
주부로서는 늘 냉장고 비우기가 과제가 되고 있다.
오늘은 냉장고에서 어떤 재료를 꺼내서 음식을 만들까?
냉장고에는 사다 놓거나 선물로 받은 음식 재료,
남은 먹을거리 등으로 늘 해결 거리가 보관되어 있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길에서 홍보용으로 받은 행주와 물수건,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화장품이나 손소독제,
이런저런 상황에서 얻게 된 자질구레한 생활용품이나 가방,
여행지에서 가이드의 언변에 혹해서 구매한 건강식품 등등이 집안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물품들의 일부는 몇 년 지나도 채 사용하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기왕에 사들였으니 언젠가는 사용하겠다는 계획이 덜미가 되어 또는 애착이 있어서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저렴해도 알뜰히 소비하지 못할 것이라면 아예 사지 말것을 습관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책장을 보면 이미 읽은 책 외에 읽다만 책들이 빼곡히 있다.
꼭 읽어야지 하며 사 둔 책들과, 아는 문인들에게서 증정받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끝까지 읽지 못한 시집, 소설집, 수필집, 문예지 등이 진열되어 있다.
앞으론 책을 받으면 그날로 읽어버리겠다고 다짐해도 막상 실천이 어렵다.
서랍 안에는 쓰다가 중단한 원고, 정리하다만 노트들,
계획한 글을 쓰기 위해서 모아둔 자료들, 필사한 자료 뭉치 등이 많이 있다.
읽지 않은 책은 냉장고 속을 정리하듯 좀처럼 버리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읽어야지’라는 결심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내용의 책들이 출판되고,
애착심으로 소장했던 책이라도 익히 아는 내용이 되어서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기도 한다.
비록 버려져 책 무덤으로 가기 전에 읽고자 하는 누군가의 손으로 들어가서 읽힌다면 좋으련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대로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 앞에는 완성하지 못한 채 미뤄두는 과제가 눈앞에 늘 쌓이고 있다.
읽지 못한 나의 책들, 완성을 기다리는 나의 미완성 과제들이
냉장고 속의 먹지 않는 음식처럼 버려지지 않도록 오늘도 다짐해 본다.
이정미 율리안나 고잔 본당, 한국문인협회 회원, 작가
연주제29주일 주보 참조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