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배할 곳은 성벽이 잘 쌓여져 있으면 성문은 안전한가요?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지역인가요? 페루시아 제국에 의해 포로로부터 귀환한 초기 유대인이 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한 이후에도 70여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고 주님을 예배할 수 없는 곳이였습니다. 그 터에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 줄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곳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자신과 한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약속하셨기에 유대 총독 느혜미야로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완벽하게 복원하셨습니다.
비로소 포로로부터 돌아온 유대인과 황폐해진 지역에서 거칠게 살았던 유대인이 비로소 예루살렘에 자리 잡았습니다. 온 유대인들은 완성된 성문 앞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룻기 등을 보면 성문 누각은 사사 시대 때부터 주님 백성이 마주하는 삶의 여러 현실에서 어떻게 주님 백성답게 살지를 지도자들이 결정하는 장소였습니다. 이렇게 성문 앞에서 에스라 학자가 선포한 주님 말씀을 듣고 지도자들은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주님 백성으로 온전히 살아갈 방향을 분별했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거주하기로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과의 약속대로 성전이 있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회는 성전 중심의 주님 백성 공동체가 되어 어디를 가든 그곳이 거룩한 주님이 임재해 계신 장소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과 온 창조 세계의 주인이신 야웨 하나님의 뜻이 오묘합니다. 그분의 창조물들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가 때로 어렵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남유다 왕국에서 마지막 개혁을 이루었던 요시야 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남유다 왕국이 주님과 참된 한 가족으로 만들던 와중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요시야 왕은 국가를 개혁하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가 오래 살아 있었다면 남유다 왕국의 운명은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이 주님께 달려 있기에 요시야 왕의 39살에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주님의 창조물들은 그분의 뜻 모두를 완벽히 알 수 없습니다.
요시야 왕의 죽음에 대해 성경기록은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첫째, 주님은 요시야 왕이 왕국 전체에 내리는 처벌을 보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가 일찍 숨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요시야 왕은 전쟁에서 전사한 이후 무사히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둘째, 요시야 왕은 주님이 이집트 신왕조 파라오를 통해서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세워 그를 맞섬으로 전사했습니다. 요시야 왕에 대한 상반된 기록자의 이야기는 역대기를 읽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즉 한 이야기는 주님이 요시야 왕을 위해 일찍 그가 숨을 거두게 하신 듯 보이지만 또 다른 이야기는 그의 어리석은 오판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요시야 왕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있던 이들에겐 재앙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노래에서 말했듯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남유다 사람들 중 일부는 포로로 끌려갔고, 일부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며, 일부는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버리고 주변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그분의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세간에 흘러가는 이야기는 그분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마치 불매운동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까요. 우리는 계몽주의를 지나면서 이성의 발달로 수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오류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일생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잘 살 수 있을 까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열등한 자가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기고 누리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 생각이 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보아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실과를 먹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아노라 하였잖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결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오를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타락전에 아담과 같습니다. 죄가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죄가운데 들어간 아담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오를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오신이가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사시면서 시간에 제약을 받으며 고통속에 사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간을 가진 고통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참 행복한 자입니다.
70여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곳이 없는 유대인에게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완벽하게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할 곳은 성벽이 잘 쌓여져 있으면 성문은 안전한가요? 우리가 예배할 곳을 잘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성전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성전은 매일 같이 말씀으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