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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 건강칼럼 (379)... 朴明潤의 여행과 나눔의 즐거움
박명윤(보건학박사,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여행과 나눔의 즐거움
혹자(或者)는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고 한다. 한 번은 어머니 자궁(子宮)에서 이 세상으로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여행(旅行)길 위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ㆍ1749〜1832)는 이태리 여행에서 희곡 파우스트(Faust)의 영감을 얻었고, 스티브 잡스(Steve Jobsㆍ1955〜2011)는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한다.
필자(筆者)도 여행을 좋아한다. 지난해 가을 가족과 함께 전라북도 전주(全州) ‘한옥마을’을 방문한바 있으며, 지난 9월 20일에는 전주에서 개최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장: 대통령) ‘교육민족화합포럼’ 세미나 참석차 다시 ‘한옥마을’을 방문하였다.
전주는 견훤(甄萱)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이자,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탯자리로 두 왕조 역사의 중심지였다. 지나온 천년 역사의 저력만큼 전주는 전통생활양식의 근간인 한옥(韓屋), 한식(韓食), 한지(韓紙), 한국소리(판소리) 등 전통문화를 담고 있는 ‘韓스타일’의 거점도시이다.
1977년 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된 ‘한옥마을’은 7만 6320평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문객이 100만명 정도였던 2008년까지만 해도 한옥마을은 문화지향적인 모습을 간직하여 2010년 도시 단위로는 국내 최초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매년 방문객이 급증하여 금년에는 600만명 정도가 될 전망이다. 이에 한옥마을이 대중성과 상업성에 휩쓸려서 애당초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 전주를 찾는 관광객의 약 70%가 한옥마을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새로운 관광거점들을 개발하여 관광객들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에는 가족과 함께 승용차로 3박4일 호남지역 여행을 하면서 전주를 방문하였으나, 지난주에는 우리 포럼 회원들과 함께 고속버스를 이용하였다. 일주일 전에 전주행 KTX 열차를 예약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전주로 가는 전라선(全羅線)은 KTX 운행 편수가 경부선이나 호남선보다 적으며, ‘한옥마을’이 관광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주말 열차예약은 한 달 전에 해야 한다고 한다.
오전 9시 10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한 우등고속버스(요금 18,700원)는 중간에 15분정도 정차한 후 12시경에 전주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한옥마을까지 택시로 이동하여 한식당 ‘양반가’에서 전국(수도권, 중부권, 호남권, 영남권)에서 온 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오찬으로 신선로(神仙爐)를 위시하여 푸짐하고 깔끔하게 차려진 전주전통 한정식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오찬 후 한옥마을에 위치한 ‘최명희문학관’ 세미나실에서 교육민족화합포럼 2014년도 3분기 회의 및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필자는 2013년 7월 1일 창립한 민주평통(民主平統) 교육민족화합포럼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포럼은 민주평통 전ㆍ현직 운영위원 및 상임위원 6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직 국회의원 두 명을 위시하여 대학교수, 연구기관 연구위원, 사회단체 대표, 기업체 임원 등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분기별 회의 및 세미나는 수도권, 중부권, 호남권, 영남권 순으로 개최하며 금년도 3분기 회의는 호남권 전주에서 개최되었으며, 4분기 회의는 영남권 대구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朴明潤 상임대표는 개회사에서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통일교육 및 민족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미나 주제 발표는 광주교육대학교 姜聲慄 교수가 ‘독일통일 경험과 교훈’을 그리고 전북대학교 辛起鉉 교수(사회과학대학장 겸 행정대학원장)가 ‘지역사회의 통일교육 거버넌스 방향’에 관하여 발제를 한 후 참석자들의 질의응답 및 토론이 이어졌다. 세미나 주제 발제 후 인문학(人文學) 특강으로 전북대학교 철학과 陳晟秀 교수가 ‘전주지역 역사 발자취’에 관하여 재미있게 설명을 해 주었다.
금년에 팔순(八旬)을 맞은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李常民 박사(정치학)님을 위한 조촐한 축하파티를 열었다. 참석자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를 때 이상민 교수가 케이크커팅을 했으며, 박명윤 상임대표가 축하선물로 동양난(東洋蘭)을 증정하면서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했다.
포럼 공식순서가 끝난 후 ‘최명희문학관’에 전시된 작가의 육필(肉筆)원고, 편지, 애장품, 영상자료 등을 비롯한 희귀자료를 관람하였다. 대작 ‘혼불’을 집필한 최명희(崔明姬ㆍ1947〜1998) 작가는 전주에서 출생하여 1972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1981년까지 전주와 서울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1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96년 12월 ‘혼불’ 제1〜5부(전10권)을 출간한 뒤, 1997년에는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모여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결성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명희 작가는 지병인 난소암(卵巢癌)으로 1998년 12월 11일 사망했다.
혹자(或者)는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말한다. 한 번은 생명이 끊어질 때이며, 또 한 번은 사람들이 망자(亡者)의 이름을 잊을 때라고 한다. 최명희 작가의 이름은 ‘혼불’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최명희문학관 전시실 관람에 이어 인근에 위치한 경기전(慶基殿)을 관람했다. 경기전(사적 제339호)은 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궁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어진(御眞, 국보 317호)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년(1410년)에 창건되었다.
저녁 식사는 비빔밥전문점 ‘한국관’에서 전주명품 모주(母酒)를 곁들어 전통 전주비빔밥을 먹었다. ‘전주비빔밥축제’가 한옥마을에서 오는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열린다. 석식 후 한옥마을 ‘골목길 투어’를 했으며 골목길 마다 특색이 있어 특별한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저녁 7시경에 모든 일정을 마치고 회원들은 12월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었다. 신기현 전주회의준비위원장은 전주명품 한지(韓紙)를 실로 만든 한지사(絲)로 제조한 양말 세트를 참석자들에게 선물로 증정하였다.
저녁 7시 30분 전주에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약 3시간 후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지하철을 타고 DMC역에서 내려 도보로 우리 집에 도착하니 자정(子正)에 가까웠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활동하여 몸은 약간 고단하였지만 즐겁고 유익한 하루였다.
전주에서 상경하여 이틀 후인 지난 9월 23일(화요일)에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朴明潤ㆍ李幸子 특지장학회(特志獎學會)’ 장학금 수여식이 열려 장학생 3명과 보건대학원 원장, 부원장, 논문지도교수 등이 참석하였다. 趙炳熙 대학원장의 인사말에 이어 필자가 장학생들을 격려하면서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수여식 후 보건대학원장이 참석자들을 오찬에 초대하여 호암(湖巖)교수회관에서 환담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본 장학회는 필자가 회갑(回甲)을 맞은 지난 1999년에 설립하여 2000학년도 제1학기부터 석ㆍ박사 학위논문 계획서를 제출한 대학원생 중에서 우수한 학생 3명(박사과정 1명, 석사과정 2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총 90명에게 연구비를 지급하였다.
장학증서(獎學證書)에는 “위의 사람은 學位論文 硏究計劃書가 優秀하여 保健學 硏究發展에 寄與할 수 있다는 判斷에 따라 朴明潤ㆍ李幸子 特志獎學生으로 選拔하여 學位論文 硏究費를 支給키로 決定하였기에 이 證書를 授與함.”이라고 적혀 있다.
논문 연구비를 받은 학생들은 석ㆍ박사 학위논문이 심사에서 통과되면 인쇄된 학위논문을 필자에게 감사편지와 함께 보내온다. 필자는 이때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최근 석사학위 논문(英文, 2014년 8월 학위 취득)과 함께 보내온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정성이 깃든 ‘손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영진님은 현재 한국원자력의학원(Korea Institute of Radiological & Medical Sciences)에서 의사(M.D.)로 근무하고 있다.
“박명윤 교수님께. 교수님, 안녕하신지요? 저는 올해 보건대학원을 졸업하는 석사 학생 고영진입니다. 교수님께서 주신 장학금으로 석사 논문 영문교정과 책자 등에 감사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한참 학생으로서, 또한 직장인으로서 회의가 들 무렵, 박사님께서 장학금을 수여해 주셨습니다. 저는 한 가정의 엄마이기도 하고, 또 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늘 무언가 부족한 마음이 들어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지만, 일상에 치여 논문 쓰는 것 마저 짐으로 느껴지는 그 순간 즈음 박사님의 장학금은 저에게 또 다른 채찍질과 감사함이 드는, 정말 감사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처럼, 이 논문이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건대학원 졸업생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전진하겠습니다. 조금이나마 교수님을 본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석사학생 고영진 드림”
장학회를 설립하게 된 동기는 지난 1994년 10월 교육방송(EBS) ‘명사(名士)와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1시간 동안 필자가 걸어온 길을 이야기 하면서 대담 마지막 부분에 앞으로의 계획을 언급하면서 가능하면 돈을 모아 장학금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 후 하루 용돈을 5000원 정도로 줄이고 점심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면서 매달 200만원씩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 동안 1억원을 모아 1999년 회갑(回甲)때 사회복지기관, 청소년학회/단체, 봉사단체 등에 기부하면서 5천만원은 서울대학교 특지장학회에 기탁하였다.
회갑 때 기부한 1억원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을 인지하고 고희(古稀)때 또 1억원을 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000년부터는 연금(年金)을 받아 생활하면서 1억원을 모으기 위해 10년 동안 해외관광여행을 가지 않는 등 근검절약하면서 월 100만원씩 저축하여 2009년 1억원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오는 2019년 팔순(八旬)까지 또 1억원을 사회에 환원하여 총 3억원을 기부할 예정이다. 또한 팔순 잔치를 대신하여 지난 회갑과 고희 때와 같이 다일공동체(최일도 목사)에 무료급식비를 지원하고 ‘밥퍼’ 봉사를 가족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박명윤ㆍ이행자 특지장학회’ 1억원, 청소년지도장학회 3천만원, 아동장학회 2천만원, UNICEF 2천만원, 북한어린이돕기 2천만원, 심장병어린이돕기 의료선교기금 2천만원, 사회복지단체, 청소년단체, 청소년학회 등에 총 2억5천만원을 기부하였다. 앞으로 2019년까지 추가로 의료선교기금에 3천만원, UNICEF 1천만원, 청소년단체 1천만원을 기탁할 예정이다.
우리 사회에는 어렵게 모은 재산을 기부하는 ‘김밥 할머니’, ‘생선가게 할머니’ 등의 미담(美談)이 살아 있지만, 정작 사회 지도층의 기부문화(寄附文化)는 뒤처져 있다. 선진국의 경우 부유층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의 정기적인 기부가 활발한 반면 우리나라는 자연재해 발생 같은 때에 일회성 기부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필자는 ‘사회 지도층은 환갑ㆍ고희에 1억원씩 기부하자’고 강조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별 혜택을 받지 못한 시장 할머니들이 평생 어렵게 모은 재산 몇 십억 원씩을 기부하는데, 사회 지도층은 많은 사회적 혜택을 받아 쌓은 부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마땅한 처사이다.
이에 매년 환갑 또는 고희를 맞는 약 60만명 중 사회지도층 1000명이 1억원씩 기부하면 매년 1000억원이 사회에 환원돼 어려운 이웃의 어두운 삶을 환하게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국민 세금으로 세비(歲費)을 받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임기 4년 동안 세비를 절약하여 1억원씩 기부하면 약 300억원이 사회에 환원되며, 또한 뇌물(賂物) 수뢰로 재판을 받는 국회의원들도 사라질 것이다. 한 사람의 작은 나눔이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 되므로 이 캠페인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 靑松 朴明潤(서울대학교 保健學博士會 고문, 대한보건협회 자문위원)
<청송건강칼럼(379). 2014.9.30. www.nandal.net www.ptcian.com>
mypark1939@snu.ac.kr
첫댓글 회갑연과 고희연에 각각 1억원씩 사회에 기부하는 청송의 마음에 고개숙여 경의를 드립니다. 사업을 해서 돈이 있어도 쉬운 일은 아닌데... 삼구동창중에 이재나 권리를 떠나 특수한 분야에 평생을 다한 몇분중의 한 분으로 늘 삼구의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