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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5편 10절-12절: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10절: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왜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리라고 하는 거냐?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일반적으로도 어떻게 나의 백성과 나의 아비 집을 버릴 수 있겠느냐? 글자 그대로 버리라는 말일까, 아니면 표면적인 이 말씀 속에 하늘의 무슨 뜻을 넣어서 주신 말씀일까?
우리가 쉽게 생각해 보면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니 좋은 것이기 때문에 버리라는 걸까, 나쁜 것이기 때문에 버리라는 걸까? 나쁘기 때문이다. 악하고 나쁜 것이기 때문에 버리라는 거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쁜 걸까? 세상이란 세상 안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죄와 사망 아래 놓여진 이방풍속, 습관, 관례 등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 죽어가는 성질들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라고 하는 것은 아비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처럼 이런 성질들을 감싸고 위하면서 이런 성질에게 하나님처럼 등을 기대어 힘을 삼는 세상의 요소들을 버리라는 거다. 사람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기대고 있는 사상 정신을 버리라는 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을 할 때도 여자가 왕에게 시집을 가서 왕후가 되었다면 어떻게 친부모에게 가서 살겠느냐? 왕궁에서만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으로 부모를 버린 거냐? 상황이 그런 것뿐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라고 하는 것은 존재적인 사람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네 속에 그런 정신을 버리라는 거다. 무슨 정신이냐? 세상을 등 기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버려라. 아닌 말로 왕후가 왕을 덜 사랑하고 부모 쪽으로 등을 기대고 있다면 그 정신은 버려야 한다. 성도로서 귀빈으로 선택이 되어서 주님의 왕궁에 들어왔느냐? 그리고 왕후처럼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버려야 한다. 뭘 버리느냐? 마음속의 육적, 세상적, 옛사람 부패성적인 생각을 버려라. 세상을 등 기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부모가 재산이 많은데 예수 믿는 내가 거기에 등 기대고 있다면 버린 거냐, 못 버린 거냐? 세상을 못 버린 거다. 이런 사람은 부모를 생각하는 것 같아도 그 마음은 부모의 재산을 탐내고 있는 거다. 생각 속에 이런 게 있는 거다. 그래서 부모의 재산을 뺏기 위해서 시골의 부모를 잘 찾아뵙는 자식도 있다. 이런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재산이 없다면 부모를 찾아볼 자식이냐, 안 찾아볼 자식이냐? 안 찾는다. 속의 마음이 그런 거다.
왕후처럼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버려야 한다. 왜 버려야 하느냐? 이제는 바꿔졌기 때문이다. 왕도 바꿔졌고, 통치성도 바꿔졌고, 소속도 바꿔졌고, 입장도 육에서 영으로, 땅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꿔졌다. 다 바꿔졌으니 정신도, 사상도, 소원 목적도, 가치판단 평가성도 달라진 것으로 나와야 한다.
남자가 장가를 갔다면 누구와 한 방을 써야 하느냐? 아내와. 그런데 마마보이로 자란 자식은 장가를 가도 아내와 같이 있을 줄을 모르고 어머니 옆에서 잔다. 이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다. 어떤 여자가 이런 남자와 살려고 하겠느냐? 안 바꿔지면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근심 걱정과 고통을 안겨주게 되고, 자기도 다른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들고, 결국은 심판을 받게 만든다.
어린 룻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말씀만 붙잡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나갔다. 예수님을 믿고 자기의 입장과 소속이 예수님께로 바꿔졌느냐? 그렇다면 자기의 소원과 목적과 취미성과 추구성과 간구성과 지향성 전부가 주님의 것으로 바꿔져야지 안 바꿔진 채로 주님에게 자기 쪽으로 와서 자기 것을 이뤄달라고 억지를 부린다면 이는 몽둥이 맞을 신앙이다.
11절: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 ‘그러하면.’ 10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리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뭐가 아름다운 거냐? 왕이 보는 아름다움은, 주님이 보는 아름다움은 속이냐, 겉이냐? 속 중심을 보신다. 이런 뜻이 이 말씀 안에 들어있다. 그냥 겉모양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안 된다. 자기의 육모의 미모성을 자랑하던 와스디는 폐위를 당했다. 그 날로 거지꼴이 되었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나의 백성과 아비 집을 버리면 왕의 보기에 아름다워진다고 했는데, 참 이상하다. 참 이상하다. 나의 백성과 아비 집을 버리면 어째서 내가 아름다워지는 거냐? 안 믿는 사람이 어떻게 이 말을 이해하겠느냐?
어린 룻이 자기 아비의 고향 모압을 찾아가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하나님을 선택했다. 하나님께서 이 룻을 아름답게 모셨다. 하지만 오르바는 자기 백성, 자기 민족, 자기 집을 찾아갔다. 그러니까 왕이 보는 아름다움은 타락된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과는 다른 거다. 왕이 보는 아름다움은 육모의 미모성보다 영모의 미모성이다. 영모의 미모성은 육모의 미모성보다 훨씬 오래 간다. 얼마나 오래 가느냐? 영원히 오래 간다. 그러니까 영원히 아름다운 미모성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가는 아름다움을 알아주신다.
사촌 오라비 집에서 부엌대기 노릇을 하던 에스더는 순간적으로 왕비로 선택이 됐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 자기의 계획, 인간 자기의 지혜지식에 들지를 않는다. 우리가 할 것은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만 하면 하나님 당신이 보실 때 이렇게도 올려주시고 저렇게도 올려주신다. 그러니까 자기의 행불행은 누구에게 달린 거냐? 하나님에게 달려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서 하라.
솔직히 말해서 우리교회에 다니면서 오늘날까지 이 진리를 따르면서 큰 손해난 게 있느냐? 본인들은 알 런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다듬어지려고 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사람이 점차 안착이 되는구나.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겸손하면 다른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지만 교만하면 무시를 당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육모의 미모성은, 육의 모든 조건성은 나이 들수록 쭈그러진다. 힘도 쇠퇴해진다. 그러나 영모의 미모성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건강해지고, 힘이 솟구치고, 아름다워진다. 이런 성도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천군천사들과 앞서 간 성도들이 다 알아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모의 미모성을 잘 꾸며야 한다. 어떻게 꾸밀까?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인격화 되고, 사상화 되고, 자체화 되고, 실상화 되는 거다.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의 교훈을 받아야 한다. 이러면 자기 속에서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이 영특해지니 그 마음의 움직임이 민감해지고, 행동도 민첩 민활성이 되어 나온다. 그러니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멍청하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둔감하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게으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굼벵이처럼 굼뜨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입만 살았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방인과 똑같은 차원으로 노느냐? 이렇게 되면 자기의 미모성에 있어서 추모가 된다.
세상 일반적으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오는 처녀는 평소에 밤낮으로 자기의 육모의 미모성을 가꾼다. 아무 옷이나 입고 대회에 나오면 미스코리아가 되는 게 아니라 날마다 미모성을 가꿔야 한다. 성경에도 보면 우리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미인대회가 있는데, 아하수에로 왕이 새 왕후를 뽑기 위해서 미인대회를 열었다.
먼저 있었던 왕후는 육모의 미모성은 빼어났지만 술이 건하게 취해서 ‘왕 제까짓 게 뭔데 왕후인 나를 오라 가라 하느냐?’ 라고 하면서 왕의 명령을 거스려 버렸기 때문에 왕후자리에서 쫓겨났다. 말하자면 왕후 자기의 처지가 어떤 처지냐? 자기가 명령을 할 처지인지 순종을 할 처지인지 알아야 하겠는데 순종할 처지에서 명령을 해버리면 쫓겨나는 거다. 왕후가 왕의 명령을 거스리고 쫓겨났으니 그 꼴이 어떻겠느냐?
이 일 후에 미스 월드 대회를 열어서 127도에서 뽑힌 세계적인 육모의 미녀가 다 왕 앞에 서서 양쪽의 핵심부분만 가리고 홀라당 벗고 자기의 육모의 미모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이리저리 돌면서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모든 여자가 왕의 눈이 안 드는데 맨 나중에 발목까지 덥인 긴 치마를 두르고 나오는 처녀를 보고 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에서 이런 처녀가 숨어있었나? 하며 만족해했다. 이게 누구냐? 에스더다. 아하수에로 왕의 눈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잘 보여지게 하면 잘 보여지는 거다.
계: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후에 세상이 끝나는 날 성도들을 공중으로 휴거시켜서 거기에서 미인대회를 한다. 잔치를 한다 그 말이다. 이 잔치에서 각 성도가 세상에 살 동안에 영모의 미모성을 얼마나 잘 가꿨는지 심사를 한다. 이 잔치에는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날까지 예수 믿은 성도들이 주님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오게 되는데,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도 부르는 나팔소리가 나면 다 올라갈 거다. 나팔소리를 들으면 안 올라갈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데 집안의 난간을 붙잡고 제일 안 올라가려고 버티는 사람이 누굴까? 보나마나 세상에 정이 제일 많이 들어있는 사람이다. 세상 누림성이 소원성이 강한 사람은 안 올라가려고 할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떻게든 안 나오려고 하다가 맨 나중에 나온 이스라엘 사람이 있을 거다. 이런 사람이 어떤 자들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이스라엘이면서도 애굽의 여자를 붙잡고 살면서 애굽의 풍속과 문물에 정이 들고, 자식도 낳고 한 사람일 거다. 이스라엘인 남편이 애굽을 떠난다고 하니까 애굽의 아내와 자식들이 가지 말라고 해서 ‘간다. 가지 말라’ 하며 씨름을 하다가 맨 나중에 나올 거다. 주님 오실 때도 이런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이 주님 앞으로 구름떼처럼 몰려올 텐데, 이 때 주님께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신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동명이인이 많기 때문에 나를 포함에서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여기저기서 ‘예’ 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가니까 ‘너 말고 저기 저 사람이 내 옆에 앉거라’ 라고 한다면 내 얼굴이 뭐가 되겠느냐? ‘목사 너는 저리로 가서 앉고 저기 있는 궁극교회 집사인 네가 내 옆에 앉아라’ 라고 한다면 목사인 내 얼굴이 뭐가 될까?
10절에서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리면’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기를 영모의 미모성을 빼어나게 해 주시려는 말씀이다. 우리가 이런 이치로 일반적인 차원도 생각해 보면 부모는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서울로 올려 보내서 논밭을 팔아 학비를 대주는데 이 자식은 부모님을 생각한다고 공부는 안 하고 집에 와서 농사일을 돕는다면 이게 부모를 생각해 주는 거냐?
일반적으로 보면 알지를 못해서 속이 터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인데도 사람이 안 돼서 속이 답답하고 속이 터지는 사람도 많다. 세상 일반적인 공부를 많이 했으면 일반적인 차원에서도 속이 확 트여야 배운 보람이 있는 게 아니겠느냐? 배웠으면 그만큼 속이 확 트여야 하겠는데 오히려 못 배운 사람보다 속이 더 좁아서 이해심도 없고, 느리고, 미련하고, 미련한 사람이 욕심은 더 많다. 고집도 되게 세다면 많이 배웠다는 게 뭐냐?
이런 사람을 보면 참으로 구역질이 난다. 똥이 더러운 게 아니라 이런 사람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난다. 똥은 똥이니까 냄새가 나는 거지 똥의 속이 좁으냐? 똥이 냄새가 난다고 더럽다고 하는 것은 똥의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자기 속이 좁은 거다. 똥이 똥냄새를 풍기는 것은 똥으로서 착실한 거다. 만물은 거짓이 없다. 그러나 사람 속이 좁으면 정말 구역질난다. 만물보다 더 거짓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 경배가 뭐냐? 돋보고 부러워하는 거다. 돋보고 부러워하면 그걸 가지려고 하게 된다. 불교인들이 왜 부처 앞에 가서 꾸벅꾸벅 절을 하는 거냐? 부러우니까 그러는 거다. 경배성이라고 하는 것은 돋보고 부러워하고 욕심을 갖는 것. 이게 경배성이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그 다음에 그것에게 절을 하든지 하는 것은 때에 따라 나오기도 하고 안 나오기도 하는 거다.
왕이 왕후를 사랑해 주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실 분은 창조의 주시요, 만능의 능력자요, 당신의 신령천국을 우리에게 상속해 주셔서 누리게 해 주실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왜 이 분을 경배하라고 하심인가? 경배하라고 하는 것은 고맙고 감사해서 절을 하라고 함보다 경배를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입히고 당신을 닮게 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당신 차원으로 올려서 영적 최고의 고상한 인격적 도덕적 결합을 원하심이요, 당신과 함께 그 나라의 누림성을 당신처럼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려는 것이 들어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당신의 차원으로 올려서 당신과 결합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그냥 ‘영광 받으시옵소서’ 이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날마다 신적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올림성이 있어야 이게 바른 예배고 바른 경배가 되는 거다. 그래서 예배를 올린다고 하는 거다. 하나님에 대해 깨닫는 게 없다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 어떻게 알고 경배를 하겠느냐?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높이는 일을 하면 영원 궁극적으로 인간 자기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왕과 왕후, 주님과 성도, 남편과 아내는 모두 본질적으로 영적 인격적 결합적 수수관계성이 들어있다. 그런데 부부가 서로 인격적으로 고상하게 올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고 억압 강압적이고, 집어던지고, 멱살을 잡고, 물어뜯고 잡아 뜯고 한다면 이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어찌하던 서로가 차원을 올려주려고 하는 게 사랑이다. 특히 부부간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 한다. 이게 성경적이다 사랑을 하려면 희생이 있어야 한다. 희생이 없이 어떻게 사랑이 표현이 되느냐? 사랑이면 서로 주고 싶은 거다.
하나님 공경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서 자기 인격화 시키는 것이다. 공경성에는 이게 들어있다. 이게 안 들어있으면 공경성이 아니다. 교회에서 세상 것이나 주고, 충성봉사나 열심히 하는 것은 하나님 공경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공경하라. 나를 믿어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 당신 차원으로 끌러 올리려는 거다. 예배의 성질이 이래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높이는 부부는 인격적 차원이 고상하게 올라가고 신분이 고상하게 올라간다. 성격도 다듬어지고 성질도 다듬어진다. 하나님을 높임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져 가니 고상해질 수밖에 없고 사람이 영특해지는 거다. 이러면 아름다움이 이 사람 속에서 풍겨져 나온다. 이런 부부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모의 미모성이 아름다운 부부라고 보는 거다.
12절: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두로의 딸은 이방인이다. 이 이방인의 딸이 왜 왕후의 왕께 예물을 드리느냐? 존경을 하니까 예물을 드릴 마음이 나오는 거고, 좋아하니까 예물을 드릴 마음이 나오는 거고, 높임을 받으실 분이니까 예물을 드리는 거다.
그런데 이방인의 딸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왕후의 왕께 예물을 드리느냐? 그것은 이방인의 딸이 왕후의 정신 사상적 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왕후의 언행심사를 보고, 왕후와 왕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보고 배워서 ‘왕은 어떤 분이시다’ 하는 걸 알게 되니까 예물을 드리는 거다.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왜 내 은혜를 구하느냐? 그것은 자기의 물질적 구함보다 왕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신비롭고 고상한 은혜가, 하나님의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이 질적으로 좋고, 영원히 오래 갈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가치판단과 정평 정가를 가지게 해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엇이 더 좋고,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더 좋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니 왕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거다. 만일 왕후에게 왕의 은혜가 없다면 이 왕후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주지를 못한다.
왕후가 인격적으로 고상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저질이고, 또 왕후가 왕을 멸시했다면 왕후가 어떻게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느냐? 이러면 어떻게 이방인들이 왕을 알아보고 은혜를 구할 수 있겠느냐? 첫째로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다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모의 미모성이 없다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가치판단적으로 최고의 것을 알지 못하면 구하지 않게 되니 은혜를 받지 못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