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4] 강경렬 (姜慶烈) - 몸 태워 어둠을 밝히고 8. 고생 뒤에는 반드시 축복이 - 2
12 남들처럼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묵상 가운데서 성경 구절을 지시받아 즉흥 설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었다. 13 1963년 2월 8일 제1차 기성 축복 시에 남편 문홍선(文洪善) 씨와 축복을 받았다. 14 1964년 4월 대구에서 전국 식구들이 모여 원리 강연회를 할 때 반대하는 기성교회 목사와 정면 대결을 벌여 또 한 번 여장군의 별명이 붙게 됐다. 15 나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나는 김희옥(金喜玉) 권사와 함께 기성교인들과 치고받는 격전 끝에 결국 3개월의 감옥생활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16 1964년 10월 1일부터 1965년 3월 28일까지 3차에 걸쳐 실시된 전국순회대강연회에서 이재석(李載錫), 김일환 양씨와 함께 3인조가 되어 순회 집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17 1967년 8월 28일 창립된 중생기도원에서 이월성(李月星), 김희옥(金喜玉), 원생금(元生金) 씨와 함께 상임 부흥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주로 새벽제단을 쌓고 부흥 설교를 했다. 18 이외에도 파고다 공원, 장충단 공원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등 전국 방방곡곡 나의 발걸음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종횡무진 누렸다.
19 나는 건강을 돌보지 않는 무리한 활동으로 1976년 7월 충북교구본부 강단에서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재기불능의 병을 얻고 말았다. 20 흔히들 남성들에게만 붙이던 ‘장군’이나 ‘호걸’이라는 명칭(선생님께서 붙여주신 별명)을 일생을 통해 얻었다. 여자이기에 눌림 받던 시절, 뭇 남성들을 무색게도 한 나에게 여성답지 못하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21 나는 성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22 여자로 태어난 한을 풀고 분수에 넘쳐 보이도록 정열의 삶을 뜻길에 바쳤지만, 언제나 부족한 마음 금할 길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