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머레이 조직신학 II』의 아래 내용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왜 그토록 무거운 죄일까?"라는 깊은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여전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품고 있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답해줍니다. *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그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이어졌음을 성경을 통해 차근차근 증명하며,‘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서 오는지’를 명쾌하게 밝혀냅니다. 타락으로 인해 사람의 본성이 왜곡됐을지라도 그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과 정체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침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침해이다
| 창세기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
아담이 셋을 낳았을 때의 형상(3절)과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의 형상(1절)과의 대조가 의도되고 있다거나, 최소한 3절의 형상과 1절의 형상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거나, 3절의 강조점은 아담의 형상에, 1절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거나, 3절이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 1:5의 예에서처럼 아담이 그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된다. 이에 대해 반대의 논거가 있다.
(1) 창세기 5:1은 창세기 1:26을 반추하고 있다. 모양과 형상의 또 다른 개념이 3절에서 도입되고 있다는 암시는 없다. 5장이 아담의 계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셋의 출생과 관련해서 3절에 모양과 형상을 언급한 목적은 아담의 자손은 아담 자신과 동일한 용어들로 규정되어야 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특징지어진 정체성이 아담의 자손에게 보전되었다는 것이다.
(2) 사람의 속성으로서의 형상과 모양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이외의 것을 지칭하는 예가 성경에 없다. 어디에도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형상을 대조와 차별을 통해 구별하는 곳은 없다. 그러한 대조를 끌어들인다면 성경에 반할 뿐이다. 고린도전서 15:49을 들어 이에 항변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이에 대비되는 사람의 형상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첫째 사람인 아담의 형상과 생명을 주시는 영인 둘째 사람이며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의 형상, 곧 산영으로서(45절; 참고, 창 2:7) 존재했던 아담과 부활의 권능 속에서 존재했던 그리스도와의 대조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3)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타락한 상태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3절의 모양과 형상, 1절의 형상이 서로 다르다고 해야 할 근거는 없다.
|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
이 율법은 타락한 사람을 위해 제정되었고, 따라서 타락한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이 절에서는 세 가지 사항이 고찰된다. (1) 살인죄의 중대성, (2) 형벌의 중함, (3) 형벌을 가하는 이유. 타락한 상태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이 정체성이 사람에게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형벌의 중함과 범죄의 중대성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확히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형벌에 대한 이유와, 그리고 함축적으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범죄의 중대성에 대한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침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특히 가증스러운 범죄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침해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면, 이 절의 전제는 부인된다.
존 머레이, 박문재 역, 『존 머레이 조직신학 II』, pp.45-46.
첫댓글 초신자를 위한 요약: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아담의 계보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체성입니다.
창세기 5장 3절에 등장하는 아담의 형상은 1절의 하나님의 형상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이 자손에게 보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 전반에서 사람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을 별개의 것으로 대조하거나 구별하여 차별을 두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 또한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의 상태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로 간주되고 인정받습니다.
창세기 9장 6절의 살인에 대한 엄중한 형벌 규정은 타락한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 위에서 제정된 율법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하는 가증한 범죄이기에 그에 합당한 무거운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좋습니다. 개혁주의 관점이 잘 녹아 있습니다.
창세기 5장과 9장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귀한 정체성을 보전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우리 존재의 참된 존엄성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이 사람과 하나님의 형상을 대조하여 깎아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며, 죄로 오염된 상태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 가치와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음을 전율하듯 느끼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하는 가증한 범죄라는 엄중한 율법의 선포 속에서, 생명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무겁고도 거룩한 시선을 마주합니다.
오늘 하루 내 곁에 있는 이웃들을 대할 때, 그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생명임을 기억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결단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아,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영혼의 소중함을 알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담대히 전하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아담의 계보 속에서 인간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을 임의로 분리하거나 대조하지 않고, 창조 때의 영광스러운 정체성이 타락 이후 자손들에게도 고스란히 보전되었다는 가르침에 깊이 공감합니다.
인간의 어떤 속성이나 정체성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외에 별개로 존재하지 않으며, 죄로 인해 오염되었을지언정 인간 존재 자체의 근원적 가치는 결코 상실되지 않았음을 깨달아 마음에 큰 울림이 됩니다.
창세기 9장의 엄중한 살인 금지 명령이 타락한 이후의 인류를 향한 법이라는 사실을 통해, 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하시고 존엄하게 대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엄중한 침해이자 가증한 도전이라는 지적은, 오늘날 생명을 경시하는 이 시대 속에 우리가 가져야 할 거룩한 경각심이 무엇인지 일깨워 줍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명확히 가르쳐 준 이 묵상을 거울삼아, 내 곁의 이웃들을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존재로 존중하며 사랑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주님, 타락하고 죄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도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는 충성된 종이 되게 하옵소서.
성도들이 서로를 대할 때나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바라볼 때, 외모나 조건이 아닌 그들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하시고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목자의 마음을 부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입은 양 떼를 거룩한 사랑과 존중으로 양육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이 시대 속에서 생명의 존엄함과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해 가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아멘!
장 칼뱅(John Calvin)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영혼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참혹하게 일그러지고 파괴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며, 타락한 인간에게도 이성과 양심,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 등의 형태로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기에 칼뱅은 창세기 9장 6절을 주석하면서, 아무리 사악하고 비천한 이웃이라 할지라도 그들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며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칼뱅은 이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오직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함으로만 온전히 회복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적·도덕적 본질인 '좁은 의미의 형상(지식, 의, 거룩)'과 인간의 전인적 구조와 통치 권세인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는 타락으로 인해 참된 지식과 의, 거룩함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의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어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본질, 지성과 의지,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같은 넓은 의미의 형상은 타락 후에도 파괴되지 않고 인류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분류가 더 섬세하네요.
하나님이 사람, 아담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고, 아담 또한 자기 형상대로 자손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주어졌고, 그 형상과 모양은 그대로 변함없이 인류가 생존하는 동안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창 9:6에서 살인을 한 자나 피살된 자나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해하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지를 알겠습니다.
존 머레이의 해설이 훌륭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어서 가장 귀한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 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깊이 있게 배웁니다.
공감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5장을 통해 아담의 자손들이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전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이 낳은 아들 셋 역시 아담 자신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부여하신 바로 그 고귀한 형상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형상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대조하거나 차별하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 존엄성의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창세기 9장 6절은 타락한 이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살인죄의 중대성을 경고하며, 사형이라는 엄중한 형벌을 내리는 이유를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만약 타락한 인간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지 않다면, 살인이 그토록 무거운 죄가 될 이유도,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을 이유도 사라집니다.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는 이 본문들을 통해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의 고귀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역설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맙시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존엄성만큼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살인을 엄벌하는 이유가 단순히 사회적 계약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이 가슴 깊이 와닿습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현재 모습 이면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먼저 바라보며 존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기억하며, 매 순간 서로의 생명과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게 하소서.
타락과 죄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는 가치를 부여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 고귀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아멘!
타락과 죄로 인해 인간의 본성이 찌그러지고 왜곡되었을지라도, 우리 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귀한 정체성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 왜 그토록 가증스럽고 엄중한 죄인지 성경적·신학적 근거를 명확히 깨닫게 되었고,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며 존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스스로 무너진 '비굴한 자'들마저도 조건 없이 품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과 긍휼이 이 글을 통해 따뜻한 위로와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