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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편저)
순교자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가 살았던 시대는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과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가 통치하는 시대였다. 이때 일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것이 자기들의 사명임을 깨달았고,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정의가 조선 땅에 임하기를 간구했다.
주기철은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현재 진해시)에서 후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이복형제와 사촌들 사이에서 따돌림 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워낙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서 오히려 형제들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 조만식 선생 등을 만나 민족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을 받았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안질이 심해져 웅천에 낙향했는데, 재산 상속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가 생겼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별거로 그는 벼랑 끝에 몰리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 안갑수 사모 주광조.
주기철은 청년운동과 교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목사님의 중매로 결혼하였다. 그런데 장모인 안씨는 그를 목회자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권유하였다. 이후 4살 된 아들 영묵이와 2살 된 딸 영덕이의 죽음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사는 것만이 인간의 참된 도리임을 깨닫는다.
그는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성령체험을 한 뒤 헌신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기도처를 정해놓고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올 때는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젖어있었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 원고를 집필하고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 번 낭독하고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
평양 산정현교회
그는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는데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무기로 한국교회의 목을 죄어왔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였다. 대부분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지만 주기철 목사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주 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에 걸쳐서 총 5년 4개월간의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했다.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하게 했는지 고문을 받고 나면 통증으로 온 방을 뒹굴었고 밤새도록 울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고통을 잊기 위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찬송을 불렀다.
▲1937년1월 산정현교인들. 앞 왼쪽부터 조만식 김동원 박정익 장로 주기철 유계준 김봉순 오윤선 김찬두 장로이다.
다섯 번째로 구속되어 교도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행한 생애 마지막 설교에서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당하시고 날 위해 죽으셨거늘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까? 다만 ‘일사 각오’ (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외쳤다.
▲진해에 있는 주기철목사 순교기념관.
1944년 4월 21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주기철 목사는 평양 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47세로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 기도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한국교회가 주기철 목사님의 절대 믿음, 절대 헌신, 절대 성결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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