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16. 흑백논리와 제3의 논리...세상사와 인생은 제3의 논리로 흘러간다.
한국 사람들은 흑백논리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흑백논리와 제3의 논리, 사실 이건 생각을 하는 능력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아고라에서 글을 쓸 때 제가 민족주의자적 관점에서 글을 쓰면 일베들이 제게 "넌 북한에 가서 살아"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즉, 북한을 욕하지 않으니 제가 북한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거였을 겁니다.
요즘도 중국이나 러시아 관련해서 유튜브에서 댓글을 달면 북한에 가서 살라고 하는 답글이 달리는 것을 가끔 봅니다. 말하자면 전혀 관련이 없는 답글을 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북한이나 중국 러시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니 당연히 한국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나 인생사나 사실 흑백논리로 흘러가진 않습니다. 인생은 흑백논리가 아니라 지그재그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흑백논리에 매몰이 되어버리면 인생을 이해하는게 너무 어렵게 됩니다. 생각은 습관이고 흑백논리에 습관이 되게 되면 좀체 다른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제3의 논리"라고 구글에서 검색을 하니까 아래와 같은 글이 검색이 됩니다.
질베르 뒤랑은 상상력과 상징이론가요, 신화학자이면서도 방법의 문제와 새로운 논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학자다. 그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새로운 방법과 논리의 모색 없이는 불가능하다고판단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새로운 방법과 논리의 모색을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 현대의 과학이론가들로부터 착안했고, 이로부터 그의 소위 “새로운 과학”이 창안된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하나 로 아우르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여는데 그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새로운 과학으로서 인류학이란 주지의 “상징의 인류학”이자 “시니피에의 인류학”이다. 이성과 이성이 추구해온 ‘객관성’이라는 제국으로부터 탈피하여 어떻게 하면 새로운 과학으로서 인류학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 그에게 전통의 이분법적 사고틀을 방법ㆍ인식론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제3의 논리가 필요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가 말한 제3의 논리는 이미지, 상징, 신화, 원형 등을 하나의 개념이나 체계, 다시 말해 고정된 실사(名辭)로 포획하지 않고 역동적 동사로 이해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동사로서 이미지, 상징, 신화, 원형 등에 잠재된 시니피에를 해독해낸다는 것은 결국 이것들을 보이는 것으로서 그 의미를 파착(把捉)하는 태도를 지연ㆍ유보시켜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다의미(polysémie)와 끝없이 시선을 교차해야만 한다는 뜻이 숨어있다.
이미지, 상징, 신화, 원형 등이 “가장 좁은 의미로 축소된” “저열한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에게는 결국 새로운 논리와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구 사유 전통에서 고질적 병폐라고 할 수 있는 배타적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했기에 제3의 논리, 구조적 3분법, 3분법적 다원론을 “시니피에의 질서”를 좇아 구축한 것이다.
뒤랑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 하지만 그의 이러한 일종의 ‘치유적’ 차원의 제안은 전통의 논리적 차원에서 보면 “애매모호”하게 보일 수도 있고, “비논리”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마련한 새로운 논리와 새로운 인식론의 초석은 철학을 전공하는 우리가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뒤랑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빗대어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듯,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지 않는 한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저 오랫동안 봐온 것만을 보여주는데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아마도 박치완 (한국외대)이란 분이 쓴 글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혹은 보통 대화를 할 때는 보통은 문자 그대로, 말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복잡한 경우에는 말이나 문자가 상징을 띨 때가 있습니다. 언어나 문자가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전 같은 경우에는 상징으로 점철되는 경우가 많은데 선가禪家의 선문답이 그렇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는 문자적인 해석을 해야 할 것과 상징적인 해석을 해야 할 것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습니다. 상징적인 해석을 해야 할 것을 문자적인 해석으로 한다면 그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고 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돼지들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라고 했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들 가난뱅이들이었잖아요. 그러니 돼지에게 던질 진주가 어디 있었겠어요? 예수의 말은 자기가 하는 진리에 대한 말은 곧 진주처럼 귀한 것이니 혼자나 간직하고 실행해야지 그 말을 돼지(세상 사람들)에게 하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돼지(세상 사람들)들은 진주(진리에 대한 말들)를 알아보지 못하고 발로 뭉개버리고 까불면서 돼지 똥과 진주는 같이 짓 뭉개져서 뭐가 진주인지 뭐가 돼지 똥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고 제자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제3의 논리에 대하여..
어느 날 사람들은 예수에게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묻습니다.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을 어찌 할까요?" 둘 중 하나입니다. 율법에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평소에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떠 벌리고 다녔습니다. 예수가 율법에 따라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면 사람들은 예수가 평상시에 하던 말과 어긋나는 말을 했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예수가 율법에 어긋나는 말을 했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렸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가 누구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아닙니까. 예수는 말합니다. "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단, 간음할 생각조차도 해 보지 않은 사람만 왜냐하면 마음속에서 생각한 것은 곧 행동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이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슬금슬금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간음할 생각을 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고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또 왜냐하면 예수 역시 깨달음을 얻기 전 한 때는 중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흑백논리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걸 몰랐던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예수를 충분히 함정에 빠뜨렸다고 하면서 좋아했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문제를 하나 냅니다. "여기에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병이 하나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새가 한 마리 있다. 이 새는 너무나 귀한 새라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병에 넣고 길렀다. 왜냐하면 그 병이야말로 새를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만 새가 너무나 커져서 병에서 나와야만 하는데 입구가 작아서 나올 수가 없다. 새는 나오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다. 새를 죽여선 안된다. 하지만 이 병 역시 너무나 귀한 병이라서 깨서는 안 된다. 어찌 해야 하겠는가? 어찌하면 병을 다지치 않으면서 새를 살릴 수 있겠는가? 새는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라"
이 이야기는 제3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인간의 육신과 의식의 상태에 대해서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성장합니다. 그리고 성장함에 따라서 의식은 확장되어 가고 결국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계속 몸에 갇혀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나 육신을 파괴해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병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곧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마어록에 보면 "그대의 집은 불타고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육신에서 벗어나 자신은 결코 삶과 죽음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해탈을 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해탈인가?하고 논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인 겁니다. 죽어가고 있는데 많은 말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스승은 다그칩니다. "새가 죽어가고 있다. 어찌 해야 새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빨리 답하라.. 늦으면 새는 죽는다." 제자는 진땀을 흘립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생각이 궁지에 몰려서 무엇을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생각이 끊어지면서 자기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면서 말을 합니다. "새는 병속에 있지 않고 이미 병 밖에 나와 있습니다." 제자가 이정도 되면 스승이 제자의 빡빡머리 한번쯤 쓰다듬어 주어야 할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이론에 불과합니다. 이론에 불과한 것을 실체화 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풀어내야 하고 풀어내기 위해서는 꽉 막힌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아니라 흑백논리를 넘어서 자유자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가 올 수 있기 때문인 겁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흔히들 "저 사람은 지혜가 있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대부분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서 사고하는 사람입니다. 흑백논리는 양쪽 대척점에 서서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라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데 지금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정당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양 진영 모두 우리 민중들 그리고 대한민국, 한민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은 민족주의 열풍이 한번은 불어야 꼬인 문제들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만 쓰죠.. 새로운 날 맞이하시기를..
수행자에게 후원하기 계좌 번호 : 농협 : 302 3171 9116 61 예금주 : 이선명, 후원과 상관 없이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 상담해 드립니다. 전화하실 분은 문자 먼저 주셔요. e-mail : persona6219@hanmail.net T. 010 5042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