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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려천리장성은 요동에 있었다
작자미상 노란색 부분은 고구려천리장성 녹색부분은 고려천리장성 / 출전[coo2]
우리나라 고려에도 천리장성이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천리장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본 기억이
없습니다. 듣기로는 석축으로서 높이와 폭을 각각 25자씩의 크기로 하고 압록강 서쪽강구에서 동쪽으로
의주를 거쳐서 함경남도 화주를 거쳐 도련포 해안(맨아래 사진 참조)까지 쌓았다는 말인데 고려초기에
시작하여 대충 1033년에 초벌을 완성하고 그후 완공은 1044년에야 이루었다고 하였으니 기간으로는 약
100여년이 넘게 걸렸군요.
그렇지만 한반도의 국경은 최소한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이 상식인데 장성은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의 북부를 내버리고 그 안쪽으로 쌓았다는 얘기입니다. 집터의 마당에다 다시 담을 친 셈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배웠으니 토를 달지말고 잠자코 있으라면 할말은 없지만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었다고 하는
백성으로서는 궁금증이 너무나 많은것입니다. 요즘은 국민들에게도 알 권리라는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기에 이글은 어쩌면 대답해줄 의무가 있는 정부 기관에 질문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아래 글은 고려와 명나라가 국경문제로 실랑이를 하는 내용인데 국경선의 내용이 너무도 엉뚱합니다.
한번 보시지요.명나라 태조가 홍무20년(1387) 고려왕에게 보낸 국서입니다.
광령의 의주에서 갈라져 나간 성의 위치에 려성(驪城)이라고 표기된 중국도(中國圖)
출전:대영도서관소장(향고도)
이 지도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바다로 들어갔던 갈석산 부분이 바다로 윤몰되었지요.(수경주 석 참조)
정종 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 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018년에 구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다. 그런데 1035년에 송령에 장성을 구축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송령' 동쪽의
심주지역에 '구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원사의 구주 부분에서는 이 자료 이상 더 찾아볼 자료가 없으니 다른 여러 가지
기록에서 구주의 위치를 더
확인하여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이 과연 한반도에서 있었는지 만주지역에서 있었는지 확인
해 보아야 한다.
(壬申) 命戶部咨高麗王, 以鉄嶺北東西之地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韃靼高麗人等遼東統之. 鉄嶺之南舊屬
高麗,
人民悉聽本國管屬. 疆境旣正, 各安其守, 不得有所侵越.[明太祖實錄卷187 洪武二十年 十二月 壬申]
(12월26일 임신일) 호부에
명하여 고려왕에게 자문을 보내도록 하였으니, (그 내용에 이르길) “철령의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전에 개원(開元)에 속하였다.
그 토착 군민과 여진, 달단, 고려인 등은 요동이 다스렸었다.
철령의 남쪽은 예전에 고려에 속하였으나, 인민들은 모두 본국(명나라) 관속을 따른다.
강역이 이미
정하여졌으니(疆境旣正), 각자 그 수자리를 안정시켜 침범하여 넘는 바가 없도록 하라.”
* 위의 글, 명의 실록에서 철령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동서는 개원이 관활하던 땅인데 토착 군민과 여진,
달단,고려인 등이 살았었다고 하는것은 이곳이 과거에 고려의 영토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철령의 남쪽도 고려의 구지라고 하였으니 심양, 요양 등이 모두 고려의 영토였다는 기록이 아니겠
습니까?
고려는 철령의 동서와 북쪽을 먼저 잃고, 따라서 철령의 이남도 순차적으로 밀려나던 모습을 명사 실록이
기록하고 있다는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강역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각자 그 수자리를 안정시켜 침범하여 넘는바가 없도록 하라] 이 말은 명이
고려의 영토를 노략질하고 주인을 욱박지르는 강자의 공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국경선을 가르는 장성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보는것이 순서일듯 합니다.
아시다시피 요동에도 분명히 만리장성과는 형태가 다른 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주인공들이 누구냐 하는것을 알고 싶은것입니다.
행여나 그 성들의 주인이 설마 고려였을까? 듣기로는 고구려도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실체를 확인
하기가 어렵고 부분 부분만 나타나니 장성이라고 하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금(金)장성이라고 하는 부분성들도 몇군데 있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성은 연다라
쌓여진 장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축성 역사부터 알아보는것이 상식일듯합니다.
장진근님의 글을 빌려 중국장성의 역사를 알아봅니다.
중국 장성에 대한
이해
[진(晉)나라는 서진의 초기 기록만 믿을 수 있고, 영가(永嘉: 회제 이후 재위 307~316,
이후 동진으로
이어짐) 이후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자기들의 주장에 의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진 · 한(秦漢)의 장성(長城)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燕)나라가 쌓은 장성을 이해해야 한다.
연나라는 우리 고조선과 서쪽으로 이웃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연(燕)나라가 쌓은 장성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 · 흉노열전(匈奴列傳)》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나라
에서 연나라 등에서 쌓은 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은 기록도 역시 《흉노열전》에 함께 들어 있다.
".....진나라의 소왕(昭王) 때에, 의거의 융왕이 소왕의
어머니인 선태후와 밀통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감천궁에서 모살하고 드디어 군대를 출동시켜 의거를 쳐서 대다수를 살상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농서(농서)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서 북쪽 오랑캐를 방어했다.
또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풍습을 고쳐 호복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가르쳐 북쪽으로 임호
(林胡) · 누번(樓煩)을 무찔러 장성을 쌓고, 음산산맥(陰山山脈) 기슭을 따라서 고궐(高闕: 올더스 지방)에
이르는 사이를 요새지로 만들고 운중(雲中) · 안문(雁門) · 대(代) 등 3군을 두었다.
그후
연나라에 진개(秦開)라고 하는 어진 장군이 있어 흉노에 볼모로 가 있었다.
흉노는 진개를 매우 신임했는데, 진개는 연나라로 귀국하자 곧 동호(東胡)를 습격해서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동호는 천여 리나 후퇴했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나라 왕 정(政: 나중의 진시황제)을 죽이려고 갔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秦開)의
손자이다.
연(燕)나라도 또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 어양(漁陽) ·
우북평(右北平) · 요서(遼西) · 요동(遼東)의 여러 군을 두어 오랑캐를 막았다.
당시 중국에는 문물과 예제가 잘
갖추어진 나라로는 7개국(齊 · 燕 · 楚 · 韓 · 魏 · 趙 · 秦)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세 나라(燕 · 趙 · 秦)가 흉노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그 후 조나라의 장군 이목(李牧)이 건재한
동안은 흉노는 조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지 못했다.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는 몽념(蒙恬)에게 명하여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의 흉노를
치도록 했다.
몽념은 황하의 남쪽 올더스 지방을 모조리 손에 넣고, 황하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고 하류를 따라
44개의
현성(縣城)을 쌓은 다음, 죄를 지어 변방의 수비병으로 와 있는 자들을 옮겨서 수비하게 했고, 구원(九原)
으로 부터 운양(雲陽)까지 직통 도로를 열었다. 그리고 산이 험한 지형을 이용해서 경계를 만들고, 계곡을
이용해서 참호를 만들었으며, 보충해야 할 곳은 손을 보아 임조(臨洮)를 기점으로 하여 요동(遼東)에 이르
기까지 1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또 황하를 북쪽으로 건너가 양산(陽山)과 북가(北假)의
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
(박일봉 편역, 《사기》열전 2, 《흉노열전(匈奴列傳)》,육문사, 1994년, 183~184
참조)
우리는 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연나라에서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것이요, 그 다음 진나라에서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1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던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또 기억해야 할 것은 동호(東胡)의 정체이다.
이 말에서 영어 퉁그스(Tongus)란 말의 어원이 비롯된 것으로 우리 예맥족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 중국
학자들의 견해이다.
* 《진서(晋書) · 당빈전(唐彬傳)》의 장성 관련
기록
다시 동북아의 주인은 서진으로 대체 되었다. 서진은 잘 알다시피 '사제갈주중달(死諸葛走生仲達)'로
유명한 사마중달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나라였다.
《진서 · 당빈전》에는 선비의 침입에 대비해서 종전에 진(秦)나라가 쌓았던 성을 온성(溫城)에서부터
갈석(碣石)까지 복구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중국에는 사전의 왕국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이다. 벼라별 사전이 다 있다. 그 가운데 《장성사전(長城辭典)》이란 것도 있다.
허실삼아 거기에 나와 있는
진(晉) 관련 장성 기록을 찾아보았다.
서진장성(西晉長城)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었다.
"서진 왕조에서 쌓은
장성이다. 《진서 · 당빈전》의 기록에 의하면 "진무제 태강 2년(281), 당빈(唐彬)이
유주(幽州)에 재직할 때, 북방의 소수민족의 남침을 방지하기 위해 일찌기 옛 경토를 개척하여 천여 리의
땅을 물리치고, 온성(溫城)으로부터 갈석(碣石)까지 산과 계속을 이어 3천여 리에 걸쳐 진장성(秦長城)
요새를 복구하고, 군사를 나누어 주둔을 시켰는데 봉수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장성에 관해서는 서진 왕조가 단명으로 끝난 왕조일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므로 그
유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어떤 전문가는 이 장성에는 겨우 봉화대(烽火臺) 보장(堡障: 보루)을 죽 이어서 만든 보잘것 없는 공사였을
것으로 여긴다라고 하였으며, 어떤 전문가는 문제의 장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承德)에서 요녕성 조양
(朝陽) 지역에 이르기까지 위치했으며 진 · 한(秦漢) 시기의 장성의 옛 노선을 따라 증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어떻든간에 진일보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
(임암 주편, 《장성사전(長城辭典)》, 문회출판사, 11쪽) 인용 끝]
<진서><당빈전>에서 하북성 승덕에서 요녕성 조양까지 1000여리의 장성을 보수하였다는 기록을 참고
하면 위 지도에서 보이는 고려천리장성의 깃점이 시작되는 곳 까지로 볼수 있다.
여기서 부터는 성의 형태가 책성으로 바뀌고 또 고려천리장성은 의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을 적용
할수 있는것이다.
<명일통지>는 압록강을 의주강으로 기록한바 있다.<지도:요계관방도 홍대용의 연행도에서>
정종 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 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통나무국경선*
간도 땅의 옛 귀속을 두고 벌어진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한국 땅으로 그려진 18~19세기 유럽지도 69점이
수집돼 그중 몇 점이 공개되었다.
지금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삼고 있지만 이 지도들에는 200여리 안으로 그 국경선이 북상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안(集安)이나 부여(夫餘) 예(濊) 맥(貊) 읍루(?婁) 발해(渤海) 등 고대 유지를
비롯, 조선족 자치지역인 간도는 이 북상된 국경선 안에 들어있는 한국영토로 돼 있다.
이 유럽의 지도들이 어디다 근거를 두고 국경선을 북상시켰을까.
장장 2000여리나 연해 있던 책성(柵城) 자리를 지도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다.
책(柵)이란 토담 위에 통나무를 엮어 담장이나 성을 삼는다는 뜻글자로, 이 책성이 한·중 국경선인데 학문
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청국행정법 병법란에 보면 공무(公務)로 책성의 통행문인 변문(邊門)을 나갈 때는 병부(兵部)가 발행하는
군부(軍符) 없이 나들 수 없다 했으니 책성이 국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변문의 별칭이 시래문(矢來門)으로 화살이 날아든다는 뜻이니, 책성은 외적의 방어용이 아니라 사람의
내왕을 억제하고 국경을 나타내는 표지물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편찬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직방전(職方典)에 실린 상세한 지방지도
에 보면 책성은 신의주 대안인 단둥(丹東)에서 약 200리 북쪽에 있는 봉황성 변문에서 시작, 보도된 유럽
지도들처럼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등거리로 동북쪽으로 뻗어 위원보(威遠堡) 변문에서 몽골 국경과
마주치고, 간도는 책성 남쪽 밖으로 그려져 있다.
책성이 국경인 증거로 부여 읍루 예맥 발해 등 고대한국 옛 유적들이 이 속에 있고, 고려문(高麗門) 고려위
(高麗衛) 등 지명을 비롯, 17대를 집단 거주한 문가보(文哥堡)를 포함한 한국 역관촌들이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이 농사를 지었던 답동(畓洞)이 있고 고려국(高麗菊) 고려압(高麗鴨) 등 한국생물이 자라고
있음을 보았다.
그 더욱 압록강의 크고 작은 모든 섬들은 그것이 북쪽 강가에 붙었더라도 모두 한국 영토로 돼 있다는 것이
강이 국경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대중국문제에 약세인 당국자들에게 외치고 싶은 책성이다.
이규태 코너 통나무
국경선<6510>kyoutaelee@chosun.com
위의 지도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수 없지만 대략 비슷한 시대의 지도이기때문에 위치를 비교하자는
뜻으로 올려 본것입니다. 색칠한 부분은 설명과 관계가 없습니다.
거란시대의 지명은 명시대와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양=동경 심양=심주 개원=개주 함평=함주 등...
*아래 소개하는 기록은 명나라가 요동에 있던 고려의 영토를 침약하여 밀어내고 자기들의 군사근거지를
설치하던 생생한 기록들입니다.
/新校本明史/志/卷四十一 志第十七 地理二/山東/遼東都指揮使司
鐵嶺衛 洪武二十一年(1388)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
南有汎河,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范河城在衛南,
亦曰汎河城,正統四年置汎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
又有咸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里.
철령위 홍무21년(1388)3월 옛철령성설치.26년4월옛 언주땅으로 옮김. 직 현재치소로. 서쪽으로 요하,
남쪽으로 범하,또 남쪽으로 소청하,이들 물들은 모두 요하로 들어간다.
또 남쪽에 있는 의로성은 홍무29년 설치하였는데 의로천호소자리다. 또 범하성은 위의 남쪽에 있고,
역시 범하성이라한다.
정통4년 범하천호소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이다.고려계와 접한다.
홍무초에 현을 설치했다 폐하였다.또 함평부가 있고, 원직속의 요동행성이 있다.
지정2년정월 항복하여 현을 만들었다 홍무초에 폐하였다.남쪽으로 도사는 240리 떨어져있다.
[鐵嶺衞. 箏司城北二百四十里. 古有鐵嶺城, 在[金]衞治, 東西五百里接髙麗 거의 같습니다. 요양을 (요동)도사성이라 표기하고 동남5백리를, 동서5백리라 잘못 표기한 것을 제외하면 같지요. 그런데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동지의 [今] 대신 [金]이 쓰여져 있습니다. 해석하면 ‘옛 철령성은 금위(金衛) 치소에 있다’입니다. 따라서 ‘금위(金衛)’는 명대의 ‘금주위(金州衛)’를 가리키는 것이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예컨대 |
처럼 요양성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 대표적인 네 개의 위들이 있었는데, 금주위는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금주위도 옛 치소(舊金州)가 있고, 후대의 치소가 있어 장소가 달랐습니다.
책성이 요동의 중심지를 한바퀴 돌아 동쪽 바닷가까지 도착한 종점입니다.
이 책성에서 봉황성과 흥경동쪽으로 여진족을 막기 위해서 성을 구축할 나라는 고려밖에는 없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을 한반도로 밀어내고 기왕에 있던 성을 보수하여 사용하였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한반도 의주에서 시작되었다는 고려천리장성을 볼수 없습니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 작성한 군사지도입니다.
[국내통설] 고려의 천리장성
고려 덕종 때인 1033년부터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장성이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북평의 거란·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쌓으려 하였는데, 이 계획이 실행
되기는 1033년(덕종 2)부터였다.
이때 고려가 요나라의 세 차례 침입을 모두 막아낸 뒤 요나라와 화친하게 된다.
고려 조정은 요나라의 재침과 여진족의 침략을 막을 목적으로 축성하게 된다.
천리장성의 규모는 매우 컸던 것으로서 서쪽의 압록강 어귀로부터 동쪽으로 의주 근처인 위원(威遠)·흥화
(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정융(定戎)을 비롯한 오늘날의 평안남북도인 운주(雲州 : 운산)·안수(安水 :
개천)·청색(淸塞 : 희주)·영원(寧遠)·맹주(孟州 : 효산)·삭주(朔州) 등 성(城)을 거쳐
영흥 지방인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성에 이르러 정평 해안인 도련포(함경남도 정평군의 광호
(廣湖). 광포(廣浦)라고도 부른다.)까지 뻗어, 길이가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尺)의 석축이었다.
이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성으로서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막대하였다.
이 천리장성은 1033년경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덕종 이전에 대대로 북방에 쌓은 여러 성책을
연결하고 보축(補築)한 것으로, 그 완성 시기는 1044년(정종(靖宗) 10)경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덕종 때 유소(柳韶)가 축조(築造)의 대부분을 끝마쳐 장성의 윤곽이 형성된 것만은 사실이다.
유소는 그 공으로 1034년(덕종 3) 3월에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장성의 축조는 거란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의를 받았으나, 고려에선 이에 적의가 없음을 밝힌 일도
있었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고려사》내용은 세종대 이후 일부가 왜곡된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밝혀졌다.
그내용중에는 일부 지명도 있지만 성의 길이가 수천리에 달한다는 내용과 성의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약 3개월이 걸린다는 내용이 누락된것이다.
이러한 가짜 고려장성은 조선 세종때까지도 없었기에 만약 의주에서 경원까지 성을 쌓는다면 북방의
국경이 안전할것이라는 우의정의 건의를 볼 수 있다.
지명에서 창주. 연주. 덕주. 맹주는 산동반도에서 화주는 요동에서 정주는 중산에서 용주.철주.통주.곽주.
귀주.삭주는 요동에서 옮겨왔습니다.
통설에 의한 고려천리장성의 지도입니다. 출전[엔싸이버 백과] 이 지도에 보이는 장성의 위치가 언제까지
국경노릇을 하였는지 아니면 몇년동안이나 하였는지 대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보시다시피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은 압록강의 넓은부분만을 조금 띄어두고 거의 100프로를 여진과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콧구멍같은 틈바구니도 지키지를 못하고 거란군이 고려땅으로 수시로 넘어왔다고 하니 이게
수긍이 가는 얘기입니까?
더구나 손바닥같은 좁은 지역에 강동육주라는 고을을 두고 성을 쌓았다고 하면서 그곳들은 마치 거란군의
노리터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고려군이 그렇게도 약했던 군대이었던가요.
중국의 자치통감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당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扶餘城卽 唐高麗之扶餘城也. 時高麗王王建有國 限混同江而守之 混同江之西不能有也 故扶餘城 屬渤海國
混同江卽鴨綠水>
<부여성은 즉 당나라때 고려의 부여성이다. 고려왕 왕건이 나라를 이르켰을때 혼동강을 경계로하여 지켰
으나 혼동강의 서쪽은 진출하지 못하였다. 옛 부여성은 발해국에 속했고, 혼동강은 즉 압록수다.>
*이때 발해의 부여성이란 개원 서쪽의 황용부에 있었지요.
강동 6주의 비밀과 귀주대첩의 진실
고려의 서희장군을 영웅으로 만든 강동6주나 강감찬장군을 영웅으로 만든 귀주대첩은 학교수업을 통하여
적지아니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별 저항없이 그 장소가 평안북도의 의주 주변에 있었을것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않은 강동이라는 단어때문에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던중 요즘 천추태후라는 역사드라마를 통해서 서희장군이 등장하고 강동6주가 다시 등장하여 민족의
아프던 추억을 되살려 준것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어색한점이 많이 보이는것입니다.
역사서를 쓰던 당시의 상황이 여의치못하여 불가피하게 바른말을 기록할수가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촘촘히 따져보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씁니다.
만약 고려의 천리장성과 강동6주가 불가분의 관계라면 고려천리장성이 한반도의 북쪽으로 천여리나 멀리
있었다고 주장한만큼 당연히 강동6주의 위치도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지명을 옮기면서 일부는 확인이 어렵도록 가명을 썻기때문에 사료를 추적하는데 애로가 많았습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자국의 역사서를 믿지못하고 타국의 역사서에 의존해야하는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 해서는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당초에 강동6주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서기959년 고려광종10년에 왕이 병을 빙자하여 요나라에 입조할수 없음을 사신을 통하여 통보하자 요나라
목종은 요하 동쪽의 강동6주의 성을 침공하도록 명한것입니다.
당시의 지명중 <속,자치통감>이 기록한 화주.용주.통주.철주등은 거란지리지도에서 확인할수 있으나 귀주
와 곽주의 지명이 지도에 없어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귀주를 요양,곽주를 갈사관이 설치되었던 개주하 북변
으로 보았습니다.
<속자치통감> 卷第三十 宋紀三十
己未(959),高麗王詢遣刑部侍郎田供之奉表於遼,稱病不能朝。遼主怒,命取興化、通州、龍州、鐵州、
郭州、龜州六城。
기미, 고려왕 순(詢)이 형부시랑 전공을 시켜 요나라에 표를 보내, 병을 빙자하여 입조할 수 없다고 하자,
요주(遼主)가 노하여 화주,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귀주 6성을 취하도록 명하였다. (고려 광종 10년)
거란지리지도에서 찾아본 고려강동6주(강동이란 요하의 동쪽을 이르는 말. 필자주)
위치를 찾기 어려웠던 곽주에 대하여
<대청일통지>는 발해로부터 얻은 청나라의 경내에 있던 세곳의 지명, 즉 평양. 곽주. 모주 등이 있는데
곽주는 압록의 북에 있다고 하고, 모주는 압록의 서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조선계의 현 압록으로
비정한다면 역시 의심스러운 기록이라고 하였습니다.
右見淸一統志 得渤海之地於我國境內者三 曰平壤曰郭州曰慕州 而謂郭州在鴨綠之北 慕州在鴨綠之西
則亦可疑也
*거란군의 일차침입당시 서희와 소손영과의 회담내용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煕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侵
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黠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女眞
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納,
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煕,留丹營,七日而還,王,
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煕,復奏曰,臣,與遜寧約,盪平女眞,收復舊地,
然後朝覲可通,今纔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
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
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당시 압록강은 요하로 추정됨 필자주
-국내 정설로 되어있는 강동 6주-
강동 육주(江東六州)는 993년(고려 성종 12년) 요나라의 제1차 침입 때 서희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얻은 고려 서북면의 영토이며, 군사상·교통상의 요지였던 이곳은 여진족이 거주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 땅은 압록강 동쪽 280여 리, 곧 홍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며, 이 강동 육주의 북쪽 국경에 쌓은 장성이 고려의 천리장성이다.
고려는 요나라(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하여 요나라과 통교할 것을 조건으로 요나라로부터 얻은
강동에서 여진족을 몰아낸 뒤 994년 장흥진(長興鎭, 태천), 귀화진(歸化鎭, 위치 미상), 귀주(구주),
곽주에 성을 쌓았고, 995년 다시 안의진(安義鎭, 안주),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宣州, 선천)·맹주(孟州,
맹산)에 성을 쌓고, 요나라에 적의를 보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가졌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0년 요나라 성종(聖宗)이 직접 40
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 요나라 군대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수도 있음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
하고 퇴각하였다.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다가 1018년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개경 부근까지 진입한 요나라 군대는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도중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귀주에서 거의 전멸하였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 한다.<위키백과 에서>
이후 두 나라는 오랜 전란에 지쳐 화의를 도모하여, 고려는 요나라의 연호를 쓰기로 하고, 요나라는 강동
6주 반환의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강동은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으려고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게 된다.
지도자료:엔싸이버백과 글머리에 강동6주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도에 보이는 흥화진이 280리가 될까요? 너무도 수긍할수 없는 주장을 늘어놓고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고려는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이 등극한 이후로 천추태후의 세상이 되었고, 조정에서는 하루도 정쟁이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하여 성질이 불같은 강조는 위정자들을 미워하여 반란을 이르키게 됩니다.
이후로 강동 6주는 강조가 반란을 이르켰기때문에 그를 치죄한다는 명목으로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그해 기유년은 고려 7대 목종 12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월 '강조(康兆)의
쿠데타'였습니다.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는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와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새
왕으로 세운 일입니다. 그는 목종을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으며,그 와중에 한때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누렸던 45세의 천추태후(목종의 어머니)는 권좌에서 밀려났고,그의 정부(情夫) 김치양은 태후가 낳아준
6살짜리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때는 거란이 북쪽에서 발호하던 전란의 시절이었습니다. 요수의 동쪽 소위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요구
하며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은 이번에는 강조의 쿠데타를 처벌하겠다며 다시 강을 건너온것입니다.
바로 다음 해 1010년 11월 거란 임금 성종이 40만 군대를 끌고 고려를 침입합니다.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쳤던 강조는 적을 깔보고 바둑을 두다가 그만
창졸간에 적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거란군 포로가 된 고려군 총사령관은 양탄자에 둘둘 말려 거란 왕 앞에 던져졌고. 거란 성종은
그를 풀어
놓고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묻자.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강조는
대꾸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바로 아래 부사(副使)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 세상을 보았으니 어찌 옛
산천을 그리워하겠소!"하며 신하가 될것을 애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나이의 생과 사가 갈렸지요.
숭덕궁주라면 무모하리만큼 충성심을 보였던 강조도 결국은 이렇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거란은 또다시
1018년 고려가 약속과 달리 조공도 않고 강동육주도 돌려주지 않는다며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때 강감찬과 강민첨 등은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고, 흥화진에서는 냇물을
막았다가 갑자기 터트려 거란군을 혼란에 빠트려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패퇴하는 적군을 귀주에서 섬멸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10만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명이었
습니다.
그의 승리는 역사에 '귀주대첩'이라 기록됐고,오늘날 그가 태어났던 자리에는 낙성대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울의 전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서울대 뒷문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이 시기를 오늘 우리 역사책은 '거란과의 30년 전쟁'(993~1019년)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꼭 한 세기 뒤 이번에는 여진족의 금(金)이 거란족의 요(遼)를 물리치고 중국의 송나라를 제압해
남쪽으로 밀어붙인 다음,고려의 굴복을 요구합니다.
이때 거란군에는 항복하지 않았던 고려도 1126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주 대첩(龜州大捷)은 1018년 고려 현종 때 요나라(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에게 승리한 뒤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현종 9년)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이루었다.
이때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고려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대승하였으나,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남하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에서 다시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계속 남하하여 개경 근방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귀주에서 매복하고 있던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
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 이것을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고 해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출전: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서)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 내용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갑오 13년(994), 송 순화 5년ㆍ거란 통화 12년
命平章事徐煕,率兵攻逐女眞,城長興歸化二鎭,及郭龜二州。
평장사(平章事)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長興鎭)ㆍ귀화진
(歸化鎭) 두 진과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을미 14년(995), 송 지도(至道) 원년ㆍ거란 통화 13년
是歲,命平章事徐煕,帥兵,城安義興化二鎭。遣李知白,如契丹,貢方物。
이해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ㆍ흥화진(興化鎭) 두 진에 성을 쌓게
하였다.
6주의 명칭 연혁
이제, ‘서희
수복 6주’의 위치를 찾아 봅니다.
6주의 위치를 찾는데 있어 다행스러운 것은 당이 고구려를 강점한 이후 붙인 지명을 고려도 그대로 사용
하였고, 요나라, 원나라도 지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원사에 기록되어 있는것입니다.
요사와 원사의 지리지에는 그 명칭과 관할하는 현(縣)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 요사, 원사 등에 기록된 지명과 관할하는 현의 지명은 원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
한다. 먼저 ‘서희의 강동 6주’부터
* 흥화주(興化州)
<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1010년)
11월
辛卯,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號義軍天兵,渡鴨綠江,圍興化鎭,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
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犠令張顥,嬰城固守。○壬辰,崔士威等,分軍出龜州北,
恧頓,湯井,曙星,三道,與契丹戰,敗績。
이 기록으로 보면, 강동 6주중의 하나인 흥화진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쪽에 있습니다.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당시 양국의 국경은 압록강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여기에도 군을 나누어 귀주 북쪽으로 보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일단 요하를 건넜고, 주변으로 용주.통주.귀주등이 나타나는
증세로 보아 그 중심인 화주로 추정키로 하였습니다.
* 용주(龍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龍州
<요사>/지/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용주
龍州,黃龍府.本渤海扶餘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
府廢.開泰九年,遷城于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統州五、縣三: 黃龍縣.本渤海長平縣,
併富利、佐慕、肅慎置. 遷民縣.本渤海永寧縣,併豐水、扶羅置. 永平縣.渤海置.
용주. 황룡부. 발해 부여부.(..) 황룡현, 천민현, 영평형 등 3개 현이 있다.
*黃龍府
本渤海扶余府,遼太祖平渤海,(..),即此,故城在今吉林農安縣,今遼寧省開原以北及吉林全境、
內蒙古東境,皆其轄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황룡부 : 발해 부여부(..) 옛성이 현 길림 농안현에 있다. 현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과 내몽골 동쪽이
모두 황룡부 관할이었다.
*永平縣 遼置,金省,今遼宁省鐵岭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영평현 요나라 설치. 현 요녕성 철령현이다. 즉, 용주는 현
길림성 농안현에 치소를 두고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 내몽골 동쪽을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 철주(鐵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鐵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 철주)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
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八]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
철주, 건안군, 자사, 본래 한의 안시현, 고구려 안시성, (..) 탕지현을 관할
*营口市基本概况 : 唐末,北方先后有契丹、女真、蒙古3个民族政权更迭,并在营口市境内设置地方 政权。
辽将渤海国的一些州县迁到营口地域内,在今熊岳镇设卢州领熊岳县,在今汤池镇置 铁州领汤池县,
耀州领岩渊县,归州领归胜县,另设曷苏馆大王府和辰州领建安县。(영구시 홈페이지)
*통주(通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通州
(요사/지, 권38, 지 제8 지리지2/동경도/통주)
通州,安遠軍,節度.本扶餘國王城,渤海號扶餘城.太祖改龍州,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
人燕頗餘黨千餘戶置,升節度.[二一]統縣四: 通遠縣.本渤海扶餘縣,併布多縣置. 安遠縣.本渤海顯
義縣,併鵲川縣置. 歸仁縣,本渤海強帥縣,[二二]併新安縣置.
漁谷縣.本渤海縣.
통주 : 안원군, 절도, 본래 부여국 왕성. 발해시대 부여성이라 부름. 태조가 용주로 개명, 통원현, 안원현,
귀인현, 어곡현 등 4개현이
있다.
* 즉, 통주는 현 요녕성 개원현에 치소를 두고 개원 일대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영구시 기본개황 : 당말,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 등 3개 민족정권이 번갈아 일어날 때, 요나라는 발해의
주현을 영구시 경내에 옮겼다. 현 웅악진에 노주를 설치하여 웅악진을 거느리고, 현재의 탕지진에 철주를
설치하여 탕지현을 거느리고, 요주는 암연현을 거느리고, 귀주는 귀승현을 관할하고,
그 외에 갈소관대왕부와 진주(건안현을 관할)를 설치하였다.
http://www.runsky.com/homepage/dl/spec/2004/forum/cities/userobject1ai449765.html
즉,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에 치소를 두고 영구시 일대를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 귀주(龜州)
귀주는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상대로 대첩을 이룬 전적지이므로
특별히 유의하여 찾아 보았다.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제12 지리3)
龜州本高麗萬年郡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龜州顯宗九年爲防禦使.
高宗三年丹兵來寇州人拒
戰斬獲甚多至十八年蒙兵來侵兵馬使朴犀盡力禦之力屈猶不降以功陞爲定遠大都護府. 後爲都護府又改定州牧.
귀주: 본래 고려
만년군, 성종13년 평장사 서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귀주성을 쌓다,
현종 9년 방어사. 고종3년 거란병이 침입해 항전하여 적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18년에 이르기까지 몽고병이 내침하여 병마사 박서(朴犀)가 진력하여 싸우고 항복하지 아니한 공로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도호부를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치다.
귀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귀주가 정원대호부와 정주목이 되었다는 내용이 입니다.
즉, 귀주가 정주(定州)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高麗史58卷-志12-地理3-020(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定州古稱巴只[一云宣威.]靖宗七年爲定州防禦使置關門恭愍王五年陞都護府
정주, 옛 이름은 파지(일명 선위) 정종7년 정주방어사를 두고 관문 설치. 공민왕5년 도호부로
승격,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定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정주)
定州,保寧軍.高麗置州,故縣一,曰定東.聖宗統和十三年升軍,遷遼西民實之.隸東京留守司.統縣一: 定東縣.高麗所置,遼徙遼西民居之.戶八百.
정주, 보령군, 고려때 주를 설치, 정동현이 있다.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였다.
동경유수사에 속하다. 호수는 팔백이다.
즉 요서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한 것으로 보아 정주는 요서군과도 가까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정주의 위치는
아래의 요사 지리지 동경도 보주를 보면 정주와 보주와 연접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保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보주)
保州,宣義軍,節度.高麗置州,故縣一,曰來遠.聖宗以高麗王詢擅立,問罪不服,統和末,高麗降,
[七]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於此置搉場.隸東京統軍司.統州、軍二,縣一: 來遠縣.初徙遼西諸縣
民實之,又徙奚、漢兵七百防戍焉.戶一千.
보주, 선의군, 절도, 고려때 주를 설치. 래원현이
있다.(..)통화말 고려가 항복하여 개태3년 보주 정주 두 개주를 취하여 이곳에 각장을 설치하다. 동경통군사에 속하게 하다. 래원현이 있다.
래원현,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다. 또 해(奚)의 한인 병사 칠백을 옮겨 방어하게 하다. 호수는 일천이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六 志第六 兵志下/五京鄉丁/東京 (요사 지 권36 지제6 병지 하 5경향정/동경)
東京,本渤海,以其地建南京遼陽府.統縣六,轄軍、府、州、城二十六,[五]有丁四萬一千四百.天顯十
三年,太宗改為東京.
遼陽府: 定州定東縣丁一千六百. 保州來遠縣丁二千.
동경, 원래 발해영토. 그 땅에 남경 요양부를 설치. 6개현을 관할.
(...) 태종때 동경이 되다.
요양부 : 정주 정동현 장정 일천 육백명, 보주 래원현 장정 이천명
귀주가 정주가 되고, 정원대호부(定遠大都護府)가 되었다는 기록에서 추정되는 것은 정주(定州)의 정동현
(定東縣)과 보주(保州) 의
래원현(來遠縣)의 합성지명(定+遠)으로 보여 집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바로 현재의 남경 요양부를 요 태종이 동경으로 고친 요양
관활인것으로 추정
됩니다. 거란지리지도에서 래원과 보주는 압록강의 바로 북쪽에 위치하지만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요양임을 설명하고있어 이를 택하였습니다.
적어도 귀주대첩이 이루어질만한 장소로는 요양정도가 적합한 위치이고 이곳으로 요나라는 자국의 백성
들을 옮겨와 도시를 경영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곽주(郭州)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郭州本高麗長利縣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郭州顯宗九年爲防禦使高宗八年以叛逆降稱定襄.
十八年避蒙兵入于海島元宗二年出陸隸隋州恭愍王二十年復郡號.
곽주. 본래 고려 장리현. 성종13년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곽주성을 쌓음.
현종9년 방어사가 되고, 고종8년 반역하여 정양(定襄)으로 강등하여 부르고, 18년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
(海島)에 들어갔다가. 원종2년 육지로 나온 뒤 수주(隋州)에 속하게 하고 공민왕 20년 다시 옛 군 이름을
되찾다.
*西至望平海口三百六十里, 東西南三面抱海. 舊志, 海在蓋州衛西十里, 又西十里爲歸洲,
<구지>에 의하면 봉천에서 서쪽으로 360리에 망평해구가 있고,동,서,남 삼면을 바다를 끼고 있는데,
개주위의 서쪽 10리에 바다가 있고, 또 그 바다에서 서쪽으로 10리에 귀주라는 섬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귀주가 개주의 남쪽 뭍으로 옮겨젔습니다.)
<요사 지리지>이곳이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로 들어갔다가 원종2년에 육지로 나왔다는 귀주(歸洲)로 봅니다.
이후 수주로 바뀌고 후에 다시 원 이름인 곽주로 되찾았다는것입니다.
新校本遼史/本紀/卷十五 聖宗六/開泰二年 (요사 본기
권15 성종6/개태2년)
丙寅,詳穩張馬留獻女直人知高麗事者.上問之,曰:「臣三年前為高麗所虜,為郎官,故知之.自開京東
馬行七日,有大砦,廣如開京,旁州所貢珍異,皆積于此.勝、羅等州之南,亦有二大砦,所積如之.若大
軍行由前路,取曷蘇館女直北,直渡鴨淥江,並大河而上,至郭州與大路會,高麗可取而有也.」上納之
병인, 장마류가 고려사정을 아는 여직인(주1)을 바쳤다. 왕(요의 성종)이 묻자 대답하기를 “신이 3년전
고려의 포로가 되어 낭관이 되었던 고로 압니다.
개경 동쪽에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대채가 있는데 크기가 개경정도 되고 여러 주에서 보낸 진귀한 공물
로 쌓여 있으며, 승주, 나주 등의 남쪽에 또한 두 개의 대채가 있는데 공물의 쌓인 바가 그와 같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직(주2)의 북쪽을 얻고, 압록강을 곧바로 건너서 대하(大河)(주3)
를 거슬러 올라가면 곽주와 대로(大路)(주4)를 만납니다. 고려를 가히 취할 수 있습니다.” 왕이 받아
들이다.
*필자 주 : 주(1) 여직(女直)은 여진(女眞)과 같다. (2)갈소관여직은 현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연윤 이북에 있었었다고 한다.(갈소관로치소고 : 동만군, 북경문물, 1992년 제1기).
* 曷苏馆路治所考 董万军 《北方文物》1992年第1期(갈소관로치소고, 동만군)
辽代曷苏馆女真,金曷苏馆路治所,确在营口地区盖县南部和复县永宁澗以北地域内设置
요대의 갈소관여진, 금대 갈소관로 치소는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영윤 이북지역에 설치되었던
확실하다.
http://www.bjkg.com/wenxzl-sub1.asp?id=812
金史 卷024志第五 地理上(금사
권24 지5 지리 상)
盖州,奉国军节度使,下。本高丽盖葛牟城,辽辰州。明昌四年,罢曷苏馆,
개주, 봉국군절도사, 하. 본래 고려
개모성, 요나라 진주. 명창4년 갈소관을 폐하다.
맺는 말
지금 이나라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봅니다. 그것도 외부의 사정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분열된 국론때문입
니다. 이 자리를 빌어 어줍지않은 시론을 펴자는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사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역사는 반면교사라는 철학을 미량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필자도 이나라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한평생을 보내는 같은 동포의 일원의 자격으로 호소하고자 합니다.
당리당략을 위한 소인배들의 정쟁을 당장 걷우시기 바랍니다.가정의 불화는 행복을 파괴할것이고 국정의
내분은 너와내가 같이 망하는 공멸을 가져올것입니다. 글을 펼치는 과정에서 혹 잘못된 판단이 있을수도
있습니다.요하의 동쪽을 기준으로 한 지명이라는 범위를 넘지않도록 고려하였습니다.
<고려사>의 신빙도를 비판한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
안정복의 <동사강목>의<지리고>에서 정인지가 저술하였던<고려사>는 <삼국사기>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여 만들었으므로 국읍과 산천을 고거(考據)할 데가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원근을
전도하고 남북을 바꾸어 놓았으니 믿을 수 있는 역사책이라고 하겠는가?
고려 서희 장군의 강동6주
Ⅰ. 서언
고려 성종때 서희장군께서 거란으로부터 수복한 6주는 흔히 “강동6주”, 서희장군이 쌓은 성은 “강동6성”으
로 불리어지며, 현재의 한중 국경인 압록강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국사교과서 등에 기록되고 있다.
이글에서는
서희장군께서 거란으로부터 수복한 6주와 6성의 원래 위치를 고찰해 본다.
먼저, [속자치통감]에 기록된 6주는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구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이고,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은 장흥진(長興鎭)ㆍ귀화진(歸化鎭), 곽주(郭州)성ㆍ귀주
(龜州)성 , 안의진(安義鎭)ㆍ흥화진(興化鎭)이다.
1. 참고 자료 및
연구방법
위에 기록된 지명의 원래 위치를 찾는데 참고한 자료는 [신교본요사], [고려사절요(민족문화추진회 번역)],
[속자치통감], [원사], [하북정구연혁지(河北政区沿革志)], [중국고대지명대사전(중화박물편집)], [고금
지명대조표], 지나의 북경, 승덕시,
호로도시, 영구시, 향하현 등 홈페이지 , 기타 지나 사가들의 글 등이다.
지나의 여러 기록 중 간체로 기록된 것은 번체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였다.
지명 위치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원사지리지]였다. [원사지리지] 동녕로(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조에는 아래에서 다시 인용하겠지만, “당나라 말에 고려에 편입된 60
여성은 고려, 원에서 당의 옛 명칭을 그대로
썼다(雖仍唐舊名)”고 하였다.
따라서 원래의 주, 성의 명칭, 관할하는 현의 명칭을 연결고리로 하여 원래 위치를 찾아 보았다.
2. “강동6주” “강동6성”에 대한 용어 검토
필자의 연구결과 서희장군께서 수복한 6주와 6성은
국사교과서의 기록과 다르게, 현재의 요녕성, 길림성,
하북성, 산서성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강동6주”라는 용어는 우리
스스로에게 6주 위치가 압록강 동쪽에 있다는 최면을 거는 효과가 있다.
필자는 ‘강동 6주’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서희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서희 수복 6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고, 서희장군이 쌓은 6성은 “서희 개척 6성”으로 부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이 6주의 위치가 현재의 압록강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압록강 동쪽을
위미하는 “강동”이라는 용어가 [요사]나 [고려사절요], [속자치통감] 등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어느 사서
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국사책에는 “강동6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이것도 혹시 식민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고도의 최면술이 아닌지 의심된다.
Ⅱ. 서희수복 6주 6성 관련 국내외 기록 실태
1. 국내 기록
(가) 야후백과 사전
고려 성종 때 평안북도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설치한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
구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 고려 때 군사상 교통상 요지였던 강동6주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장군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압록강의 동쪽지방을
개척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열 것을 조건으로 고려는 강동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6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6주 개척 후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흥(長興;泰川)·귀화(歸化;郭山)·선천
(宣川;宣州)·안의(安義;定州)·흥화(興化;義州東)·구주(龜州;龜城) 등지에 강동6성을 쌓고 거란에게
적의를 보였다.
이에 거란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약속불이행을 추궁하고 국왕이 친히 내조(內朝)할 것을 요구하였
으나 역시 듣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강동6주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에서 이를 듣지 않자 거란은 1018년(현종 9) 이래 3차에 걸쳐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고 침입하였
으나 번번이 고려의 항전으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으며,
특히 제3차 침입 때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거란군은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에 의해 대파되어
돌아갔는데, 이를 구주대첩이라고 한다. 두 나라는 서로 적대관계에 지쳤기 때문에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대신 거란은 강동6주의 요구를 철회하였으므로 강동6주는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 야후백과사전에서
압록강은 현재의 한중 국경인 압록강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고려시대의 압록강은 현재의 요녕성 요하를 가리킨다는 것은
이 사이트에서 여러 번
언급된 것이므로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나)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煕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
侵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黠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
女眞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
納,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煕,留丹營,七日而還,
王,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煕,復奏曰,臣,與遜寧約,盪平女眞,收復
舊地,然後朝覲可通,今纔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
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
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서기 993년에 이미 압록강 안쪽은 수복하였고, 바깥쪽에 대한 수복을
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희 수복
6주’와 6성이 압록강 안과 밖에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 내용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갑오 13년(994), 송 순화 5년ㆍ거란 통화 12년
命平章事徐煕,率兵攻逐女眞,城長興歸化二鎭,及郭龜二州。
평장사(平章事)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長興鎭)ㆍ
귀화진(歸化鎭) 두 진과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을미 14년(995), 송 지도(至道) 원년ㆍ거란 통화 13년
是歲,命平章事徐煕,帥兵,城安義興化二鎭。遣李知白,如契丹,貢方物。
이해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ㆍ흥화진(興化鎭) 두 진에 성을 쌓게
하였다.
2. 속자치통감 卷第三十 宋紀三十
己未,高麗王詢遣刑部侍郎田供之奉表於遼,稱病不能朝。遼主怒,命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
龜州六城。
기미, 고려왕 순(詢)이
형부시랑 전공을 시켜 요에 표를 보내, 병을 빙자하여 입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요주가 노하여 화주,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귀주 6성을
취하도록 명하였다.
☞속자치통감에도 ‘서희 수복 6주’가 압록강의 동쪽이라는 기록은 없다.
Ⅲ. 서희 수복 6주의
위치
1. 6주의 명칭 연혁
이제, ‘서희 수복 6주’의 위치를 찾아 본다. 6주의 위치를 찾는데 있어 다행스러운
것은 당이 고구려를
강점한 이후 붙인 지명을 고려도 그대로 사용하였고, 요나라, 원나라도 지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
하였다고 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요사와 원사의 지리지에는 그 명칭과 관할하는 현(縣)이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가)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
居平瓖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
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為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
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餘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
名.錄事司.土山縣.中和縣.鐵化鎮.都護府,自唐之季,地入高麗,置府州縣鎮六十餘城,此為都護府,
雖仍唐舊名,而無都護府之實.至元六年,李延齡等以其地來歸,後城治廢毀,僅存其名,屬東寧路.定遠
府.郭州.撫州.黃州.領安岳、三和、龍岡、咸從、江西五縣,長命一鎮.
원사/지/권59 지제11. 지리2/요양등처행중서성/동녕로
동녕로, 본 고구려 평양성. 장안성이라고도 함. 한이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토군을 두었는데,
이곳에 낙랑을 두었다. 진 의희 이후 고구려 왕 고련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그 나라는 동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원나라 지원 6년, 이연령, 최탄, 현원열 등이 부주현진 60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8년 서경을 동녕부로 고치다.
13년.(..) 현재도 옛 명칭 그대로다(今姑存舊名). 토산현, 중화현. 철화진.
도호부. 당나라 말에 고려에 편입되어 부주현진 60여성을 두고 이곳은 도호부가 되다.
당의 명칭을 그대로 쓰다(雖仍唐舊名).(...) 이연령 등이 항복한 뒤 성의 치소가 훼손되었으나 그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고(僅存其名) 동녕부에 속하다.
정원부(定遠府), 곽주(郭州), 무주, 황주는 안악, 삼화, 용강, 함종, 강서의 다섯 개 현과 장명진을
관할하다.
☞ 따라서 고려사, 요사, 원사 등에 기록된 지명과 관할하는 현의 지명은 원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서희 수복 6주’부터 살펴본다.
2. 서희 수복 6주
(가) 흥화(興化)주
河北政区沿革志 承德市(하북정구연혁지 승덕시)
辽为中京道北安州兴化县地。金承安五年(1200年)置兴州,治兴化县(今滦河街西南里许),属北京路;
为兴化县、宜兴县地。元属上都路兴州兴安县、宜兴县地。
http://post.baidu.com/f?kz=19828745
요나라 때에 중경도 북안주 흥화현. 금
승안5년(1200년) 흥주를 설치,
치소는 흥화현(현 난하거리 서남 지점)에 두었다.
☞ 즉, 고려의 흥화주는 요의 북안주
흥화현으로서 현 하북성 승덕시 난하거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나) 용주(龍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龍州 (요사/지/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용주)
龍州,黃龍府.本渤海扶餘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
府廢.開泰九年,遷城于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統州五、縣三: 黃龍縣.本渤海長平縣,
併富利、佐慕、肅慎置. 遷民縣.本渤海永寧縣,併豐水、扶羅置. 永平縣.渤海置.
용주. 황룡부. 발해 부여부.(..) 황룡현, 천민현, 영평형 등 3개 현이 있다.
*黃龍府
本渤海潛余府,遼太祖平渤海,(..),即此,故城在今吉林農安縣,今遼寧省開原以北及吉林全境、
內蒙古東境,皆其轄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황룡부 : 발해
잠여부(..) 옛성이 현 길림 농안현에 있다.
현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과 내몽골 동쪽이 모두 황룡부 관할이었다.
*永平縣
遼置,金省,今遼宁省鐵岭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영평현 요나라 설치. 현 요녕성 철령현이다.
☞ 즉, 용주는 현 길림성
농안현에 치소를 두고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 내몽골 동쪽을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다) 통주(通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通州 (요사/지, 권38, 지 제8 지리지2/동경도/통주)
通州,安遠軍,節度.本扶餘國王城,渤海號扶餘城.太祖改龍州,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人
燕頗餘黨千餘戶置,升節度.[二一]統縣四: 通遠縣.本渤海扶餘縣,併布多縣置. 安遠縣.本渤海顯義縣,
併鵲川縣置. 歸仁縣,本渤海強帥縣,[二二]併新安縣置.
漁谷縣.本渤海縣.
통주 : 안원군, 절도, 본래 부여국 왕성. 발해시대 부여성이라 부름. 태조가 용주로 개명, 통원현,
안원현,
귀인현, 어곡현 등 4개현이 있다.
*通遠縣 遼置,今遼寧省開原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통원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安遠縣 遼置,今遼宁省開原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안원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 漁谷縣
遼置,今遼寧省開原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어곡현 요치, 현 요녕성 개원현
☞ 즉, 통주는 현 요녕성 개원현에 치소를 두고
개원 일대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라) 철주(鐵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鐵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 철주)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
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八]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
철주, 건안군, 자사, 본래 한의 안시현, 고구려 안시성, (..) 탕지현을 관할
*营口市基本概况 :
唐末,北方先后有契丹、女真、蒙古3个民族政权更迭,并在营口市境内设置地方 政权。
辽将渤海国的一些州县迁到营口地域内,在今熊岳镇设卢州领熊岳县,在今汤池镇置 铁州领汤池县,耀州
领岩渊县,归州领归胜县,另设曷苏馆大王府和辰州领建安县。(영구시 홈페이지)
영구시 기본개황 : 당말,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 등 3개 민족정권이 번갈아 일어날 때, 요나라는 발해의
주현을 영구시 경내에 옮겼다. 현 웅악진에 노주를 설치하여 웅악진을 거느리고, 현재의 탕지진에 철주를
설치하여 탕지현을 거느리고, 요주는 암연현을 거느리고, 귀주는 귀승현을 관할하고,
그 외에 갈소관대왕부와 진주(건안현을
관할)를 설치하였다.
http://www.runsky.com/homepage/dl/spec/2004/forum/cities/userobject1ai449765.html
☞ 즉,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에 치소를 두고 영구시 일대를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마)
귀주(龜州)
귀주는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상대로 대첩을 이룬 전적지이므로 특별히 유의하여 찾아 보았다.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제12 지리3)
龜州本高麗萬年郡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龜州顯宗九年爲防禦使.
高宗三年丹兵來寇州人拒
戰斬獲甚多至十八年蒙兵來侵兵馬使朴犀盡力禦之力屈猶不降以功陞爲定遠大都護府. 後爲都護府又改定州牧.
귀주: 본래 고려
만년군, 성종13년 평장사 서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귀주성을 쌓다,
현종 9년 방어사. 고종3년 거란병이 침입해 항전하여 적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18년에 이르기까지 몽고병이 내침하여 병마사 박서(朴犀)가 진력하여 싸우고 항복하지 아니한 공로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도호부를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치다.
☞ 귀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귀주가 정원대호부와 정주목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즉, 귀주가 정주(定州)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하여 고려사와 요사의 기록을 보자
高麗史58卷-志12-地理3-020(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定州古稱巴只[一云宣威.]靖宗七年爲定州防禦使置關門恭愍王五年陞都護府別號中山. 有鼻白山.
[春秋降香祝行祭.]
정주, 옛 이름은
파지(일명 선위) 정종7년 정주방어사를 두고 관문 설치. 공민왕5년 도호부로 승격,
또 다른 이름은 중산도호부라고도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
중산에 관한 고금지명대조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中山——①中山国,战国都顾(今河北定县)。一度为魏所灭,复国后迁灵寿(今平山东北)。公元前296年
为赵所灭。②汉郡、国,治卢奴(今定县)。后燕以为都城。隋废。⑧宋以定州为中山府,治安喜(今定县)。
④今中山县,宋以来为香山县。1925年孙中山逝世后改今名,中山故里在县南翠亨村。(고금지명대조)
중산-②한나라때, 군, 국, 치소 노노(현 하북 정현) 후연의 도성. 수나라 때 폐함. 송은 정주를 중산부로
하다. 치소 안희(현
하북 정현)
*定州——北魏改安州为定州,北齐改其治所卢奴为安喜县,即今河北定县。北宋末定州为中山府。
明改定州。(고금지명대조표)
정주: 북위때 안주를 정주로 개칭. 북제는 그 치소 노노를 안희현으로 하다. 즉 현재의 하북 정현이다.
북송말 정주는 중산부가
되다. 명나라때 정주로 고치다
☞ 현재 하북 정현(定县)이 정주의 치소였고, 전국시대 중산국의 도성으로서, 북송과 고려가 각각
중산
으로 불렀다는 것이 고려사와 지나의 고금지명대조표가 일치한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定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정주)
定州,保寧軍.高麗置州,故縣一,曰定東.聖宗統和十三年升軍,遷遼西民實之.隸東京留守司.
統縣一:
定東縣.高麗所置,遼徙遼西民居之.戶八百.
정주, 보령군, 고려때 주를 설치, 정동현이 있다.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였다.
동경유수사에 속하다. 호수는 팔백이다.
☞ 즉 요서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한 것으로 보아 정주는 요서군과도 가까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정주의 위치는 아래의 요사 지리지 동경도 보주를 보면 정주와 보주와 연접한 것으로 나타난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保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보주)
保州,宣義軍,節度.高麗置州,故縣一,曰來遠.聖宗以高麗王詢擅立,問罪不服,統和末,
高麗降,[七]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於此置搉場.隸東京統軍司.統州、軍二,縣一:
來遠縣.初徙遼西諸縣民實之,又徙奚、漢兵七百防戍焉.戶一千.
보주, 선의군, 절도, 고려때 주를 설치. 래원현이
있다.(..)통화말 고려가 항복하여 개태3년 보주 정주 두
개주를 취하여 이곳에 각장을 설치하다. 동경통군사에 속하게 하다. 래원현이 있다.
래원현,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다. 또 해(奚)의 한인 병사 칠백을 옮겨 방어하게 하다.
호수는 일천이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六 志第六 兵志下/五京鄉丁/東京 (요사 지 권36 지제6 병지 하 5경향정/동경)
東京,本渤海,以其地建南京遼陽府.統縣六,轄軍、府、州、城二十六,[五]有丁四萬一千四百.
天顯十三年,太宗改為東京.
遼陽府: 定州定東縣丁一千六百. 保州來遠縣丁二千.
동경, 원래 발해영토. 그 땅에 남경 요양부를 설치. 6개현을 관할.
(...) 태종때 동경이 되다.
요양부 : 정주 정동현 장정 일천 육백명, 보주 래원현 장정 이천명
☞ 귀주가 정주가
되고, 정원대호부(定遠大都護府)가 되었다는 기록에서 추정되는 것은 정주(定州)의
정동현(定東縣)과 보주(保州) 의 래원현(來遠縣)의
합성지명(定+遠)으로 보여 진다.
하북성 보정지구는 북경, 천진과 함께 하북의 삼각축을 이루는 중요한 곳이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교통요지로서 하북지구는 당시 남쪽의 송, 북쪽의 요나라, 동쪽의 고려가 서로 각축을 벌이던 요지였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바로 현재의
하북성 정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바) 곽주(郭州)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郭州本高麗長利縣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郭州顯宗九年爲防禦使高宗八年以叛逆降稱定襄.
十八年避蒙兵入于海島元宗二年出陸隸隋州恭愍王二十年復郡號.
곽주. 본래 고려 장리현. 성종13년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곽주성을 쌓음.
현종9년 방어사가 되고, 고종8년 반역하여 정양(定襄)으로 강등하여 부르고, 18년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
(海島)에 들어갔다가.
원종2년 육지로 나온 뒤 수주(隋州)에 속하게 하고 공민왕 20년 다시 옛 군 이름을 되찾다.
[요사]에는 고려에 포로가 되었던 여진인이 요나라 성종에게 개경으로부터 곽주에 이르는 노정에 관해
진술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新校本遼史/本紀/卷十五 聖宗六/開泰二年 (요사 본기 권15 성종6/개태2년)
丙寅,詳穩張馬留獻女直人知高麗事者.上問之,曰:「臣三年前為高麗所虜,為郎官,故知之.自開京東
馬行七日,有大砦,廣如開京,旁州所貢珍異,皆積于此.勝、羅等州之南,亦有二大砦,所積如之.若大
軍行由前路,取曷蘇館女直北,直渡鴨淥江,並大河而上,至郭州與大路會,高麗可取而有也.」上納之
병인, 장마류가 고려사정을 아는 여직인(주1)을 바쳤다. 왕(요의 성종)이 묻자 대답하기를 “신이 3년전
고려의 포로가 되어 낭관이 되었던 고로 압니다. 개경 동쪽에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대채가 있는데
크기가 개경정도 되고 여러 주에서 보낸 진귀한 공물로 쌓여 있으며, 승주, 나주 등의 남쪽에 또한 두 개의
대채가 있는데 공물의 쌓인 바가 그와 같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직(주2)의 북쪽을 얻고, 압록강을 곧바로 건너서 대하(大河)(주3)
를 거슬러 올라가면 곽주와 대로(大路)(주4)를 만납니다. 고려를 가히 취할 수 있습니다.”
왕이 받아 들이다.
*필자 주 : 주(1) 여직(女直)은 여진(女眞)과 같다. (2)갈소관여직은 현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연윤 이북에 있었었다고 한다.(갈소관로치소고 : 동만군, 북경문물, 1992년 제1기).
(3)대하(大河)는 현 대릉하 또는 난하로 추정된다. (4)대로(大路)는 단지 큰길을 가리킨 것 같지 않다.
행정구역명칭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요나라에서는 ‘00로’라는 행정구역이 없었다.
요사가 후대의 金과 元나라때 기록 된 것을 고려하면, 어쩌면 사가가 기록 당시의 행정구역명칭을 혼용
하여 쓴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즉, 북경지방이 대녕로(大寧路)에 속하였는데, 위의 대로는 대녕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
曷苏馆路治所考 董万军 《北方文物》1992年第1期(갈소관로치소고, 동만군)
辽代曷苏馆女真,金曷苏馆路治所,确在营口地区盖县南部和复县永宁澗以北地域内设置
요대의 갈소관여진, 금대 갈소관로 치소는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영윤 이북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http://www.bjkg.com/wenxzl-sub1.asp?id=812
金史 卷024志第五 地理上(금사
권24 지5 지리 상)
盖州,奉国军节度使,下。本高丽盖葛牟城,辽辰州。明昌四年,罢曷苏馆,
개주, 봉국군절도사, 하. 본래 고려
개모성, 요나라 진주. 명창4년 갈소관을 폐하다.
☞위 여진인의 진술을 보면,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현재의 만주를 가로질러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에
도착한 뒤 압록강(현재의 요하)을 건너서 또다시 대릉하 또는 난하와 만나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다
소 추상적인 진술이나 대체적으로 현 하북성 중․북부 지구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래에 하북성 향하현의 연혁을 더 살펴 보자.
하북성
香河县 建置沿革 향하현 설치연혁(향하현 홈페이지)
公元936年,石敬塘(后称晋高祖)勾结契丹(后称辽)灭后唐,割燕云十六州给契丹,此地属契丹。
契丹会同元年(938年),于武清孙村置榷盐院,为贮盐新仓。后居民集聚,渐成井肆,遂由武清、漷县
(今属通县)、三河划出部分地域置香河县。时县境较阔,约辖
至元九年
(1272年),属大都路大兴府。至元十三年,升梆阴县(今北京市通县漷县镇)为州,
香河县属大都路漷州,明洪武元年(1368年),香河隶漷州,属山东行省北平府。
http://www.xianghe.cn/zjxh/xhxz.htm
기원936년, 석경당(뒤의 진 고조)이 거란(위의
요)과 연합하여 후당을 멸하고, 연운16주를 거란에게 할양
하여 이곳은 거란에 속함. 거란 회동원년(938년) (..) 무청(武清), 곽현(漷县, 현재 통현), 삼하(三河)현의
부분을 떼어내어 향하현을 설치(...) 원나라 지원13년(1276년) 향하현은 대도로 곽주(漷州)에 속함.
*역자 주) 향하현은 북경과 천진 사이에 있음
지나의 어떤 연구자가 쓴 아래의 글에는 위 하북성 향하현 홈페이지와
내용이 같으나 곽주를 漷州라고
표기하지 않고 郭州라고 표기하고 있다.
天津市的武清县和河北省的香河县并入二十几个村庄,类似元朝的郭州,只是比郭州小得多。《辽史》、
《元史》、《寰宇通志》和《方舆纪要》中记载:郭县原名霍村镇,辽代改为郭阴县,元朝至正十三年升
格为郭州,并且管辖武清和香河两县。明朝初年,降为郭县,
천진시 무청현과 하북성 향화현의 28개 촌장을 합하면 원나라의 곽주와 유사하다. 요사, 원사, 환우통지,
방여기요에 기록된 곽현의 원명은 곽촌진이다. 요나라 때에는 곽음현(郭陰縣)이었다가, 원대에 곽주(郭州)
가 되어 무청(武清)과 향화(香河) 두 개현을 관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http://www.clcn.cn.net/guest/search/st_dianzi/st_jw/zgny/zgny29.htm
☞ 즉, 곽주는 우리의 역사교과서 기술과 다르게 만리장성 너머 현재의 북경과 천진사이에 있는 향화현에
있었다. 이것은 위 요사에
나오는 여직인의 진술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Ⅳ. 서희 개척 6성
1. 장흥진(長興鎭),
귀화진(歸化鎭)
新校本遼史/志/卷三十九 志第九 地理志三/中京道/中京大定府 (요사 지 권39, 지제9, 지리지3 중경도,
중경
대정부)
統州十、縣九:10주와 9현을 통괄한다.
大定縣.白霫故地.以諸國俘戶居之.대정현
長興縣.[三]本漢賓從縣.以諸部人居之.(장흥현, 한의 빈종현, 여러부 사람이 거주하다)
歸化縣.本漢柳城縣地.(귀화현, 본래
한의 류성현지이다.)
(가) 장흥진(長興鎭)
위 요사 중경대정부조 기록을 보면 관할 9현 중에 장흥, 귀화현이
있다.
장흥진은 그 중 장흥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의 빈종현이라 하였다.
노북경망(老北京网)에 실린 당대의 북경지방의 행정구역 설명(唐代地方行政区)을 보면 빈종현은 선주
(鲜州)에 속하였고, 그 치소는 로현 고성(현 북경 통현 동쪽8리 고성촌)에 있었으며 빈종현을 관할하였
다고 되어있다.
鲜州,寄治于潞县之古潞城(今通县东8里之古城村),领宾从县
선주, 로현의 옛 로성에 치소를 설치(현 통현
동쪽8리 고성촌),
http://www.oldbeijing.net/Article_Show2.asp?ArticleID=2351
☞위 요사와 노북경망의 기록으로 볼 때 장흥진은 북경시 통현에 있었다.
즉, 장흥진은 그 위치가 곽주와 인접하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 귀화진(歸化鎭)
중경대정부에에 귀화현이 있었다. 귀화진은 위의 귀화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화현은 한의 유성현(柳城縣)이라고 하였다. 고대사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바로 그 유성(柳城)이다.
柳城县(중국고대지명대사전)
汉置,后汉省,故城在今辽宁省兴城县西南,清一统志谓故城即后魏及唐之营州、辽之兴中府,
今河北省朝阳县,按后汉书注,故城在今营州南,则汉柳城非唐之营州治可知,又李兆洛谓在今永平府境,
陈芳绩历代地理尚革表,谓今昌黎西五十里静安社为古柳城。
한대의 유성은 현 요녕성 흥성현 서남이다. 청 일통지에는 고성이 곧 후위와 당의 영주이고, 요나라의
흥중부는 현 하북성 조양현이라고 하였다.
후한서 주에 따르면 고성은 영주의 남쪽에 있었다. 즉, 한의 유성은 당의 영주치소가 아니다.
이조락은 현재의 영평부 경내라고 하였다. 진방적은 역대지리상혁표에서 현재의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가
옛 유성이라고 하였다.
☞ 필자는 일단 진방적의
이론을 택하여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를 귀화진의 위치로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장흥, 귀화 설치를 같이 하였고, 군사적으로 서로 상응할 수 있도록 가까이 있어야 하므로
장흥과 가장 가까운 창려 서쪽을 채택하였다.
2. 안의진(安義鎭)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지12/지리3)
安義鎭顯宗九年築城.
안의진, 현종 9년에
쌓았다.
안의라는 지명은 신당서에 나오는데 상곡군에 속한 9개 府 중의 하나이다.
● 新校本新唐書/志/卷三十九 志第二十九
地理三/河北道 (신당서/지/권39/ 지제29/지리3/하북도)
易州上谷郡,上.土貢:紬、綿、墨.戶四萬四千二百三十,口二十五萬八千七百七十九.縣六.有府九,
曰遂城、安義、脩武、德行、新安、古亭、武遂、長樂、龍水.有高陽軍.易,上.容城,上.本遒.武德
五年,以容城及幽州之固安、歸義置北義州.貞觀元年州廢,縣還故屬.聖曆二年以拒契丹更名全忠,神龍二
年復故名,天寶元年又更名.遂城,上.淶水,上.滿城,中.本永樂,天寶元年更名.有郎山.有永清軍,
貞元十五年置.五回.中下.開元二十三年析易置,置樓亭、板城二縣.天寶後省.
역주 상곡군, 현은 6개소, 부는 9개, 수성, 안의(安義), 수무, 덕행, 신안, 고정, 무수, 장락, 용수,...
● 산서성 장치시(长治市)
长治市位于山西省的东南部,居太行之巅,古称"上党".<释名,释洲国>说:"上党,党,所也,在山上,其所最高,故
曰上党."<文献通考>说:"其地极高,与天为党,故云."<潞安府志>说:"潞以水名,其称上党
五代后唐庄宗初,置潞州。梁末帝时(913-921年),改为匡义军,岁余,唐灭梁,改为安义军。后晋
(936-947年),复为昭义军。后汉、后周(947-960年)因之。具治潞州。
산서성 장치시는 산서성 동남부에 있다. 옛 명칭은 상당이다.(...) 오대 후당시 로주를 설치..
당이 량을 멸하고 안의군으로
개칭하다. 후진때 소의군이 되다...
http://club.heima.com/show_topic.aspx?forumid=198605&topicid=840003
☞ 후당 때 산서성 장치시가 안의군이 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의 안의진은 산서성 장치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3.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흥화진(興化鎭)성
곽주, 귀주, 흥화진성은 위 서희 수복 6주 중 곽주, 귀주, 흥화주와
명칭이 같은 것으로 보아 그 곳에 성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서희 개척 6성”은 “서희 수복 6주”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Ⅲ. “서희 수복 6주”가 ‘강동6주’ 로 알려진 원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희 수복 6주와 개척6성은 현 하북성 북쪽에서부터 요녕성 요하(압록강) 동서에
걸쳐 있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왜 압록강 동쪽 ‘강동 6주’라고 백과사전과 국사교과서에 기록되고
있을까?
언제부터 강동6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혹시 이러한
용어도 식민지사학자
들이 만든 용어라면 우리에게 오랫동안 세뇌교육과 최면을 건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잘못된 용어는
적합한 다른 용어를 찾아서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Ⅳ.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서희수복 6주’ 중 흥화주는 요의 북안주
흥화현으로서 현 하북성 승덕시 난하거리,
용주는 현 길림성 농안현, 통주는 현 요녕성 개원현,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 귀주는 현재의
하북성 정현, 곽주는 현재의 북경과 천진사이에 있는 향화현에 있었다.
‘서희 개척6성’ 중 장흥진은 북경시 통현, 귀화진은
창려 서쪽 50리 정안사, 안의진은 산서성 장치시,
나머지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흥화진(興化鎭)성은 위의 6주 위치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위치 비정은 역사적 사실관계를 충분히 고찰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나라와 지나의 사서,
지나의 고대지명사전에 실려 있는 동일 지명을 찾아서 추정한 것이어서 한계가 있다. 필자의 조그마한
노력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구이넷 회원 여러분의
의견제시를 기대한다.
이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사이트에서 만이라도 “강동6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희 수복 6주’
‘서희 개척 6성’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며, 더 좋은 용어가 있으면 제시하여 같이 검토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수메르)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