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과 경복궁 -서울의 주산과 그 아래 조선의 대궐- 배우리 회장(한국땅이름학회)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악산(北岳山)은 서운하다. 너른 마을 한양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조차 몰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청와대 뒤의 이 북악산을 서울 사람들의 반 이상이 이 산의 이름을 정확히 모르고, 대개는 인왕산(仁王山)으로 알고 있다지 않은가. 원주 사람들은 그 지방의 주산인 치악산(雉岳山)을 잘 알고, 목포 사람들은 유달산(儒達山)을, 개성 사람들은 송악산(松岳山)을 그 고장의 주산 또는 진산이라 하여 잘들도 기억해 주고 있는데, 왜 지금의 한양 사람들은 이 고장의 주산인 이 산을 몰라 주는 걸까? 이 북악산의 딴이름은 '백악(白岳)'이다. 아마도 '흰 바위를 이고 있는 산'이란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었으리라고도 보지만, '백악'에서의 '백(白)'은 원래 '으뜸'의 뜻을 갖고 있었던 글자라 하니, '고을의 으뜸 산'이란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그럴 것이다. 이 산은 또 '공극산(拱極山)' 또는 '면악(面岳)'이라고도 한다. 높이 342m의 이 북악산은 화강암(花崗岩.쑥돌)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세가 매우 유순하다.
□ 북악 밑은 그 형세로 보아 천하의 명당
조선시대에 이 북악을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정했다. 풍수지리학적인 면을 크게 고려해서다. 이 산은 양쪽으로 두 팔을 힘차게 펼쳐 청룡(靑龍), 백호(白虎)의 긴 맥을 이루어 놓았다. 그 앞으로 넓은 평지. 정면으로는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알맞은 높이의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서울의 진산을 <동국여지승람>에선 '북한산(北漢山)'이라고 적고 있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이 산이 진산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명승이며, 풍수의 대가인 도선대사(道詵大師)도 이 산을 '가히 궁궐의 주룡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또 그의 <유기(留記)>에서 '왕씨를 이어 임금 될 사람은 이(李)씨이고, 한양에 도읍한다'는 예언까지 하였었다. 고려 때도 나라에선 이 산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고려 중엽의 숙종 때 최사추와 윤관 등은 남경(南京.서울)터를 살피고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산형과 수세가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여 그 풍수적인 면을 높이 샀다. 고려 왕조에선 이 산을 중심으로 하여 언제고 이(李)씨가 새 나라를 세울 조짐이 있다고 조금 겁도 먹었다. 그 기운을 아예 없애야지. 그래서, 풍수상의 조치를 하기도 하고, 윤관을 시켜 백악 남쪽에 오얏(李)을 심어 놓고 무성하게 자라면 싹둑싹둑 잘라서 왕성한 기운을 눌러 왔다. 북아산은 북한산과 손을 잡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 조선에 들어와 이 북악산 밑을 궁궐터로 잡은 것은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 총론(경기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태조가 중 무학을 시켜 도읍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萬景臺))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碑峰)에 갔다가 한 개의 돌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무학이 산의 맥을 잘못 찾아서 여기에 온다)라는 6글자가 있었는데, 이는 도선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은 드디어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쪽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 맥이 합쳐져서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 터를 정하였는데, 곧 고려 때에 오얏을 심던 곳이었다." 이 태조는 왕이 되자 새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해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옮길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한양의 어디쯤에 궁궐터를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어명을 받들어 천도(遷都)를 위해 새 왕도(王都)를 찾아 나섰던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1327~1405)는 인왕산(仁王山)으로 진산을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을 좌우의 용호(龍虎)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인 정도전(1337∼1398)의 주장은 달랐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렸지 동향(東向)하였다는 말은 들어 본 일이 없다면서 북악(北岳.백악)을 주산으로 삼고, 인왕(仁王)과 낙산(駱山)을 좌우 용호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태조는 갈등 끝에 '북악 주산론'의 정도전 의견을 따라 궁궐 터를 정했다. 경복궁이 지금의 자리에 자리잡게 된 것은 바로 태조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뚝딱뚝딱, 쓱싹쓱싹, --- 즉위 3년째인 1394년 신도 궁궐 조성 도감을 열어 궁 창건을 시작하고,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궁궐 지은 후 왜 그렇게도 순탄치 못했던가? 왕자의 난 등 흉사(凶事)가 겹쳤다. 에라, 옮겨 버리자, 한양 천도 4년 반만인 정조 원년(1399)에 개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 터는 운명적으로 이미 이 땅의 머릿도시로 정해져 있었던 가보다. 태종 5년(1405) 10월 11일에 이르러 다시 한양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1405년이 정확한 서울 천도일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景福宮)'이란 이름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 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는 말에서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 위 사진 ; 광화문과 북악산 1886년
□ 이 산을 중심으로 하여 종묘사직을 배치
경복궁은 당시의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것으로, 뒤로는 산을 받치고 도읍 터의 북쪽에 자리잡았다. 궁의 정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안고, 마주 보이는 남쪽에 안산(案山)인 남산(南山)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흘러,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더 없이 좋은 명당 터다. 또한, 궁의 왼쪽으로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었는데, 이것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던 중국 도성 건물 배치의 기본 형식을 따른 것이다. 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은 앞쪽인 남면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은 그 자리가 그리 좋지 않았음인가? 이 궁은 역사의 기복 앞에서 두 번의 큰 화재를 겪어야 했다. 첫번 화재(1553)는 강녕전(康寧殿)에서 일어났다.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타 버렸다. 화재로 소실됐던 건물은 이듬해에 복구하였으나, 40년도 안 돼서 또 불을 먹어야 했다. 임진왜란에 의해 두번째 화재(1592)를 맞았다. 화재가 너무 커서 궁 전체는 물론, 창경궁까지 모두 불타 버렸다. 선조 임금이 난리를 겪고, 환도하였을 때는 정릉동(지금의 서대문구 정동) 월산대군가(지금의 덕수궁)에서 어소(御所)를 차려야 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임금이 정궁(正宮)이 아닌 곳에서 나랏일을 보아야 하는 상황 아래서 궁의 복원은 그 어느 일보다 시급했다. 왜란 직후부터 복원이 거론되었으나, 워낙 큰 경비와 노력이 드는 일이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을 설치하는 등 복원이 구체화되는 듯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위 사진 ; 경복궁. 북악산 남쪽으로 전각들이 잘 배치되어 있다..
경복궁은 왜란으로 타 버린 지 무려 270년 후인 조선 말에 와서야 겨우 복원될 수 있었다. 당시 집권자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왕권 강화의 차원으로 경복궁의 복원을 과감히 실행에 옮긴 것이다. 중건 당시 원납전을 무리하게 거둬들이고, 팔도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해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하였다. '을축 4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했네. 석수쟁이 거동 보소. 방방치를 갈라 잡고 눈만 꿈벅거린다. 도편수란 놈의 거동을 보소. 먹통을 들고 갈팡질팡한다.' 백성들은 당시 무리한 공사를 강행한 데 따른 불만을 이렇게 풍자적인 노래로 불러 댔다. 복원된 궁은 그 동안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크게 능가한 것으로, 그 규모가 7.225칸이고, 후원에 지어진 전각 256칸, 담장 길이가 1.765칸이었다. 조선 왕조 5백 년의 찬란함과 수난을 함께 말해 주는 이 정궁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 해부터 빈 궁궐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 또 파란을 겪어야 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궁 안의 전, 당, 누각 등이 민간에게 방배되었고, 1917년에는 창경궁 위 내전에 화재가 나자, 그 복원을 위해 경복궁 일부 건물이 헐려 그 재목들이 바쳐져야 했다. 일제는 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헐고, 그 자리에 식민 통치의 본부인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궁 안의 많은 건물들을 헐고, 경무대(警務臺)를 짓거나 총독 관저를 짓는 등 자기네의 소굴로 만들어 갔다. 광화문 위 사진 ; 1903년의 광화문 앞
□ 서울 도성의 기준이 된 명산
조선시대에 한양을 도읍으로 삼고 나서 태종 5년(1405) 1월, 둘레 50리 정도의 도성(都城)을 쌓았다. 서울 북방의 성벽은 이 산을, 남방의 성벽은 남산을 중심으로 했고,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을 이어 둥근 형태로 성을 쌓았다. 정도전은 성저(城低)를 측정, 이를 97구로 나누어 각 구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북악산 마루에서부터 시작해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순서로 글자를 붙여 나가다가 95번째 글자인 조(弔)자에 이르러 북악산에 도달하도록 했다. 즉, 도성의 기준을 이 북악산부터 잡은 것이다. 조선 초, 태조가 이 성을 쌓을 때 둘레의 범위를 결정 못 짓고 크게 고민한 일이 있다. 그러던 차에 하룻밤엔 큰 눈이 내렸는데, 낮에 보니 바깥쪽은 눈이 쌓였으나 안쪽 눈만 녹아 있었다. 태조는 이를 하늘이 정해 준 도성 자리로 보고, 그 눈자국을 따라 성을 쌓도록 명령하였다. 이래서 이 성을 '눈성' 또는 '설성(雪城)'이라고도 했다. 이 성은 수백 년 동안 잘 유지돼 왔다. 그러나, 조선 말과 일제 때에 인구 증가에 따라 많은 집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낮은 지대 것은 모두 헐리고 높은 지대의 것만 남게 되었다. 특히, 일제 때에 큰길들을 많이 내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이 산을 중심으로 두 개의 북문(北門)이 있다. 서쪽 인왕산과의 안부에는 자하문(紫霞門.북소문)이, 동쪽에는 숙정문(肅靖門.북대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문들은 문으로서의 구실은 거의 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엔 이 문들을 거의 닫아 놓은 채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 북문은 음문(陰門)에 해당하고, 그 음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들이 바람이 많이 난다던가? 그러나, 음문이기 때문에 기우제(祈雨祭) 구실로서 한 몫을 했다. 여름에 가뭄이 심할 때에는 이 문을 활짝 열어 음기를 채우고, 양문(陽門)에 해당하는 남문인 숭례문은 일시적으로 닫아 비를 부르기도 했단다. 글쎄, 그래서 장안의 양기(陽氣)가 죽어 비가 정말 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왕산, 북한산, 낙산, 남산 등과 함께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장벽인 이 북악산은 노송이 울창하고 산세가 좋아 예부터 경승지(景勝地)로 잘 알려져 탐승객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청와대가 있어 일반인이 자유로이 오를 수가 없다. 따라서, '북악'이라는 이름도 사람들의 입에서 많이 멀어져 갔고, 다만, 그 밑으로 뚫린 '북악터널'과 그 뒤쪽 산기슭을 감돌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라는 이름만이 간신히 '북악'이라는 이름을 안고 있을 뿐이다. 북악터널과 북악스카이웨이는 알아도 북악산은 모른다? 그래서, 북악산은 울고 싶은 것이다.
행정수도가 충남 공주-연기 지역에 들어선다고 해서 청와대마저 옮겨갈 줄 알았지만, 수도는 어디까지나 옛 한양 땅인 서울이어서 그렇게 되지는 않게 되었다. 따라서, 북악은 그대로 나라의 '안방'을 품고 있게는 되었다. 경복궁도 이미 옛날의 모습으로 거의 복원되었다. 그 뒤켠의 주산인 이 북악도 이젠 시민들의 품으로 일부나마 돌아왔다. 북악은 지금도 그 의연한 모습으로 오늘도 서울 시민들을 보듬고 있다. /// (글. 배우리) 위 사진 ; 북악산과 청와대. 1903년
위 사진 ; 북악산 산마루를 배경으로. 2011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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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한양허물기' 작업
일제는 1900을 전후해서 한국을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삼아 식민지화하려는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부산 개항(1876), 원산 개항(1880), 인천 (1883)과 더불어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에 승리하면서 그 도는 더욱 심해졌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로 한 달 뒤에 한국의 외교와 모든 정무를 감독하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해 모든 권한을 장악했고, 그 5년 뒤인 1910년 8월 29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에 따른 국호(조선) 변경으로 국권을 고스란히 차지했다. '조선총독부 관제'를 공포한 일제는 초대 총독으로 테라우치(寺內正毅)가 부임, 식민지 수탈의 총본산이 된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에 착수했다. 원래 초기의 청사는 을사조약 체결 후 남산에 두었던 통감부 청사였는데, 철저한 식민지 경영과 한국 민족 말살 정책 시행을 위해 주요 시행 사업의 하나로 광화문 자리에 총독부 새 청사를 짓는 일에 착수하였다. 하였다. 1912년 신축 계획을 수립, 1916년 착공하여 10년 만인 1926년에 준공을 하였다. 일제는 이미 그 이전에 훈령을 내어 전국 각 도시의 시구(市區) 개정에 대하여 허락을 받게 하고, 서울의 경우에도 경복궁 전면에 총독부 청사를 건립하는 것을 정점으로 그 앞의 광화문과 육조거리를 철거, 지금의 태평로를 만들고, 그 길이 남산으로 이어지게 하면서 남산이 국사당 자리에는 자기들의 신과 천황을 모시는 조선신궁(朝鮮神宮)과 신사(神社)를 세워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조선총독부를 위시하여 경성부청(京城府廳),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경성재판소(京城裁判所) 등 주요 관공서를 경성부청(현재의 서울시청) 광장으로부터 1킬로미터 이내에 배치함으로써 명치유신 이후 일제가 동경(東京)을 가꾸었던 것과 같이 '작은 동경'을 만들기 위한 '한양허물기' 작업을 획책하였다. 서울시청. 일제 때는 경성부청이었다. 1999년
□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 1926년 10월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로서 건평 2,115평, 총 9,604평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다. 평면은 '일(日)'자형이고, 건축 양식은 중앙에 돔을 축조한 르네상스식이다.. 청사의 설계자는 일본에 있던 독일인 게에게란데로서 1913년 기초 설계를 맡은 고문이었는데, 1914년 사망, 전 대만총독부 기사였던 노무라(野村一郞)ffm 고문으로 촉탁해 기사 쿠니에다(國枝博)가 함께 설계도를 완성했다.
□ 일제 총독 관저도 지금의 청와대 뒤에 '경무대(警務臺)'란 이름으로 우리 나라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이 되었던 건물이 청와대 구관(舊館)이다. 이 건물은 1937년 기공식을 갖고, 1939년 준공되어 일제 말 식민 통치의 본산이 되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미 극동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사용하였고, 정부 수립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돼 왔다. 6대 대통령 때인 1990년 한옥풍의 청와대에 새 관저가 들어서면서 쓰이지 않다가 김영삼 대통령 출범 때 북악 줄기를 원형 보존키로 하면서 철거하였다.
□ 최초의 헌법 제정했던 중앙청의 중앙홀 우리 나라 최초의 헌법은 제헌 국회에서 제정한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아래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 때 198명, 임기 2년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이어서 소집된 의회에서는 헌법을 제정하였고, 7월 17일 이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어서 대통령 선출을 선출하였고, 그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제헌 국회의 의사당은 세종로 중앙청 중앙홀이었다. 그 뒤 우리 국회는 6 25 남침으로 남하하여 임시 수도였던 대구에서 1950년 7월 27일부터 문화극장을 임시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악화되어 다시 남하한 우리 국회는 8월 17일부터는 부산 문화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서울 수복되자, 다시 서울로 온 우리 국회는 10월 6일부터 11월 26일까지 중앙청 중앙홀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그 뒤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으로 이사한 국회는 그 해 12월 8일부터 1951년 1월 3일까지 사용하다가 1 4 후퇴로 남하. 1951년 1월 4일부터 부산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고, 1953년 8월 환도 때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 무덕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환도하면서 중앙청 중앙홀은 1953년 9월 27부터 54년 5월 2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날 때까지 국회로 사용되었다. 그 뒤 우리 국회는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으로 이사. 3대 국회 개원한 54년 6월 9일부터 9대 국회의 75년 9월 1일까지 22년 동안 사용하다가 여의도로 이사하였다. 일제 때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의 중앙홀은 우리 국회의 산실이었으며, 전시 때에 여러 가지 중요한 안건을 처리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 총독부 건물 철거
위 사진 ; 총독부 철거. 1995년 8월
광화문 문루 뒤의 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것은 1995년 8월이었다. 허느냐 마느냐는 문제로 많은 시간을 끌어 온 총독부 건물은 마침내 허는 쪽으로 결론을 보았다. 일제의 수탈 상징인, 옛날 우리 대궐 앞의 일(日)자 모양의 묵직한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건물이 워낙 견고해 헐어 내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첨탑이 이 건물의 가장 윗부분이고 상징이기도 해서 이를 먼저 헐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으로 치면 사형수의 목을 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어느 신문의 보도를 보자. "그것은 한편의 거족적(擧族的)인 민족 드라마였다. 일제 식민 통치의 상징인 구 조선총독부 첨탑이 철거되던 날인 광복절 아침 전국은 기쁨을 너머서 엄숙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이 날 광복절 경축식 본 행사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인 상오 9시. 경축식 본 행사장에 초청 인사들이 입장하는 가운데 멜북꾼, 횃불수, 바라꾼들의 행진이 시작되면서 구 조선총독부 첨탑 주변과 국립 중앙박물관 주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가지도 박탈했던 식민 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워 통일과 밝은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 작업과 새 문화 거리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주돈식(朱燉植) 문화체육부 장관의 고유문(告由文) 낭독이 끝날 무렵인 9시 21분, 국립 중앙박물관 중앙 입구 죄측에 묵묵히 자리잡고 있던 330톤급 대형 하이드로 크레인이 '웅-' 소리와 함께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웅장한 폭죽과 불꽃놀이가 장관을 연출하면서 첨탑이 중앙박물관 광장 받침대에 놓여진 것은 9시 35분.---" -1996.8.16 서울신문 원래의 위치에서 박물관 광장까지 들어 내리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정작 8분이면 족하지만, 이 날 역사적인 순간을 부각시키기 위해 100미터를 우회해 14분간의 드라마를 연출하였다고 당시의 상황을 신문들은 밝히고 있었다.
□ 청와대 터
북악의 바로 밑에 자리잡은 청와대는 그 행정상의 위치로는 세종로 1가 1번지이다. 지금의 경복궁 뒤인데, 고려 15대 숙종 6년 10월에 고려의 이궁(離宮)을 지었던 곳이다. 조선 태조 때에 와서 그 남쪽 넓은 곳에 궁을 짓고, 이 자리에는 융문강, 융무당, 경농재 오운각 등을 지어서 때로는 연무장 또는 과거 시험장으로 쓰고, 임금이 친히 농사를 짓는 곳으로도 쓰이다가 1927년에 오운각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두 헐어 버린 뒤 양옥을 지었다. 일제 때 일본 총독 관저로도 씌었던 이 양옥은 김영삼 정권 초기 무렵까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 대통령 관저가 되어 경무대라 하다가 4.19 학생 의거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새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이승만 정권 당시의 마전인 그 이름을 그대로 둘 수 없다하여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이 청와대라는 이름은 당시의 기와 색깔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을 붙이게 됐던 것. 이 청와대 뒤에서 천하 제일 명당이라는 암각도 나온 것으로 봐서 이 터가 꽤 좋은 터인 것 같기는 한데, 이 곳에 임자가 되는 사람마다 그렇게 좋은 모습으로 물러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이 의문이다. /// (글. 배우리) 청와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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