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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하셔서 주님의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좌우에 계신 분들과 사랑의 인사, 축복의 나눔을 함께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추운 일기 속에서도 함께하시고 은혜 주시고 또 오늘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의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라서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가는 이야기로 시작이 되어집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 아브라함이요. 자신의 종을 보내면서 아들 이삭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여인을 구해야 되는데, 이 지방에 있는 가난 족속의 딸 중에서 선택하지 말고 내가 살던 고향으로 가서 그곳에서 꼭 데려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당부를 하게 된 것이죠.
사명을 받은 종 엘리에셀이라고 하죠. 이 종은 명을 받았으니 순종을 해야 될 것 아니겠어요?
갈 길을 잘 채비합니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 길은 그리 가까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먼 길을 가서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야 되는데 사실 여러분 종의 입장에서 얼마나 부담이 컸겠어요 이 맡겨진 사명 얼마나 막중한 일인지 그래도 알았기 때문에 그 걸음이 참 여러 가지로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해 나홀 성이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 바깥에 있는 우물 곁에 이르자 그 종은요 낙타를 그곳에 무릎 꿇리고 그리고 나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제 고향 땅에 얼추 가까이 다 왔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겠죠. 그의 기도의 핵심은
주님 나의 길을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제 주인의 집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인을 순적하게 만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였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 기도의 내용이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 오늘 그 기도의 내용을 함께 좀 읽어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24장 12절에서 14절인데 그냥 하나님 형통하게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끝난 게 아니에요.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기르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저녁 때가 되었으니 물 기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 여인 중에 내가 물을 달라고 청하면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내가 가지고 온 열필에 나귀에게까지 물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여러분 이 기도가 하면서도 의심이 되지 않겠어요? 과연 나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을까 라는 그러한 생각 가운데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의 기도는 매우 구체적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종이 기도하고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한 여인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앞에 나타났던 그 여인이 자신이 기도한 내용 그대로 행하더라는 것이죠.
여러분 그러면 이 여인은 기도하는 순간 갑자기 뿅하고 나타난 것일까요? 아니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비되고 준비되어졌던 여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종은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구체적인 기도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고 들으셨구나라는 그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그로 하여금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예배하는 예배자로 만들어 내었다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집 안에 중요한 사건이 잘 진행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불어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이 담겨져 있다는 놀라운 은혜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예배가 어떻게 시작되어지고 또 그리고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예배하며 감사해야 하는지 함께 좀 말씀을 주목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종의 예배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자마자 즉시 드린 예배였다는 거예요. 우리 26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같이 한번 보실까요?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이해라는 거 이해 앞서서 종이 기도했고 기도에 따라서 그대로 응답하신 것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죠. 예 그 사건을 경험한 이 종 엘리에셀은 하나님 앞에 그 자리에서 경배했다는 것이죠. 즉 리브가를 만난 사건은 우연적 만남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26절의 내용, 그의 자세를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자의 예배 태도를 발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종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했다. 이는 리브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손의 태도이죠.
내가 지금 엎드릴 수밖에 없구나.
이것은 내가 물론 가지고 순종해서 왔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 가운데 있구나라는 것이죠. 따라서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돼요. 예배라는 것 하나님의 주권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서 나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가 예배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함께하셔서 섭리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는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밤새 고기를 잡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그렇게 명령하시죠.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했다고 기록합니다. 만약에 자신의 경험과 판단과 생각과 그동안에 쌓여왔던 그러한 노하우를 가지고 그물을 내리려 했다면 순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들을 다 차단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로 인하여서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던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그것을 경험하자 어떻게 합니까? 주님 앞에 즉각적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주님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죄인으로서 이 그가 그 그물에 건져지는 고기를 보면서
아 이분은 그냥 단순한 선생님이 아니시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깨닫는 순간 그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고백한 거예요. 나 죄인이니 주님 나를 떠나가 주시옵소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즉각적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모습의 예배자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출애굽기 15장에 보시면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난관에 부딪힙니다. 앞에는 동해가 있습니다. 뒤에는 그런데 무시무시하게 많은 애국 군사들이 쫓아옵니다.
야 이걸 어떡하나?
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겠어요?
우리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모세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잠잠하라 잠잠하라.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그들에게 말하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행하시는 것을 보라. 그 구원을 보아라.
그 순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내 지팡이를 바다 위에 내밀어라.
어떻게 됩니까? 물이 갈라져 벽을 만드는 거예요. 벽 그리고 땅은 말랐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물이 벽이 되어서도 땅이 마른다는 것은 또 놀라운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마른 땅을 걸어가게 됩니다. 여러분 이 거대한 홍수가 양쪽에 갈라져 길이 생긴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이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그들에게 가지고 있던 불안감들이 해소되면서 그 발을 하나씩 내딛기 시작했겠죠. 두려움이 사라진 채 이제는 그 길을 걸어갑니다.
걷다 보니 뒤에 누가 따라옵니까? 여전히 애굽 군대가 따라와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잖아요. 이들은 걷고 그들은 병거를 타고 오지만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이용하셔서 범접할 수 없도록 만들어 보신 거예요.
그리고 건너고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그 말씀 앞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내밀었더니 어떻게 됩니까? 그 거대한 벽이요. 한순간에 애굽 군대를 몰살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거센 물살을 그냥 받아야 했던 애굽 군사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찬양하지 않겠어요?
그들은요. 건너자마자 15장에 보니까 모세를 찬양합니다. 이리안도 찬양하 백성들이 다 같이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순종함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경험되어지자마자 즉각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 이처럼 거대한 일은 아닐지라도 순종함으로 인하여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삶들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되어지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이런 일이 우리의 주 중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1시간 지났는데 또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이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서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건이 일어날 때
아 이거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지 아니면 당연히 일어난 것이야
라는 마음과 생각을 접으시고 영적 민감성이 있어서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영적 눈이 열려야 된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구나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섭리를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하고 고백하시는 참 예배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예배라는 그냥 삶의 예배 삶의 예배 드려야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면서 감사를 고백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두 번째 종은요.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담아서 예배했다는 거예요. 우리 27절 앞부분에 보시면 이렇게 표현돼 있어요. 같이 한번 보실까요?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하셨고 그 삶을 형통하게 인도하시자 곧바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확신할 때 드려지는 예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죠. 근데 27절에 보시면 그 고백의 특징이 나오게 됩니다. 감사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특징을 볼 수 있는데 먼저 감사의 고백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찬송하는 예배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대부분 감사해서 하나님께 고백할 때는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한 것을 감사하잖아요.
하나님 이 문제가 해결됐으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만남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나의 삶의 모습을 우리가 고백하면서 감사하잖아요.
그런데 종은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일하심을 고백했다는 거예요. 하나님 순적하게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은 물론 해야 될 것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감사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27절 중간에 보니까 이렇게 말하죠.
나의 주인에게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니 사랑과 성실,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이 지금 이곳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역사가 이 삶의 현장 가운데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라는 거예요.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 즉 이삭을 통해서 열국을 허락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오늘 이 자리에서 그 과정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는 그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성문 다윗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때마다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그래서 10편 18편 1절 2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같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함께 읽어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윗이오. 나의 방패이시오. 나의 구원의 뿌리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때로는 나의 반석 되어 주셨고 하나님이 나의 산성 되어 주셨고 하나님이 나의 방패 되어 주셨고 이것이 그의 삶 가운데 수도 없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전쟁을 할 때마다 하나님 나의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승리를 허락하시고 성공케 하시는 하나님 약속이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있잖아요. 그것은 다윗이 잘나서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죠. 만약에 다윗이 승리하지 못하면 다윗을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약속은 없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볼 때 여러분 이삭의 제단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는 거예요. 안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죽음 가운데서도 살리겠다는 믿음을 가진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이상의 것으로 일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실제 우리가 살다 보면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그런 고백들이 있잖아요.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셨네요. 우리는 지나고 나면 알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기도 응답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하심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감사 고백을 드리는 이 예배는 약속의 말씀 즉 언약을 신뢰하며 드리는 예배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거야라는 그 언약의 신뢰를 가지고 드리는 예배다. 그래서 27절 뒷부분에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27절 뒷부분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지금 이거는 무슨 고백입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 그래서 내가 걸어갔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다. 리브가를 만난 일이 단순히 자신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자신에게 응답되어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가운데 종에게 기도하게끔 하셨고, 그것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로 하여금 깨닫게 한 거예요?
종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나에게 이 과정을 겪게 하셨구나.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배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있고 그것이 지금 이루어지는 가정 가운데 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한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왜요?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용을 한 것이죠.
그런데 그녀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차원에서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즉 사무엘을 통해서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죠. 따라서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 즉 언약을 신뢰하며 드린 감사의 고백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원대한 사역 가운데 우리가 쓰임 받고 있다라는 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 예배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건 혹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 있어요. 금요일날에도 잠시 말씀을 나누었지만 여러분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죠 감옥에서 다쳤어요. 외도 맞고 막 괴로운 가운데서 그들이 뭐 합니까?
찬송과 기도를 해요. 그랬더니 옥문이 열리고 자고가 풀렸어요. 그러면 바울과 실라에게 찾아왔던 이 시련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간수장의 구원이에요. 간수장과 그의 가정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겠다
라는 그 고백의 자리가 나오게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는 겁니까?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는 고된 시간을 겪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누구를 구원한 거예요?
이방인이었던 간수장의 가정을 부활시킨 거예요.
그럼 왜 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너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겠다.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때 때로는 내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좀 손해 보는 것 같고 그런 때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쓰임 받고 있는 자리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럴 때 감사가 나오는, 그럴 때 찬송이 나오는 거예요.
바울과 실라가 그 옥문 안에서 감사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지금 그냥 갇힌 것이 아니라 억울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구나 라는 것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상황에 의해서 오늘은 예배할 수 없는 상황 그런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라는 이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그 상황 속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 역사가 이루어지고 우리의 삶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원대한 꿈은 무엇입니까?
모든 열방이 주께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그때에 열방이 주를 예배하는 것. 여러분 그 과정 가운데 이미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이 귀한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종의 예배는 삶의 자리에서 드린 예배였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장소는요. 성전이나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죠.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
물론 성전 예배는 이제 이 이후에 율법이 있고 그 이후에 이제 제정되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이제 주일을 지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도 응답을 체험한 우물가가 예배의 자리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 처소는 특정한 성적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죠. 즉 삶의 자리가 예배 자리가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예배의 자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현장이 바로 예배의 자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종 이 사람은 리브가를 만난 후에 예배 처소로 달려간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우리 예배해야겠다. 감사하니까 예배 처소로 가자. 그리고 달려간 게 아니잖아요.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어서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 보시면 야곱이요 형의 위협
내가 여기 있다가는 죽겠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야 너 빨리 삼촌 집으로 가라.
그래서 밧단아람을 향해서 막 가잖아요. 가다가 어느 한 곳에 갑자기 멈춰서 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돌베개에 베고 자는데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가 깨어나서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했습니다고 해서 뭘 했습니까? 그 돌단을 삼아서 예배를 드리고 그곳을 본대이라 그렇게 칭하지 않았어요. 야곱은요. 광야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예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자리가 즉각 예배하는 현장이 되었다는 그래서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입술 가운데 선포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일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오늘 나를 만나주셔서 나에게 은혜 주셔서 나에게 말씀 주셔서 나에게 생명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삶의 처소가 예배의 처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삶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는 것은 매일이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또 의미가 되죠. 우리가 주일날 가서만 주일 대예배만 드리는 게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매일매일 예배가 될 수 있구나라는 것이죠.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리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인생을 끝냈으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리브가의 집을 찾아갔고 거기에서도 은혜를 나누고 또 돌아오는 장면까지 모든 일들을 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는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여러분 예배는 우리의 삶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이유가 예배라는 거.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삶의 현장에서 삶의 예배자로 나아가는 그 축복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삶의 예배는 결국 사명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배가 된다. 앞서 얘기했듯이 미국가를 만나서 아브라함에게로 데려오는 그 자리까지 이 사명을 완수하는데 이 종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새 힘을 얻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지속해 가는 은총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배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만나시고 힘을 얻어서 또 하루를 사시고 또 예배 가운데 힘을 얻어 또 하루를 사시고 우리의 삶의 예배가 온종일 또한 한 주간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의 예배를 함께 보았습니다. 예배의 본질 또한 자세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을 때 그 자리에서 즉각 예배드려라. 그래서 일주일 동안 여러분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목장 예배 때 나누세요. 내가 일주일 동안 이러한 은혜가 경험되어져서 그 자리에서 예배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삶을 사시라는 거예요. 일주일 동안 꼭 뭔가 느껴질 때 이거 뭔가 이상하다. 그럴 때 생각을 좀 깊이 하세요. 하나님의 은혜인가 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감사를 하십시오. 그리고 그 감사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것을 나눠 보십시오. 그러면 충성한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예배가 감사의 고백이 되시되 무엇을 고백하는 자리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신실하심을 고백하죠. 더 나아가 마지막 세 번째는 저와 여러분들의 예배를 통해서 이 사명이 다시 한 번 회복되어지고 그래 내가 지금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걸로 살지, 그래서 그 사명까지 완수되어지는 그러한 삶의 예배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