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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04년 6월 문화인물 기봉 백광홍 선생을 선정하여 그동안 학계에서 잊혀졌던 선생의 문학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백광홍선생은 평안도 평사 관직에 부임한지 불과 1년 만에 병을 얻어 1556년 35세 젊은 나이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문덕이 줄기차게 뻗어나가지 못했다.
한편, 기봉선생 시문은 대부분 일실되어 간행 기회를 갖지
못한데다가 당시 문집은 한시 위주였는데 『관서별곡』은 국문이여서 크게 부각 받지 못해 세상 사람들은 『관서별곡』실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3년에 국민대학교 이상보 교수가 『관서별곡』작가는 기봉 백광홍 선생이라고 학계에 논문을 발표했다.
■ 풍아익(風雅翼)이란 무엇인가?
백광홍에게 임금이 하사했던 선시(選詩)는 중국에서 그 전본이 드물기
때문에 처음 간행된 시기에 대해 알 수 없지만 1434년 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종 임금께서 영남과 호남 문신들에게 성균관에서
글재주를 겨루게 하여 장원을 차지한 백광홍에게 내려준 내사본(內賜本)이며 그 내사본은 1553년(명종8)10월 이전에 다시 간행된 것으로 국내
유일 『선시보주(選詩補注)』10권 완질이 수원백씨 기봉공파 종가에 소장하고 있어 2010년에 보물 제1664호로 지정되었다.
■ 우리나라 최초 한글(국문) 기행가사, 「관서별곡」
▼ 관서별곡의 위상(位相)
「관서별곡」이전
가사(歌辭)작품은 14개에 불과하고 내용적으로 불교, 서사, 유배, 교훈 등 단조로운 내용이며, 작품과 작가 간에 상호유대와 그 영향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관서별곡이 등장하면서 학습이라는 맥이 나타났다.
송강 정철은 백광홍보다 14년 연하였으며 기봉백광홍의 동생
옥봉 백광훈과 절친한 사이여서 기봉 백광홍과 송강 정철선생 간에 교류가 있었고, 「관서별곡」이 25년 앞서 불리워졌던 점으로 보아 훗날 송강
정철 선생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기봉 백광홍 선생이 지었던 「관서별곡」을 참고하여 「관동별곡」을 지었다.
「관서별곡」 또 다른 의의는
내용적으로 가사(歌辭)에 기행(紀行)을 덧붙여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 원래 기행은 답사한 노정(路程)과 풍광을 동시에 담아야 하기 때문에
설명하는 산문형태여서 표출하기 어렵다. 그런데 백광홍은 산문으로 표현하여 최초기행 가사 형태를 창작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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