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없는 미래
절정의 한여름 낮 함께 일하는
어린 동료들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눈다
최저시급 시장에 발을 들인 앳된 노동자들과
시급보다 비싼 커피를 마신다
비정규라는 말같이 어두운 커피 속
반짝이며 녹아내리는 얼음 같은 희망을
알려줄 길 없는 어른이 낯 뜨겁게
시원한 커 피 몇 잔으로 체면을 치른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분연한 마음이 일어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비굴함을 모를 리 없고
기약 없는 날을 저당 잡히고 살아보겠다고
뙤약볕 아래 선 고단함을 모른 척할 수 없어
가차 없이 잘려나가는 삶 속으로 무모하게
가담한 이들과 보잘것없는 시급을 나누어 마신다
사랑과 거처와 막연한 미래에 대해 몇 번이고 꺾일
풋내나는 이야기를 무능하게 흘려들으며 세상에
황홀한 자비는 없다고 무자비한 위로도 하지 못한다
바닥을 드러낸 연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언젠가 세상에 없을 나보다 더 늙은 체념들의
비정한 여름날이 떠올랐지만 끝내 말하지 못할
입을 다물기 위해 이가 시리도록 남은 얼음을 씹으며
장렬했던 한때조차 사라진 미래를 생각한다
신발을 버리며
십 년 넘게 신은 신발을 버린다
부리는 대로 몸을 받아내느라
굽은 허리처럼 휘어버린 뒤축과
굵고 깊게 파이고 미어진 상처
비정규직 삶의 몸통을 받치는 동안
재계약하듯 몇 번이나 밑창을 갈고
안감을 덧댔지만 도저히 더는
못 버티겠다고 아가리처럼 벌어진
밑 창 사이로 늙은 혓바닥같이
늘어난 양말이 흘러나왔다
바닥이 바닥을 밀며 보낸 세월의 전모가
고스란히 그러났으나 뭉클함보다 앞선
난감함이란 갈 곳 잃고 엉망이 되어
돌아온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 같았다
비난할 수 없는 비루함처럼
처참한 것이 어디 있을까
축축한 음지 속을 살아내느라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지독한
냄새까지 토해내며 어둠 끝에서
불구가 되어버린 내 생의 한 귀퉁이는
이제 불명의 발신자로 세간을 떠돌 테지
신발을 버린다 말끔히 닦아 가혹했음을 감추고
돌아오지 못하게 소인 없는
봉투에 밀봉한 채 더이상 바닥 같은 것은
만나지 말라고 발을 빼고 버린다
멸망의 밤을 듣는 밤
한대수의 <멸망의 밤>을 듣는 밤 쇠를 깎듯
거친 숨소리와 조율된 쉰 목소리는 동굴과
암각에 벽화를 새겼던 원시 예술을 닮았다
반구대나 알타미라동굴 벽을 긁으며
죽어간 사람들은 노역의 고통이 익숙해질 때쯤
죽었을 것이다 새끼를 업고 가는 고래를 죽이고
어린 것을 품은 들소를 죽이며 살기 위해
죽였0을 것이다 살육된 주검이 쌓이는 동안
사람은 유전자 밑바닥에 죄의식을 감추며
빼앗기 위해 죽이는 몸으로 진화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피 묻은 자신의 손이 오래된 미래라는 걸
알았을까 살기 위해 죽이던 몸이 죽이기 위해
살게 될 줄 알았을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브란데부르크 문 앞에서 더이상 전쟁은
없을 거라고 환호하던 사람들은 마치
인류의 희망이 된 듯 뜨겁게 포옹했지만
이십세기가 끝나기도 전 걸프만 밤하늘에
불꽃놀이처럼 날아가던 수많은 미사일과
이십일세기가 되기 무섭게 뉴욕 쌍둥이 빌딩에
꽃혀버린 비행기는 맨 처음 살인을 저질렀다는
구약의 아벨을 닮은 호모 사피엔스 시피엔스의 망령
자기가 태어난지도 모르고 죽어버린 가자지구
알시파병원 인큐베이터 속 조그만 발이
영영 듣지 못할 악보에 찍힌 작은 음표 같은 밤
아무런 속죄도 받을 수 없는 멸망의 밤은 그렇게
올 것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저갱 속으로
능욕을 모르는 탐욕과 영원한 슬픔을 함께 묻으며
미래를 노래하지 않는 늙은 가수의 처절한 목소리처럼
김명기의 시집 <<멸망의 밤을 듣는 밤>>에서
김명기
경북 울진 출생
2005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등
고산문학대상, 만해문학상 수상
*김명기의 시는 시를 읽는 사람이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한다.
그의 시는 한번 잡았다 하면 끝까지 읽어야 손을 놓거나 한 눈을 판 눈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그의 시가 지닌 매력은 읽어갈수록 인간의 밑바닥을 훑고 있는
시에 대한 강한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항상 위를 보지 않고
삶과 사람의 바닥을 잘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김명기만의 삶의 호흡이자
시를 대하는 진정한 시인으로서 호흡이 아닌가 싶다.
처음 시를 배우거나 문청 학생들에게 필독으로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