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同期인터뷰 1/코리아병원 이원석 원장]‘인간목수’의 보람
서울 동대문구 장안2동 ‘코리아병원’ 원장 이원석 동문(6회)은 ‘인간목수’로 불린다. 좀 투박하기는 하지만, 정형외과 전문의 20여년의 관록에 걸맞는 별명이다.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인턴, 레지던트, 군의관 등 일련의 과정을 모두 섭렵하고 전문의가 되어 맨처음 메스를 든 곳이 수유동의 ‘대한병원’이었다. 90년부터 96년까지 6년 동안 봉직의로 열과 성을 다하고, 96년부터 4년간 답십리의 ‘강북성심병원’을, 2000-2003년까지는 왕십리의 ‘성동성심병원’을 임대 경영하면서 병원행정의 노하우를 익혔다.
이후 2003년 7월 현재의 7층짜리 병원을 인수하여 “최선을 다하면 낫지 않는 병이 없다”는 모토로 자립경영한 지 8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 정형외과 명의(名醫)로 명성이 자자해 2003년 공중파(KBS)를 시작으로 전파도 수없이 탔다. 그를 대하면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와 ‘인술(仁術)’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이 동문은 선서에 있는 ‘의사의 맹세’를 체화(體化)한 듯했다. ‘의사의 맹세’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만을 행하며, 개인으로나 전문인으로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인술은 ‘사랑의 치료’인데, 오늘날 환자의 호소를 경청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의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의 원장실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자상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느라 환자 대기시간이 늘 지체되기 일쑤다. 가장 보람찬 일은 자기가 치료해준 환자가 훗날 고맙다며 인사를 할 때. 최근에는 10대 환자를 치료했는데, 20대 CEO가 되어 나타났다고. 가장 서글플 때는 자기는 최선을 다하고도 환자나 보호자가 말도 안되는 억지를 쓰며 매도를 할 때. 이런 경우를 그는 ‘의사가 아프다’라는 제목으로 촌철살인 수필을 남기기도 했다.
휴일도 수술을 하기 때문에 주말 한번 제대로 편히 쉬어본 적이 없어, 좋아하는 벗들과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도 없다. 1년 열두 달, 수술 없는 날이 거의 없고, 하루에도 서너 번, 많으면 10번 이상의 크고 작은 수술에 칼을 들어야 했으니, 참말로 바빠도 너무 바쁘다. 20년 동안 4만번(1년 2천여회)의 수술기록을 남겼으니. 수술의 달인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니 자칭타칭 인간목수(人間木手)인 것이다.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척추관협착증, 퇴행성 관절염, 골절, 고관절염 등이 모두 뼈와 관계되는 것은 불문가지. 뼈를 자르고 붙이고 잇는 ‘뼈 도사’가 따로 없다. 검사 결과를 보면서 환자나 보호자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는 친절한 의사, 그가 바로 이원석 원장이다. ‘뼈의 왕(王)’, 오죽하면 이메일이 boneking@hanmail.net일 것인가. 대학에서 척추학을 전공하고 그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나, 절단된 수·족지 접합 성공률이 90%를 상회하는 국내 유일의 접합수술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하다는 것 또한 특이한 사실이다. 대한정형외과학회, 수부외과학회, 스포츠학회, 미세수술학회, 척추학회 등 수많은 단체의 정회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국내든 해외든 관광을 위해서만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예외가 있는데, 해마다 열리는 세계의사축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3주 정도의 휴가가 유일하지만, 그것이 어디 휴가일 것인가. 50대 중반의 나이에 지금도 운동장을 헤집고 다닌다. 그게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 춘향골 남원에서 태어나 초등하고 5학년때 전주 풍남초교로 전학을 했다. 전라중·고교 시절에도 공차기 하나만큼은 억세게 즐겼다. 오늘날 의사축구단 메인 멤버가 된 것도 그 덕분. 축구에 관한 이야기라면 밤을 지새울 수도 있다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온통 환자 돌보기와 수술뿐이니 참으로 아쉬울 손. 의사축구협회 대표를 역임하고 2004년에는 모든 실무를 책임지는 운영이사도 맡았다. 회원은 150명 가까이 되나 실제로 경기를 하는 회원은 40여명.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의사 축구선수로 호주, 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영국 맨체스터대회에도 참가, 실력을 뽐냈다. 2009년에는 서울에서 대회를 개최, 동창친구들의 열띤 응원도 받았다. 요즘도 1주일에 최소 3번은 새벽에 틈을 내 인근 초등학교에서 몸을 푼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부인의 교회 가자는 권유도 공찬다는 핑계뢰 외면하기 일쑤였지만, 얼마 전부터 주일날 저녁 시간에 교회를 나간다. 워크홀릭(일중독)에다 축구 마니아가 따로 없다. 동문들의 건강을 위해서 진료상담과 치료를 전담하는 새로운 청사진도 가지고 있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에는 팔순이 훨씬 넘은 어머니의 지극정성 떡분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형제자매가 모두 미국에서 거주, 국내에는 이원장가족만 살고 있어 외롭다. 최근까지만 해도 국내의 아들이 마음에 걸쳐 1년에 한 차례는 다녀가셨지만, 이제는 너무 연만하여 쉽게 오실 수가 없다. 이 원장은 “제가 뵈러 갈게요. 고생스럽게 오지 마세요”라면서 ‘작은 효도’를 실천할 계획을 세웠다. 2003년 병원 신축 당시 어머니의 지엄한 부탁으로 병원 한켠에 작은 교회를 만들었는데, 몇 년 전 그 어머니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모두 노트에 일일이 손으로 베껴 아들에게 ‘수기성경(手記聖經.Hand-writing Bible)을 선물로 주셨다. 이런 선물이 세상에 어디 흔할까. 원장 책상 한켠에 신주단지처럼 모셔놓고 즐거울 때나 피곤하고 괴로울 때마다 어머니의 무한애정에 고마워한다고 한다.
망중한(忙中閑)이라고 했던가? 그 바쁜 이 원장이 ’원촌(園村)‘이라는 호를 필명으로 고교동창 홈페이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의’닥치고 수필‘은 재미에 재미를 더했다. 가끔씩 벗들의 눈의 피로를 식혀주려는 듯 테마가 있는 깔쌈한 여인들의 야한 사진도 올려 친구들을 즐겁게 한다. 60을 넘고 70이 되면 연륜과 내공을 발휘해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최신해, 이시형, 정혜신 박사같은 ’의사 에세이스트‘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우리 가정, 우리 벗들의 주치의, 그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한다.
*이 인터뷰는 2011년 11월게 이뤄진 것이다. 올해 코리아병원 개원 16주년이 되었음을 감축드리며, 자료를 찾아 옮긴다. 혜성같이 다시 나타나,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이 원장과 병원의 장족의 발전을 기원한다. <우천 최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