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전 오늘 세계를 경악시켰던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6·25전쟁이 한창이었던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무려 4일 동안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무더운 날에 철로 위와 다리 밑에 고립되어 미군의 폭격과 사격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99년 AP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가 나가면서 이 참혹한 학살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발생했던 현장 주변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건립되었다.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건립된 이 공원은 현재까지 약 13만 명의 사람들이 방문했다. 기자는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학살사건 당시 10살이었던 양해찬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 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7월 12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
- 본인의 소개를 부탁한다.
"나는 노근리 학살사건의 당사자이자 그 사건 현장에서 생존한 사람이다. 현재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 회장과 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과거에는 민선 1기와 2기 지방선거에 출마해서 영동군의원을 두 차례 역임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을 하고 7월 23일부터 대전과 영동 인근까지 인민군이 몰려왔다. 미군들이 인민군을 막기 위해 영동에 왔는데 지리를 몰라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옛날에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지나다니던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임계리다. 옛날에 쓰던 지적도를 살펴보면 이게 길로 나와 있다. 북한군의 차량 이동을 막기 위해 임계리 부락 입구에 대전차 지뢰를 가득 묻어뒀다. 미군들이 이 길을 차가 다니는 도로로 착각했던 거다.
임계리 부락 입구에 대전차 지뢰를 가득 묻어두고 마을에 와 보니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당시에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7월 23일에 미군이 영동에 주둔하고 소개령을 내렸다. 북한군이 대전까지 내려왔기 때문에 영동 근방은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임계리가 골짜기였기 때문에 영동의 중심지에 살던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와 있던 상태였다. 23일과 24일에 피난민들이 들어와서 임계리 부락에 600~700명 정도가 모였다. 미군이 임계리 부락입구에 대전차 지뢰를 묻어놓고 와서 보니 부락에서 사람들을 이동시켜야겠다고 판단하여 24일 해가 질 때쯤 피난을 시켜주겠다고 사람들을 독려했다. 피난을 가기 위해 짐을 싸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주곡리에 도착하기 전에 밤이 되어서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고 하가리 입구의 강변에서 노숙을 하며 밤을 보냈다. 24일 밤에 우리가 노숙을 하는 동안 미군은 대전 방향을 향해 밤새도록 포를 쐈다. 사거리가 40km정도 되는 포를 밤새도록 쐈다는 건 인민군이 대전과 옥천 근방에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 와중에 미군이 우리 피난민들의 이동을 막았던 이유는 대전과 옥천 사이에서 미군의 딘 소장이 이끄는 사단이 인민군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군 사단이 패배한 이유가 인민군 정규군이 피난민 복장을 하고 들어와서 미군을 갑자기 공격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배한 시점이 바로 우리들을 마을에서 데리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게 당했기 때문에 상부에서 피난민들의 이동을 통제시킨 것이었다.
미국 군인들이 노근리 쌍굴다리 인근의 철로 위로 우리들을 올려 보냈다. 땡볕에서 철로 위에 서 있다 보니 사방에서 미군들이 다가와 몸수색을 했고 보따리 검사를 했다. 그런데, 노약자와 부녀자와 어린이들 밖에 없어서 수상한 물건이 나올 리가 없었다. 피난 가는 사람들이니까 칼과 부식, 숟가락밖에 없었다. 칼은 미군들이 수거해 갔다. 꼼짝 말라는 말을 해서 우리들은 가만히 있었다. 수색을 마친 미군들이 어딘가로 무전을 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정찰기가 지나가더니 나중에 폭격기가 와서 철로 위에 있는 피난민들을 향해 반복적으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폭격기 1대가 와서 한 차례 폭격을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한 대가 한 차례의 폭격을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폭격기 몇 대가 와서 반복적으로 폭격을 했다. 철로 위에서 반복된 폭격으로 인해 700명 정도 되는 피난민들 중에 절반 이상이 그곳에서 사망했다. 살기 위해 움직이면 어딘가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이미 자리를 잡고 우리들을 표적으로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미군들이 다가와서 착검을 하고 사람들을 찌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겠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아프니까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미군이 쌍굴다리 밑으로 들어가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철로 위에서 있었던 일이 더 기억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어머니와 누나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폭격을 할 때 튄 파편이 박혀서 하반신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고 누나는 폭격의 굉음 때문에 한 쪽 눈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다리에 파편을 맞았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놀라서 다리가 다친 것을 알지도 못했고 고통도 없었다. 내가 다친 어머니와 누님을 부축해서 쌍굴다리로 내려가면서 참혹하게 죽어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물이 빠지는 작은 수로가 있었는데 그곳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있었다. 아마도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피해서 도망치려다가 죽은 것 같았다.
쌍굴다리 속에서 3박 4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숨어있었다. 작은 움직임만 있어도 미군은 쌍굴다리로 사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았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철로 위에 버리고 온 식량을 가지러 가다가 미군의 총격에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노근리 사건 현장에 가보면 쌍굴다리의 한 쪽은 도로가 생겼고 나머지 한 쪽은 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도로가 없었다. 우리 피난민들은 그 도로가 있었던 쪽에 모여 있었다. 그 당시에도 도로가 있던 곳은 물이 흐르지 않았고 한 쪽은 물이 흘러서 우리는 물이 안 흐르는 쪽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들이 모여 있던 곳에 도로가 생겨서 조사하기가 어렵다. 당시 그곳에 있었던 미군이 상관의 명령이 있어서 총을 쏘긴 했지만 차마 사람을 향해 쏠 수는 없어서 쌍굴다리 천장을 겨냥해서 쐈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 보니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쌍굴다리 안에서 있었던 사건들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피난민 중에 임산부가 있었다. 쌍굴다리에 고립되어 있는 와중에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다가 그 어머니가 총을 맞아 죽었다. 이제 아기 혼자 남아서 울고 있는데 아기의 아버지가 와서 달래보려고 아무리 노력했지만 배고픈 아기를 안 울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인기척만 나면 미군이 총을 쏘아 대니까 같이 있던 피난민들이 아기를 빨리 없애던지 아니면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당시 자기 아내는 총 맞아 죽고 아기는 계속 울고 있는 상황에서 피난민들까지 닦달하니까 그 아버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미군의 총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아기를 물에 집어 던졌다. 자기 아기가 물에 빠져서 발버둥 치면서 죽어가고 있는데 미치지 않을 아버지는 세상에 없을 거다. 그걸 지켜보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미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건 꼭 기억해야 한다고 해서 노근리 평화공원에 흉상을 만들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을 마시러 가다가 총을 맞아 죽고, 총을 맞은 상태에서 물을 먹다가 죽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물가로 가다가 총에 맞아 죽으니까 나중에는 사람의 몸에서 나온 피를 마셔 가면서 살아남았다.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은 그렇게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다. 7월 29일에 미군들은 29일에 철수했다. 700명 정도 되는 피난민들 중 노근리 쌍굴 다리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은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7월 29일에 미군이 철수하자 그날 인민군들이 쌍굴 다리에 들어와서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이 나쁜 놈들. 민간인을 이렇게 많이 죽였어."라고 말하면서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때 동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평화로워졌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서 나가려고 하니까 인민군들이 우리를 막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낮에 가면 비행기가 폭격해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어두워지면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되어 어두워지니까 살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세상 어디에도 군인들이 민간인을 죽이는 법은 없다. 그런데 그 당시에 상황이 급박하니까 상부에서 피난민들은 전선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전과 옥천 사이에서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게 당했던 것 때문에 노근리 학살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 노근리 학살사건이 발생하고 50년 정도가 지나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5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해달라.
"군대에 가기 전에는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해 말하지 못했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1968년에 경찰서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에 또 한 번 경찰서에 불려갔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끼리 얘기했던 것인데 어떻게 경찰이 알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새마을 지도자나 이장은 무슨 일에 연루되어도 좀 봐주는 게 있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어떤 직책을 맡고 있어서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왔다. 그리고 1973년에 세 번째로 경찰서에 갔다. 세 번째에 왔을 때는 경찰이 직접 와서 나를 데려갔다. 경찰에 갔더니 나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사상범, 즉 빨갱이로 몰아가려 했다. 그래서 잘못했다고,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싹싹 빌어서 간신히 풀려났다. 당시 내가 이장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특혜를 받아 풀려난 것이었다.
당시에는 노근리 학살사건의 진상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언젠가는 꼭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에 정은용씨가 찾아왔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노근리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한 실화소설을 출간해서 학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왔던 것이었다. 그분이 오면서 노근리 학살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1999년에 AP통신에서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가고 미국 정부에서 배상을 해주겠다면서 접촉해왔다고 알고 있다. 배상과 관련된 진행 과정과 결과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엄밀히 말하면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배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미국이 배상을 제안했을 때 받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배상이라고 정확히 지정해서 배상을 해주는 거라면 그 제안을 받아도 되겠지만 우리 대한민국에 미국 군인들이 와서 살상한 거 전체를 다 포함해서 배상해주는 거라면 그건 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6·25전쟁 때 죽었던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해서 위령비를 만들고 장학금을 지급해준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을 생각하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내가 했던 그 말을 노근리 사건 유족들이 다 들었을 때 모두가 미국 측의 제안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노근리에 국한되어 배상금이 지급되는 거라면 우리가 못 받을 이유가 없으며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전체에 대한 배상이라면 미국 측이 제안한 그 정도의 금액으로는 충분하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대한민국 국민들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고 다른 조건을 제시했지만 끝내 미국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우리는 6·25전쟁뿐만 아니라 5천년 동안 수많은 외침을 받고 살아 왔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역사는 역사대로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