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사를 다녀와서
최승범 (시인..전북대 명예교수)
구암사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58년전의 일제말기 순창농림학교에 입학하여서의 일이다. 저 봄의 어느날, 같은 반이었던 박주린(朴柱麟 . 전 동아일보 기자)을 통해서 였다.
그는 고향 자랑의 이야기에서 구암사가 자리 한 '구암이 골짜기'의 깊고도 아름다운 경치를 말하였다.나는 나의 고향 뒷산이 노적봉, 벼슬봉과 그 품에 자리한 호성암(虎成庵)의 저설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구암사를 찾아보려니 마음먹었으나, 광복후 우리는 학교를 달리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박주린은 전주사범학교로 옮겨갔고, 나는 그보다도 일년남 후에 고향의 남원농업학교로 전학하였기 때문이다.
그후에도 구암사를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따르곤 하였다. 특히 구암사가 들어난 시와 산문을 대하였을 때엔 저 그리움이 따라 들곤하였으나, 58년간을 훌쩍 건너뛰고 말았다.
구암사는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 374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심춘순례(尋春巡禮)>>(백운사, 1926)에서 구암사가 자리한 깊숙한 경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창의 복흥은 남원의 운봉과 한가지로 전라도에서 가장 높은 지방이다. 사방 어디서든지 10리씩 오르게 생긴 곳이다./ 구암사에서 보면 마치 구암사가 혹시 외간(外間)과 교통할까 보아서 동구를 바짝 막아선 것 같은 화개봉(華盖峯 . 656.8m)도 나와 보면 실상들과 물과 재를 건너 이쪽에 있는 것이었다.'고 했다.
위당 정인보도 69년전에 이곳을 다녀간 바 있다. 그의 <남유기신(南遊寄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 연재(1934.7.31~9.20)의 기행문이다.
-'구암사가 얼마나 높은 곳인가 하면 정읍역에서 보면 내장(內藏)이 까맣고 내장에서 보면 순창 넘어가는 재가 또 까만데 이 잿마루가 순창쪽으로는 거의 평지와 비둥하니 순창은 실로 산꼭대기 고을이어늘 구암은 순창서도 또 까맣다.'고 구암사의 위치를 말하였다.이 높고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구암사를 만해 한용운은 어느해에 다녀갔던 것인가. 두 수의 한시를 남긴 바있다. 미당서정주의 국역과 더불어 다시 읊조려본다.
-'옛절에 가을 드니 사람은 절로 비고/ 박꽃만이 높지막이 밝은 달에 피었다/ 서리 앞둔 남산골 단풍들 말씀/<아직은 서너 가지 붉는 몇 이팔>.'
[古寺秋來人自空 匏花高發月明中 霜前南峽楓林語 纔 見三枝數葉紅]
-'추산(秋山) 폭포 성낸 소리 들린다/ 허튼 사람들 남은 봄이 부끄럽겠다/ 밤낮으로 어디로들 가려는 건가/ 머리 돌려 옛 어른들 생각해 봐라.'
[秋山瀑布急 浮世愧殘春 日夜欲何往 回看千古人]
칠언의 제목은 <(구암사 초추(初秋)>, 오언의 제목은 <구암폭(瀑)>. 시에 나오는 '남산'이나 '추산'은 보통명사로 보아야 한다. 구암사의 뒷산은 영구산(靈龜山)이요, 절의 동쪽에 구암사 폭포가 있다.
만해는 구암사에 얼마동안 머물렀던 것인가. 여름에 들어 겨울을 나고 봄철에 다시 운수행각이었던가.
'회간천고인'의 옛어른들에게 이 절에 인연진 여러 스님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 무왕37년(636), 이 절을 창건한 숭제(崇薺), 18세기의 설파(雪波, 1707-1791), 임진왜란에 소진된 이 절을 중건한 백파 (白坡,1767~1852) 그후의 설두(雪竇, 1824~1889), 설유(雪乳, 1858~1904) 등의 대종사를 비롯하여 만해 자신의 선배요, 신석정 . 서정주의 불교전문 강원 스승이었던 정호(鼎鎬, 1870~1948) 스님도 '천고인'(千古人)으로 마땅히 헤아려야 할 것이다. 백파대종사의 부도는 절에 오르는 길의 오른편에 있고, 추사 김정희가 짓고 쓴 비는 선운사에 있다.
이렇듯 유서깊은 절, 실로 반세기에 걸쳐 때론 그리던 절을 직접 탐방한 것은 지난 8월초의 주말이었다. 과연 노령산맥의 한 갈래에 우뚝한 영구산의 중턱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엇다. 적송의 소나무숲이 울울한 길을 굽이돌아 가까이 올라서야 구암사는 코앞에 나타났다. 유수한 맛이 돋는다.
주시스님은 지공(智空)스님으로 한창 중창의 불사(佛事)중이었다. <영구산 구암사>의 현판도 <대중전>의 현판도 없었다. <대웅전>은 거의 준공단계에 있었다.
'구암사의 거북바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두 바위가 있었지요. 그 하나는 새로 짓는 대중전 마루 아래에 들어있고 다른 하나는 절로 드는 입구의 길옆에 있습니다. 그러나 길옆의 거북은 그 일부가 흙에 묻혀있어 제대로의 형상을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 흙을 제쳐 그 모습을 들어내게 하렵니다.'
'중창불사를 잘 이루시기 바랍니다.'
차 대접을 받고 일어서려 하자, 지공스님은 책 한 권을 건네준다.
<<백파대율사비첩(百坡大律師碑帖) >>이다. 추사께서 짖소 쓴 저 비문을 탁본 영인하여 배열하고 국역도 곁들였다. 정호스님이 찬한 <<백파 대사 약전>>도 부록되어 있다.
뜻밖의 선물까지 안고 돌아오는 길, 반나절 영구산의 푸른 기운이 배인 탓인가, 발걸음은 사뭇 바람처럼 가볍기만 했다.
시사전북 200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