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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2
信天함석헌
제2강 히브리서의 구조
본문의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더 그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이 글의 구조가 어떠한가를 보기로 한다. 물론 어떤 글이나 그 글의 구조는 그것을 다 읽어 이해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백두산에 올라가보기 전에는 그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또 백두산을 참으로 잘 보기는 안내자의 설명이나 지도로써 그 산 규모가 어떠한 것임을 미리 알지 않고는 불능한 일이다. 그와 같이 이 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이것이 어떤 구조를 가졌는지, 규모의 대체가 어떠한지를 미리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극히 간단히 한다면 전문을 예론(豫論) 본론, 결론의 3부로 가를 수 있다. 대체로 제 1장에서 제4장까지가 예론이요, 제5장에서 제10장 전반까지가 본론이요, 그 이하가 결론이다. 저자가 결국에 있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결론에 있다. 거기서 그는 믿으라 하고 견디라 하고 소망을 가지라 하고 실지 도덕을 힘써 지키라 한다. 그리하여 환난을 무서워 말고 피하지 말고 그 의미를 알아 달게 받으며 이겨서 장차 오는 세계에 들어가도록 하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만 말하여 가지고 신앙적으로 약해진 수신자들을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줄을 안다. 이미 믿은 지 오래여서 선생이 되었을 자들로서 아직도 굳세게 서지 못하는 그들을 일어서거라 싸우라 하는 말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영혼을 진동 시킬 만한 진리의 이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깊은 이해를 위하여 본론이 있다. 그 주지는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의 대제사(大祭司)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가는 직통로를 열고, 옛날에 있던 모든 불완전한 중간적인 것 영상적인 것을 완전히 폐(廢)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따라 단대(胆大)히 하나님의 지성소에 직접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고로 이제 우리는 꺼릴 것이 없고 다시 더 유예를 얻을 수도 없고 다시 더 옛날의 낡어진 세계와 그 종교 안으로 물러 들어갈 수가 없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에,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라는 논(論)에 근거를 짓기 위하여 처음 4장의 예론이 있다. 아들과 천사의 비교, 아들과 모세의 비교, 구약의 안식의 실패 등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의 것은 극히 대체로 본 말이요, 이것을 좀더 자세히 본다면 실로 그 구조가 더욱 묘하고 더욱 견고하고 더욱 아름다운 것을 깨닫는다. 논법에 치밀한 저자는 건축가가 건축을 하듯이 그 논지를 순서있게 산 관련 밑에서 펴간다. 고로 우리는 본서 전체를 한 개 석탑의 건축에 비(譬)하여 설명할 수 있다.
건축의 재료는 돌과 콘크리트요, 그 돌은 시내 산에서 떠낸 것이다. 저자의 논설의 재료는 모두 다 구약과 역사사실에서 가져온 굳고 굳은 것들이다. 저자처럼 성서의 인용을 풍부히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굳은돌만을 쌓는 것이 아니다. 한 돌을 놓은 후 반드시 그것을 연결하여 붙이는 콘크리트가 있다. 간절(懇切)한 권면이 곧 그것이다. 화강암같이 굳은 논(論) 다음에 콘크리트처럼 부드럽고 붙는 힘 강한 권면이 오는 것, 이것이 저자의 건축재료요 건축방법이다. 건축물의 수명은 그 재료의 성질과 건축방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우리는 시내 산에서 떠낸 신앙의 화강암으로 된 이 탑이 영원한 수명을 가질 것을 안다.
건축은 먼저 기초로써 시작한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기초가 튼튼치 못하면 큰 건축을 할 수 없다. 굳은 반석 위에서만 만세 불변일수 있다.「히브리서」가 서는 기초는 무엇이냐. 책을 펼쳐드는 처음에 이를 알 수 있다. 왈(曰),
“여러 부분으로 여러 모양으로 옛적에 하나님이……”
하나님이다. 원어의 순서로 하면 하나님이란 말은 제 4위에 있다. 그러나 의미로 할 때 “하나님”이 그 첫머리인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이……” 다. 이하에 무슨 말을 하겠는지 무슨 주장이 있겠는지, 그것은 말할 것 없이 우선 하나님의 일로써 출발한다. 사람도 아니요, 국가의 일도 아니요, 우주조차도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다. 이 만세반석, 이 영원의 반석, 이 위에「히브리서」는 선다. 윤오(輪奥)의 미를 자랑하던 얼마나 많은 건축이 무너졌나, 그 기초가 거짓된 것이었던 탓으로. 어떤 의미로 하면 사람은 폐허 속에 산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 문명의 무너진 위에,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깨어진 가운데, 인도 종교의 해여진 속에 있다. 상아탑이 쌓여서는 무너지고 쌓여서는 또 무너진 것이 오늘날에 서있는 학문의 전당, 예술의 궁전의 터다. 그리고 그것도 같은 운명에 돌아갈 것이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라는 산 반석 위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어 자로 기록하여 권면한” 이 조그마한 문헌이 지금까지 살았고 이후도 길이 살 것은 그 디디고 서는 터 때문이다.
저자에 따라 우리가 이 산 반석, 얼마나 두터운지 어디까지 끝인지 알 수 없는 영원의 반석 위에 섰을 때, 갑자기 한 그루 철주가 지표를 뚫고 나오는 죽순(竹筍)모양으로 하늘을 향하여 쑥 솟아오르는 것을 본다. 이것이 이제 쌓는 이 탑의 중심 기둥이 되는 영원의 철주인데 그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처음에 우리는 이 철주를 보고 잠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힘이 너무 세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다른 편지 모양으로 평안을 비는 인사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서론(緖論)도 없다. 그리고는 첫 머리에서부터 강철(鋼鐵)같이 굳고 하늘같이 높은 것이 안전(眼前)에 우뚝 솟아오른다. 아무리 보아도 이 편지는 애교(愛嬌)있는 글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사랑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다. 너희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기에는 심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제 1선에서 물러서려는 전우를 보는 사람이다. 고로 넘어가려는 대하(大廈)를 버티려는 듯이 위선 이 철주를 들어 세우는 것이다.
그와 같이 본서의 첫머리 3절은 그 근본사상 중심진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어뢰(魚雷) 모양으로 저자의 가슴 안에 있는 압력에 몰려 발사(發射)되어 나온 것이다. 어두운 가운데 장작이 횃불을 들면 잠간(暫間)은 물건을 구별할 수 없는 것같이 본서 첫머리를 읽고 우리는 그 너무 강한 광선에 눈이 어둡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안회(顔回)모양으로 “앙지미고 찬지미견”(仰之彌高 鑽之彌堅) 쳐다볼수록 더 높고 뚫어볼수록 더 굳다고 탄식을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횃불 밑에서 주위(周圍)의 모양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같이 일단 이 중심 철주를 세워놓고는 저자는 우리를 이끌고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탑을 쌓아 올라가게 한다.
탑은 3부로 되어 있다. 맨밑에 기대(基臺)가 있고 그 위에 가장 주되는 탑신이 있고 그 위에 갓이 있다. 위에서 말한 예론 본론 결론의 3부분은 곧 여기 해당(該當)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중심의 기둥인 예수 그리스도를 싸고도는 것이다. 각 부분은 이 중축(中軸)에 연락이 되어서만 든든할 수 있다. 저자가 권면의 콘크리트를 쓰는 것 은 이것을 위하여서다.
제1부의 기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제 1장 4절에서 제2장 4절까지가 제 1단인데 거기서 저자는 아들과 천사를 비하여 아들의 높은 것, 따라서 아들에 의한 복음은 천사의 손을 거친 율법보다도 더 위대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중에 제1장 4절로 그 장말까지는 구약을 인용하여 하는 논증이요, 제2장초의 4절은 “그런 고로 운운……” 하여 권면하는 말이다.
제2단은 제2장 5절에서 제3장 첫머리까지로 되는 것인데 2장말까지에서 예수의 수난은 대제사의 자격을 위하여 절대 필요한 것임을 말하고 제3장 12절에서 거기 대한 권면을 한다.
제3단은 제 3장과 제 4장이다. 모세와 예수를 비하고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지 못한 것을 말하여 구약의 불완전, 따라서 참 안식의 약속이 남아 있고 그것은 우리의 약점을 체휼(體恤)하신 영원의 대제사 예수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중 제4장 14절 이하는 본단에 대한 권면인 동시에 또 다음에 약속본론을 끄집어내는 실마리가 된다. 이것도 저자의 묘한 논법의 하나인데, 있다가 말할 것을 일단 간단한 말로 예고하여 준비를 시켜놓고 그후에 자세히 풀어 말을 한다.
그와 같이 3층의 기대를 다 쌓아 예수가 영원한 대제사인 것을 주장 할 논거가 확실하여진 후 드디어 본서의 주체가 되는 탑신이 놓인다. 탑은 3매(枚)의 큰 돌로 된다 할 수 있는데, 그 제 1매는 제5장 1절에서 10절까지요, 제2매는 제7장 전부로, 제3매는 제8장 이하 제 10장 18절까지다.
제5장 1절에서 “대제사마다……” 하고 말을 끄집어내어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 중에 기이한 존재인 멜기세덱을 빌어온다. 그러나 일단 멜기세덱을 말해놓고 저자는 논단한다. 그것은 수신자의 이해력의 부족 때문이다. 이제부터 들어다놓을 그 큰 돌을 약한 자들이 감당(堪當)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너희가 젖이나 먹고 굳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라고 책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하기만 하자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다. 노하며 한편으로는 “너희가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고 구원에 가까운 줄을 안다 운운(云云)”하여 격려(激勵)도 하고 굳은 것을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준다. 이리하여 제5장 11절 이하 제6장전부에까지 있는 긴 권면이 본론의 중가운데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제6장의 말(末)에서 격려의 말을 끝막으며 어느덧 멜기세덱을 다시 끄집어내어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는 솜씨는 실로 능하고 묘하다 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이 튼튼한 준비를 다한 후 제7장에서 멜기세덱이라는 제2의 큰 돌을 놓고,
제8장 이하에서는 최후의 거석(巨石)을 놓는다. 예수의 대제사의 의미, 그것이 아론 계통의 제사보다 나은 이유, 신약과 구약의 비교, 따라서 신약이 최후적인 가장 완전한 계시요 이 이상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제10장 18절까지에서 논설적인 부분이 다 되고 이제 남은 것은 이 탑의 가장 미관(美觀)이 되는 권면의 부분이다. 우선 제10장 후반에서 장차 오는 세계의 멀지 않음을 말하여, 올려놓을 탑갓에 대한 준비를 하고, 그 위에 팔면(八面) 영롱(玲瓏)한 것이 올라앉는데 그것은 네 부분으로 되어있다.
처음에는 신앙의 일매석(一枚石)으로 되는 제11장의 큰 갓이 놓이고, 그 위에 구름같이 둘러싸는 과거 신앙의 영웅들의 용전과 새 예루살렘의 장려한 것을 조각한 제12장의 장식이 있고, 그 위에는 크리스찬의 실제 도덕을 표시하는 제13장의 구석(球石)이 놓이고, 그리고 나중에 맨첨에 세웠던 중심 철주의 끝에 이어 금색으로 찬연(燦然)히 빛나는 첨침(尖針)이 서는데(제13장 20절 이하) 이것도 역시(亦是) 그리스도다.
이리하여 본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끝난다. 하늘을 어루만지는 이 높은 탑은 이 철주로 인하여만 가능하다. 어떤 학문도, 어떤 변론도 이 반석, 이 중축(中軸)에 의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인류 역사 있은 이래 사람의 정신적 산물이 어찌 한우충동(汗牛充棟)만이리오마는 그중에 성서가 홀로 독특한 권위를 가지는 것은 다만 그 원인 이것이 하나님을 말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편지의 위대함도 그의 문필의 능함에 있는 것도 아니도 아알렉산드리이리철학지식에 있는 것도 아니도 아예수의 직제자나 사도이어서조차도 아니다. 그는 분명 제2세 신자다.(제2¥그리절) 그런 것 아니오 오직 저의 신앙이 바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 중축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은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로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의 말로 하면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하는 것은 물론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처음부터 분해표를 짜가지고 편지를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샘이 그 물을 토하듯이 산 생명의 말을 자연스러이 쏟은 것뿐이다. 그러나 산 것인 고로 맥종(脈終)이 있고 관련이 있다. 진리는 석재나 두부모 같은 것이 아니요 산 생선처럼 생체(生體)다.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고 골격이 있고 내장이 있다. 고로 진리는 통으로 삼킬 것 아니요 한편에서 모조리 먹는 식으로 할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서 그 참맛을 알지 못한다. 주지(主旨)는 무엇이며 설명은 어떻게 되고 결론은 어디 있는 것을 분명히 씹어 음미하지 않으면 안된다. 분해는 이 때문에 필요하다. 그러나 또다시 그분해가 기계적으로만 되어서는 모처럼의 생명의 말씀도 죽은 것으로 화하고 만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계적 학습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생선을 먹고 또 먹어 그 구조를 잘 알듯이 각자가 이 글을 읽고 또 읽어 자연한 가운데 스스로 환해지는 것이 있게 하는 것이다.
성서조선 1939.5 124호
저작집30;20-101
전집20;11-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