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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50. [역경의 열매] 최성권 (1-20) 인생 실패의 경험 통해 하나님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
가난한 교육자 가정에서 어렵게 자라나
안과 의사 되고 싶었지만 안경학과 전공
거듭된 역경 딛고 기업인으로 자리매김
어린 시절의 최성권(왼쪽 두번째)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야외에서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교육자의 가정은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 아버지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면 온 가족은 보따리를 싸야 했다. 나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이사 가는 게 일상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았지만 그래도 미션스쿨에 다녔던 건 축복이었다. 안과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안경학과를 전공했고,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두루 섭렵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 가지 연구에만 몰두했다. 국내선 비행기도 탈 기회가 없던 나였지만, 실패를 거듭하는 역경 속에서 다시 일어나 오대양 육대주를 휘젓고 다니는 기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은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생산라인을 구축한 경영자이면서 비즈니스 선교사로 바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열흘씩 격리를 해야 했던 코로나19 비상시국 때도 한 달에 한 번씩 미국을 오갔다.
지난 5월 국민일보 미션어워드 시상식에서 수상한 뒤 국민일보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할 때였다. 감사 인사를 하면서 나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늘의 일들이 믿기지 않은 듯 지난날 역경의 순간들을 회상하며 감격이 북 받쳐 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인생 실패의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가장 큰 복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자랑으로 여긴다.
미국에 간 지 2년을 조금 넘긴 현재,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많이 극복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저변에 깔린 믿음의 담력 때문이라 생각된다. 오래 전부터 사업차 남아메리카의 브라질과 멕시코를 드나들면서 남미 문화에 익숙했고 그 덕에 히스패닉 사람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다. 기도하고 땀 흘린 만큼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일분일초를 허비하지 않는 성실함을 무기 삼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기를 즐긴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내 삶을 드러낸다는 게 두렵기도 하다. 아직 제대로 성공한 기업가로 우뚝 선 것도 아니고 여전히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 진행형 기업가일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일 앞에 두려움이 앞서는 젊은이들에게 진솔하게 전하고 싶은 나의 삶과 신앙 이야기가 있다. 아직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풋내기 기업가지만 젊은이들에게 도전 정신을 심어 줄 수 있다.
1968년도 당시 나의 외할아버지는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고제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대만 가겠다며 고집하는 자신의 딸을 끔찍이 아끼셨다. 나의 어머니시다. 교육자 집안에서 오르간을 칠 줄 아는 딸에게 외할아버지는 오르간 교본 한 권을 갖다주며 연습해 보라 하시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난 어느 날 연습하는 딸에게 “1학년 아이들 한 번 가르쳐 볼래”라고 하셨단다. 당시는 교장이 추천하고 임명하면 초등학교 강단에 설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임명돼 선생님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니까 결혼도 안 한 어린 여성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약력=1970년 경상남도 거창 출생. 김천대 안경학과 졸업, 이엔포스 대표, 서울 새행로교회 파송 BM 선교사.
* [역경의 열매] 최성권 (1) 인생 실패의 경험 통해 하나님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
* [역경의 열매] 최성권 (2) 학교 홍일점 어머니, 1살 많은 총각 선생님 만나 결혼
* [역경의 열매] 최성권 (3) 명문 미션스쿨 거창고 진학… 학생회 회장 맡아 부흥 앞장
* [역경의 열매] 최성권 (4) 신앙생활 멀리하고 교만한 삶 살다 신용불량자로 추락
* [역경의 열매] 최성권 (5) 요나3일영성원서 단식기도… 지난날 곱씹으며 재기 꿈꿔
* [역경의 열매] 최성권 (6) 영성원서 만난 두 목사님 "신학 공부하며 연구하라" 조언
* [역경의 열매] 최성권 (7) 나날이 사업 번창하다 믿었던 동업자 배신으로 법정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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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최성권 (12) '천지창조'의 감동 품고 사도 바울의 길 '트레 폰타네' 찾아
* [역경의 열매] 최성권 (13) 목사님이 눈여겨 둔 음식 감쪽같이 사라져 끝까지 추적
* [역경의 열매] 최성권 (14) 사당동 반지하 공장에서 아시아를 넘어 미국·유럽까지
* [역경의 열매] 최성권 (15) 영국서 엉뚱한 제품 판매로 신용 잃고 유럽 사업 큰 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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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최성권 (19) "지역별 프랜차이즈로 제품 설치하자" 제안에 솔깃
* [역경의 열매] 최성권 (20·끝) 세상에 도움 주는 기업 돼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길…
정리=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
***[역경의 열매] 최성권 (2) 학교 홍일점 어머니, 1살 많은 총각 선생님 만나 결혼
식 올린 지 열흘 만에 남편은 입대하고
허니문 베이비 들어서 학교 그만두게 돼
막내딸 가방 찾는 계기로 신앙생활 시작
최성권 선교사의 부모는 학교에서 만나 결혼했고,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을 만난 뒤 신앙인으로 거듭났다. 사진은 2010년 최 선교사 부모와 최 선교사 아들이 경기도의 한 휴양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 최성권 선교사 제공
1960년대 최고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엘리제의 여왕’ 이미자씨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일 것이다.
마침 고제초등학교에는 다섯 명의 총각 선생님이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홍일점인 처녀 선생님에게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총각 선생님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선생님이 오르간을 치는 처녀 선생님에게 노래를 부르며 다가갔고 점점 친해졌다. 짝은 하나밖에 없는지라 1살 위였던 그 총각 선생님과 처녀 선생님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허니문 베이비가 들어서면서 여 선생님은 2년 동안 담임을 맡은 고제초등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게다가 남 선생님은 군 미필자였던 탓에 결혼식을 올리고 열흘 만에 입대했다. 어쩔 수 없이 부부는 생이별한 채 함께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게 됐다.
그럭저럭 36개월의 시간이 흘러갔고 군생활 막바지 남편이 제대 10개월을 남겨두고 휴가를 받아 나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이 들어섰다. 아마도 제대를 앞둔 남편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을 터.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안겨준 선물이 아들 최성권, 바로 나였다.
제대한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인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거창화산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학교 주변에 나환자촌이 있어서 다른 지역의 학교에 비해 고과 점수를 많이 받았고 덕분에 승진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내 아래로 여동생이 생기면서 이제 가족은 다섯으로 늘었다. 놀랍게도 바로 윗 형이 먼저 교회를 다니게 되자 6살이던 나와 두 살 아래인 여동생도 덩달아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앙생활과 무관하던 어머니는 초등학교 2학년이던 여동생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했다. 당시 여동생은 친구들과 놀다가 가방을 던져두고 오는 일이 잦아지곤 했다. 어느날 여동생이 던져둔 가방을 잃어버렸다. 어머니와 함께 가방을 찾으러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자 두 모녀가 찾아간 곳이 교회였다. 교회 전도사님은 교회에서 울고 앉아 있는 두 모녀를 보고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주셨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도 같이 교회에 나와야 되겠네요”였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리 밑에서 놀다가 던져둔 가방을 어떤 아주머니가 주워왔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렇게 여동생의 가방을 찾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어머니도 그 날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이따금씩 어머니는 “하나님이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더라고요. 참 신기해요”라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거창 읍내로 이사를 한 후로 어머니는 거창교회를 모교회로 삼아 신앙생활을 해 오셨다. 신앙의 성장과 함께 어머니의 전도에 대한 열정은 2등하면 서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을 송사리떼 몰 듯 교회로 인도했다. 학창시절 친하던 친구부터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올해 76세의 어머니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묵상하고, 권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면서 만년 구역장으로 온전히 섬기며 봉사를 도맡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3) 명문 미션스쿨 거창고 진학… 학생회 회장 맡아 부흥 앞장
빚투성이 학교를 정상화시킨 일화로
유명한 전영창 교장의 신앙 이어받아
강한 지도력 발휘하며 30명 이상 전도
최성권 선교사(오른쪽)가 고등학생 시절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맡아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거창 지역엔 두 개의 명문 고등학교가 있었다. 하나는 든든한 자금을 바탕으로 중·고등학교 법인을 세운 대성고등학교, 또 다른 하나는 거창에서 유일한 미션스쿨인 거창고등학교였다.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형이 먼저 진학한 학교인 거창고등학교에 따라가고 싶었다. 공부를 잘한다 싶은 학생을 뺏기지 않으려는 대성재단 중학교 선생님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미션스쿨인 거창고로 가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거창고는 전영창 교장 선생님의 숱한 일화로 더 유명한 학교다. 이분은 내가 거창고에 재학할 때는 계시지 않았지만, 거창고를 명문고로 이끈 대단한 분이셨다. 이분이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학교의 재무 상태는 빚투성이였다. 그는 답답한 나머지 토굴에 들어가 금식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도 아무 응답이 없으니 나중에는 떼를 쓰듯 울며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나님, 정 응답하지 않으시면 서울에 올라가 중앙일간지에 광고 낼 겁니다. ‘하나님 안 계시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학교로 돌아왔더니 서무직원이 놀라운 소식을 보고했다. 미국에서 돈이 왔다는 거였다. 금액은 놀랍게도 빚진 액수 그만큼이었다. 얼마 후엔 미국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22만 달러를 보내줘 강당까지 짓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한다. 1970년대 당시로는 거액이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줄 나는 믿는다.
이런 신앙의 줄기를 타고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학생회 회장을 맡았다. 활발한 성격 탓에 친구들이 많이 따랐다. 그리고 강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30명 이상을 전도해 학생부를 부흥시키게 되면서 목사님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성탄절 연극을 하면서 목사님 역할을 맡게 된 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할 때부터 예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컸다. 안과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꼭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재수라도 해서 재도전하려고 했지만, 재정의 부담을 느낀 아버지의 강한 반대로 꿈을 접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인기가 높았던 김천에 있는 전문대학 안경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더 큰 꿈을 가졌던 탓에 학교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눈 딱 감고 1년은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1학기가 끝나고 몇몇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하는 걸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대학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남학생이 도피처로 생각하는 곳은 아마 군대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 내에서 누가 언제 입대하는가의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한의 남아라면 어차피 한번은 다녀와야 할 병역의 의무인지라 나는 지체하지 않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영신청서를 냈다. 군에 입대할 생각을 하니 2학기 내내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4) 신앙생활 멀리하고 교만한 삶 살다 신용불량자로 추락
제대 후 세상 인정받으려 돈 벌이만 집중
보험회사 영업하다 사무실 여직원과 결혼
외제차 타고 다니며 신나게 세상 즐기다…
최성권 선교사가 1994년 김천대학교 졸업식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결국 대학 1학년을 마친 후 군에 입대했고, 거제도에 있는 육군부대로 배치받았다. 의무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응급조치 등을 하면서 생명에 대한 소중함도 깨닫게 됐다. 그런데 군복무를 마치고 남은 학기를 공부하면서 내 삶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진 듯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정을 받고, 어떻게 돈을 벌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머릿속 생각과 내 삶의 전부를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다 보니 예배는 멀리하고, 교회와 멀어지게 됐다. 신앙생활은 점차 피폐한 상태로 망가져 갔다.
졸업 후 나는 방향도 목적도 없이 무작정 일자리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행을 택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가진 돈이 없으니 모든 게 막막했다. 그때 간 곳이 보험회사였다. 다행히 영업실적이 괜찮았고 사무일을 보는 정규직원과 눈이 맞았다. 2002년 2월 형이 결혼한 뒤 우리 부부도 그해 10월, 3년간의 열애 끝에 100주년 기념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살림은 의정부 아파트에 마련했다.
당시 서울에 근무처가 있던 형은 자신의 아파트가 있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출퇴근하기가 고역이었다. 형이 서울로 전세를 얻어 나오게 되면서, 우리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형의 아파트로 들어가게 됐다.
결혼하고 안정된 삶이 이어지면서 나의 길은 비뚤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교만한 삶이 문제였다. 그때는 어느 누구의 말이나 조언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아내와 함께 신나게 삶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이 위기의 신호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삶의 위기를 맞았고 날개 없는 추락이 시작됐다. 수중에 있던 돈은 씨가 말랐고, 형의 아파트마저 은행 차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만 신용불량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했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에 해보지 않은 일들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의 시궁창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정신 없이 일하는 것, 오직 그것 뿐이었다. 가락동 시장에서 마늘 배달부터 시작해 부동산 중개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이 조금 모이는가 싶었지만 그마저도 언 발에 눈 오줌에 불과했다. 일이 점차 늘어나면서 몸은 지쳤고 감당하기 힘들어 길거리로 나앉고 말았다.
이런 아들의 사정을 알게 된 어머니가 아내를 설득했다. 여기 거창으로 내려와 살라고. 그렇게 해서 아내는 4살 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시댁으로 내려갔다. 어머니와 아내는 ‘생명의 삶’을 교재로 삼고 매일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렸다. 때로는 아내와 같이 금식을 하신 어머니는 “너만 상처받았나. 나도 상처받았다”라고 하면서 속에 있는 걸 다 드러내놓고 아내를 다독였다. 그러면서 아내도 영적으로 위로를 받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으며 변화가 일어났다. 아픔과 고통의 세월은 어느덧 3년이나 지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5) 요나3일영성원서 단식기도… 지난날 곱씹으며 재기 꿈꿔
어머니의 권유로 영성원서 3일 단식하며
꽉 막힌 단식관에 누워 진정한 안식 찾아
최성권 선교사가 심적으로 힘들었던 30대 시절 어머니 집에서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아내의 마음을 다스린 어머니는 이제 내게로 시위를 당겼다. 틈만 나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신앙의 조언을 하시면서 나에게 서울에 있는 요나3일영성원에 가서 기도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다른 때 같으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하면서 무시했겠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됐다. 나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위기를 깨닫고 순종하겠노라 말씀드렸다.
사실 어머니는 요나3일영성원의 이에스더 목사님을 미리 만나 부모의 속을 썩인 자식이 부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이제라도 주의 종의 길을 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셨단다. 오직 그 길만 열어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이 목사님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아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어머니는 하루라도 빨리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나에게 그곳에 가서 목사님을 꼭 만나보라고 권한 것이었다. 아무런 대책이 없던 나로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이야 못 들어주랴’는 심산으로 어머니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요나3일영성원을 찾은 것은 2005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그때는 1층 예배실 뒤편에 복층으로 만들어진 단식관이 있었다. 몸집이 큰 내게는 좀 작아 보였지만 들어가서 누워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3일의 단식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진정한 안식이 됐고, 7일 동안 죽을 먹으며 보호식을 할 때는 끼니마다 아하수에로 왕이 배설한 진수성찬과 같았다.
사면이 꽉 막힌 단식관에 가만히 누워서 지난날들을 하나씩 복기했다. 부채가 늘어나면서 잘 다니던 회사도 못 다니고 쫓겨나듯 그만두게 된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더부살이하도록 결정을 내렸던 내가 한없이 미웠다. 그때 나와 아내의 이름으로 진 부채가 자그마치 1억5000만원을 넘었으니 순손실만 3억원에 이른다. 부동산 거래소에서 일하던 몇 달 만에 신기하게도 매매가 잘 이뤄져 1500만 원의 수익금을 손에 쥐고서 기뻐하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 돈으로 서울 송파구에 반지하 방을 구하게 되면서 짧은 기간이나마 시골에 내려갔던 아내와 아들을 서울로 올라오게 해 같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추억으로 슬픈 마음을 달랬다.
막노동이나 배달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몸은 자동으로 그 일에 익숙해졌다. 새벽일을 잘하니까 낮에도 일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가락시장에서 새벽일을 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거부 의사를 분명히 표하자 사장은 나의 새벽 일마저 그만두라고 했다. 그 바람에 시장에서 쫓겨나게 됐던 일. 그리고 하루가 멀다 않고 괴롭히던 빚 독촉. 대리운전과 인터넷 전화 영업을 하면서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고 해가 질 때면 마음이 울적했던 일. 갈 곳이 없어 서울의 여기저기에 눈에 띄는 찜질방을 하룻밤 안식처로 삼았던 생활.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6) 영성원서 만난 두 목사님 “신학 공부하며 연구하라” 조언
등록금 낼 수 없는 상황이라 거절하자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며 설득
어머니의 비밀 장학금으로 무사히 졸업
최성권 선교사의 어머니 이정묵 권사가 서울 홍제동에 있는 요나3일영성원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다.
아무리 내 힘으로 하려고 해도 안 될 때가 있다. 그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동안 홀로 상황을 극복해보려고 했지만 되레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곤 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이 난관을 돌파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 때 요나3일영성원이 내 곁에 있었다.
요나3일영성원에서 일정이 끝나는 10일째, 나는 원장인 이에스더 목사님과 원목인 장덕봉 목사님을 만났다. 어머니에게 배경설명을 들은 두 목사님은 내게 무슨 연구를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전력 절감 장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고,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아 고민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과거 공군사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장 목사님이 나를 격려하면서 “충분한 지식은 없지만 현재보다는 미래의 아이템으로 가능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의사를 표했다. 동시에 이 원장님은 내게 어머니의 소원대로 신학교에도 입학할 것을 권하셨다. 사실 어머니는 목사님들께 지금 하는 그 연구를 당장 중단하도록 부탁하셨지만, 목사님들은 신학 공부를 하면서 그 일을 병행하는 게 좋겠다는 말로 내게 힘을 실어줬다.
신학교 입학 얘기를 들은 나는 생활비도 부족한 현재 상황으로는 등록금을 낼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때 이 원장님이 그건 아무 염려하지 말고 3학년으로 편입학해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고 했다. 순종하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어머니는 그때부터 나의 등록금을 위해 목적헌금을 하고 있었다. 이 원장님의 제안으로 내가 신학교에서 학기를 마치고 등록금을 낼 때면 그때마다 영성원은 어머니의 목적헌금을 영성원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이 사실은 내가 졸업하던 날까지 비밀로 지켜졌으며 졸업식 날 “오늘은 반드시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라”는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요나3일영성원은 나에게 도움을 주는 기도의 처소였던 것이다.
아울러 나는 보다 큰 관점에서 요나3일영성원에서의 시간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되짚고 싶다. 그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삶과 목적을 설정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성경 말씀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대해 매일 훈련했다. 또 내가 얼마나 교만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기도로 회개했다. 이는 하나님을 되찾은 증거였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게 믿음으로 다가왔다.
다만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당장 내 삶에 기적같은 큰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매일 고난과 역경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요나3일영성원에서 내 인생 변화의 시작점을 찍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려움도 많고, 되는 일도 없이 하루 하루 지나가는 가운데 채무 면책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서둘러 채무 면책을 신청했고 통과됐다. 모처럼 빚독촉의 시달림에서 벗어나면서 수원에 있던 선배와 함께 그동안 준비해온 제품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현재 하고 있는 회사의 밑그림이 됐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7) 나날이 사업 번창하다 믿었던 동업자 배신으로 법정 사투
전력 절감 장치 개발 성공하며 사업 시작
가파른 성장세로 거부가 될 꿈에 부풀다
설립 초기 멤버들 유사 복제품 공장 차려
최성권 선교사가 2012년 기업 세미나 참석차 프랑스 리옹을 방문했을 때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전력절감장치 개발은 매력적인 사업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는 원하는 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요나3일영성원에서 만난 두분 목사님들이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을 날마다 되새겼다. 믿음을 갖고 계속 노력하다보니 조금씩 개발이 활기를 띄었다.
마침내 2006년 수원에서 ‘이엔포스’라는 이름으로 전력절감장치 사업을 시작했다. 이듬해 서울의 동작구 사당동에 지하 공장을 얻어 회사 운영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이미 국내에는 유사 제품이 나와 있었지만 절감 효과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국내보다 해외로 눈길을 돌리는 걸 선택했다. 기도하며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완성된 제품은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 제품을 수출하고자 했던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중국과 멕시코 등지에서 주문이 들어오면서 판로가 열리게 됐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어 공장을 용산으로 옮겼다. 수출 길은 계속 확장돼 스페인을 발판으로 유럽에 도달하게 됐고 이 소문은 국내 시장에도 퍼져 국내 판로까지 열렸다. 몇 년 동안 이산가족처럼 살았던 아내와 아들이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된 것도 이 맘때다. 2008년 5월이었다. 사업 영역이 확장되고 제품을 찾는 곳이 많아지면서 당장에라도 거부가 될 거라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너무 분주한 게 화근이었을까. 분주함 속에 숨어있던 마귀의 장난질로 고통스런 나날이 다시 시작됐다. 믿었던 동업자의 욕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환난의 늪에 빠지게 됐다. 회사 설립 초창기 멤버들이 어느새 유사 복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차린 것을 보고 심한 좌절감에 시달렸다. 어쩔 수 없이 법의 도움을 청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법정 사투를 벌이는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너무 심한 고난으로 삶이 또 다시 힘들어졌고 경영상 피해도 커졌다. 사람이 싫어졌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없이 들었다. 요동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요나3일영성원의 두 분 목사님들이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으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두 분 목사님은 기도할 때마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을 간구하셨다. 기도는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수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수차례 위기의 고비를 넘기면서 나는 끊임없이 기도했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길고도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건 큰 고난을 통해 앞으로 닥칠 다른 고난을 작게 만드시는 탁월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 바로 그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실패를 통해 연약한 마음을 더 단단해지게 하시고, 사람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사업의 이치를 깨닫게 하셨다. 너무나 값진 선물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8) 8% 전기 절감 효과 입증… 전 세계로 하나님의 비전 펼쳐
포스코에서 3년간 테스트 거쳐 성공하자
광고 한번 않고도 해외 기업서 먼저 찾아
삶과 기업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고 싶어
최성권 선교사가 2015년 멕시코의 ‘식스 플래그 놀이공원’ 전기실에서 현지 직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하나님과 동업하는 선교 일꾼의 자세로 삶과 기업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고 싶어 전혀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삼으시고 기도로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연약한 나를 개발의 도구로 삼으셔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시고 그 많은 경험을 통해 사업의 영역을 확장하도록 인도하셨다.
포스코에서 3년의 테스트를 거쳐 개발한 결과물이 8% 전기 절감 효과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소식을 한 번도 광고하지 않았는데 금세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에서도 우리 회사를 찾아왔다. 외형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규모의 회사였지만 절대 얕보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전기 절감이 절실한 것은 일본의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국내선 비행기를 탈 일도 없었다. 그랬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달에도 몇 차례씩 해외 출장을 위해 국제선을 타도록 만드셨다.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100% 응답하신다. 다만 조건이 있다면 내가 응답의 기간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그분의 뜻에 따라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이 이뤄질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을 통해 일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찜질방을 전전하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제물로 삼으셨다. 그리고 3~4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개발을 시작해 작은 지하 공장으로 이전시키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비전을 갖고 전기 절감 장치를 들고 나가게 하셨다. 나는 단지 제품을 판매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를 성장시키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과 동업하는 선교의 일꾼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삶과 기업을 통해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늘 기도한다.
이와 더불어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장덕봉 담임목사님께서 침례신학대학교의 겸임교수로 강의할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다. 장 목사님은 그 대학의 총장님과 함께 공군사관학교 수요예배에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신학대 총장으로서는 흔치 않은 초청을 받았기에 흐뭇한 일이었을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논리정연한 신학자답게 은혜로운 메시지로 긴장된 생도들의 영혼을 일깨웠다고 했다.
이날 돌아오던 길에 장 목사님이 총장님께 이런 제안을 했다. “총장님, 제가 겸임교수로서 이럴 때에 1억원을 기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10년에 걸쳐 1억원 이상의 기여 효과를 낼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자 총장님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며 관심을 표하셨다.
장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 전기 절감 장치를 개발하는 일을 교인이 있는데요. 우리 신학대에도 설치하면 그만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총장님이 “어떤 방식으로 하는데 그게 가능하냐”면서 자세히 알고 싶어하셨다. 장 목사님은 “제가 알기로는 저항을 감소시키는 방식이랍니다”라고 답했고 총장님은 “그럼 조만간 목사님과 함께 제 방으로 오시지요”라고 하셨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9) 선교 열정 충만한 여동생, 남편과 함께 인도서 개척사역
대학 2년 때부터 많은 선교 활동 다니다
이모 소개로 선교 꿈 키우는 남편 만나
인도서 교회 세워 목회하며 신학교 운영
인도 델리에서 사역을 하는 최성권 선교사의 여동생 부부가 현지 성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담임 목사님과 침례신학대학교 총장님이 나눈 가벼운 차 안 대화는 나에게 큰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일주일 이내에 신학대학교의 전기 담당자와 사무처장이 함께 모이는 전기절감 회의로 이어졌다. 매달 3000만원 정도의 전기료를 내야 하는 형편인데 8%만 절감이 된다고 해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설치하기에는 예산이 문제였다. 분명히 이 정도의 장비라면 수천만원의 예산 편성이 이뤄져야 집행을 할 수 있는 일인데, 준비조차 되지 않았기에 학교 측에서도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다. “뭘 걱정하십니까? 앞으로 일정 기간 절감되는 금액에서 반은 학교에서 유익하게 사용하시고 반만 저희 회사로 돌려주시면 되는데요.” 예산 담당자도 전기 실장도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기에 그저 놀란 표정만 짓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우리 사업이 곧 선교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나님은 여동생에게도 선교의 길을 여셨다.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은 고신대 2학년 때부터 예수전도단 훈련에 참석할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다. 신학생 시절에 제주도 훈련을 받고 난 다음 매년 스리랑카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고 졸업을 하고서도 6년 동안이나 선교지에 머무르며 처녀 선교사의 사명을 다했다. 서른 살이나 된 딸이 시집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저렇게 돌아다닌다고 아버지는 애꿎게 어머니를 핍박했다. 모두 예수에 미쳐 저렇게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가운데 어머니는 여동생을 목회자한테 시집 보내려는 생각으로 선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여동생 선 자리가 들어왔다. 지금 선교사는 아니지만, 사업가로서 선교의 꿈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동생은 그 사람과 선을 봤고 결혼까지 했다.
한 번은 여동생이 남편과 선교를 하러 인도로 간 적이 있다. 델리에서 시작된 개척사역은 활발하게 이뤄졌다.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를 이루면 현지인을 양육시켜 목회를 맡겼다. 이렇게 사역을 이어가니 인도에 간 시간이 어느새 20년이 됐다. 지금 여동생의 남편은 신학과정을 거쳐 어엿한 선교사가 됐다. 그리고 여동생 부부 선교사는 인도 중부의 비사카 파트남이라는 곳에서 교회를 설립, 목회와 신학교 운영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교회 단독 건물을 지을 수 없고, 십자가를 세울 수도 없기에 YMCA 건물을 사용하고 있단다. YMCA 건물 내에 예배실을 마련해 현지인 예배와 영어 예배 그리고 어린이 주일학교까지 이끌고 있다. 영어 예배는 경제적으로 상위층에 속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고 하는데 특이한 건 현지인들을 가정 예배로 연결해 교육을 시키고 현지인 목회자로 양육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현지인 목회자가 탄생하면 그가 고향으로 가서 목회할 경우 염소 12마리를 줘서 파송시키는 제도다. 이것만 있으면 일상생활이 가능한 데다 추후 성공적인 목회를 이루게 되면 12마리 염소는 갚도록 했다. 이러한 딸과 사위 선교사의 생활을 부모님이 직접 가서 경험하도록 내가 경비를 지원해 여행을 주선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0) 담임 목사님께 감사의 마음 전하려고 준비한 성지순례
영적으로 이끌어주신 목사님 위해
바쁜 사업일정 모두 미루고 계획
현지 한인교회 섬기는 김 집사의
안내로 코라 교회 등 유적지 방문
최성권 선교사가 2018년 바쁜 사업을 뒤로 하고 성지순례를 위해 방문한 터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18년 5월 나는 담임 목사님께 성지순례를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사업으로 바쁜데 어떻게 여행을 간다는 말이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래도 시간을 내기만 한다면 일정을 조율해 보겠다고 했다. 장 목사님이 그해에 책 출간 계획을 갖고 있었기에 의외로 빠른 일정을 잡기로 했다. “6월 4일부터 12일까지 8박 9일간 터키와 로마 여행 일정입니다. 티켓은 터키 항공 비즈니스로 준비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로 한가롭게 여행이나 즐길 처지가 아니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바이어들과의 미팅으로 쉴 틈이 없는 한 기업의 대표였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나를 영적으로 이끌어주신 담임 목사님께 조금이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목사님과 함께 터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1시간 정도의 비행을 한 항공기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역만리 낯선 이스탄불이지만 마중 나온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기에 예약된 호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터키에서 만난 첫 번째 한국인인 김 집사님의 안내로 한 카페에 들렀다. 이슬람 문화권인 터키에서 만난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했고, 금세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됐다. 비가 내리는 데다 라마단 기간 중인 이스탄불의 분위기는 동방의 아침과 너무나 달랐다. 뭔가 알 수 없는 영적 분위기가 감지됐다. 멀리 보이는 좌측의 유럽 이스탄불과 우측의 아시아 이스탄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도 생각났다.
외국어대학교에서 터키학과를 졸업하고 이스탄불에서 직물공장을 경영한다는 김 집사님은 이스탄불한인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섬기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터키 경찰과 입국 관련 소송 중에 있어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보기도의 용사가 돼 삼겹줄처럼 더 단단해졌다. 다음 날 김 집사님의 안내로 코라 교회를 방문하게 된 것은 특별한 기쁨이었다. 터키에서는 ‘카리예 박물관’이라고 알려진 이 교회는 건축된 후 지진과 이슬람교의 탄압으로 무너지기도 했던 곳이다. 또한 내부의 모자이크 성화와 프레스코 성화는 회칠로 덧입혀졌다가 다시 벗겨지기를 반복한 기구한 운명의 교회라고 한다.
원래 코라교회는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성벽 바깥에 세워진 복합 수도원이었다. ‘시골의 성스러운 구세주 교회’ 또는 ‘야외에 있는 거룩한 구세주의 교회’라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교외 시골’이라는 이름의 ‘코라(chora)’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벽면과 천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으로 빼곡한 것이 특징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마르마라 해협을 따라 옛날 왕과 왕자, 왕족들의 유배지로 사용됐다는 프린스 아일랜드로 향했다. 그런데 목사님과 나는 바닷가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보다는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전도 열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길게 늘어져 있는 아시아 이스탄불 방향만 계속 주시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1) 이스탄불에서 로마로… 성 베드로 광장 대성당 등 순례
원고 촉탁 받은 목사님 관심에서 시작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 관람일정
‘로마의 휴일’ 같은 멋진 로마 기대하다
최성권 선교사와 장덕봉 목사가 2018년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18년 6월 8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이탈리아 로마행 항공편이 갑자기 취소돼 오후 비행기로 대체한다는 튀르키예 항공사의 연락을 받았다. 결국 유럽 쪽 이스탄불에 소재한 공항이 아닌 아시아 쪽 이스탄불에 있는 사비하괵첸 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오전 비행기로 정해졌다.
사실 로마를 가기로 한 건 바티칸 시스티나예배당의 천장화에 대한 담임목사님의 관심에서 비롯됐다. 국민일보 출판사로부터 원고 촉탁을 받고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주제로 한 천장화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출장 일정을 변경해서라도 아무 차질 없도록 할 테니 가능한 시간만 알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행이었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 ‘로마의 휴일’과 같은 멋진 로마의 인상 때문에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입국 절차를 밟으면서 그런 기대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관광세를 받는 입장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그들로서는 ‘신속한 입국’이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이 마땅했다. 그런데 한꺼번에 쏟아지는 입국자들을 대하는 그들의 인상은 관광객들을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온 시간의 절반을 입국 수속에 허비하고서야 우리는 겨우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행객을 위한 콘도 개념의 아파트에서 여장을 푼 다음 우리 일행은 곧장 바티칸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인 성 베드로 광장을 찾았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광장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운집해 있었다. 이미 공항에서부터 긴 줄에 익숙한 터라 아무 어색함 없이 대성당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줄에 섰다.
바티칸은 눈에 보이는 거룩함도 돋보였지만, 화폐가 중심이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성당 꼭대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500계단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한 사람당 2유로를 지불하면 200계단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 돈을 받다니’ 하는 불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정책을 탓할 순 없는 일. 로마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성당 꼭대기에 오른 우리 일행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로마를 담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곳 서점에 파송돼 사역하는 한국인 수녀 한 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각자의 처지는 다르지만 애틋한 동포애와 남다른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로마에서 보낸 둘째 날은 바티칸 박물관 관람 일정으로 빡빡했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이 박물관을 보기 위해 매일 3만 명에서 5만 명 정도가 찾는다는 말에 놀랐다.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최고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1506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궁전 근처의 포도밭에서 발견된 라오콘 군상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전시한 것이 시초가 됐다. 이 조각상을 계기로 율리우스 2세는 바티칸에 당대 최고의 화가와 조각가들을 불러들여 바티칸 궁전의 건축과 장식을 맡겼는데, 이로 인해 지금의 박물관으로 자리 잡게 됐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2) ‘천지창조’의 감동 품고 사도 바울의 길 ‘트레 폰타네’ 찾아
단체 관광 행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감상하며 감탄
사도행전과 옥중서신 통해 만나왔던
바울 사도 마지막 여정 보며 숙연해져
최성권 선교사가 2018년 6월 성지 순례차 방문한 바티칸시티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관광 가이드와 약속된 테르미니 지하철역 주변으로 한국인 관광객들이 하나 둘 몰려 들었다. 삽시간에 서너 팀이 형성되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해외 관광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그토록 싫어하는 관광의 백미 깃발 따라가기에 나섰다.
모두 이어폰을 끼고서 가이드의 안내를 들으며 박물관 방향으로 행진을 계속한다. 언덕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갔는데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고 있다. 한 줄은 올라가고 또 한 줄은 내려간다. 이들이 모두 바티칸 박물관을 보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가이드에게 우리의 관람 목적을 밝혔다. 그리고 오늘 관람 일정에서 필요한 것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미켈란젤로 작품뿐이니 박물관 입장과 동시에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겠다는 것이었다.
단체로 이동하다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안내자를 동반한 그룹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깃발만 쫓아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우리는 천장화로 유명한 천지창조의 대작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며 감상했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미켈란젤로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환갑이 된 미켈란젤로는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제단 위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러나 1년 만에 교황이 사망하게 되자 이 작업은 일시 중단됐다가 알렉산드로가 교황 바오로 3세로 취임한 후 다시 이 그림을 의뢰함으로써 재개돼 서쪽 벽에 ‘최후의 심판’이 완성됐다.
14m에 달하는 거대한 높이의 벽면에 온갖 인간의 형상을 망라한 391명의 육체의 군상이 그림 속에 드러나는 이 대작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으로서 가장 부패한 인물이었던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부르심을 받은 자 답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그려 넣을 정도로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강직함을 표현했다.
다음 날에는 바울 사도가 순교한 장소로 추정되는 트레 폰타네를 찾았다. 사도행전과 옥중서신을 통해 늘 만나왔던 그분을 찾은 느낌이었다. ‘바울 사도의 길’과 ‘그분의 마지막 여정’이 오롯이 서려있는 숙연함 때문인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트레 폰타네(Tre Fontane, 三泉)’. 2년간 가택연금됐던 바울 사도가 어떻게 순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64년 네로 박해 때 순교당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네로가 빈민가를 불 지르자 시민여론이 사나워졌고, 황제는 다급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바울과 베드로 두 사도 모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로마시민권자였던 바울은 ‘참수형’으로 순교를 당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전설에 따르면 이곳을 담당했던 형리가 사도 바울의 목을 자르니 머리가 세 번 튀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튄 자리마다 샘물이 퐁퐁 솟아났는데 이것을 형상화한 그림과 조각이 이곳에 다양한 작품으로 걸려 있다. 트레 폰타네 바울 순교 기념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아담한 규모에 적막할 정도로 깊은 고요함이 흘렀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3) 목사님이 눈여겨 둔 음식 감쪽같이 사라져 끝까지 추적
먹음직스런 음식 맛 궁금해진 목사님
아주 특별한 맛인데 시도해보라 추천
금방 다시 찾았을 때 치우고 없어져
한 친절한 관리자의 도움으로 찾아내
최성권(오른쪽) 선교사와 장덕봉 목사가 2018년 6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한 성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로마의 감옥은 바울 사도를 꼼짝할 수 없도록 묶었다. 그러나 사도가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성령의 감동 속에 옥중서신을 썼던 것을 보면 감옥은 결코 그를 묶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서에 나오는 4권의 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다. 세상은 그를 목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인간 바울의 육신은 죽어 사라졌지만 그를 통해 전달된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성경으로 남아 있다.
트레 폰타네의 감동을 뒤로 한 채 가까운 곳에 있다는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피의 함성이 울리던 것을 생각하면 분노의 감정도 있었지만 고대 로마 최대 원형 경기장인만큼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그 길을 방해한 것은 다름 아닌 동성애자들을 가득 태운 자동차 행진이었다. 현란한 모습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멀리서 포착돼 발길을 돌렸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매우 민감하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은혜에 흠이 되는 것은 곧바로 제거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고서 감사했다.
이제 로마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다시 이스탄불 공항으로 갔다. 이때 라마단의 특색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한 사건이 있었다. 공항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먹음직스런 음식을 찾고 있는데, 목사님의 눈에 우리네 대추보다 훨씬 큰 것으로 만든 것이 괜찮아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나에게 물으시기에 맛이 아주 특별하다며 한번 시도해 볼 것을 추천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다시 찾아갔을 때 눈독을 들였던 그것만 감쪽같이 치워져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주방 요리사에게 그게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시큰둥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언제 다시 이스탄불에 오겠나 싶어서 목사님은 끝까지 추적해 보기로 했단다. 아래층 라운지로 내려가면 그것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듣고 내려갔던 것 같다. 경력이 있어 보이는 주방 요리사에게 물었더니, 방금 저 뒤편 엘리베이터로 걸어간 여성이 이곳 관리자인데 그에게 물어보라고 알려줘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직전에 그를 불러 여기까지 오게 된 상황 설명을 했단다. 그러자 위층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오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었다. 잠시 후 내려 온 이 관리자의 말은 라마단과 연장 선상의 일이어서 그렇다며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상황 설명을 해줬다.
그 요리를 담당했던 사람이 독실한 이슬람교도인데 밤 8시 30분에 라마단 금식이 끝나면서 그 시간부터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계율에 따라 자기의 일을 정리하고 정상적으로 퇴근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 음식을 치워둔 곳에 가서 가져오겠다며 목사님을 안심시켰다. 이날 우리는 계율을 지키며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한 이방 종교인과 타인 중심으로 끝까지 배려하고자 정성을 다하는 한 관리자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렵사리 구한 것을 우리는 함께 나눠 먹으면서 ‘이스탄불에서 만난 즐거운 추억’으로 삼았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4) 사당동 반지하 공장에서 아시아를 넘어 미국·유럽까지
사채 1억 빌려 용산공장으로 이전 후
제품 홍보위해 말레이시아에 머물다
한 여성 사업가가 제품에 관심보이며
구매·납품까지 도와 말레이시아 진출
최성권 선교사(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2019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이엔포스 전 세계 대리점 콘퍼런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항공기 안에서 나와 장 목사님은 현재 하는 일과 전망에 대해 충분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해외에 지사가 많이 늘어났다는 것과 회사의 경영목표를 월드와이드 비즈니스로 변환했다는 사실을 장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그 일환으로 미국을 비롯해 브라질, 일본,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홍콩 등지에 새로운 사업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음을 알렸다.
전 세계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의결하면서, 국가마다 비상이 걸린 것이 사실이다. 화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드는 곳에서는 당연히 석탄, 석유 화학 제품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는데, 여전히 상당량의 전기는 화력발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 국가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기업을 향해 사회적 의무를 다할 것을 요청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큰 문제라 생각했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순탄할 겨를조차 없이 파란만장했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만으로 일을 시작할 때가 생각났다. 사업자금도 없이 기술력만 가지고 이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2008년 나는 사채업자한테 6개월 만에 갚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무작정 1억원을 빌렸다. 이 사채업자가 돈을 빌려주긴 했지만 내가 도망가면 큰일 아닌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자기 친형이 용산에서 운영하는 식당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사당동 반지하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용산으로 이전하게 됐다.
나는 용산공장에서 만든 전기절감장치 제품을 들고 말레이시아로 갔다. 난생 처음 찾은 타국에서 리홍이라는 말레이시아인의 집에 머물게 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여인이 우리 제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자기가 직접 제품을 구매해 주고 납품까지 하면서 현찰이 돌기 시작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지만, 이 여성 사업가는 우리 제품을 신뢰했고, 말레이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꿈만 같은 동남아 진출이 이뤄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내가 약속한 6개월은 넘겼지만, 9개월 만에 1억원을 들고 사채업자를 찾아갔다.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온 줄로만 알았던 나를 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매월 200만원씩 이자를 받기 위해 공장으로 찾아오면 식사까지 극진히 대접하며 이자를 공손히 드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꼬박꼬박 받아가던 그 재미가 사라졌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리홍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전체적인 해외 사업 분위기를 이끌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중국으로 연결돼 아시아권의 발판을 확장해 나갔다. 2009년에는 스페인으로도 연결이 되면서 유럽으로 뻗어나갈 통로가 마련됐다. 스페인에서는 한인교회를 통해 만난 안수집사님 한 분이 관심을 가지면서 유럽 총판을 맡기로 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5) 영국서 엉뚱한 제품 판매로 신용 잃고 유럽 사업 큰 난관
여동생을 통해 납품 제품에 문제 확인
내성 강한 흰색 대신 검정색 전기선을
사용한 유사제품으로 바뀐 걸 알게 돼
최성권 선교사가 2015년 사업차 방문한 멕시코 통신사 ‘텔셀’ 본사에서 현지 직원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지분을 투자한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힘도 덜고 쉬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나이에 회사를 죽여놓는 꼴이 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힘들 바에야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4명의 직원을 데리고 용산에 자리를 잡은 뒤로 중국에 출장을 가는 일이 계속 있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의 현금 결제가 잘 이뤄져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줄 수 있었다. 어느새 직원이 10명으로 늘어났다.
어느 날 직원 2명이 갑자기 출근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원래 좀 뺀질거렸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중 한 명은 내가 특별히 생각해 공장장이라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특별한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비이락이랄까. 회사로 출근을 하지 않는 2명의 이상한 행보와 맞물려 묘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유럽 독점권을 가진 스페인의 안수집사님과는 별도로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여동생을 통해 영국에 있는 인도 사람과 업무 연결이 됐다. 우리는 배전반과 연결하는 돌출 부분의 전기선을 내성이 강한 흰색만 고집해 사용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영국 내에서 우리 제품과 같은 모양이지만 검은색 전기선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면서 혼자 위안으로 삼았다. 스페인의 안수집사님이 포항에 사는 장인까지 소개해 줬고 그 어른의 문상까지 갈 정도로 신뢰를 쌓았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출근을 안 하는 직원 중 한 명이 지방에서 우리 제품과 비슷한 걸 만든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런데다가 영국에서 서울 본사로 기술적인 질문을 해왔다. 우리 제품이 분명하다면서 설치한 사진을 찍어 보내온 것이었다. 우리는 써보지도 않은 검은색 선이 분명했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소문으로 들었다는 그곳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이미 몇 개월 동안 거기서 겉모양이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 영국에도 보낸 것이 확인됐다. 이미 6개월 전부터 터진 사고였는데 이렇게 둔하게 대처한 자신을 질책했다.
이 일은 스페인의 안수집사님이 머리를 굴려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 회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모든 항의는 우리 회사를 향했다. 어쩔 수 없이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했고, 이 일은 장기간에 걸친 법적 소송으로 이어졌다.
유럽으로 확산하던 우리의 계획은 난관에 부딪혔다. 엉뚱한 제품으로 둔갑해 팔려나간 뒤로 회사의 신뢰도마저 추락하게 됐다. 2년의 수고로 개척한 유럽의 일들을 모두 접어야 했다. 분한 마음과 배신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참담한 마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를 성령님께서 붙잡아 주신 계기가 됐다. 성경 말씀 가운데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는 시편 119편 71절 말씀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이 큰 위안이 됐다. 뭘 하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마음을 주셔서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6) 조달청 우수제품으로 등록… 정부와 공기업 문의 빗발쳐
짝퉁 소송 후 바이어 사이 떨어진 신뢰
러시아 철도 회사와 MOU 맺으며 회복
미국 비롯 세계 30여 개국에 특허 승인
최성권 선교사가 2016년 경기도 중소기업 포럼에서 전력개선 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9년부터 시작된 민사소송은 7년간 이어졌다. 상고심까지 최종 승소로 마무리된 때는 2019년이었다. 법정 소송 중에도 유사 제품은 독버섯처럼 번져나갔다. 해외 바이어들 중에서 정품과 가짜인 짝퉁을 구별할 줄 모르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때는 속이 쓰렸다. 다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러시아 철도 회사와 MOU(업무협약)를 맺으면서 업무를 시작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고무적인 일이 됐다. 2012년도에 그 회사의 부사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 부사장은 우리나라 외교부 장관을 만나 전기절감장치 회사인 이엔포스를 아느냐고 물으면서 이번 기회에 그 회사를 방문해 계약을 하려고 한다는 말을 했단다. 그런데 우리 외교부는 “그런 작은 회사는 모른다”는 한 마디로 말로 묵살했다고 한다. 러시아 철도 회사 부사장은 “이런 소중한 자산도 모르고, 회사의 크기만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들이었다”며 나를 만나는 순간 그 얘기부터 들려준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를 수시로 왕래하며 전기절감장치를 납품했고, 많은 곳에 우리 제품이 설치됐다. 그런데 2014년 소치올림픽에 모든 예산을 집중시킨 푸틴의 정책이 발목을 잡았다. 그들의 상황을 봐서 대금을 받을 수 없겠다는 판단에 공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2017년 조달청 성능시험을 통과해 조달 우수제품으로 등록된 뒤부터다. 번번이 조달청 성능시험에서 탈락한 수배전반 전문업체에서 협업을 요청했다. 수배전반이란 고압의 전기를 저압으로 변환해 사용처로 보내는 장비다. 우리 제품을 자기네 수배전반에 장착해 전력품질의 향상을 인정받으면 성능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조달청 시험관들 앞에 제품 개발자인 내가 전기절감의 원리를 설명하고 호평을 받았다. 이후 조달청을 통해 물품을 구매하는 정부기관과 공공기업에서 우리 제품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 하나님이 마음껏 날아보라고 내 어깨에 달아준 날개였다.
나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30여개국에 특허를 신청해 모두 승인을 받았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몇몇 사업자들과 연결해 꾸준히 우리 제품을 알리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조달청 조달 우수제품으로 등록되면서 미국에서 내가 직접 이 사업을 펼쳐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담임목사님께 미국에 가서 사업을 펼칠 계획을 얘기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일이 시작됐음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여호와의 깃발이 높이 들려서 펄럭거려야 하는 시점이라는 강한 사인 말이다. 여호수아가 아말렉 군사들과 전투할 때 모세는 기수의 역할을 했다. 모세의 손에 하나님의 깃발이 높이 들려 있기만 하면 여호수아의 군대는 이기게 돼 있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항상 깨어있어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세만 기수 역할을 한다는 건 벅찬 일이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팔을 받친 것처럼 여호와의 깃발은 함께 들고 있어야 한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7) 국내 최고 선박기업 배에도 이엔포스 절전장치 탑재
우리 제품 관심 갖고 간만 보던 H회사
‘오염물질 규제 강화’로 빠르게 도입
최성권 선교사가 2018년 성지 순례차 방문한 이탈리아 로마에서 장덕봉 목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국가 조달기관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자마자 국내보다 중국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 이엔포스의 제품을 설치하는 기업마다 대출 자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대대적인 보조를 해주게 된다는 소식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나는 중국 시장이 확대되면서 13억 중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교적 기업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어 이웃나라 일본 기업에서도 부쩍 관심이 커졌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지혜와 지식의 영을 더하셔서 새로운 특허 신청을 할 때마다 인정받게 해주셨다. 게다가 제품 성능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 눈에 띌 정도로 효과가 개선됐다. 이것을 보면서 한 인간의 능력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제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서는 단계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발판을 구축하고 있다. 미국을 움직여서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나의 비전을 듣고서 목사님은 계속 기도로 돕겠다며 크게 기뻐해 주셨다.
국내 최고의 선박기업인 H사에서 전기절감 장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할 듯 말 듯 간만 보고 있는 것에 속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박 대기오염물질 규제 강화’를 강조하는 국제 사회의 발빠른 움직임이 우리 회사를 돕고 있었다. 이코노미스트의 기사에 따르면 중유를 사용하는 가장 큰 선박 15대가 배출하는 유해 산화물(질소, 황 등)은 전 세계 자동차 수십만 대가 배출하는 유해 산화물보다 많다고 한다.
3년간이나 끌고 온 지리한 법정공방도 마침내 마무리 돼 순차적으로 이엔포스의 전기절감 장치가 배에 탑재되기에 이르렀다. 대형 선박의 경우 고층 규모의 대형 빌딩만큼이나 전력 소모량이 많다. 해외로 화물을 운송하는 국내선박들은 물론 대서양과 태평양을 운항하는 대부분의 선박들은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를 지나게 된다. 그 길목에서 대기 중인 모든 선박들을 대상으로 이 장치를 장착하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넓은 세상의 다양한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는 여호수아의 역할이다. 여호와의 깃발이 내려오지 않도록 돕는 중보의 역할이 절실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담임목사님께 모두 얘기했다. 그것은 오직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목사님께서는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고 권면해주셨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다섯 시간이 흘러 어느새 인천행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 다가왔다. 역시 목사님의 좌석은 비즈니스, 나와 딸의 좌석은 이코노미석이다. 탑승권을 발급받기 위해 창구로 갔더니 일찍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담당 직원이 잠시 대기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웬일인가 했더니 “축하합니다. 오늘따라 한국을 찾는 승객이 너무 많아 만석이 되는 바람에 두 분을 비즈니스석으로 승격해 드리겠습니다”라며 반갑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스탄불 공항에서 “할렐루야”를 외쳤다. 한밤중에 이륙한 비행기는 10시간 가까이 하늘을 날았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달달한 공기에 마음이 평안해졌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8)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동시에 멈추며 수출에도 차질
활동 자유로워질 즈음 사람 간 만남 중단되고
이동 끊어지며 업무 크게 어려워졌지만
위기 통해 절감장치 필요 인식 높아져
최성권(오른쪽) 이엔포스 대표가 지난해 5월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서 변재운 국민일보 사장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2년여 동안 미국을 왕래하며 내린 결론은 캘리포니아였다. 로스앤젤레스 오렌지카운티 부에노파크에서 미국 현지 회사의 간판을 붙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2020년에 투자 이민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에서의 활동이 한층 자유로워졌다. 신나게 스타트를 했는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코로나19의 역습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동시에 멈춰선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동이 끊기면서 수출에 차질이 생겼다. 점차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사람 간의 만남도 중단됐다. 고국 방문뿐 아니라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10일간의 격리를 참아내기 힘들었다. 처음 한 번은 견딜만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방문부터는 외출이 금지된 열흘 동안 방안에 갇혀 있는 자체가 지옥처럼 여겨졌다.
한번은 국내에서 업무를 마치고 인천공항으로 나갔다가 낭패를 당했다. 코로나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당장 이틀 후 멕시코에서의 중요한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됐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격리’라는 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섰다. 베트남에도 가야만 했는데 거긴 우리나라보다 더 심했다. 비행기 안에서 코로나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각서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어려움이 가중되는 이런 상황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위기를 통해 전기절감장치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한층 더 높여주셨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가 사라지는 순간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대처해 나갔다.
지난해 5월 국민일보 미션어워드 수여식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상식을 마치고 모든 수상자와 함께 주최 측에서 준비한 식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다음 나는 국민일보와 우리 회사 간의 업무협약 체결 행사를 하기로 계획돼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고위직 인사를 수차례 만났고 큰 행사도 치러본 터라 그저 담담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감사의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오늘의 일들이 믿기지 않은 듯, 지난날 역경의 순간들을 회상하며 감격이 북받쳐 올랐던 모양이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담임 목사님과 이에스더 목사님께서 대변해 주시느라 애를 많이 쓰셨다. 엎질러진 물을 어찌 다시 담을 수 있으랴.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됐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질책하지 않았다.
국민일보사와 맺은 업무협약의 특징은 영리보다 선교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일정 금액 이상의 전기료를 지불하는 교회가 희망하면 테스트를 거친 다음 초기 설치비용 없이 전기절감장치를 설치해 준다. 절감되는 비용의 40%는 절감한 교회의 몫으로 사용하고, 50%는 이엔포스의 몫이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선교지 또는 미자립 교회 지원 및 장비 유지 관리비용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작은 불이 모이면 충분히 큰불을 밝힐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19) “지역별 프랜차이즈로 제품 설치하자” 제안에 솔깃
고명진 목사 마중 도우며 조찬 초대 받아
많은 미국인들과 교제권 넓히는 계기 돼
최성권(앞 테이블 왼쪽) 선교사가 지난해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 침례교단 모임에 참석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국민일보와 업무협약체결을 하고, 한 달이 지난 6월 담임 목사님이 미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LA에서 열린 미주한인침례회총회에 그해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이셨던 고명진 목사님을 수행해 임원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각자 탑승한 항공편이 다르다 보니 착륙 시간도 2시간 차이가 났다. 애매했다. 그렇다고 먼저 오신 귀한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내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라 여기고 기쁘게 공항 마중을 나갔다. 그러자 다음 날, 고명진 총회장님의 일정에 맞춰 FBWM(Fellowship of Baptist World Ministries) 조찬 모임에 초청받는 영광을 얻게 됐다.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미국인들과 교제권을 넓히게 된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었다. 전기절감 장치의 매력으로 테슬라 부사장을 만나고, 캘리포니아 전력국장도 만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 기간 국가 간 이동이나 만남이 제한된 상황이었기에 웹사이트를 새롭게 개편했다. 인도에 있는 동생에게 맡겼다. 인도 청년 중 영어를 할 줄 알면서 컴퓨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직원을 채용하도록 했다. 덕분에 SNS나 홈페이지 구축에 큰 도움을 받았고, 저비용으로 고효율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미국 내 실적은 잭인더박스와 같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 방식으로는 금방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왜냐하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 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성령님은 한 사람을 기억나게 하셨다. 2012년 나와 함께 일했던 신시내티 출신 제임스 브라운이었다. 그는 미국에 있는 한국인 기업에서 영업 전반을 담당하고, 영업 조직을 이끌면서 한국의 기업문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다. 미국인 중에서 우리 제품 테스트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 뒤 전화를 걸어 “내가 이런 상황인데 너랑 이야기 좀 해야 되겠다. 우리는 친구이자 주님 안에서 형제잖아”라며 말을 건넸다.
돌아온 답은 “자기 일이 바빠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대뜸 “일주일 안에 네가 있는 오하이오로 내가 갈게”라고 말하니 ‘그러라’고 했다. 그는 신실한 믿음의 형제였으며, 우리 제품에 대해 100%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 나름대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0년 만에 만난 나를 반갑게 맞이한 그의 제안은 ‘프랜차이즈’였다. 우리 제품을 본사가 일일이 테스트를 해주고 설치하는 건 더딘 방식이라고 했다. 지역별로 프랜차이즈를 통해 설치하는 방식에 귀가 솔깃했다.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어떻게 그것을 추진하느냐가 문제였다. 분명한 건 그 제안의 주체가 누구인가가 중요했다. 내가 아닌 미국인 제임스가 제안한 것이기에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 기대됐다. 그동안 미국 안에서 한국인인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쳤어도 오십보백보였다. 미국 사람이 미국 내에서 뭔가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제임스의 제안은 한 줄기 희망의 빛, 섬광처럼 빛났다.
***[역경의 열매] 최성권 (20·끝) 세상에 도움 주는 기업 돼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길…
제임스와 다시 힘 합치며 미 전역에
우리 제품을 깔겠다는 부푼 꿈 생겨
전기료 인상으로 전 세계가 힘든 때
나와 우리 회사가 주님께 쓰임받기를
최성권 선교사가 지난해 7월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전기를 나눠요, 사랑을 나눠요’ 캠페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와 제임스는 다시 힘을 합치기로 했다. 프랜차이즈로 나가자는 데 공감하면서 그다음 방향을 물었다. 그는 이미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국 내 프랜차이즈를 연결해 주는 큰 규모의 회사가 3개 있는데 그중 우리 일에 가장 관심이 있는 회사로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시카고에 있는 FMS라는 회사를 선택했다. 다른 두 개의 회사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왔다. 전 직원들에게 우리 제품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 제품은 설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이었다. 놀랍게도 FMS를 통해 한 달 만에 30여 개의 프랜차이즈가 만들어졌다. 그들을 통해 수년 내로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가정과 사무실 그리고 공장에 우리 제품이 설치될 예정이다. 조만간 3만여 개를 확보할 것이라는 말에는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프랜차이즈를 위한 초창기 비용은 상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회사가 전적으로 담당해야 할 일이다. 차분히 확장해 나가면서 조금씩 분담하면 상생의 길이 열릴 것으로 본다. 2년 동안 미국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그중 영어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가장 컸다.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슨 말이든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2년 만에 어느 정도의 소통이 가능해졌다.
제임스와 힘을 합치게 되면서 내 영어 실력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미팅을 가질 때 했던 말들을 그에게 다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주효했다.
미국에서는 MBA 과정을 마친 사람들을 우대하는 분위기다. 경영과 관련한 조직 운영과 마케팅의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이 과정을 거쳤기에 내게는 보화와 같은 동역자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에 트레이닝 센터를 만들자는 제안도 했다. 제임스는 ‘작은 호수와 정원이 있는 집’에 사는 괜찮은 미국 생활의 표본이 되는 삶을 사는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우리 제품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와 처음 만나 우리 제품인 전기절감장치를 설치해 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자기 스스로 “우리 집에 달았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변했다. 그런 그에게 이제는 프랜차이즈를 통해 미국 전역에 우리 제품을 깔겠다는 부푼 꿈이 생긴 셈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은 전기료 인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스 공급이 중단된 유럽은 더 심각하다. 어쩌면 지금보다 5~10배 정도의 전기료가 인상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런 암울한 전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게 여겨진다.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에스더 4장 14절 말씀을 묵상해 본다. 분명 하나님은 이때를 위해 나와 우리 회사를 선하게 사용하실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세상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기업으로 발돋움시켜 주셔서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주께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