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의 씨앗준비
『농사직설農事直說』의 편찬 작업은 1428년(세종 10) 윤4월 세종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왕명을 내려 노농老農을 탐방하여 평안도와 함길도에 전습시킬 만한 농법 내용을 추려 올리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실제 농민들이 시행하고 있는 농업기술 가운데 양계 지역에 옮겨서 가르칠 만한 것을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충청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에게도 동일한 왕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하삼도下三道(충청도·전라도·경상도) 관찰사는 자신의 지역에서 노농들에게서 구한 농업기술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를 올렸다. 하삼도 관찰사의 보고를 기반으로 1429년 5월 정초鄭招와 변효문卞孝文이 편찬한 결과물이 바로 『농사직설』이다.
『농사직설』은 세종 대의 다른 서적과 달리 편찬자의 역할이 책 내용을 책임지는 저작자가 아니라 주어진 자료를 정리하는 정리자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농사직설』에 실려 있는 농업기술에 관한 내용은 앞서 하삼도 관찰사가 정리해서 올린 책자冊子에 담겨 있던 각 지역 노농의 지식과 경험이었다. 정작 편찬을 담당한 정초와 변효문이 한 일은 책자에 실려 있는 농업기술의 내용을 세목별로 분류하고 정서하는 작업이었다. 이처럼 『농사직설』의 편찬자로 이름이 올라 있는 정초와 변효문이 수행한 역할은 다른 서적 편찬자의 역할과 크게 달랐다.
아홉 가지 곡식의 씨앗을 거두는 데는 견실한 것을 취하되 잡종이 섞이지 않고 젖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젖었다는 것은 수분이 많아 변질의 염려가 있는 상태.씨앗이 잘 여물지 않으면 이듬해 이삭도 잘 여물지 않으며 이른바 병올 태에서 부터 잉태한 것과 같은것이다 . 종자가 섞이면 숙기가 고르지 않으며 종자가 수분이 많은 즉 발아하지 않고 발아하여도 여물지 않는다).
^^^周왕의 아들. 어려서 임금이 되매 숙부인 周公旦이 그를 도와서 나라를 잘 다스림.
쭉정이는 키로 까불어 버린 후 물에 담그어 뜨는 것은 건져 버리고 가라앉은 것만을 씻어 충분히 말린 다음 습기가 없는 상황을 헤아려 짚으로 엮은 그릇 따위에 단단히 저장하여 둔다.
(짚으로 엮은 그릇은 시골 말로 공석(섬) 이라 하며 습기가 약간만 있어도 변질은 많아진다:.
◦ 이듬해에 작황이 좋을 곡종을 미리 알아보기 위하여 아홉 가지 곡식의 씨앗을 한 되씩 각각 다른 베자루에 넣어 움집 안에 묻어 둔다(사람이 그 위에 앉거나 눕지 말도록 해야한다). 50일이 경과 한후 꺼내어 다시 되어 보아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이 그해 풍작이 될 곡종이다. 토양 의 성질은 곳에 따라 다르므로 각 마을로 하여금 시험케 하여 작황이 좋을 곡종을 알아 보아야 한다.
O 겨울에 옹기나 나무로 된 그릇을 땅 속에 잘 묻 어 놓고 얼지 않도록 해야한다 . 선달에 눈녹은 물을 많이 모아 담아 짚 등으로 엮은 자리 (시골이 름으로 비개라 한다 )로 두껍게 덮어둔다
(옛 글에 이르기를 눈은 5곡의 정기라 하였다). 파종할 무렵에 씨앗을 눈 녹은 물에 담그었다
가 걸러서 볕에 말리기를 두번 하거나 혹은 나무 그릇에 마소의 외양간 오줌을 담아 그 속에 씨앗 을 담그었다가 걸러 내어 볕에 말리기를 세번 되풀이하기도 한다.
備穀種
收九穀種 取堅實不雜不海者(海醫浪世 種不實 則 明 年 穀 德 赤 不實 所請受病於胎世 種雜則 투晩 不等 種海則不生 雜生赤不實)
雍 揚 去 祝 後 況 水 去 浮 者 ® 出 圖 乾 以 十 分 無 濕 氣 爲 度 堅 藏 高 磨 之 類 ( 高 S 鄕 名 空 石 小 有 濕 氣 多致醫消〉r農事直說j 譯文 93
O 飮 知 來 歲 所 宣 以 九 穀 種 各 一 丹 各 盛 布 囊 理 於土字中(幻令人坐臥其上)後五十 H 發取量之 息 S 多 者 其 歲 所 S 世 土 氣 隨 地 異 료 료 令 各 村 里 試 之
O 冬 겨 以 萬 戒 權 埋 地 中 要 令 不 凍 至 腦 전 多
짠 것은 하이다.
耕 地
耕 地 료 徐 徐 則 土 軟 牛 不 症 困 春 夏耕료後 秋耕
.收雪什盛貯苦薦 (鄕名飛介) 厚蓋(古書S 雷五穀 基深 春耕則隨耕隨治 秋耕則 待土色乾습乃治
之精)至種時 積種其中 渡出艦乾 如此:그度 戒用 木權 盛牛馬旣池尿 浪種其中 滅出■乾 赤煩三度